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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는 무엇일까? 저자는 먼저 정장바지 스타일의 사람들의 하나님나라 개념과 스키니진 스타일의 사람들의 하나님나라 개념을 나눈다. 이것은 저자가 현대의 상황에서 과연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고찰하기 위한 시도라고 본다.
스키니진스타일의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사회정의와의 연결속에서 찾는다. 하나님나라는 개인구원에서 흘러나오는 사회정의및 사회변혁과 관련이있다고 믿는다.(22) 또한 정장바지의 스타일의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는 구속적 통치를 가르키며 예수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안으로 들어왔음을 밝힌다.(37)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밝히려는 시도안에서 두 상황에서 긴장을 최소화 하려는 시도를 할것이라고 예상된다. 더불어 그는 정장바지의 스타일의 보수적인 그룹들이 구속적 역학의 개념을 빌어 하나님나라의 사역은 문화를 변혁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칼 헨리 와 엔디크라우치, 미로슬라브 볼프에 이르는 변혁자 유형의 그리스도를 통해 문화의 변화를 통한 행동주의 유형보다는 오직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통하여 신실한 현존이라는 전략을 통하여 하향식 변화를 제안한다. 이들은 문화를 변혁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자칫 권력을 추구하는 일에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행동한다는 데서 위험요소가 있다고 평가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문화라는 단어를 세상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있는 듯하다고 판단한다. 그런의미에서 문화는 구속의 대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저자는 세상을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세속적 방식이라고 한다. 좀더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저자는 결국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교회가 되는 것은 세상이 그자신을 세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며 교회가 할수 있는 교회의 사명을 회복함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즉 본 서는 사회적 행동과 구속적 통치사이에서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정의하며 성경적인 차원에서 풀어나갈 것인지 기대를 갖고 시작하는 것이 책을 맥락을 잃지않고 읽는 방식이라고 여겨진다.
철저히 저자는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동일선상에 놓고 그의 논지를 풀어간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이 곧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종말론적 가치 아래에 있는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제도적 교회를 말하고 있지는 않는 것같다.
교회는 현재 성취되어 있는 하나님나라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교회와 하나님나라 사이의 유사한 연관성을 그는 살피려는 시도를 곳곳에서 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어 그들이 그리스도안에 머물고 아들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수 있게 하는 것이라 여겨야한다. 또한 이런 것들을 교회의 변형으로 여겨야 한다." (163)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셨을때 과연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셨나 싶다. 예수님은 철저히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그분이 거한 곳이 하나님나라가 되게 하셨던 분이지 교회를 만드신 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신 분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신 분이며 제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 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나라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안으로 들어오는 즉 교회로 들어오는 삶안에서 가능하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데, 교회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자체가 궁금하다. 들어온다. 또는 머문다. 들어간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인 하나님나라로 들어오는 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에 등록? 복음을 듣고 하는 영접기도? 교리 문답이후에 받는 세례? 주일예배를 드리고 지키는 것?
저자는 163페이지에 우리는 나라인 동시에 교회라고 밝힌다. 결국 교회 밖에는 하나님나라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이 방인들을 위해 확대된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는 사회적 정치적 용어들임을 밝힌다. 교회라는 용어는 세상나라 혹은 로마의 권세와 맞서고 있는 공동체의 범위로 한정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의 확장 내지는 확대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세상 권세에 놓여진 혹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의 개념일까? 하나님나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저자는 끊임없이 세상 나라를 향해 무언가 변혁시키려하는 시도나 세상을 변화 시키려는 것에 대해서 무의미한 것 내지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특별히 선을 행함이나 사회 정의내지는 사회 복음에 대해서는 조금더 이해하기 어려운 다소 난해하게 논지를 풀어나간다.
