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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식(食)과 주(住) “식사는 몸이
음식을 만나는 활동이지만, 음식과 만나는 일이란 영양의 섭취뿐 아니라 음식의 출처인 땅이라는 큰 자연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음식을 입에 넣은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더 큰 자연과
면면히 이어져 있음을, 자연과 교환 작용을 부단히 해오고 있음을 가장 또렷이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체험하기 쉬운 건 정신성 없는 육체의 자동적 자기 유지 운동이다.1)”
왜 그럴까? 저자는
음식/식사가 가지는 다른 모든 연관을 배제하고 오직 맛, 영양, 요리, 레시피의 차원에서만 음식을 바라보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주장2)한다. 즉, 지구생태계(대지/강/바다)-농축산어업-식품가공업체-도소매유통업체-음식점/부엌[요리]-테이블-음식물쓰레기처리장-지구생태계(대지/강/바다)로 이어지는 순환구조에서
음식점/부엌[요리]-테이블
차원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유도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10~20분의 짧은 식사 시간, 다음 끼니 전까지 몇 시간 동안 유지되는 열량원으로써 단기 효과3)”를 보는 ‘단기성 음식’을 기계에 연료를 주입하듯이 자신의 입에 주입한다.
다시 말해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적 고양이 가능한 식사 시간이 조지 투커(George Tooker, 1920~2011)의 <점심>(1964)에 그려진 것처럼 소외 상태에 놓인 인간 군상(群像)이 묵묵히 기계적으로 동작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소외를 폭력으로 바라보았다.
점심(Lunch)
출처 : 우석영, <철학이 있는 도시>, p. 98
이렇게 식(食)을
음식의 폭력성이라고 한다면, 주(住)는 거류(居留)를 통한
장소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우리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 과거의 주거방식과 단절하고 아파트 위주의 주거방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중산층의 ‘아파트 불패신화’에 근거한 자산 운용은 이미 아파트가 주거보다 투기의 대상임을 암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믿음처럼 아파트가 편리성, 환금성, 안정성을 주더라도, 한옥으로 대표되는, 땅과 진정으로 관계 맺는 과거의 주거방식을 포기한 대가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다. 2008년 이후 전국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음4)에도 많은 사람들이 2년마다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전월세 세입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소속감을 주는 장소[삶의
터]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장소정체성을 상실하여 뿌리가 사라진 이들이 언제까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대도시에서 휴식이 가능할까
도시인들은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맞춰 아침을 시작하고,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선다.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 시달리다 집에 들어가 잠을 잔다. 여기에 노는 것을 죄악시하는 문화는 시간이 생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의
시조처럼 자연과 벗하고 즐기는 삶은 아예 꿈꾸기도 힘들게 되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草廬)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淸風)이요, 반간은 명월(明月)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그렇기에 저자는 “우리 시대는 단순히 쉬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라, 휴식은 행복과 크게 무관하다는
매우 독특한 휴식관과 행복관을 싹트게 하는 시대5)”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된 휴식’이 가능한 것일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저자는 “길 걷기, 특히 소요(逍遙)라는 형식의 걷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성취가 되는 훌륭한 활동(이며,) 복원되어야 할 중요한 활동6)”이라고 강조하면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삶을 견디겠는가, 삶을 살아가겠는가 “견디는 일이 반복되어 견딤이 견딤으로 더는 느껴지지 않을
때, 견디는 일이 몸에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될 때, 견딤은
길들여짐이 된다.7)”
이렇게 길들여지면 사실 편안해지기는 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편안함이 퇴행적 혹은 노예적 편안함이라는데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듣는 ‘고객님’이라는 호칭에는 소비자의 자율성 대신 기업의 지배력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딘호 벤토(Dinho Bento)는 <인간 동물 Ⅱ>(2013)라는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즉, “소비하는 한, 쇼핑몰에 있는 한 나는 언제라도 갑이며 할인 행사에 밝은 한 나는 언제라도 스마트 소비자라는 위풍당당함.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으로서의 알맹이가 텅 비어 있는 상태.8)”를 그려 인간에서 ‘고객님’이라는 동물로의 퇴화를 풍자한 것이다.
