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교과서 니체,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 이진우, 백승영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영국인만 그럴 뿐.』 우리의 예상을 뒤집어엎는 니체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니체 자신이 행복의 현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말의 뜻은 쉽게 이해된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삶은 더 높은 것을 추구한다.” - <본문 39쪽> 이 책은 ‘《플라톤아카데미》의 인생교과서’ 시리즈 7번째 책으로, ‘위대한 건강을 갖춘 인간들의 위대한 미래, 철학적 의사이자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니체가 심혈을 기울여 제시했던 그 청사진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니체’연구의 대표학자로 할 수 있는 두 분 저자의 ‘삶에 대한 궁극의 질문과 답’을 보여준다. 2010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Academia Platonica)’는 인문학 연구 역량을 심화시키고, ‘탁월함의 추구’라는 인문 정신의 사회적 확산을 위해 설립된 공익재단이며, <인생교과서> 시리즈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 19명에게 묻고 싶은 인생의 질문 즉,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 인생의 화두라 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각 계의 대한민국 대표 학자들이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 ‘이진우’는 정치·사회철학자. 연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 및 동 대학 8대 총장, 한국 니체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니체의 인생강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 『프라이버시의 철학』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이성은 죽었는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등이 있다. 저자 ‘백승영’은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책임연구원과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를 거쳐 지금은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Interpretation bei Nietzsche. Eine Analyse,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니체, 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기획하다』 『파테이 마토스』가 있고, 공저로는 Nietzsche. R?ttler an hundertjähriger Philosophietradition, 『마음과 철학』 『서양철학과 주제학』 『철학, 죽음을 말하다』 『처음 읽는 독일현대철학』 『처음 읽는 윤리학』 『우리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데카르트에서 들뢰즈까지』 등 다수가 있다. 제24회 열암학술상 및 제2회 출판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된다. 제1부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의 욕망과 행복, 고통과 절망 및 극복방법, 허무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제2부에서는 ‘나와 우리’라는 주제로 ‘나’, ‘이웃’ 그리고 ‘효과적인 의사전달’과 ‘고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그리고 ‘권력’을 ‘존경받을 만한 가치로 만들기’ 위한 노력 등에 대해 설명한다. 제3부에서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일의 정의’와 ‘욕망’, 그리고 ‘기억과 망각의 관계’, ‘다원주의 가치의 필요성’ 및 ‘예술적 거짓’과 ‘삶에 대한 적절한 거리 두기’와 ‘죄와 용서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지막 제4부에서는 ‘현실과 초월’에 대해서 ‘신’과 ‘도덕적 삶’의 정의 및 조건, 그리고 ‘정의’의 뜻, ‘자유로운 삶’과 ‘의지의 철학’에 대해서 설명한다. 철학, 역사, 교육 및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는, 그러나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니체’의 생각을 대표학자인 두 분의 저자를 통해서 편안하게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인 ‘위버멘쉬’, ‘영원회귀’, ‘권력(힘)에의 의지’, ‘예술가인 삶’ 등 ‘니체’의 핵심 사상들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더불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같은 주제에 대한 두 저자의 다른 해석을 살펴보는 색다른 재미’ 또한 흥미롭다. 인간의 건강한 삶을 사랑한, 우리의 위대한 스승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철학은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다. 여기에 철학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 그러니 먼저 너 자신이 되어라!(Werde, wer du bist!)”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
|
『인생교과서』는 인류의 위대한 현자 19명에게 묻고 싶은 인생의 질문에 대해 각 계의 대한민국 대표 학자들이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총 19권의 시리즈이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서 출발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타자에 대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책임과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며 지난 삼 년 동안 새로운 사업을 추진해왔다. 바로 인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현자 19명(부처, 공자, 예수, 무함마드,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장자, 이황, 간디, 데카르트, 니체, 칸트, 헤겔, 미켈란젤로, 베토벤, 톨스토이, 아인슈타인)을 오늘의 시점으로 소환하여 그들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동안『인생교과서』시리즈 중 무함마드, 간디를 읽었고 이번에 '니체'를 읽게 되었다. 한 권 두 권 누적되면서 이 시리즈의 책을 차근차근 다양하게 읽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행복이란 무엇인가','죽음이란 무엇인가' 등 인생의 화두라 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저마다 어떻게 생각했는지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다. 현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지금의 학자들이 추론하여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도 흥미롭지만, 같은 질문을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색다르다. 읽어나가면서 나만의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또한 이 시리즈는 19명의 현자에 더해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를 20번째 현자로 포함시킨다고 한다. 인류의 스승들이 던졌던 인생의 질문을 숙고한 다음, 마지막 스무 번째 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한다. 19인의 현자의 도움으로 인생을 통찰하다보면 어느새 현자 비슷하게 되어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 책의 저자는 이진우(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백승영(플라톤 아카데미 연구교수)이다. 인생교과서 시리즈의 경우 저자가 두 명으로 나뉘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균형잡힌 느낌이 든다. 니체에게 묻고 싶은 23개의 질문에 두 저자가 답하기도 하고 한 저자가 답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철학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철학을 하는가? 니체의 생각은 이렇다. '철학은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다. 여기에 철학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10쪽) 이렇게 책을 읽는 기회가 아니라면 일부러 철학 서적을 보게될 기회조차 희박하다. 철학이라는 것을 삶과 동떨어지게 생각했는데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라는 의미와 가치를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얻게 된다.
이 책은 총 4부로 나뉜다. 1부 '삶과 죽음', 2부 '나와 우리', 3부 '생각과 행동', 4부 '현실과 초월'로 구성된다. 근본적이면서도 살아가면서 꼭 던져야 할 질문들에 답변하고 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우리는 어떻게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일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거짓 없이 살 수 있는가?', '신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이 채워져 있다. 니체의 사상에 근거해서 풀어나가는 글을 읽어나가다보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간다. 때로는 동의하며, 때로는 비판하며 적극적으로 책을 읽게 된다.
