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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저자가 이계삼이란 분이고 시와 공화국의 저자는 변홍철이라는 분이다. 출판사는 공히 한티재라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 상호가 한티재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 물론 대구의 달구벌 대로에 위치하는 지역 출판사이다.
한티재(대구 팔공산 칠곡 동명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고갯길)라는 이름에 주목하게 된다. 1,800년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모여든 고개길에 은둔한 신자들의 집단 순교지 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과 다르다는 것이 틀렸음으로 죽어 갔던 곳이 바로 한티재이다. 가산산성이 위치해 있고 임란에 왜군을 막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곳이 순교와 저항이라는 두 개의 모티브를 하고 있는 셈이다.
출판사 편집인을 봤다. 변홍철이다. 낯설지가 않았다. 지난 번 지방 선거 때, 내가 사는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분이 변홍철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내가 가입한 정당에서는 후보조차 없었다. 이 지역의 국회의원은 구청장 임기가 남아 있어도 구청장 임기중 사직을 하고 다시 국회의원이 되려고 출마했었다. 출마를 하지 않고 계속 구청장 했더라면 지방선거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선거를 치르는 비용은 고스란히 세금으로 지출되었다. 어느 출마자가 선거 후에 사표 내고 보궐 선거를 하더라도 그 비용은 고스란히 지역 시민들의 세금으로 충당된다. 구청장 하라고 뽑았더니 중간에 관두고 다시 출마하여, 그래도 보기 좋게 다수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 되었다. 이 동네는 강아지가 공천만 받아도 당선되는 지역이니 그 당에서 출마하고 사표 내고 또 자리 바꾸는 회전문 선거는 또 한다만은 돈은 나처럼 반대하는 사람의 세금도 들어간다는 "조옷"같은 사실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야당에서 나온 후보가 변홍철, 한 사람이었다. 사표인 것도 뻔히 알고도 찍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책 마지막 장에 책의 편집인과 출판사를 보니, 아. 그랬구나!라는 연관성이 메들리로 이어졌다. 아 그분이 이분이었다니. 그런데 이력을 보니 녹색평론이란 잡지의 주간도 했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는 이 책표지 색이 상징하는 녹색당이 바로 그 곳이었던 것이다. 역시 한티재라는 의미와 순교라는 희생이라는 뜻과 녹색이 지향하는 저항의 의미였다.
이 책의 저자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했던 선생님이었고 밀양의 송전탑 반대 투쟁을 벌였고 지방 선거에서 후보로도 출마했던 경력을 지냈다.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겪었던 교육에 대한 이야기와 송전탑 반대라는 이슈의 중심에서 활동가이기도 했고, 역시나 다를 것도 없이 전교조 출신이기도 했다.(지금은 학교에서 퇴직한 상태)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한겨레 신문, 녹색평론 등 각종 칼럼과 기고했던 컬럼을 다시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한 산문집이다. 어린 시절 유년한 때 놀았던 강변의 추억들을 시작으로 오랜 학교생활에서 생각한 교육에 관한 신념, 그리고 세상에서 부딪힌 것들에 관한 단상들을 모아 놓았다. 그런데, 이책을 읽으면서 은연 중에 어떤 모종의 절망과 허탈을 느낀다. 통상 진보라는 사람들의 내면에 깔린 인간 사회의 부조리(조리 되지 못한)를 못견뎌 하는 우울증이라는 점이다. 자본에 대한 저항으로 이은 좌절과 맞물려 있는 것도 느낀다.
