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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쿠스는 예전의 전략을 다시 한 번 이용하여 반란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한 후, 군대에게 안식일에 유대인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마타시우스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율법에 쓰여 있는 말을 지키다 죽기 보다는,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33쪽).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안식일에 대해서 비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형식적인 종교가 무슨 종교가 될 수 있는가 말이다. 종교란 것이 영혼을 구하는 것이지 그저 복이나 구하는 것이 무슨 종교이겠는가.
복음서의 실제 저자들은 개인적으로는 비록 예수를 알지 못했어도 200년경에는 현존하다가 그 이후 사라진 여러 자료에서 정보를 얻어 진지하게 연구했던 사람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60쪽).
미골 네 복음서의 저자 모두 유대 계통이었지만 그들은 망명 시절 이후 고대 헤브라이 어 대신 쓰이던 아람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책을 썼다(63쪽).
대개 한 민족의 행복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는 반비례한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넘어 그보다 더 부유하고 번창하게 되면 사람들은 단순한 즐거움에 흥미를 잃고, 바야흐로 인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엄청나게 지루한 고역이 되는 것이다(68쪽). 이런 것이 석가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닐까. 그리고 이 말은 우리 개인에게도 잘 맞는 이야기같다. 돈 자체로 행복한 사람은 별로 못보았으니까.
예루살렘의 관리들이나 친구들을 통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몇몇 부모들은 재난(지난 3년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마리아와 요셉 역시 남쪽으로 도망쳤으며, 아브라함과 요셉을 예수의 어린 시절과 연관시키려 한 전설에 의하면 이집트까지 갔다고 한다(77쪽).
여러 그리스 철학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 역시 진정한 행복은 영혼의 문제이지, 돈으로 가득 찬 주머니나 군중들이 시끄럽게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다(100쪽). 돈이나 명예가 영혼 구제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까 너무나 당연한 결론인 듯 하다.
요한은 미래의 메시아가 무자비한 여호와와 같을 것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과 생각이 같았다. 예수는 더 고귀한 통찰력이 있었고, 모든 것의 아버지는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영원한 인내와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다(106쪽).
몇백 년 후 사랑의 하느님이 전하는 메시지를 단순한 사람들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예수의 모든 생애에 약간의 기적이 가미되었다(108쪽). 기적은 오늘도 있다. 나의 노력으로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이루어지면 그 자체가 기적일 것이다. 아니 나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기적일 것이다. 기적을 믿어야 겸손해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해서 불의에 항상 순종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구약은 공의의 하느님이시고, 신약은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한 마디로 하면 공의로 된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혁명가이시다. 그 분이 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돌아가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뜻일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돌아가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이런 죽음을 선택한 분들 중에서 나는 소크라테스, 간디, 김구, 이순신, 윤동주, 전태일 등과 같은 분들을 기억하고 싶다. 이름하여 '죽음을 넘어선 영웅들'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언제나 경배의 대상에 초인적인 능력을 결부시키고 싶어 한다. 그리스의 신과 영웅들은 모두 마술을 할 줄 알았다. 고대 유대의 선지자들은 쇠를 물 위에 띄울 수 있었고 깊은 강물 위로 걸어가기도 했으며 천문 체계도 바꿀 수 있었다. (중략) 그러나 예수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지대하여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술이나 주술을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믿는다(110-111쪽).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러진 뼈를 붙일 수도, 전염병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아는 것이지만 상상력은 질병에 크게 작용한다. (중략) 비록 의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더라도 환자들에게 확신을 줌으로써 치유할 수 있는 순전하고 온유한 이들에게 종종 부여되었다. 사람에 대한 절대적 정직과 단순한 사랑으로 확신과 믿음을 불러일으키던 예수는 상상의 질병에서 오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던 이들을 도울 수 있었다(119-120쪽).
그리하여 자신이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대신 자신의 인생과 행복과 편안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모든 인류가 형제이며 온유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자신의 이상만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분명하게 공언했다(129쪽).
사울은 소년 처럼 즐겁게 이 끔찍한 일을 맡았지만, 시리아의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그의 닫혔던 눈이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예수가 옳았고, 대제사장은 옳지 않았다. 그 이후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도달한 논리적인 결론이었다(181쪽). '신이 된 남자'라는 소설에서는 돌아가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고,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저자의 이 해석은 정말 통찰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도 성령을 받은 것 같다. 역시 종교는 깨달음인 것이다. 그저 하느님 무엇 무엇을 주세요하는 것은 단지 어린이이의 믿음일 뿐이다. '어린아이같이'가 중요한 것이지 어린아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처음에 그(바울)는 서해안의 에베소로 향했다. 이 도시에는 아주 예전부터 그리스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 아폴로와 쌍둥이었던 이 달의 여신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르테미스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으며 아버지인 제우스보다 더 강력하다고 상상했다. 중세에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아들보다 더 많은 숭앙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184쪽).
게다가 그(베드로를 말함)는 매우 효율적으로 선교한 능력자였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눈부신 일들은 해외에서 활동하던 바울과 후에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받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게 맡겼다(192쪽). 교회의 수장이 처음에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라는 것을 여기에서도 읽는다. 성경과 관련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많은 것 역시 이 책의 좋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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