요즘들어 '거짓'에 대해 생각에 잠긴 적이 많았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예술적 거짓을 추구하라'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거짓과 진리는 대립적이지 않다는 문장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니체는 "생을 긍정한다는 것은 바로 거짓을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진리와 거짓은 결코 대립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삶에는 거짓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진실될까 아니면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거짓을 말할까?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기에 "살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을 필요로 한다. 살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 자체는 그러나 인간 삶의 두렵고도 의심스러운 성격에 아직도 함께 속해 있는 것이다." (253~254쪽)
이 책은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읽기 힘든 것도 아니다. 적당한 강약 조절로 사색에 빠져드는 포인트가 설정되어 있다. 그런 지점에서는 머물러서 깊이 눌러 읽으며 사색에 잠겨야 뜻이 다가온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수만가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니체의 말을 토대로 니체의 철학을 짚어보며 푹 빠져서 읽게 된다. 어느새 니체의 정신을 가늠할 수 있고 나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생교과서 시리즈 3권을 보았는데, 그 안에서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며 교집합을 찾는 것이 나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이렇게 읽고 생각하는 분량이 늘어날수록 나만의 세계관이 정립되고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리라 생각된다. '인생교과서'라는 제목이 적절하게 잘 붙었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시리즈에도 자연스레 눈길을 주게 된다. 이 책과 함께 삶에 대해 깊이 통찰해보는 시간을 보낸다.
|
|
니체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수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 니체는 난공불락의 성 같다.
지금껏 니체와 친해지기 위하여 기울인 노력이 얼마였던가? 읽은 책만 해도 한 수레(?)는 될 것 같고, 들인 시간만 해도 몇 년은 될 것 같다.
그렇게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니체의 책은 가급적 읽으려 노력하고, 니체에 관한 책은 더더욱 빠트리지 않고 챙겨 읽으려고 한다. 니체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란
영원회귀의 문제, 그것이 니체를 읽을 때마다 나에게 숙제였다, 그 개념을 어떻게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그래서 니체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영원회귀에 관련한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부분을 읽고 이해가 잘 된다 싶으면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책으로 간주하곤 했었다.
지난 번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강의>를 읽고, 영원회귀에 대해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다. 이진우 교수가 <니체의 인생강의>에서 영원회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니체는 말한다.
“네가 사람들과 아주 다른 삶을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별다른 차이가 없다. 네가 지금 아주 고귀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삶조차도 과거에 무수히 반복되었던 삶 중 하나에 불과하다.”(니체의 인생강의, 110쪽)
그러니, 그렇게 반복되는 삶이기에 니체는 삶을 긍정하라고 한다.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야,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온 몸으로 끌어안아야 될 긍정적인 것이야”(112쪽)
그래서 니체의 생각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사상중의 사상, 영원히 반복적으로 회귀한다는 사상을 온 몸으로 인식하고 체현한다면 그 사상은 널 변화시킬 것이다. 너의 삶이 변화할 것이다.”(113쪽)
그렇다면, 이 책은 영원회귀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너는 네 삶과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영원히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라고 물어보는 목소리,
이 목소리를 가정법의 형태로 던지면서 니체는 무의미한 삶의 영원회귀와 의미 있는 삶의 영원회귀라는 두 선택지를 우리 앞에 내놓는다.
만일 삶의 매 순간이 의미 있고 필연적이어서 그것의 영원회귀를 바랄 정도의 것이라면, 그 목소리는 최고의 축복이다.
반면 영원히 돌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단 한번만 반복된다 하더라도 저주처럼 들리는 삶도 잇을 것이다.
이 둘 중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고, 그것의 영원회귀를 바랄 정도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니체의 생각은 이런 것이다.> (35쪽)
물론 이진우 교수의 설명도 의미있지만,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영원회귀의 개념이 더 쉽게 이해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이 세계를 긍정하라는 말
또 하나 이 책을 통해 더 쉽게 이해하게 된 항목이 있으니, ‘사후 세계가 현실 삶을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저편의 세계, 즉 죽음 이후의 세계를 완전한 세계로 파악한다면, 이 세계는 한낱 허구로 여겨질 것이 틀림이 없다. 이처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전제하는 종교적 세계관은 모든 것을 전도시킨다. 이 세계를 가짜의 세계, 그리고 저편의 세계를 진정한 세계로, 니체는 이렇게 전도된 세계를 다시 전복시킴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자 한다.>(79쪽)
따라서, 우선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81쪽)
여기서 깨달은 것은 확실히 같은 내용도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니 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 <인생교과서, 니체>를 통해 니체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으니, 기쁘다.
|
|
21세기북스의 <인생교과서>는 위대한 현자 19人의 삶과 철학을 대한민국 각 계의 대표 학자들이 풀어낸 총 19권의 시리즈이다. 재단법인 플라톤 아케데미는 위대한 현자들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등 인생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물어보고, 그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인문학계에서 해당 인물을 연구해온 대표 학자들을 초청해서 그 현자들의 생각을 대신 추론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삶의 근본적인 고민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들을 통해 인류의 현자 19명이 평생 목숨을 걸고 사유했던 인생의 질문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이 시리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멘토 19명의 치열한 사유와 통찰은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자아내고, 시대를 넘어 현답의 길로 안내하고자 한다.
삶에 대한 궁극의 질문과 답 <인생교과서> 07번째 이야기는 위대한 건강을 갖춘 인간들의 위대한 미래, 철학적 의사이자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니체에게 묻는 <<인생교과서 니체>>이다. 이 책은 한국 니체학회 회장 등을 엮임한 이진우,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 연구교수 백승영 학자를 통해 삶에 대한 23가지의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들을 수 있다. 같은 질문에 대한 두 학자의 다른 해석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라 할 수 있겠다.