오늘도 나는 낙동강에 나갔다. 점점 여름철로 접어 들어 가는데 벌써 녹조띠가 강의 가장자리에서 부터 생기고 있다. 물은 흐르지 못하고 거대한 호수처럼 갇혀서 하루도 빠짐없이 각종 오염물질은 쏟아지고 온도는 올라가고 고문당하고 있다. 과잉 영양화로 조류의 번식은 폭발적인데 어떤게 녹조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녹조는 강물에 녹아 있는 용존 산소를 다 마셔 버리고 물고기는 또 질식해서 허연 배를 뒤집고 힘없이 흐느적 거리다가 이내 근육에 힘을 풀고 죽어 가고 있다. 죽은 물고기 사체는 다시 분해되면서 부영양화로 강물을 더더욱 오염시킬 것이 뻔하다. 이렇게 썩어 가는 강물을 바라 보면서 나는 녹색당의 녹색이란 이념의 가치에 회의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고서도 무관심한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움 앞에서 무어라 지껄일 여력이 남아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염을 배출하고 먹고 마시고 싸는 모든 과정에서 나오는 물질을 강은 고스란히 다 받아 내고 있는데, 태양에서 나오는 빛은 또 왜 그렇게도 수면을 반짝이게 찬란하기도 하는지, 이 삶의 거대한 모순과 처절한 영광은 마치 강이 말하고 있는듯 했다.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모순적인 형태가 강물에 스며들고 녹아 있는 현실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진실을 목도한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저자는 희망의 끝없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 모순과 부조리함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 저항의 바탕에 깔려 있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우울과 희망을 크로스하고 있다.
최근에 읽었던 책들의 모음을 보면 하나의 큰 스펙트럼에서 의미하는 지점이 있다. 전부 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과 모순적 상황. 자본주의에 대한 적패에 이구동성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소 깊든 얕든 큰 맥락은 다 나온 셈이다. 점점 갈수록 살기가 퍽퍽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아우성과 뭐가 다를 바도 없다.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탄식하고 있고 학교에서 각 기업체 근무하는 사람들에게서 삶에 대한 버거움은 점점 그 농축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하고, 다시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한다.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 있어서 시간에 대하여 순교할 자격이 있을까 싶었다. 어쨋거나 살기는 살되, 자식들에게 닥친 미래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낳은 책임은 어떻게 면하고 죽을 것인가. 앞으로도 나는 계속 이런 산문집을 사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숨어 있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교감함으로써 연대하고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다 자식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겠는가.
----------- 아침부터 한 권 다 읽고나서, 강에 나가 사진 찍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재빨리 간단하게 리뷰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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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4 어깨동무하는 평화를 꿈꾸는 아저씨 ― 고르게 가난한 사회 이계삼 글 한티재 펴냄, 2016.2.15. 15000원 여전히 나는 꿈을 꾼다. 오래된 미래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어떤 그림을. 고르게 가난한 나라, 그 가난이 가져다줄 삶의 평화. 그 평화의 정경을. (28쪽) 이계삼 님이 신문과 잡지에 쓴 글을 엮어서 빚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한티재,2016)를 읽습니다. 이계삼 님은 한때 국어 교사였고, 한동안 밀양송전탑과 얽힌 일을 했습니다. 이제는 녹색당에 몸을 바치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밀양에서 나고 자란 뒤에 도시로 나가서 학교를 다녔고,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사 일을 열한 해 만에 씩씩하게 그만두었고, 고향 밀양에서 시골마을 할매랑 할배하고 이웃으로 지냈다고 해요. 이계삼 님은 어릴 적에 송전탑이나 전봇대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겠지요. 이계삼 님은 어릴 적에 핵발전소나 거대자본을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을 테지요. 그렇지만 이계삼 님은 나이가 드는 동안 차츰 하나씩 알아차립니다. 스스로 알려고 하면서 하나씩 배워요. 