즉 사회적 행동주의가 교회를 밀어내거나 대체할때 그것은 우리의 충성이 더이상 에수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우상숭배가 되며 하나님나라의 일이 백성들을 통하여 세상속으로 흘러갈때 그것이 선한일이다. 그러나 선한일은 하나님나라의 사명이라고 할수 없다는 말을 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무엇인가? 왜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교회의 사명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일까?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신학은 구속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성격자체가 구속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정의가 실현되고 평화가 이루어진다. 옛 선지자들이 선포한 대로 슬픔도 없고 질병도 가난도 없는 그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오직 완전한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속적이라고 한다.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구속에 관한 중요한 네 본문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복음서의 네 본문은 마 12:28; 마11:2~6; 마 8:14~17; 요 2:1~11 10:10 이다. 이는 예수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구속사역이 어떠한지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은 사역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임하였으며, 하나님나라의 구속과 동시에 세상속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고칠뿐아니라 도덕적으로 제도적으로 해방시킨다.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구속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나라의 구속이란 무엇일까? 그는 무엇보다 통전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통전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두 스펙트럼 사이에서 통합을 시도한다. 즉 복음전도와 정의의 문제, 영적차원의 사명과 사회적 차원의 사명의 두 극단에서 통합을 시도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인정하시만 그 사명의 사회적 차원을 위한 자리가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증인으로서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고 밝힌다.
이에 관하여 나 역시 복음주의자로서 동의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소위 복음주의자 내지는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의 대부분 복음전도의 영혼구원 측면을 매우 강조한다. 저자가 말한대로 두 극단이라는 표현이 현실이다. 떡이냐 복음이냐를 두고 교회마다 공방을 오고가고 있으며, 심하면 교단이 분열되거나 이단시 정죄하기도 한다. 좀더 건강한 교회경우에야 사회참여를 어느정도 미덕으로 여기며 지역사회 봉사 정도로 교회의 이미지를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이들의 공방이 오고가는 데는 두 분야를 굳이 극단적으로 이해한데서 라고 생각한다.
로잔언약(Lausanne Covernant)은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할일 중에서 복음전도가 최우선이다 라고 하였고, 존스토트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해석하였다.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지지하고 설명할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 복음전도는 분명한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둘째 복음전도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상관이있다.
즉 존스토트는 복음주의의 목표이며 결과가 복음전도이면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전도가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상관이 있다는 것에 관하여는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은 그들을 하나의 전인(全人)으로 여기며 섬기도록 이끌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이 두 극단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통전적 구속은 교회의 자리안에서 영적 구속과 사회적 구속 두가지 모두를 이뤄낸다고 강조한다.(278)
둘째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하나님나라 백성가운데서 이뤄지는 다차원적 구속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였다. 그는 구원의 다차원적 성격에 대해서 고찰을 시도한다. 먼저 구원은 죄에서 또는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아담적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또한 구원은 우리를 악한 자의 지배로부터 구해낸다. 마지막으로 구원은 조직적인 악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한다. (279-82))
이 부분에서 사실 저자에 대해서 아쉬운 부분들이 드러난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저자는 사실 위에서 말한 구원에 다차원적 의미 그리고 그 구원을 가져다 주는 참된 해방의 의미를 어떤 현실에서 해방과 구속에 대한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로서 즉 마귀, 죄, 악한 권세 등등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독자들을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니 결국 저자가 말하는 "구속의 통전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본서를 읽으면서 이미 밝힌 로잔언약의 내용이나 각족 복음주의 선언서의 전문들을 보면서 복음전도와 사회복음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저자는 구속에 대한 다양성을 영적인 의미로 더 다가가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니 두 극단에서 통합을 시도하려 했던 저자의 의도가 더 모호해지는 느낌을 갖게되고 더불어 과연 저자가 말하는 통전적 구속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정사와 권세에 맞서는 일은 무엇보다도 이세상의 악한 제도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물들지 않은 지역 교회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부분이 가장 동의할수 없는 부분인데, 저자는 사회와 법, 경제적 불의, 인종주의, 공동 선에 대한 저항을 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여기는 유혹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밝힌다. (283)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여기서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진 구속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나라가 곧 교회라는 입장을 계속 견지하면서 그는 구속적 측면도 오직 교회라는 상황속에서 통전적 구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밝힌다. 즉 저자가 말하는 통전적 구속은 교회안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이다.