<<인생교과서 니체>>의 23가지 질문과 답은 총 4부로 나뉘어 소개하고 있는데 1부 삶과 죽음에서는 / 어떤 삶을 살 것인가? / 행복이란 무엇인가? /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 우리는 어떻게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가? / 죽음이란 무엇인가? / 어떻게 살아야 건강하게 사는가? / 에 대해 살펴볼 수 있으며, 2부 나와 우리에서는 / 나는 누구인가? / 이웃이란 누구인가? / 효과적인 의사전달은 어떻게 가능한가? / 네트워킹 시대에 왜 고독이 필요한가? / 우리는 왜 권력을 추구하는가? / 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3부 생각과 행동에서는 / 일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 욕망이란 무엇인가? / 기억과 망각의 건강한 관계는 무엇인가? / 다원주의적 가치가 필요한 이유는 ? / 우리는 거짓 없이 살 수 있는가? / 어떻게 해야 웃으면서 살 수 있는가? / 죄와 용서의 관계는 무엇인가? / 에 대해 다루며, 4부 현실과 초월에서는 / 신이란 무엇인가? / 도덕적 삶이란 무엇인가? / 정의란 무엇인가? / 어떻게 해야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 /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이성인가 의지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이 책은 이렇게 23개의 질문을 통해 니체의 정신을 살펴보고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인생의 참된 좌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하나의 과정이고 몰락이다. 몰락하지 않는 삶은 상승할 수도 없다. 불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현대인들의 병이라 할 수 있는 행복강박증은 삶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고 단지 밝은 면만을 추구한다. (본문 40p)
니체는 인생에는 진정한 삶을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내일에서 죽음 이후의 내세로 연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진실하게 사는 '삶을 위한 삶'과 '본능에 대적하는 삶 '삶을 거스르는 삶'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니체는 본능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없기에 본능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모습이 결정되어진다고 말한다. 본능을 인정하고 가꾸지 않으면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은 욕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그러나 아무런 목적 없이 투쟁한다면, 우리 인생은 천박한 쾌락주의나 금욕주의로 전락할 것이다. 데카당스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욕망과의 투쟁은 바로 삶의 목적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상'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우리가 평생 동안 매달려온 그 이상이 설령 한갓 허상에 불과할지라도 의미 있는 허상일 것임에 틀림없다. (본문 26p)
니체에 의하면 우리 삶의 목적은 '자기극복'이며, 권력에의 의지는 삶의 전제조건이다. 니체가 우리에게 진정 바라는 것은 노동을 놀이로 삼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삶에는 이성뿐만 아니라 비이성적 충동도 필요하고, 진리뿐만 아니라 허구적 환상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비극적 인식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을 웃으면서 긍정할 수 있을테니.
더 나은 삶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삶을 긍정하자. 내일이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웃자.
오늘 잘 웃는 자가 최후에도 웃는다. (본문 265p)
다양한 질문과 답을 통해 니체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삶, 나, 생각과 행동 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삶에 답은 없다. 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존재하기에 그들에게 답을 구함으로써 내 인생의 좌표를 세워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인생교과서>시리즈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힘이 되어줄 것이다.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삶을 꿈꾸며 당당히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을 당부한 위대한 철학자, 니체에게 묻는 삶에 대한 질문과 답 23가지 <<인생교과서 니체>>를 통해 자신만의 이상을 만들어보길 바란다.
(이미지출처: '인생교과서 니체' 표지에서 발췌) |
|
니체 - 삶을 사랑한 그의 이야기 간혹~ 사람들 중 이 책의 끝 페이지가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다. 고론데~ 이 책이 딱 그랬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할까? 니체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러다가 뒷 페이지가 얼마 안남은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 조마조마했다. 니체의 이야기를 더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책을 나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고 싶었다. 내가 요약한 문장은, “위버멘쉬(Übermensch)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 삶은 데카당스(Décadence)에 가까워진다.”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니체의 고민은 삶의 심연으로 들어가 이 고민이 왜 생겼는지 자아(self)에게 질문하는 듯했다. (니체는 ‘I'와 ’SELF'을 구분한다.) 보통 서평을 쓰면 내가 관심 있었던 구절,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바를 썼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러지 못하겠다. 한 페이지마다 줄을 치지 않았던 문장이 없었고,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말들이었다. 그만큼 내 삶에 대한 고민을 철저하게 하지 못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면 니체의 말을 쳐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지 못했다. “니체에 의하면 행복은 승화된 불행이며, 불행이란 아직 수용되지 않고 작업되지 않은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승화’다.” ( P 55 ) 행복은 이제 숙제처럼 되었다. 행복에 대한 책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린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을 할까? 각종 지표에서도 아이들, 어른 할 것 없이 우리나라는 행복의 순위에서 꼴찌다. 행복에 순위를 메긴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여튼 우린 다른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 행복감이 낮다. 그럼, 행복의 반대말이 불행일까? 불행하면 아플까? 고통이 있겠지.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 P 58 )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야 진정으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을까? 어떤 일에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혹자는 이런 말을 한다. ‘그게 힘들어?’, ‘야! 나는 더 힘든 일도 있었어!’ 그래~ 각자의 기준으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상대방이 힘든 모습을 보고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기준으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야 그것이 진정으로 아픈 고통이 된다. 고통이 무의미해진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닌데 말이다. 니체는 이런 고통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고통이 삶의 필연적 계기인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 p 61 ) 우린 항상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기에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다. 만족할 수 없기에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만족한다면 힘에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의미를 거두면 행복할까? 그런데 현대인은 군중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고독 속에서 마주하는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 176 ) "니체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일컫는 세 가지, 즉, 유행, 여론, 그리고 순간이 지배하는 곳이다. (중략) 모여 있는 군중은 변덕스럽다. 혼자 있을 때는 스스로 생각하다가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어놓으면 자기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 p 178 ) 결국, 군중 속에 있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의 대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개념의 형성은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Gleichmachen des Ungleiche"과정을 거친다. 즉 대상의 개별성과 구체성과 독특성과 일회성은 배제되고, 일반성과 공통성과 평균성이 주목되며, 게다가 그 주목마져 특정 관심과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 p 161 ) 니체는 대화는 오해라고 했다. 각자 자신만의 경험과 이해로 상대방의 말을 걸려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오해가 시작이라고 했다. 이런 한계를 가짐을 인정하는 것. 니체 만쉐~~ 잘 정리하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런데 정리하지 못하는 책이 되어버렸다. ‘정돈’의 개념을 니체에게 던진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면, 니체는 ‘무질서’를 말하지 않을까? 질서없음은 현실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는 반증이며, 내일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라 말할 것 같다. 니체가 말하는 ‘이성적 죽음’을 대비할 때 비로소 ‘정돈’이라는 개념이 나온다고 니체가 말할 것 같다. |
|
니체라는 철학자의 아우라는 참으로 거대한 사람이다. 많은 철학이 그의 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바라보게 된다.
독일 철학에서 그를 빼놓고 설명하기란 많은 영향을 받은 철학자가 많고 공부한 사람도 그를 이야기가 말하기가 힘들다.
