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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선종 7주년이 되는 한국 종교계에 큰 별이 된 '김수환 추기경'의 책이 나와 화제입니다. 다소 두꺼운 분량, 종교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더라도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의미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미 《간송 전형필》로 '이충렬'작가를 만나보신 독자에게는 즐거운 독서가 될 것입니다. 특히, 방대한 사진 자료를 수집하고 미공개 사진까지.. 그 역사의 증인 찾아 인터뷰하며 퍼즐 조각을 맞추듯 추기경의 삶을 다시 그린다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써 내려간 전기 소설이란 형식이 다소 당황하셨다면 전작인 《간송 전형필》을 만나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실제에 가장 근접하여 인물의 궤적과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기록 장르인 전기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독특한 장르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번엔 김수환 추기경의 굴곡진 삶을 3년간의 작업 기간을 걸쳐 한국 역사와 함께 써 내려갔습니다.
책은 총 2권으로 1권 : 신의 향하여와 2권 : 인간을 향하여로 나뉘어 있습니다. 1권에서는 옹기장이 집안 대대로 내려온 천주인의 잔뼈 굵은 신앙심으로 두 형제가 가난을 이겨내고 신부가 되기 위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항렬에 맞춘 순한이란 이름이 열두 살에야 '수환'으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서운하다거나 의구심 없이 받아들이는 어린 수환의 일화는 훗날 종교인의 욕심 없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1922년 생인 김수환 추기경은 말 그대로 한국사의 중심에 삶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경제 발전과 인권 사이에서 화약고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국민들과 일화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항상 낮은 곳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한국사의 어른의 깊은 뜻을 사진과 문헌을 통해 알아볼 수 있어 좋습니다.
이 연설문은 김수환 추기경이 유신정권을 개탄하는 인권 연설문의 일부입니다. 1970년대의 일이지만 지금도 비슷한 일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역사는 왜 이리 반복되는 것인지 참 아이러니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비폭력 시위인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늘 '화해와 일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 같지만, 이것이 아니고는 살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경제발전으로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이기주의와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풀어보는데 앞장섰습니다. 가톨릭 '고백의 기도'에 나오는 '내 탓이오'라는 구절을 통해 최근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점과 외로움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탓으로 인정하며 서로 아끼는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87년간의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김수환 추기경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아픈 자와 건강한 자를 나누지 않고 모두 사랑하였습니다. 종교를 떠나 한국사의 아픈 순간을 함께하고 어루만져 주었던 추기경의 손길이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세상은 놰 날이 갈수록 흉흉한 사건사고를 경쟁적으로 토해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마다 곁에 두고 추기경의 따뜻한 행보를 곱씹으며 자신만의 위안을 얻고 싶습니다. 윤달의 마지막 날, 4년마다 한번 씩 온다는 29일이 아련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환한 모습이 그립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 사랑하십시오!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 그뜻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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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당에 다니는 캐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신자가 아니어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이 책은 종교여부를 떠나서 그분의 발자취를 뒤 찾아보기에 부족함이 어뵤은 책이다 좋은 삶, 행복한 삶, 가치있는 삶을 찾아 위대한 순례자의 길에 동행한 《간송 전형필》 작가 이충렬의 감동대작! 정치와 사회가 균형을 잃고 정의가 위협받을 때 참된 정신의 상징으로, 갈등과 이기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시대의 스승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소리 없는 자의 소리가 되어준 큰 어른.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메시지부터 고비마다의 고뇌와 결단, 불면의 밤과 인간적 외로움, 내면세계와 영성의 완성까지. 한 아름다운 인간의 모든 것을 철저한 사실에 바탕하여 온전히 되살려낸 최초이자 유일 전기 정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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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막연한 느낌은 "소박하시고 서민적이며 친근하다"는 것이었다...바보처럼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란 마지막 말씀이 오랜 동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게 되는 것 또한 스스로 그 길을 묵묵히 걸어오셨기에 더욱더 진실되게 다가갈 수 있었음일 것이다..김 추기경님의 탄생에서부터 어머님의 헌신적인 지원과 강직함 속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어내고 신부님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수도자로서의 고민과 성찰, 주변 지인들과의 만남, 사회적 어려움과 역사의 격랑속에서의 소신있는 모습을 고스란히 살펴봄으로써 추기경님과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 들게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막연히 좋은 분에서 많은 고민과 역경을 이겨내고 삶을 완성해 나가는 수도자로서의 모습을 알게됨으로써 진정 인간이 살아가야할 삶의 지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하게하는 시간이 되었다...1,2 권 책의 두께가 무색할 정도로 가슴속 깊이 다가와 시간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그런 글이자 삶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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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시대를 살았던 추기경 김수환의 생애는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전기임과 동시에 당대를 살았던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에 관한 집단 전기이기도 하다. - '감수의 글' 중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를 따라
1951년 9월 15일, 한국전쟁을 발발한 북한이 연합군에 밀려 항복 직전까지 이르게 되자 뒤늦게 전쟁에 참여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중국 인민군은 낙동강을 넘지 못하고 후퇴했다. 당시 대구에선 전투가 없었고 평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대덕산 자락의 빼곡한 초가집 굴뚝에서는 저녁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직 가을이라기엔 이른 시기였다. 대덕산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 물은 계산동으로 흘러들었다. 개천을 따라 시내로 가는 길목에는 붉은 벽돌의 대구대성당(현, 계산성당)이 있다. 조선시대 끝자락에 대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들이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성당이다. 두 개의 뾰족한 첨탑, 그 위에 십자가가 있다. 이곳은 대구 천주교의 중심 성당이라 일요일엔 신자들로 붐볐다.
