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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은, 20세기에 급격하게 발전한 현대의학의 발자취를 훑으며, 그 중 12가지의 중요한 사건을 정의한다. 페니실린의 발견(1941), 코르티손의 발견(1949), 흡연의 발암성 규명(1950), 현대식 기계호흡(1952), 클로르프로마진의 발견(1952), 개심술(1955), 인공관절(1961), 신장이식(1963), 고혈압치료의 시작(1964), 소아백혈병 완치(1971), 시험관 아기(1978), 헬리코박터균의 발견(1984)이 그것이다. 이 중 마지막인 헬리코박터균의 발견이 굉장이 의아하다. 저자도 독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을 알고, 해당 장(章)의 서문에서 왜 이 사건을 다른 대단했던 사건과 동급으로 놓았는지를 장황히 설명한다. 헬리코박터 균의 발견은 위궤양에 대한 기존의 병태생리, 즉 유전, 스트레스, 식습관 등 모호한 원인들로 설명되던 것이 단일한 생물학적 원인으로 설명되는 것으로 바뀌는 커다란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는 것이다. 1부의 마지막인 이 헬리코박터 장에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이를 근거로 현대의학의 쇠퇴를 설명한다. 현대의학의 쇠퇴에 관한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신유전학과 사회학적 관점이 대두되었으나 실제로 의학의 발전에 보탬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률의 변화(430쪽)를 인용하며, 극적으로 변하는 거꾸로 된 U모양의 그래프를 보면 심근경색은 '유행병'처럼 발생했다가 진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헬리코박터와 같은 '단일한 생물학적 인자'가 관여하지 않고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 예방의학에서 주로 설명하는 고지방식이, 흡연과 같은 인자는 이런 그래프를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대중을 기만할 뿐이라는 주장을 과감하게 펼치는데, 이는 큰 논리적 오류이다. ![]() 저자는 진단기술의 변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무언가 질병양상이 크게 변화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질문인데도 그렇다. 분명 1900년과 1950년의 진단기술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과거에는 그저 '급사'로 취급하던 것들이 '심근경색'으로 진단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1950년대에 정점을 찍은 후 1960년대부터 급격하게 사망률이 하강하는 모습이야말로 내게는 저자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고혈압관리의 효과로 보인다. 연보에 따르면 1964년부터 경구약제로 고혈압 치료가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로 뇌졸중, 심근경색의 사망률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특히 뇌출혈에 그러하였는데, 과거와 달리 현대에 들어서 젊은 성인이 뇌출혈로 사망하는 사례는 극히 드문 일이 되었다. 이렇게 설명 가능한 심근경색의 사망률 양상에 성급하게 알려지지 않은 생물학적 인자의 존재를 들이미는 것은 오컴의 면도날 법칙에 위배된다. 저자가 칭찬해 마지않는 브래드퍼드 힐의 제1기준, "상관관계는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타당해야 한다"에도 맞지 않는다. 저자는 헬리코박터의 사례가 굉장히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헬리코박터의 발견은 미생물이 극한의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큰 의미는 없다. 베리 마셜 자신이 헬리코박터 균을 먹은 후 바로 위장장애가 발생한 것은 기가 막힌 우연일 뿐이다. 한국인의 경우 약 50%가 위장에 헬리코박터 균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50%의 한국인이 모두 위궤양 환자인가? 전혀 아니다. 헬리코박터 하나로는 위궤양을 설명하지 못한다. 저자는 헬리코박터 균으로 말미암아 위궤양의 병태생리학이 완전히 변화하였다고 주장하지만, 헬리코박터 균과 마찬가지로 유전, 식습관, 흡연, 약물 등의 인자도 여전히 주요하다. 여기서 틀렸기 때문에 이 책의 이후 논의는 완전히 틀려버린 것이다. 책은 헬리코박터의 논리로 여전히 원인이 미궁 속에 남아있는 류마티스 관절염, 다발성 경화증과 같은 난치병과 정신질환마저도 지금껏 고려하지 못하였던 생물학적 원인이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저 끝없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과 같은 모습일 뿐이다. 베리 마셜 박사가 노벨상을 받긴 했지만, 인류 건강에 얼마나 이바지했는가? 