이진우와 백승영이란 저자가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가면서 공부를 했고 그리고 많은 저서를 통해 그의 생각들을 이야기 했다. 니체는 철학자기도 전에 교육학자기도 하고 먼저 나 자신을 알아보기 위한 철학적 의사가 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먼저 너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찾아서 건강한 정신을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를 인생 교과서를 통해 심혈을 구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다른 인생 교과서의 질문의 구성은 큰 흐름과 일치한다. 삶과 죽음 그리고 나와 우리 생각과 행동 그리고 현실과 초월을 통해 이야기 한다.
이진우와 백승영이 번갈아가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 한다, 특히 나라는 자신에 많은 생각을 하듯이 나는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핵심이 많이 내포되어있면서
신앙인을 넘어서 신적인 존재에 대해 많은 철학적 사고를 했던 니체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현실과 초월적 단계에서 많이 드러나고 있다.
신이란 무엇인지를 통해 도덕적 신의 죽음과 자기초월적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인간 내제에 있는 신성에 대해 주목을 하는 것이 그의 많은 이야기를 대변하는 것과 같다고 볼수 있다.
모든 신은 죽었다고 니체는 선언을 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할수 있으나 철학적 물음을 현재에서도 자유롭게 오갈수 있다, 신앙인들의 무게 중심이 신에게서 아닌 인간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성찰이면서 인간안에 내재하는 신성을 주목하는 권유와 함께 신 개념이란 것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이 질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본 기회이기도 했다.
진정한 신의 개념을 잡고자 했던 니체 그리하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단편적인 문장으로 많은 이야기가 오가지만 그는 페르시아의 종교 창시자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 선악의 이원론을 기발한 착상으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우리가 니체는 잘 몰라도 대표적인 마지막 도서와 같은 책을 통해서 니체의 인간의 삶을 지배했던 신이 더이상 삶에 기여 못한다고 하기 때문에 신의 죽음은 억압과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신때문에 인간은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불만이 많았던 그다.
오직 신은 신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에 그 신성을 인간에게서 찾아 낼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을 두 학자의 입으로 통해 어느정도 지금의 시각으로 니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질문을 통해 많은 생각을 오가게 도와준다.
철학자들중에 어찌본다면 어려우면서도 난해할수 있는 그 인물을 통해 좀 더 통찰적인생각을 유도하는 책이다.
|
|
[서평] 인생교과서 니체 [이진우, 백승영 저 / 21세기북스] <인생교과서>는 2010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위대한 현자 19인의 삶과 철학을 대한민국 각계의 대표 학자들이 풀어낸 책이다. <인생교과서> 시리즈는 부처, 공자, 무함마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장자, 간디, 데카르트, 니체, 칸드, 베토벤, 톨스토이, 아인슈타인 등 총 1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이야기 할 책인 <인생교과서> 7권 니체 편의 저자 이진우는 정치, 사회철학자로 연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동 대학 총장, 한국 니체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양한 글을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 인간 실존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그 극단까지 철저하게 사유한 니체의 실험 정신을 본받아 인간의 자유, 생명,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인간다움의 새로운 의미를 찾고 있다. 또 다른 저자 백승영은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책임연구원과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를 거쳐 지금은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 연구교수로 있다. 21세기북스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는 <인생교과서> 시리즈 총 19권 중 이번에는 7권 니체 편이 출간되었다. 좋은 명언으로 자주 접하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를 만날 수 있는 책이라 책을 펼치기 전부터 큰 기대에 부풀어 책을 펼쳤다. 이 책 니체 편은 1부 삶과 죽음, 2부 나와 우리, 3부 생각과 행동, 4부 현실과 초월로 크게 4부로 분류하여 총 23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은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다. 여기에 철학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것은 니체의 철학관이다. 그리고 그런 니체가 말한다. 먼저 너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세계가 네 작품이 된다. 너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세계도 지배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세계가 너의 화원이 된다. 너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녀야 세계도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먼저 너 자신이 되어라! 건강한 너 자신이, 위대한 건강을 지닌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한다. 니체가 남긴 말 중에 아주 유명한 문구가 있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구인데 니체하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라 굉장히 흥미롭게 보았다. 4부 현실과 초월에서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 '신이란 무엇인가?'에서 "신은 죽었다"에 대해 다루는데 니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가장 궁금했던 점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일까?하는 질문인데 이 질문에 니체는 답한다. "'신' 개념은 지금까지 인간 삶에 대한 최대의 반박이었다. 우리는 신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책임을 부정한다. 이렇게 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다." 라고. 니체는 신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삶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니체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니체의 작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살펴보면서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니체에 의하면 건강을 필요로 하는 신이 있고 병을 필요로 하는 신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은 삶을 향상시키기보다는 구원의 이름으로 수많은 병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병을 필요로 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이 진단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신을 창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다시 한 번 신의 가치를 전도시킨다. 니체는 신 역시 세계에 대한 해석의 일종이라며 어떤 종교가, 어떤 신이 삶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하는가와 같이 해석의 차이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니체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신론'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오히려 이 무신론은 그 마지막 발전과정의 하나일 따름이며, 내적 논리적 결론의 하나일 따름이다. 이것은 2천 년에 걸친 진리를 향한 훈련의 장중한 파국이며, 이것은 마침내 신에 대한 신앙에서의 허위를 스스로 금하게 한 것이다. (...) 아주 엄격하게 물어본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교적인 신을 이겨낸 것은 무엇인가? (P.288) 니체가 남긴 말 중에 가장 알고 싶었던 부분이라 이 부분만 다루었지만 이외에도 행복, 고통과 절망, 허무, 죽음, 삶, 이웃, 권력, 기억과 망각, 인정과 관용, 거짓, 죄와 용서, 욕망과 충동, 정의 등 인생을 살다 보면 품게되는 삶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묻고 니체의 답을 듣는다. 니체의 사상은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도록 하는 가르침들이었다. 니체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당당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니체의 사상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많았는데 평소 명언으로만 친근했던 니체의 사상을 조금은 깊이 접하며 인생의 여러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
|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에서 펴내고 있는 ‘인생 교과서’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에게 묻고 싶은 질문과 오랜시간동안 연구해온 대한민국 학자가 풀어내는 답을 만날 수 있다. 하나의 질문에도 때로는 각기 다른 시각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현자 19명에게 건네고 싶은 질문이 겹치는 경우도 많아서 나름 비교를 하면서 읽어볼 수 있기도 하다.