오늘은 토요일임에도 개천을 따라 이곳을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명의 새로운 신부가 탄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대국가 고향인 김수환 부제副祭와 왜관 출신의 정하권 부제였다. 서울에서 대신학교(사제가 되기 위한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를 다니다 대구에 피난와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는 것이다.
당시 신학교의 과정은 길었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2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둥학교) 을조에서 소신학교 과정 5년, 대신학교 6년, 총 13년이었다. 이렇게 긴 과정을 마치고 신부가 되는 사람은 입학 때의 5분의 1 정도였다. 그런데, 김수환 부제는 동창들에 비해 4년이 늦은 17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해방 후엔 일본군 전범재판의 증인으로 괌에 다녀오느라 2년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김수환 부제의 친가와 외가는 조선 말 천주교 박해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오래된 교우집안이다. 할아버지는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희생된 순교자이고, 어머니와 두 누나는 대구 성요셉성당(현, 남산성당)의 오랜 신자였다. 셋째형은 사제 서품을 받은 김동한 신부다. 외가도 외할아버지, 큰외삼촌, 이모들 모두 신앙심이 깊다고 소문난 신자들이었다. 이처럼 친가나 외가를 아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 대구대성당으로 김수환의 서품식을 축하하러 왔다.
김수환의 부모는 경상북도 칠곡 장자골 옹기촌에서 결혼했다. 당시 아버지는 서른한 살, 어머니는 열입곱 살이었다. 천주교인끼리의 중매결혼이었다. 결혼 후에도 '옹기장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조선 말 천주교 박해 때 순교자의 자손이나 피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옹기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 천주교에서 '옹기장이'라는 단어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옹기를 구우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조선시대의 신자와 가난한 옹기촌에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근대의 신자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래서 훗날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아호雅號를 '옹기'라고 했다. 서품식이 끝나고 가족사진 촬영 후 두 모자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곧 칠순이 될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이는 천주교 집안의 전통이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내 아들이 아니라 천주님의 아들이니, 신자들을 잘 잘 보살피이소"
식민지 소년의 분노
당시 제6대 대구교구장을 역임했던 최덕홍 신부(1902~1954년)가 김수환에게 사제 서품을 수여했다. 두 사람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939년 6월 25일, 최 신부가 소신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4학년이던 수환의 가슴속에 있던 불덩이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신 과목이 끝나자 장면 교장은 그를 교장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얼마 후 그가 시무룩한 모습으로 교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짝인 김정진이 물었다. "스테파노, 요왕 선생님(장면의 세례명이 요한이었다)이 왜 부르신 거니?" 수환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대답했다. "며칠 전에 수신시험 답안지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라서 천황의 칙유勅諭(친히 내린 말)에 대해 소감이 없다고 썼다고 따귀를 맞았어.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말씀도 하셨고. 아무래도 학교에서 쫓겨날 것 같아"
그때 동성학교 교사들 중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분들이 많았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유홍렬 선생은 역사를 가르쳤는데,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척하면서 한국사를 얘기해주었고 한문강사였던 조윤제 선생은 <적벽부>를 가르치면서 신라의 화랑도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또 장면 선생이 교장 업무 때문에 수업을 많이 못하자 새로 부임한 이훈 영어 교사는 창밖을 힐끗거리면서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밖에 많은 한국인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일제의 만행들을 이야기했기에 수환의 마음속엔 분노의 불덩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유학과 박사학위 포기
1962년 10월 11일, 가톨릭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참석한 주교만 2,540명이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준비중이던 수환은 독일인 친구 신부들과 함께 바티칸 방송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놓고 발표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대역사였다.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그 발표를 듣는 순간 김수환 학생신부는 강한 전율을 느끼며 온몸이 굳는 듯했다. 이미 회프너 교수신부와 폴크 교수신부의 강의를 통해 들었던 내용들이라 얼른 이해가 됐다. 바로 이거다! 이제 가톨릭이 세상을 향해 엎드리는구나! 성신(성령)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의 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도교수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차 로마에 와 있던 서정길 대주교에게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독일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비록 박사학위는 받지 못햇지만, 새로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신학적 시야와 사고의 폭이 넓어진 시기였다.