사회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몸으로 부딪히면서 깨닫습니다. 정치나 경제가 굴러가는 얼거리를 몸으로 부대끼면서 알아차립니다. 송주법은 송전선로 갈등을 ‘얼마 되지 않는 쥐꼬리 보상’으로 틀어막으려고, 그러니까 주민들이 입을 피해를 덜어 주거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송전선로를 더 쉽고 원활하게 깔려고 만들어진, 철저히 한전과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입안된 것이다. (41쪽)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이계삼 님이 몸으로 부딪히면서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수수한 국어 교사였던 사람이 왜 교사라는 자리를 씩씩하게 그만두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한 밀양 아저씨 한 사람이 왜 송전탑을 반대하는 싸움에 뛰어들어서 온몸을 바쳤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하고 작은 사람이 왜 녹색당이라고 하는 정치운동에 한몸을 맡기려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는 이야기책에서는 경제발전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진보나 사상이나 철학을 밝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왜 이 길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길이 되는가 하는 대목을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돈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마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보는 이야기를 적어요. 크거나 대단한 것이 아닌 평화와 사랑으로 짓는 살림살이를 꿈꾼다고 하는 이야기를 펼쳐요. 또래 아이들보다 가난했고, 밤낮없이 이어지는 부모님의 고된 노동을 지켜보면서 자랐지만, 그 시절이 행복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낙동강 지류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강변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2쪽) 학교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을 농민으로 길러내는 것은 지금 현실 속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교육 학교의 일부를 농업계로 전환하는 것도, 학교 교육과정 속에 농적 요소를 결부시키는 것조차 지금은 불가능해 보인다. (69쪽) 어느 모로 본다면, 평화야말로 큰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곰곰이 따진다면, 사랑이야말로 커다란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차근차근 돌아보면, 꿈이야말로 삶을 살찌우는 가장 크나큰 이야기라 할 테지요. 국가보안법이나 테러방지법을 외치는 정치는 평화하고 얼마나 가까울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경제발전을 외치면서 온 나라 냇물하고 멧자락을 파헤치거나 까뒤집는 삽질은 사랑하고 얼마나 가까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입시지옥과 학벌을 없애지 않는 교육정책은 꿈하고 얼마나 가까운 자리에 있는가 하고 곱씹어 봅니다. 시골 교사로 일하다가, 밀양송전탑을 반대하는 일을 하다가, 녹색당 일을 하는 이계삼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평화’로 나아가자는 이야기이고, ‘사랑’을 나누자는 이야기이며, ‘꿈’을 키우자는 이야기입니다. 평화 아닌 길로는 가지 말자는 이야기이고, 사랑하고 어긋난 자리에 서지 말자는 이야기이며, 꿈을 짓밟는 무리하고 손을 잡자는 이야기예요.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95쪽) 할머니들이 한 젓가락 드시려고 마스크를 내리니, 옳거니 싶어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현장 직원이 있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단다, 이놈들아” 하며 소리치던 할머니들, 머쓱해 하는 직원이 보기 안 됐는지, “이리 와서 같이 짜장면 죽자”고 하셨단다. (154쪽) 조촐한 이야기책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참말 이 이름 그대로 “고르게 가난한” 삶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고르게 가난한” 삶터가 되기를 바란다는 꿈은, 굶자는 뜻이 아닙니다. 혼자 차지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어깨동무를 하자는 뜻입니다. 서로 나누는 기쁨을 누리자는 뜻입니다. “고르게 평화롭자”는 뜻이고, “고르게 아름답자”는 뜻이리라 느껴요. 이 땅에서 한솥밥을 먹는 우리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즐겁게 열자는 뜻이리라 생각합니다. ‘공부 못한’ 학생이었기에 ‘하청 직원으로서 피폭 노동’을 도맡아야 하지 않거든요. ‘공부 잘한’ 학생이었기에 ‘한수원 직원으로서 방사능 안 쐬는 사무직’을 도맡아야 하지 않아요. 공부를 못하거나 잘하거나 아름다운 일자리를 함께 누려야 하고, 학벌이나 재산을 모두 내려놓고 즐거운 꿈과 기쁜 사랑을 두 손으로 쥘 수 있을 때에 아름다운 나라가 되리라 생각해요.