니체 편의 서문은 “인생교과서의 질문을 아리아드네의 실 삼아 탐색해본다.”라고 마무리 하고 있었는데, 인생 교과서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나온 ‘아리아드네의 실’은 ‘문제를 푸는 실마리, 또는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열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삶의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인생교과서는 인생의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이기도
하다.
니체 편에서는 이진우, 백승영 교수와 함께 니체에게 묻고 싶은 23개의 질문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니체 편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자꾸만 헨젤과 그레텔의 빵가루가 떠올랐다. 일단은 빵가루를 여기저기
뿌려놓고 있는 기분이랄까? 생각해보면 내가 뿌린 빵가루는 어쩌면 동물이나 새가 먹어버릴 수도 있고, 말라 비틀어져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길을 만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흔적 같기도 하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이 아직은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인 거 같다. 특히 죽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니체가 이야기하는 이성적 죽음관은 상당히 파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이성적 죽음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산 자들의 삶에 '자극'의 되고, 삶에 대한 '굳은
서약'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효용을 갖은 죽음일 수 있다. (90P)” 과연 이러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가
말하는 ‘위버멘쉬(ubermensch)’의 해석을
초인(超人)으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다 난해했던 것은 아니다. ‘네트워킹 시대에 왜
고독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읽을 때는 스마트폰에 있는 ‘방해금지모드’가 갖고 있는 딜레마가 느껴지기도 했다. ‘연결의 광기’라고 표현할 만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시대에서는, 스마트폰을
끄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 조차 어렵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자아와 창조를 원한다면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고 권하는 것이다. (179P)”라는
말이 기억에 더 남는다. 어쩌면 자신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기는커녕 스마트폰의 전원조차 끌 수 없는 사람들의
세상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의미 있게 읽게 된 부분이 바로 욕망과 충동에 대한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한번 ‘삶을 거스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삶을 위한 삶’과 ‘삶을
거스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도 니체는 언제나 그 자체를 직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삶, 죽음,
행복, 고독, 그리고 욕망에까지도 말이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룰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떤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이 방법으로 효과를 거두는가 못 거두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오히려 이 과정 전체에서 우리의 지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격렬한 충동의 경쟁자인 다른 충동의 맹목적인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225P)
|
|
<인생교과서 니체>는 철학자 니체라는 인물을 오랜 시간 연구해온 저자인 이진우, 백승영 저자가 니체에게 묻고 싶은 다양한 질문들에 답을 한 책이다. 니체는 '철학은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다. 여기에 철학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철학은 곧 삶에 봉사하는 삶의 기술이자 삶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인생교과서 니체>는 위대한 건강을 갖춘 인간들의 위대한 미래, 철학적 의사이자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니체가 심혈을 기울여 제시했던 청사진의 구체적인 모습을 탐색해볼 수 있는 책이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미래의 조산아인 우리.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목적을 위해 하나의 새로운 수단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건강을, 이전의 어떤 건강보다도 더 강하고 더 능란하고 더 질기고 더 대담하며 더 유쾌한 건강을 필요로 한다.(...) 즉 위대한 건강을 - 이는 사람들이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획득하고 또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인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삶을 위한 삶'과 '삶을 거스르는 삶'이다. '삶을 위한 삶'은 진정한 삶을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내일에서 죽음 이후의 내세로 연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거스르는 삶'은 '본능에 대적하는 삶'이다. 우리는 본능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없다. 본능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모습이 결정된다. 본능을 인정하고 가꾸지 않으면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다. 진정한 삶은 충동, 욕망, 쾌락, 본능의 부정과 포기가 아니다. 진정한 삶을 오히려 이제까지 부정되고 배척되었던 것, 즉 우리의 몸과 쾌락, 그리고 본능과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유혹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만의 이상을 만들어갈 때 가능한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결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본능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획득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니체는 "관점적 평가와 가상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한, 삶이라는 것은 전혀 존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은 욕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그러나 아무런 목적 없이 투쟁한다면, 우리 인생은 천박한 쾌락주의나 금욕주의로 전락할 것이다. 데카당스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욕망과의 투쟁은 바로 삶의 목적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상’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다음과 같다. 위험하게 살지어다!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가에 세우라! 그대들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내보내라! 그대와 동류의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살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지배와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와 정복자가 되라!" 니체는 <즐거운 학교>의 한 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삶과 죽음은 결코 대립적이지 않다. 삶도 죽음의 한 형식일 수 있다면, 죽음도 독특한 방식으로 삶에 기여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모든 철학적 성창은 실제로 니체의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체는 죽음을 삶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니체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제시하는 종교적 거짓말은 삶을 파괴하는 허위의식이라고 단언한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는 결코 세계의 바깥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 세계', 즉 현세를 살아가는 구체적 존재다. 우리가 사고 있는 이 세계의 앞에도 그리고 뒤에도 결코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삶에 대립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일 뿐이며, 그것도 매우 희귀한 형태다." 니체는 불멸에 대한 믿음이 세상의 가치를 빼앗아버렸다는 인식에서 신으로 대변되는 영원한 생명을 부정한다.니체에게 "무신론은 본능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신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긍정하기 때문에, 니체가 신의 죽음을 데 그토록 철저하게 선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는 결코 제때에 죽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내일에서 죽음 이후의 내세로 연기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진실하게 살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니체는 이 물음 자체를 해체시켜버린다.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알 수도 없다. 이제까지 나에게 덧씌워진 가상의 허울을 던져버리고 찾고자 하는 진정한 나는 또 다른 허상에 불과하다고 폭로한다. 니체는 '영혼', '정신' 또는 '나'로 불리는 인간의 본질을 부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위 말하는 진정한 자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를 끊임없이 해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들어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자신의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아모르파티를 '전체 세계의 필연성'에 대한 사랑이자 그 필연적 세계를 담보해내고 관계적 질서를 '같이 만들어가는' 우리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제시한다. 아모르파티는 독자적 개체로서의 자신에게만 오로지 집중하고 자신의 개별적 삶만을 독립적으로 구성해가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아모르파티의 진정한 의미는 나와 세계 전체의 운명을 같이 짊어지는 사랑이라는 데 놓여 있다. 그것이 바로 나와 세계에 대한 운명적 사랑, 나를 포함한 이 세계 전체가 필연이고 거대한 관계망이라는 점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