초대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다
1966년, 마흔네 살의 중년 사제가 된 김수환은 교황청 서울 공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로부터 전화를 받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주교의 말씀으로는 부산교구에서 마산 지방을 따로 떼어 새로운 교구를 설립하고 초대교구장 주교로 그를 임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산으로 떠나기 전 그동안 다녔던 교도소와 희망원을 방문, 봉사하는 수녀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주교 서품식 일정을 5월 31일로 정한 그는 주교직 사목 표어를 무엇으로 정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사목 표어는 주교로서의 사목 방향을 짧은 성경 구절이나 기도문 등에서 찾은 성구聖句로, 일종의 각오 같은 것이다.
그는 사제 서품 당시에는 성경 구절에서 성구를 정했지만 이번에는 제2차 바타칸공의회 실천 정신을 나타낼 수 있는 성구로 하고 싶었다. 그는 진정한 주교의 자세는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아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온갖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걸맞은 성구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몸을 나누어주시며 우리들의 '밥'이 되어주셨듯, 자신도 모든 이에게 먹히는 존재, 많은 이의 '밥'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라는 경구를 사목 표어로 정했다. 주교 서품식은 마산 성지여중고 운동장에서 거행됐다.
노동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서다
1968년 1월, 김수환 주교는 JOC 총무로부터 '심도직물 JOC 회원 관련 보고서'를 전달받았다. 그는 이 사건의 성격을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탄압이자 명백한 종교 탄압이라고 판단하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JOC 전국 회원들이 해고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하루 한 끼 절미節米 운동'도 전개해나갔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성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 가톨릭시보(1968년 2월 15일) 중에서
서울대교구장이 되다
1968년 5월 29일, 김수환
대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430만 명이었고, 대교구 산하에 48곳의 성당과 63곳의 공소가 있었다.
신자 수는 약 14만 명이었다. 임시교구장 체제로 운영되던 지난 1년 동안 극심한 재정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는 붉은 벽돌의 명동성당을 바라보앗다. 한국 천주교를 상징하는 건물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서울과 비교도 안 되게 작은 마산교구의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인 내가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대교구를 변화시키고 쇄신할 능력이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추기경에 임명되다
1969년 3월, 로마 교황청과 미국으로의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한국까지 직행 비행기가 없어 일본에서 하루를 잔 후 다음 날 아침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때 게페르트 신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추기경에 서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무거운 소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는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비서직을 수행중인 장익 신부에게 말했다. "장 신부, 만약 이 소식이 오보가 아니라면 이건 내가 아니라 한국 교회에게 내린 영예야. 선교사 없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세계 교회에서 인정한 거야. 이건 절대로 내 개인의 영예가 아닌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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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이다. 그리고 2016년은 김수환 추기경 선종 7주년이다. 옹기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집안은 조선말 천주교 박해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구교우 집안이라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총 1,000페이지에 걸쳐 다룬 이 책은 2권으로 분할된 책만 봐도 질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워낙 탄탄한 자료조사, 인터뷰,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진 등을 통해 마치 한국의 현대사를 보는 듯 했다. 이 말은 곧 김수환 추기경의 삶이 한국 현대사에서 그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저는 이 책을 쓰면서 왜 꼭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전기냐를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현대사에서 몇 안 되는 정신적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라고 한다.