인간 동물 Ⅱ
출처 : 우석영, <철학이 있는 도시>, p. 146
이러한 삶이 편안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그저 견디다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일 분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인간의 삶일까 아니다. 인간이 존중되고, 그
주체성을 가진 삶이어야 인간의 삶일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 삶을 누리고 싶은가. 1) 우석영, <철학이 있는 도시>, (궁리, 2016), pp. 100~102 2) 우석영, 앞의 책, p. 107 3) 우석영, 앞의 책, p. 14 4) 국토교통부의 주택보급률 통계에 따르면 2008년(100.7%)이후
2014년(103.5%)까지 계속 전국 주택보급률이
100%를 초과하고 있다. 5) 우석영, 앞의 책, p. 234 6) 우석영, 앞의 책, pp. 255~256 7) 우석영, 앞의 책, p. 137 8) 우석영, 앞의 책, 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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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당연시 여기며 감내하기도 하고 향유하기도 하는 도시문화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그 본질과 기원을 성찰하고 그 속에 살고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실제로 책에 들어있는 그림들 속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 그림들은 너무도 우리와 닮아있어 마음 한켠이 뜨끔하기도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안식케 하는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철학 담론과 도시인의 삶, 동서양의 미술들이 주거니 받거니 어우러져 독자를 인도하는 곳은 우리가 앞뒤 안보고 숨가쁘게 달려온 길이었고 그 끝엔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길들이 있었다. 어떤길을 선택할 것인가. 도시인의 철학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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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이난영의 그림 <우리가 꽃이 되고 나무가 되리>를 보고 가슴이 쿵 떨어졌다. 웃옷을 벗은 할머니의 모습이 낯익다. 그래, 밀양 할머니들이다! 송전탑 세우는 것을 막기 위해 싸우는 할머니들이 몇 년 전에 웃옷을 벗은 적이 있다. 공사를 막으려고 할아버지가 분신자살을 해도 막을 수 없는 한국전력과 싸우다가 할머니들이 한꺼번에 웃옷을 벗은 것이다. 남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죽음보다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배운 할머니들이다. 게다가 한국전력 편만 드는 경찰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테다. 신문에 실린 할머니들의 알몸 사진을 보며 너무 안타까워했는데 그이들이 그림에서 나무가 되고 꽃이 되어 피었다. 결연한 그이들의 주장은 딱 한 가지다. 보상금 따위 필요 없고 그냥 내 고향에서 농사짓게 살 게 놔두라는 것. 그이들의 소박한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지금 우리 현실이 꼭 그렇다.
농촌에서는 65살이 되어도 아직 청년회 소속이라는 말을 들었다. 노인회 근처에도 갈 수 없다고 한다. 얼마나 청년이 없으면 65살 할아버지를 청년이라고 할까. 도시에서는 이미 정년퇴직을 하고도 5년이란 세월이 지난 할아버지가 농촌에서는 청년이라니. 농촌은 이미 청년이 없고 청소년이 없으며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오직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남아 농사를 짓고 있다. 그이들이 지은 농산물을 먹으며 도시 사람들은 살아간다. 실상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의 밥이고 꽃이고 나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농촌을 식민지로 하여 착취한다고 하여 도시가 살 만한 곳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금 우리의 도시만큼 삭막한 곳도 없다. 도대체 우리의 삶은 왜 이 모양이고 그 뿌리는 무엇일까.
우석영 작가는 지금 우리가 도시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는지, 그것의 뿌리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대학 학부 때에는 미술 사회학을 전공한 만큼 매개체는 그림이다.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의 50여 점 그림을 징검다리 삼아 지금 우리의 도시를 이야기한다. 호주로 건너가 대학원에서는 사회학 문학 철학을 공부했다. 환경철학 문명론 평화학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우리는 폭 넓은 글쓰기의 한 사례를 읽게 된다. 그림을 징검다리 삼아 도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폭 넓은 학문의 섭렵과 성찰에서 나온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그 어떤 곳에도 없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한국 사회를 흐르는 거대한 비애의 한 원천은 바로 거주 방식인 ‘거류’이다…….(57쪽)
한 사람이 세계에 대해 갖는 감각, 태도, 관점을 기저에서부터 형성하며, 그 사람의 물리적인 삶의 지속뿐 아니라 지적․정서적 성장에마저 강한 영향을 행사하는 주거공간. 그러나 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집의 주변 세계와 이웃 세계마저 포괄하는 곳. 이런 공간은 단순히 주거공간아 아니라 ‘둘레삶터’라 부를 만한 중요한 삶의 환경이다. (87쪽)
숲과 산은 ‘온전성의 공간’이다. 이 말의 뜻은 이중적이다. 첫째, 숯과 산은 그 자체가 정연한 아름다움과 생태계의 질서를 현시하는 온전체다. 둘째, 숲과 산은 거기에 든 사람마저도 온전한 이로 회복시켜주는, 회복력을 지닌 공간이다. (228쪽)
도시와 자연이 항상 공존한다는 진리. 최첨단의 도시라도 우주의 질서, 자연의 질서에 구속받게 되어 있다는 진리. 도시에 자연은 언제나 내재하며 내재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이러한 진리가 우리 시대 도시 계획의 철학적 준거가 되어야 한다. (272 - 273쪽)
우리는 지금 거개가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작가가 인용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 “그들은 여기 살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살고 있나? / 우리 임시 거주민들. / 그릇된 별을 추종하는 우리들은 / 여기 이 섬에서 난파되었다, 늪에서처럼.”(「인간 9」)가 바로 우리 이야기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거류지’를 ‘온전성의 공간’으로 바꿀 수 있을까. “생활의 전 지평에서 평화를 항시 실천”하고, 소비자가 되는 기존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으며, “사려 깊은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 먼저 지금 같은 야만의 도시가 생긴 지 불과 몇 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 절대 영구불변하지 않다는 것, 우리의 선택에 의해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은 지금의 도시로는 안 된다는 것을 콜라주처럼 보여주며 새로운 삶의 정주 공간을 자꾸 꿈꾸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