그저 요구르트 광고에 나올 뿐이다. (그마저도 요구르트와 헬리코박터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현대의학의 질병 이론은 다요인 설명을 받아들인다. 결핵과 같은 감염병 마저도 그렇다. 나는 레지던트 시절 숱하게 활동성 결핵 환자와 아무런 보호장구 없이 접촉하였지만, 결핵에 감염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나 뿐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던 의료진들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결핵은 결핵균 하나로 설명되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핵균은 필요조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 요인들도 중요하다. 이러한 설명을 요즘에는 '그물망 이론'이라고 하지만, 나는 직소퍼즐에 비유하고 싶다. 직소퍼즐은 조각 갯수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다. 4조각이나 8조각 짜리 유아용이 있는 반면, 1000조각을 넘는 어려운 것들도 있다. 헌팅턴 무도병, 적녹색맹등과 같은 건 유아용 직소퍼즐이고, 류마티스 관절염은 1000조각이 넘는 최상급 난이도의 직소퍼즐과 같다. 잘 포장되어 나오는 직소퍼즐과 달리, 의학자들은 이 조각을 어딘가에서 찾아 맞추어야 한다. 이 조각은 유전학에서 나올 수도, 사회이론에서 나올 수도 있고, 우연히 발견될 수도 있다. 조각의 크기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다만 해야 하는 것은 그저 찾고 맞추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찾고, 찾고, 또 찾아야 한다. 물론, 이 책이 1999년 작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거의 20년 전이다. 하지만 에필로그는 비교적 최근인 2011년에 쓰여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의학을 쇠퇴로 규정짓는 작가의 시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에필로그에서 지적하는 내용 - 제약회사의 입김이 너무나도 세진 것과 탈리도마이드 사건 이후 임상시험의 규제가 굉장히 엄격해져 발전 속도가 더뎌졌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정반합의 원리를 고수하며 여전히 발전해 나가고 있다. 정오 51쪽: 1만 킬로미터 ->1만 미터 당시 소문이 어떻게 돌았는지 모르겠지만, 1만 킬로미터는 인공위성 궤도의 높이다. 책 중간에 또 같은 내용의 오류가 있는데, 아무리 독일군 비행사를 초능력자로 묘사한다 할지라도 1만 킬로미터는 말도 안되는 수치다. 비행기에 가압장치가 없던 당시 사정을 고려해보면, 현재 민항기의 순항고도인 성층권 고도 1만 미터가 2차대전때의 비행사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생각되었을 것 같다. 59쪽: 류머티즘질환 및 골관절염 표 편집 오류 (들여쓰기) 266쪽: 1부 -> 2부 540쪽: 뇌물On the take - <더러운 손의 의사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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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는 원제 대로 현대 의학의 부침(浮沈, rise and fall)을 다루고 있다. 이 중 ‘부(浮,
rise)’에
관해서는 현대 의학의 결정적인 열두 장면을 소개하고 있고, 그런 결정적 장면에서 비롯된 의학의 번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의학에 관한 낙관주의는 바로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이 저자 제임스 르 파누의 견해이고, 그게 바로 ‘침(沈, fall)’이다. 앞부분을 읽을 때는 현대 의학이 이룩한 성과에 대한 찬사로 비춰지지만, 실은 뒷부분의 현대 의학 비판을 위한 판을 짜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저자는 현대 의학의 성공 뒤의 추락에 더 중심을 두고 있다. 1999년에 초판에 이은 2011년에 재판을 내면서 에필로그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 에필로그도 비슷하다. 원래 책에 다루고 있는 시대보다 짧은, 에필로그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에도 의학의 부침은 존재하고 있는데, 여전히 저자는 그 사이의 성공보다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현대 의학의 결정적 열두 장면이 어떤 것인지부터 봐야 한다. 1941년의 페니실린부터 시작하여, 1949년의 코르티손, 1950년의 스트렙토마이신과 흡연과 폐암 사이의 관련성 입증, 1952년의 조현병에 대한 클로로프로마진 처방, 1952년의 소아마비의 유행과 이에 대한 집중 치료, 1955년의 개심술, 1961년의 관절 치료, 1963년의 신장이식, 1964년의 뇌졸증에 대한 예방, 1971년의 소아암의 완치, 1978년의 시험관 아기 탄생, 그리고 1984년의 소화성 궤양의 원인으로서 헬리코박터 규명.