기본소득론은 예수님이 원조이다. 일거리가 없어 놀다가 저물녘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먼저 와서 일한 자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포도원 주인 비유야말로 기본소득론의 핵심적인 논리를 꿰뚫고 있다. (225쪽) 이명박 정부는 강을 결딴냈다. 22조 원을 쏟아부은 4대강 본류는 지금 녹조 범벅이고, 물고기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곁으로 큰빗이끼벌레가 유유히 헤엄치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되어 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산을 결딴내고 있다. 빗장이 풀린 산지개발허가는 전국 곳곳에 대규모 개발사업을 일으키고 있다. (295쪽) 어깨동무하는 평화를 꿈꾸는 아저씨 이계삼 님이 내딛는 발걸음은 조그맣습니다. 이제 막 한 걸음을 내딛는다고 할 만합니다. 어릴 적에 누린 아름다운 낙동강을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자라는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꿈이란 무척 수수하면서 예쁘다고 할 만합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서 이계삼 님이 목청 높여 외치듯이, 어느 대통령 한 분은 이 나라 물줄기를 결딴냈고, 어느 대통령 한 분은 이 나라 멧자락을 결딴내는 길을 걷습니다. 어쩌면 두 분 대통령은 “고르게 가난한” 삶터를 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슬픈 몸짓으로 물줄기와 멧자락을 결딴내는 정책을 밀어붙이는구나 싶기도 해요. 평화가 평화를 낳고 사랑이 사랑을 낳습니다. 꿈이 꿈을 낳고 웃음이 웃음을 낳아요. 이리하여 국가보안법은 군사독재나 테러방지법을 낳는구나 싶습니다. 전쟁무기는 새로운 전쟁무기로 이어지고, 서슬퍼런 공권력은 새로운 공권력으로 이어질 테지요. 부디 이 나라에 따스한 평화와 아름다운 사랑과 푸른 꿈이 깃들 수 있기를 빌어요. 평화를 꿈꾸는 아저씨 이계삼 님도, 대통령이나 기업가도,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수수한 어버이도, 그리고 앞으로 이 땅을 가꿀 맑고 밝은 어린이도,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삶이 아니라 “고르게 넉넉한” 삶과 “고르게 즐거운” 삶이 되는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빌어요. 이 꿈길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 아니 우리가 꼭 이루리라 생각힙니다. 2016.2.2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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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게 가난한 사회 /저자 이계삼/출판 한티재/발매 2016.02.15.
사회에 편승해 살아가고 있으면서 사회적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 살아왔다면 기형적인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온 삶을 정리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단절하고 끊어버리는 것이다. 새로운 부대에 새로운 술을 부어야 할 때이다.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 그렇다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 평생 소풍놀이 끝나고 돌아갈 때 무엇이 남을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 극심한 고통은 참아내도 의미 없는 고통을 참아서는 안 된다. 지극히 의미 없는 시간으로 보낸 지난 23년의 세월을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하는 이유이다. 삶은 깨어있어야 한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그것일 뿐이다.
오늘날 체제가 부과하는 고통은 순서대로 찾아온다. 살아남을 수는 있겠으나 끝내 공허와 환멸이 찾아올 것이다. 실패한 인생을 느낄 때 더 이상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싸우거나 아픔에 함께 하지도 않으면서 미래를 위해서 희망을 위해서 참담한 오늘과 단절할 용기와 의사가 있어야 한다. 오늘을 참고 견디면서 이겨낸다고 내일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앵무새처럼 공허한 미래만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떠했던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자본의 테두리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버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P296 크리족 인디언 추장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고 한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후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힌 후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니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에 비해 성숙한가.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얼마나 바람직한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인가. 이것을 두고 비교해야 한다. 타인과의 무의미한 경쟁을 접고 성숙한 인간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좀 더 나은 사회에서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걸어 다니면 세상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풍경을 느끼고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아지게 되는데,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는 자연이든 인간이든 그냥 지나치게 된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이계삼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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