책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빈부격차, 행복지수 후퇴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가치 중에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게 사회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주된 원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도 못 살고 상대방도 못 삽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새신부로 발령이 났던 안동성당, 루뱅대학에서의 공부, 카톨릭시보에서의 사장신부, 마산교구장 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착좌 등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역사와 한국 현대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저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바로 이 같은 쇄신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이웃과 사회와 겨레를 위해 책임을 다했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이 반성을 토대로 우리 교회를 쇄신합ㄴ시다. 또한 참된 신앙으로 살고 있는지, 언제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바칠 수 있는지를 깊이 반성하며 그렇게 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하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든다. 삶의 방황을 겪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책은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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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종교 관련(?) 서적을 읽었다. 사실 종교 서적이라기 보다는, 그냥 담백한 평전, 이라고 감시 말해도 될 법한 책 ' 아, 김수환 추기경'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이자, 한국 근현대사에 분명한 발자취를 남기신 김수환 추기경 님에 대한 글이다.
이 책에 대한 후일담으로 들은 바로는, 여기 있는 사료 (특히 사진들) 들 중에는 오픈되어있지 않던 것도 많은데, 이런 것들을 다 모아서 사료조사하고 하는데에만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전기문학, 하면 사실 이미 있던 사실을 그대로 쓰는, fact 중심의 글쓰기이다 보니 얼핏 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룬다는게 curation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총 2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김수환 추기경 님의 삶의 큰 궤적을 시간 순으로 전개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6 25 시기, 민주화 항쟁 시기, 그리고 천주교 추기경이 되어 가던 시기 등 잘 아는 부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등도 생생히 살려놓았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물론 이 책 내용들을 포스팅에서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이번엔 좀 많은 사진을 들여서 몇몇 설명 및 느낀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무려 마이클 잭슨님과의 사진! 참고로, 선글라스를 벗고 싶었지만 눈이 너무 충혈되어 있는 상태여서 부득이하게 선글라스를 꼈다고 한다. 이 책은 전기 문학이 가질 수 있는 명료함을 상당한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끌고간 느낌이다. 저자 분이 왜 많은 시간을 들일 수 밖에 없었는지가 느껴진, 묵직한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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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군부체제에서 민주화 운동 등 격변의 한국사와 평생을 함께하신 추기경의 인생사가 담겨있다. 한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라, 굴곡진 현대사와 함께 하시면서 가난과 소외로 고통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약자들의 편에서 항상 낮은 곳을 바라보시면서 이들과 함께하신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셨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참모습이 책 속에 잘 담겨있다. 聖人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기보다는 聖人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을 통하여 ‘세상속의 교회’를 위하여 평생을 기도하시고, 행동하시는 삶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세상속의 교회’는 추기경님이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실 때의 사목목표였다.
참된 말이 없는 곳에는 빛이 없다. 빛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다. 옳은 말인 줄 알면서 말하지 않을 때, 인간은 의를 떠난다.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권력에 의한 탄압을 두려워하는가? 옥고를 두려워하는가?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양심을 두려워하고, 의를 두려워하고, 이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자. – 아, 김수환 추기경 1, P. 387
사제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입고 있는 수단의 검은색은 이미 세상에서는 죽고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산다는 뜻이었다.
신부들이 ‘증언자’로 나섰다. 무고한 광주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총칼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제들의 증언은 인간의 존엄과 정의를 지키려는 봉화였다. 신부는 봉수군, 성당은 봉화대가 되었다. – 아, 김수환 추기경 2, P. 36
우리의 현실은 밤과 같은 어두운 세상 ······ 진리도, 정의도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참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때 성당은 그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된다. – 아, 김수환 추기경 2, P. 132
1986년 12월 24일 상계동 철거민들을 위해 천막도 없는 맨땅 위에서 성탄 전야 미사를 마치고 일기장에 남기신 글이다. 도시 재개발로 보금자리를 빼앗겨 갈 곳이 없어진 철거민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시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한 건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 남을 향해 열린 마음, 남과 고통을 나눌 줄 아는 마음, 그런 사랑의 마음이 오늘의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아, 김수환 추기경 2, P. 269
1991년 주교 서품 25주년, 우리 나이로 70세, 즉 고희를 맞이한 해에 가치관 부재에 온갖 범죄가 범람하고 모두가 개인적·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부익부 빈익빈으로 빈부 간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어 가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걱정하셨던 글로, 약자를 사랑하시고, 어려운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시기 보다 대화를 통해 사회 갈등을 중재하셨던 시대의 큰 어른이자 정신적 지도자이셨던 추기경님을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 그리워하게 한다.
“있는 그래도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 아, 김수환 추기경 2, P. 519
2007년 5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퇴임하시고, 서울동성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미술전시회를 준비중이던 후배들의 부탁으로 ‘자화상’이란 그림을 그려놓고,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남기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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