어떤 의미인지를 알겠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어쩌면 따끔한 일침이 될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저자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하나님나라와 교회가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여있을수 있을까 싶다. 과연 교회안에서만 하나님나라일수 있을까? 그렇다면 저자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실천적인 측면은 무엇일까? 결국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은 교회인가? ㅎ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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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 것일까? 스캇이 던진 약간은 생뚱한 이 질문은 몇 가지 신학 주제를 담고 있다. 간디는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을 했다. 불신자가 하는 선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답변이 준비되어 있다. 신약학자인 스캇은 이 답변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불신자가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물은 게 아니라 간디의 선한 일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선뜻 답변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간디의 선한 행동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불신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고(5장) 교회 밖에는 하나님나라는 존재하지 않고(6장)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라고(7장) 거칠게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방점을 찍는데 스캇은 이것을 뒤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라는 말인가? 당장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런 스캇의 생각은, 그가 4장에서 잘 정리하고 거부한 예수님 당시 하나님 나라를 표방했던 5가지의 유형 중, 거룩한 후퇴전략을 쓴 에세네파의 견해 같아 보여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스캇은 7장에서 하나님 나라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사명을 아홉 가지로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사회정의를 다룬다(216). ‘복음적’이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스캇은 사회복음과 해방신학을 수용한다.(217). 하지만 이런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일로 편입시키지 않고 개인의 선한 행동으로 치부한다. 사실 난 이 차이를 잘 모르겠다. 신자든 불신자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명명하든,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선한 행동으로 묘사하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밖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받아드렸을 때 교회가 세속화 될 수 있다는 스캇의 염려에 공감한다. 이 땅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나그네라고 하는 성도와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스캇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런 것이 자칫 세상을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말에도(222)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렇게 말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난 자칫 이런 스캇의 염려 때문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성도와 교회가 움츠려 들까봐 더 염려스럽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다’는 스캇의 말을 접하고는 스캇이 채워넣은 중요한 가르침은 다 들어내고 제목만 사용할 공산이 크다. 혹 진보적인 ‘스키니스 스타일의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며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스캇의 말대로 틀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보다 스키니즈 스타일의 사람들을 통해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스키니즈 스타일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장을 담그는 것에 비유한다면 신학적 오류는 구더기에 불과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담는 것을 포기할 순 없다. 스캇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현재가 불완전함을 알아차려야 함을 말하지만 정작 신학도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 같다. 설령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신학적 언명이 미숙할 수 있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을 격려하고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신학적 미숙을 온전케 하려는 신학자의 사명이 엿보이긴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도들을 교회 안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이 책의 분위기다. 또한 아쉽게도 세상에 대해 가진 스캇의 생각은 너무 부정적이다. 그는 심지어 ‘예수는 세상을 보다 나은 장소로 만들거나 세상에 영향을 주거나 변화시키러 오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분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다.(46) 신약성서에서 세상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이다(367)’고 주장한다. 이는 바르트와 재세례파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사실 스캇은 이 책에서 바르트와 재세례파를 비중있게 다룬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요3:16)’ 그리고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 뿐만 아니라 홍수 후 노아에게도,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문화명령에 대해서도 균형있게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캇의 일차독자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성도들이다. 미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스캇의 말은 충분히 이해된다. 미국은 한때 하나님이 나라라고 일컬어지던 곳이다. 미국을 이룬 청교도들 역시 국가교회 즉 ‘콘스탄티누스주의’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스캇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부록에서 더 상세하게 기술하지만 루터와 칼빈 뿐만 아니라 카이퍼의 신칼빈주의도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하는 틀로 봐야 한다는 스캇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이 책의 유용한 점 중의 하나다 한국교회도 정교분리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정파를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 콘스탄티누스주의의 흔적이다. 복음화 성시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캇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에만 오면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인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세상을 안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는 교회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캇이 말한대로 정의와 평화가 먼저 교회에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 교호의 일차적인 사명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게 하나님 나라 일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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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맥나이트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 서평 – lali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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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의도적이라 생각되지만 새물결플러스는 대중 친화적이면서 무난한 주제를 다루는 책의 출간에는 별다른 흥미를 두지 않는 듯합니다. 기본적인 판매고를 보장하는 안전한 책보다 다소 문제적이며 논의의 필요성을 던져주는 책들이 종종 보입니다. 요즘 같은 출판계의 불황 가운데 새물결플러스의 이러한 모험은 독자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책 ‘하나님 나라의 비밀’ 역시 그러합니다.