권력은 삶의 전제조건이며 동시에 문화의 토대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명령하고 압도하려면, 간단히 말해 다른 사람에 대해 권력을 가지려면 그 사람이 인정하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진정한 권력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천재의 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천재를 존경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작품에 쏟아부은 힘 떄문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사용한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 권력은 사악한 것인가?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는 삶의 전제조건이며 권력관계는 서로를 극복하고자 하는 어떤 것의 징후에 불과하며 진정한 권력은 항상 내면의 힘을 요구한다고 답한다. "왜 우리는 권력을 추구하는가? 니체는 우리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권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자기극복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해석해야 한다.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 이런 질문들이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권력을 부정할 수 없다. 권력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모든 도덕과 윤리는 한결같이 욕망의 통제와 절제를 요구한다. 왜 우리는 삶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욕망과 충동에 대해 이처럼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니체에 의하면 욕망과 충동의 인정이 그에 대한 부정과 억압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우리가 욕망을 이성적으로 통제한다고 말하지만 이 경우에도 실은 이성이 다른 욕망, 즉 욕망을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욕망을 절제하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한가함과 무위는 정신적 여유를 전제한다. 그것은 성찰과 명상의 시간을 의미한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 과연 그것이 성찰의 힘, 명상의 힘, 생각의 힘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반성하고 판단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의 중요성은 자주 간과된다. 현대세계에 그 현상은 가속화된다. 분주함과 바쁨이 이제는 노동의 덕목을 넘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니체가 진정 바라는 것은 우리가 노동을 놀이고 삼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개인과 사회의 결단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니체가 선언하는 '신의 죽음'은 신앙인들의 무게중심을 신에게서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성찰이며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성을 주목하자는 권유이자 동시에 인간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게 만드는 신 개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종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자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성의 회복을 위한 철학적 시도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결코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적절한 '거리 두기'가 진정한 웃음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가 학생일 때 겪은 일화는 어떻게 생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암시한다. 니체의 유머는 물론 엄숙하고 고루한 교사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 니체는 벌을 받게 되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국 니체의 철학적 태도로 발전되었다. 진지한 삶을 살아내려면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신의 죽음 이래 우리의 삶에는 결코 주어진 목적과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이 없기에 삶의 목적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우리가 설정한 목적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에서 목적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희극이다. 이 희비극을 견뎌내려면 우리는 웃음을 필요로 한다. "지루한 일을 유머를 통해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모든 발언들에 농담의 옷을 입히는 쪽지를 썼다." "우리의 삶에는 이성뿐만 아니라 비이성적 충동도 필요하고, 진리뿐만 아니라 허구적 환상도 필요하다.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을 웃으면서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삶을 긍정하자. 내일이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웃자." 병든 개인과 건강한 개인은 무엇으로 측정되는가? 니체에 의하면 그 기준은 노예성과 주인성이다. 주인성은 자기지배의 힘, 자신에 대한 책임의식 및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자유에 대한 열망과 실천,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긍지, 자신의 삶의 계율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주권성, 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의지, 진정한 적이 곧 벗이라는 점에 대한 통찰, 나와 타인 그리고 세계 전체가 거대한 관계체라는 점에 대한 인식, 그 관계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정 및 긍정 등을 주요 요소로 한다. 반명 노예성은 자기지배력의 부재, 자유 대신 복종, 자기챔임에의 의지나 의식 대신 자신의 외부에 대한 책임회피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시선, 주권성 대신 타율성, 주인적 존재에 대한 미움과 원한의식과 보복심리, 삶의 향상에의 의지 대신 평균성에 안주하기, 무리를 짓고 무리 속에서 무리의 삶의 원칙을 추종하면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무리본능,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 대신 피해의식과 열등감 등을 주요 요소로 한다. 주인성의 노예성에 대한 지속적인 승리, 그 승리는 곧 건강성의 상징이다. |
|
나란 사람은 ‘왜’가 필요한 사람이다. 삶의 의미를 캐묻고 나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답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좋아하는 것은 질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아무 말 없이 수긍만 하는 아이보다는 ‘왜’냐고 묻는 아이에게 조금 더 마음이 쓰인다. 그 ‘왜’를 던지기 위해 갸우뚱 했을 아이의 머릿속을 상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그런 갸우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책에는 23가지의 질문이 나온다. 인생의 질문이다. 책 속의 앞머리 있는 발간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실 인문학은 답을 찾는 학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인문학의 본질적 의무입니다(p9)”라고. 그리고 우리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에게 인생의 질문을 던지는 독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p9)” 이 책은 마치 뷔페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니체의 사상을 인생의 질문 23가지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해 둔 책이다. 하지만 이 뷔페에 대한 비유만을 쓴다면 어떤 이는 오해할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에도 완벽하지 못하고 겉만 핥은 책이겠구나, 라고.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니체에 관해 오랫동안 파고들었고 읽어왔던 독자라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너무 간단히 훑고 지나간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니체에 관해 막연하게 밖에 알지 못했던 사람, 혹은 인생의 여러 질문들을 품고 있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런 종류의 책이 더 친근하지 않을까 싶다. 