이 목록만 보더라도 현대 의학이 얼마나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성취로 많은 질병이 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절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고, 평균수명이 늘어남과 동시에 삶의 질도 늘어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제임스 르 파누는 이러한 성취를 이룩해낸 상황들을 그리 장황하지 않게 쓰면서도 그 성취의 중심에 선 의학자와 과학자들의 분투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우선 이 성공의 공통점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찾을 수 없었다: “열두 가지 결정적인 순간들을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263쪽) 즉, 일반적인 성공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이 혁신의 속도를 빠르게 만든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혁신의 경로는 다양했으며, 그 다양한 혁신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상당 부분, 아니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즉, 어떤 계획이나 과학적 논리에 의해서 치료약이 개발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페니실린과 코르티손으로 이는 예기치 않던 자연의 선물이고, 다른 약품도 어찌 어찌 해서 찾아낸 우연의 소산이라는 게 저자의 굳건한 믿음이다(또한 상당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고 나서 이제 현대 의학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1970년대 이후 의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옮긴이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눈에 띄는 봉우리를 모조리 정복해버린 후 이제 건널 길 없는 거대한 심연을 마주친 의학의 현재와 미래”).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요인으로는 우연에 의한 성공에 도취된 자만과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기 힘든 상황(이미 많은 발전이 이뤄졌으므로), 그리고 임상과학자의 부족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단은 사실 평범한 것이고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이어서 그런 와중에 새로운 돌파구였던 두 분야에 대한 비판은 그렇지 않다. 그 두 분야는 (제임스 르 파두가 부르는 바에 따르면) 사회 이론과 신유전학이다.
사회 이론이란 말하자면 예방의학, 혹은 사회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신유전학이란 유전학을 질병에 결합시킨 분야이다. 제임스 르 파두는 대표적으로 콜레스테롤 수치와 관상동맥의 연관성, 그리고 식사와 질병과의 연관성에 대한 사회 이론의 주장과 그 흐름을 통해서 사회 이론이 허구적이고 과장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그 이론 속에 깊이 설득되어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좀 충격적이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다.
신유전학도 그렇다. 질병의 원인으로서 유전자의 결함을 찾아내고자 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낫형적혈구증이나 헌팅턴병의 성공이라는 아주 예외적인 예를 제외하고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고 보고 있다. 더군다나 신유전학은 생명현상을 유전자 차원으로 환원시켜버림으로써 생물학을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더욱 많은 연구비가 쏟아지는 상황은 아이러니한 것이다. 즉 신유전학(솔직하게 이런 용어는 처음 듣는다)의 성취에 대한 기대는 높은데, 실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에필로그에 덧붙이고 있는 Human Genome Project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긴 하여 이에 대해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편함을 감출 수 없다. 그 불편함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혹은 세뇌되어 있는 것)의 강력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쇠퇴기 이후에 전개되어온, 또 다른 의학의 발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 덧붙이고 있듯이, 그것이 일종의 기만 같은 것이긴 하지만, 놀라운 성공을 거둔 신약이 나왔고, 줄기세포와 같은 재생의학 등의 새로운 분야도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비판이 불편한데,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성공의 이면을 보면 여전히 저자의 견해에 기울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혼란스럽다.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이런 혼란스러움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겠지만, 이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이 책의 가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의사와 의학을 신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떤 의학적 상황에서 제시되는 것들에 대한 옳고 그름과, 의학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판단은 누구에게라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알아야 한다. 그 뭔가는 성공도 포함하며 한계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그 성공을 혜택을 보고 있으며, 그 한계 속에서 우리는 또한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모르는 게 약일 순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