복음이 변질되었다는 지적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때로는 TV에서 보게 되는 힐링 프로그램이나 마음 수련, 명사 초청 강연과 별다를 바 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복음의 지나친 축소는 복음을 은밀하고 사적인 것으로 만든 반면, 복음의 지나친 확대는 그 경계를 무너뜨려 윤리와 철학의 하위 갈래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제는 복음이 ‘모든 것을 의미하기에 결국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추상화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 작가인 스캇 맥나이트는 묻습니다. ‘만약 예수가 해답이라면 그 해답을 초래한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는 독자들이 복음의 뚜렷한 실체를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비밀’ 속으로 이끕니다.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수록 작가는 마치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복음이라는 사진의 샤프니스(sharpness) 버튼을 연거푸 누르는 듯합니다.
작가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위치한 예수를 복기하면서 그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구체화됨을 주장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이며, 교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 라는 다소 파격적인 이 주장은 독자 개개인이 출석하는 지역 교회를 다시금 바라보게 만듭니다. 나아가 내 교회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내 교회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혹자는 교회의 이런저런 모습에 상처받고 실망하여 ‘무슨 하나님 나라가 이래?’하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듯이 우리의 교회 역시 흠이 많고 연약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웅장한 실험실’로서 우리가 세상을 향해 갖는 바람을 교회 안에 먼저 구현해야 합니다. 즉 세상을 향해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앞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대안이자 모델이 되면서 정의와 평화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그간 무심했던 지역 교회의 사업들을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독자 스스로 돌아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애정과 참여 혹은 비판을 가능케 합니다.
한편 작가의 논리를 따라가는 도중에 다소 급진적인 주장을 마주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은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라지만, 과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대상에 있어 이런 식의 우선순위가 존재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병고침의 기적을 베푸실 때 과연 그러한 기준의 선별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의 주장과 더불어 단 하나의 문장을 더 건져본다면, 작가 스스로가 인용한 본회퍼의 말을 꼽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구속받지 못했으므로 다른 이들과 교회에 대한 이상화를 중단해야 하며 미래에 있을 완성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출범에 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과 작가 역시 이 문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복음을 회복하기 위한 작가의 고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과정에 서 있기에 절대 진리로 이상화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를 수정·보완하여 복음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깝게 복원해 낼지 모르는 일입니다.
꿈꾸는 바는 이것입니다. 훗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였을 때, 많은 이들이 그 완성에 기여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이 책과 저자가 그 찬란한 대열에 서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수많은 책과 저자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 교회들 앞에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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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 고등학생 때부터 다닌 교회에서 배운 바로는 삼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과 몇몇 성경인물들, 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내용이 기독교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 대학교 선교단체 활동을 시작하며 기독교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 중 일부분이었던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는 나를 때로는 군사로, 때로는 시민으로, 때로는 일군으로 만들었다. 왠지 세상으로부터 그 나라를 지켜야 할 것 같아 군사가 되었고, 천국 거주민이 되고자 시민이 되었으며, 열매를 많이 올려드리고자 일군이 되었다. 그렇게 캠퍼스에서 나만의 이미지로 그려왔던 “하나님 나라”는 이제 지역과 규모, 형태와 교파를 초월하여 어느덧 현대 기독교의 핵심 주제가 되어버렸다. 생소함에서 출발했던 “하나님 나라”가 어느덧 일상화 되었다.