뷔페에 가서 꼭 모든 음식을 하나하나 많이 먹어야 손해 보지 않는 건 아닐 게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음식, 가장 좋아하는 음식만을 공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이 좋다. 그 질문에 대한 니체의 생각도 물론 좋았지만 질문 자체가 좋다. 답이 안 나와도 괜찮다. 질문을 할 수 있고 그 질문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23가지 질문 중에서 내가 그동안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들, 혹은 앞으로 삶의 질문으로 품고 싶은 질문들을 만났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나란 누구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거짓 없이 살 수 있는가 죄와 용서의 관계는 무엇인가 도덕적 삶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이성인가, 의지인가?” 이 질문들은 서로 각각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알기 위해 우선은 나란 누구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나란 사람을 들여다보면 내 안에는 선하고 바른 나뿐만 아니라 당연히 악하고 옳지 못한 내가 있다. 내 안에 있는 욕망과 본능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죄와 타인의 그것들로 인해 받은 상처에 대한 나의 용서가 만난다. 그리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에게 옳음과 도덕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은 곧 나만의 정의(正義)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들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수렴이 된다. 이러한 질문과 그 답을 찾는 과정이 곧 나이며,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된다. “인생은 욕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다.(p26)” 이 책 속에서 던진 여러 질문 중에 가장 내 마음을 이끈 것은 ‘도덕적 삶’에 대한 것이다. 도덕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도덕적인 삶인지, 내가 올바르다 믿는 것은 정말 올바른 것이며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다. 선함, 올바름, 양심에 따른 삶. 이러한 것들은 욕망과 이어져 있다. 나의 도덕을 갖기 위해서는 나의 욕망을 알아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도덕과 윤리는 한결같이 욕망의 통제와 절제를 요구한다.(p218)” 한 동안 내 가슴을 지배했던 질문은 ‘나란 누구인가’였다. 나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나란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기 때문에 나의 어두움조차도 사랑하고 싶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나란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서평을 쓰고 사람을 만났다. 그런 것들 속에 던져진 내가 보여주는 행동들을 보며 나의 민낯을 만났다. 고개 돌리고 싶어지는 민낯들에 대해 여전히 당당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나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나만의 도덕. 나만의 양심, 옳음이다. 거짓 착함으로 위장하던 시절이 있다. 착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 옳음이었던 시절이다. 하지만 가슴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거짓임을. 이제는 그 거짓에서 나오고 싶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충동과 욕망과 쾌락과 본능의 인정’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진정한 삶은 충동, 욕망, 쾌락, 본능의 부정과 포기가 아니다. 진정한 삶은 오히려 이제까지 부정되고 배척되었던 것, 즉 우리의 몸과 쾌락, 그리고 본능과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유혹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만의 이상을 만들어갈 때 가능한 것이다.(p25)”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건만 어느 날 갑자기 충격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이 책 속에 있던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을 옳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옳다고 규정된 것에 대해 ‘한번도 깊이 성찰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p112)”이라는 니체의 말이 그렇다. 이 말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너무나 정확하게 핵심을 찔렀던 탓이다. 그렇다. 나는 나의 도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마치 나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진정한 답이라는 듯 부끄러움 없이 주장하고 있었다.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보다 가치가 있는가. 이타적인 행위가 이기적인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가. 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더 가치가 있는가.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왜 그러한 것들이 더 가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해왔는가, 라고 니체는 묻게 한다. 이러한 니체의 의문 자체가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내 삶의 기준이었던 옳음에 대한 이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 기준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와 시대가 만들어준 것이었음에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니체가 이타주의 이웃사랑 등과 같이 우리가 가치 있다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것은 도덕의 기원은 도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고대사회에는 도덕적 가치를 창조하는 두 계급이 있었다고 한다. 전사 계급과 성직자 계급이다. 성직자 계급은 전쟁에 대해서는 스스로 무능력하기 때문에 기존 전사 계급이 중시하던 가치, 즉 좋은 것(善)이었던 ‘고귀한 것, 강력한 것, 지배적인 것’에 대해 성직자 계급은 그들의 가치를 증오하고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전시켰다. 여기서 성직자 계급이 강조한 자신들의 가치는, 비참한 자, 가난한 자, 무력한 자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사 계급은 능동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창조했지만 성직자 계급은 이들에 대한 증오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만들었다고 말하며 이를 ‘노예도덕’이라고 말한다. 반면 전사 계급은 능동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주인도덕’이라 부른다. “이타적인 것이 선한 것으로 선전되는 것은 이타성 자체가 선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약자가 살기 위해, 즉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강자의 가치를 비판하면서 이타적인 이웃사랑을 일반적인 가치로 위장하기 때문이다.(p309)” 도덕, 선함, 옳음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흔들어 놓은 문장이 바로 위의 문장이다. 이타적인 것이 선한 것이라는 생각에 한 번도 의심을 한 적이 없었다. 이타성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약자가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치라는 말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사람과 사회가 이기적이 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도덕을 찾는다. (중략) 사람들은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면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마치 도덕이 삶에 적대적인 것처럼. (중략)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그것이 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지를 파고드는 니체는 ‘도덕의 가치’를 문제삼는다.(p303)”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도덕이 필요하다. 만약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면 도덕 따윈 없어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우리’에게 도덕이 필요하다. 니체도 “도덕은 우리 스스로가 생존조건으로 삼은 해석(p313)”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도덕이 우리의 생존조건이고, 삶의 필요를 반영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체계의 총체라면, 도덕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초시간적 구속력을 갖는 보편적인 것일 수도, 무조건적인 의무일 수도 없다.(p313)” 도덕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쩌면 신(神)의 영역과도 같았던 게 아닐까 싶다. 이타성, 베풂, 이웃사랑 등의 선이라는 가치에 대해 가치를 논할 필요조차 없으며 그저 믿고 따르기만 해야 하는 신의 영역. 하나님을 믿었던 시절,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존재한다는 ‘진리’를 기본전제로 ‘어떻게 잘 믿는가’만이 중요했다. 도덕이라는 가치도 나에게 그런 대상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이제야 알게 된다. “도덕이 우리 삶의 필요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도덕은 삶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다. 