아마 저자는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라는 나의 바람을 이 책을 읽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교회라는 단서를 가지고 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서, 교회로서 그 이야기를 써내려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할 것이다. 부디 내가 속한 교회가, 한국과 세계 곳곳의 교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지금’과 ‘아직’의) 교회가 되어 가길 감히 소망해본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통해 어떻게 이뤄질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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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 동안 국내 기독교 서적에서 '하나님 나라' 라는 주제가 들어간 책을 손쉽게 발견하게 된다. 좋은 책들의 출판 덕분에, 한국교회에서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인식이 사후의 '천국' 이라는 이미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반면, 이제 좀 그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관련 주제의 책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YES24 기준으로, 2015년부터 출판된 기독교 서적 중 '하나님 나라' 를 제목/부제에 포함하는 책만 30여권에 달한다. 이 정도면 '하나님 나라' 가 들어가야 팔리는 책이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도 역시 '하나님 나라' 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 독특하다. 저자는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러한 논리를 이끌어가기 전에 우선 두 부류의 흐름을 정리한다. 하나님 나라를 사회적 행동으로 이해하는 스키니진 스타일, 그리고 개인의 구속으로 이해하고 있는 정장바지 스타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 이후, 저자는 구속이 중심이 되는 기존의 접근법과는 다른 관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해 나간다. 그 뒤, 교회에 대해 정의하는데, 이 교회란 제도권 교회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런 교회를 가리킨다고도 말한다(178p). 이어서 나오는 6, 7장에서는 앞서 말한 교회의 정의를 전제하며, 교회 밖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논리를 이어나간다. 7장의 제목처럼,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사명인 것이다. 여기까지는 저자의 의견에 조금 불편함은 있었지만 대체로 동의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후반부를 지나 책의 말미에 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 발생하고 행해지는 곳을 '지역 교회'로 한정지어 버린다. 물론, 저자가 주장하듯 이렇게 결론을 내는 이유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 있다. 첫 번째는 저자가 말했듯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와, 이와 더불어 현대에 이르러 기존에 유지해오던 제도권의 교회 만을 교회로 볼 것 인가이다. 기존의 교회가 수행하는, 그리고 수행해야 하는 성도간의 교제, 성만찬, 교리의 전수, 양육 등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어떠한 형태 이건 교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라고 거칠게 정의해보면 그것이 꼭 지역교회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오히려, 저자의 논지는 하나님의 영역을 제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두 번째는 소위 사회 변혁 운동의 접점에 서 있는 신학이나 운동의 흐름에서 개인 구원의 필요와 교회의 자리가 점차 축소 되었다는 부분이다. 개인 구원의 필요에 대해 축소 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동의한다. 일부 운동에서는 그런 주장들이 있었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를 어떻게 정의 하느냐에 따라서는 축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본다. 사회 변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교회의 기능이 기성 교회보다 확대된 형태의 기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꼭 제도화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에게 스키니진과 정장바지 스타일이 만나는 접점은 이러하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형태는 다를 지라도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모습 역시 다양한 모습을 갖출 수 있다고 본다. 분명 일부 신학의 흐름은 전통적인 복음의 해석에서 많이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전통적인 교회 역시 복음을 너무 좁게 해석한 나머지 하나님 나라를 역동적으로 살아내고 보여주기엔 너무 버거운 화석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본다. 여기에 한가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책을 읽는 한국 성도들이 놓인 한국 교회와 사회의 상황이다. 우리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가정이 무너져가고 국가 제도가 이를 버텨주지 못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 사회를 조롱하는 수많은 유행어 들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적어도, 복음으로 변화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비율은 2014년 기준 28% 다(한국갤럽). 이 정도 수치의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 모양 일까? 최소한, 종교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최하위는 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상황 에서 필요한 것은 제도화된 교회의 틀을 깨는 대안적인 공동체 운동이나 교회의 모습이다. 또한, 각자 교회가 집중하는 모습을 실천하기 위한 가벼운 접근도 필요해 보인다. 소위 LEAN 하게 실천할 수 있는 부분들을 교회에 맞게 적용하며 고민하고 실천하는건 어떨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성경의 다양한 본문을 검토하며 상황에 맞게 해석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한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신앙의 모습은 여러모로 모범이 되지 못한다. 또한, 내가 경험 했던, 배웠던 신학의 흐름만 주장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상황을 놓치고 잘못을 반복하는 신앙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