그러니 도덕이 우리를 자유롭지 않게 한다거나, 삶을 피폐하게 만들거나 움츠리게 하거나 병들게 한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p313)” 도덕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한다면 그것은 옳은 도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또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만다. 도덕이란 것, 옳다는 것, 선하다는 것이, 절대적일 수 없고 구속력도 없으며 무조건적인 의무도 아니라면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이기심 그대로 살면 된다는 말인가. 강자는 강자의 힘을 써서 약자를 뭉개고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면 된다는 말인가. 도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니체가 강조하는 옳은 도덕은, ‘주인도덕’이다. 즉 건강한 주인적 존재가 생존조건으로 삼는 도덕, 주인적 삶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도덕이 옳다고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전사 계급처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낸 도덕은 옳은 도덕이고, 성직자 계급의 도덕처럼 다른 집단의 가치를 증오하고 배척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덕은 옳지 못하다는 의미다. 결론은 건강한 사람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니체의 이런 도덕론은 나에게 너무 어렵다. 어려워서 니체의 말 그대로를 내가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동안 마음 안에서 뿌옇게 의문으로 가지고 있던 것들이 조금은 선명해진 기분도 든다. 자기연민이 그것이다. 일본 NHK BS에서 방송한 일본 드라마 (<칫솔 여자친구/はぶらし 女友だち>)를 보며 니체의 도덕을 떠올렸다. 드라마에는 두 고교시절 친구가 나온다. 한 명은 방송작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독신 여자이고 또 한 명은 남편의 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여자다.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방송작가 친구 집에 며칠 만 있게 해 달라고 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드라마를 보며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그녀가 방송작가 친구에게 너무나 당당하게 동정을 구했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도울 의무가 있다, 너는 나보다 여유롭고 너는 나보다 모든 일이 잘 풀렸으니까, 나는 이렇게 아이를 데리고 갈 데도 없이 고생하고 있으니 너는 나를 도울 필요가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방송작가 친구는, 고등학교 이후 연락도 없던 사람이 느닷없이 와서 자신의 침대를 차지하고 자신의 삶의 시계를 무너뜨리는 친구가 의문이지만 그녀를 동정하며 취직할 데를 찾을 때까지만 이라는 친구의 말을 믿어주고 기다려준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니체의 도덕이 떠올랐다. 강자의 입장이기도 한 방송작가 친구는, 약자인 아이를 데리고 집 나온 친구를 도와주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녀는 도움 받아 마땅하기에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해도 되는가. 그동안 나는 당연하게 생각했다. 약자는 보호 받아 마땅하고 여유로운 자는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그것이 옳다고. 하지만 드라마를 보며 내내 불편했다. 나의 옳음이 무언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이 책 속 니체의 도덕을 떠올렸다. 니체가 말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이 어떤 것인지 아주 조금 희미하게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도덕적으로 사는 것인가, 무엇이 도덕적 가치인가. 내가 지켜야 할 나의 도덕적 가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 진정한 도덕이란 무엇인가는 결국 자신 스스로 어떠한 삶을 살고자 하는가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란 생각에 이른다. 니체의 도덕에 대한 핵심은,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말고 ‘왜 그것이 옳은가’를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니체가 말하는 정의(正義)는 “합리적 차별을 전제한 비례적 분배(p325)”라고 한다. 정의에 대한 그의 말에서도 그가 말한 도덕의 한 모습이 엿보인다. 정의나 도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조건적인 배분, 평등이 옳으며 차별은 그르다는 인상이 있다. 하지만 니체는 ‘합리적 차별’이 전제되어야 정의가 성립된다고 말한다. 도덕이든 정의든 니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당연함을 당연함으로 보지 말고 생각하라는 것이며, 건강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말하는 건강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다. 니체는 병든 개인과 건강한 개인을 ‘노예성과 주인성’으로 구분한다. 먼저 니체가 말하는 주인성이란 이런 것이다. “주인성은 자기지배의 힘, 자신에 대한 책임의식 및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자유에 대한 열망과 실천,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긍지, 자신의 삶의 계율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주권성, 늘 자신의 현재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의지, 진정한 적이 곧 진정한 벗이라는 점에 대한 통찰, 나와 타인 그리고 세계 전체가 거대한 관계체라는 점에 대한 인식, 그 관계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정 및 긍정 등을 주요 요소로 한다.(p318~319)” 이어서 병든 개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노예성으로 니체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노예성은 자기지배력의 부재, 자유 대신 복종, 자기책임에의 의지나 의식 대신 자신의 외부에 대한 책임회피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시선, 주권성 대신 타율성, 주인적 존재에 대한 미움과 원한의식과 보복심리, 삶의 향상에의 의지 대신 평균성에 안주하기, 무리를 짓고 무리 속에서 무리의 삶의 원칙을 추종하면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무리본능,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 대신 피해의식과 열등감 등을 주요 요소로 한다.(p319)” 주인성을 가진 자가 말하는 주인도덕이 바로 니체가 강조하는 도덕이다. 즉 자율적이면서도 주권적인 자기 형성과 삶의 형성을 위한 도덕, 그것이 우리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도덕이다. 그것이 옳은 도덕이다. 위의 일본 드라마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친구가 자신의 일그러진 인생에 대해 세상과 사회에 대해 피해의식을 보이며 원한을 품으며 동정 받기를 당연시 하던 것은 노예도덕이다. 자신이 선택한 결혼이었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였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외부로 책임회피하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연민을 구걸한 것은 노예도덕이다. 니체는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강조하고 건강한 사람의 도덕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질병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위대한 건강은 이런 것이다. “위대한 건강은 오히려 질병을 건강의 수단으로 삼을 줄 아는 힘이다. 우리는 물론 질병을 멀리해야 한다. (중략) 현대사회에서 삶의 활기를 빼앗아가는 질병은 어떤 것인가? 니체에게 건강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면, 현대사회의 질병은 삶의 의미를 묻지도 탐구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탐욕적인 건강비대증이 아닐까?(p103)” 그렇다. 노예도덕이 무조건 틀렸고 잘못이 아니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조금은 잘못 되어도 되고 조금은 잘못된 길로 가도 된다. 중요한 것은 한 번도 틀리지 않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의문을 던지며 살아가라는 것이 니체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니체는 현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살지만 왜 사는지 모르면서 사는 것처럼 보(p66)”이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상도 사랑도 동경도 없이 우리는 이곳저곳으로 분주하게 움직일 뿐(p68)”이라고. “현대사회의 일꾼은 열심히 일하지만 왜 일하는지를 생각할 ‘정신’이 없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여념이 없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향유할 ‘가슴’이 없다는 것이다.(p68)” 어젯밤 잠들기 전 읽은 이병률 작가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달, 2012)에서 가슴에 새기고 싶은 한 구절을 만났다. 수첩 제일 앞 페이지에 빨간 글씨로 꼭꼭 새겨 넣은 문장이다. 나의 가슴에 문신으로 새기고 싶을 만큼 가지고 싶은 문장이다.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난” 이병률 작가가 말하는 이 ‘갈증과 사랑과 허기와 가난’을 나는 평생 품고 살고 싶다. 욕심이 난다. 가지고 싶다. 니체가 말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런 갈증과 사랑과 허기와 가난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읽은 니체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싶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가치와 사상을 가졌는가?(p341)” 나 자신의 가치와 사상을 가지기 위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싶다. 갈증과 사랑과 허기와 가난을 품은 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