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철학의 역사를 각 철학 조류의 경계에서 바라보는 책이다. 사조들의 경계에서 차이와 변화를 살펴보며 철학의 역사를 조명한다. 조망하는 범위가 넓지는 않다. '근대철학'과 근대철학을 부수는 '탈 근대 철학'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문제들이 이 책이 다루는 부분이다. 이 책을 유명한 철학 입문서로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철학의 입문서로 부적당해 보였다. 물론, 철학'사'를 공부하는 데는 더할나위 없는 입문서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이 주로 다루는 것은 독특한 관점에서 펼쳐 본 '근대 철학의 역사' 이다. 나는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과 답을 주고 받거나, 혹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로서 책을 골랐다. 근/현대를 지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들의 역사'를 따라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친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핀트'를 잘못 맞추고 접근했다. 내 실수라는 말. 철학 사조들을 '나라'에 비유한다면, 나는 각 나라의 '문화'를 경험해 보고 싶은 여행객이었다. 이 책은 그 나라의 문화를 '내부'에서 조망하며 본질을 살피기보다는, 나라 사이의 '경계'를 넒나들며 문화의 차이를 짚어낸다. 이것은 분명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각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더욱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근대 철학사를 잘 (아주 잘) '공부' 했다는 만족감은 들었지만, 애초의 동기를 충족시키지 못해 좀 아쉬웠다. 이 책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논하는 것이 입문서라면, 이 책은 '특별한 시각'에서 새로운 통찰을 끌어내는 책으로 보인다. 즉, 입문서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근대와 탈 근대의 경계에 던지는 문제 제기'. 이 독특한 기획이 이 책을 90년대의 기념비적인 철학서적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양서이나 아쉽게도 책의 선택 동기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주관적 타이밍 미스랄까? (제 때에 읽히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텍스트보다 중간중간 삽입된 많은 양의 그림과 캡션이 인상적이었으며 나의 요구에 부응했다. |
| 2-3년 쯤 전에, 어느 신문에선가 이 책의 저자인 이진경씨가 나온 대담이 실렸었다. 그 중의 한 구절이 이러하다. 이진경씨는 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사사방'(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철굴'(철학과 굴뚝청소부)로 통한다고. 이 말은 200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내게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나에게 이진경씨는 사사방으로도, 철굴로도 '통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나는 80년대의 세례도, 90년대의 세례도 받지 못한 세대인가? 2000년과 19XX년. 숫자가 지독하게 역사를 구획해 버린다. 비록 입학하고 나서 독서욕에 불타 넘겨 본 여러 새내기 추천도서 목록에 이 책은 빠지지 않고 나왔던 것 같지만, 학회라는 전통이 사라진 그 시기에 나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내기 시절, 이 책과 나와의 만남은 유예되었고, 결국 '철굴'은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나서 이제야 읽게 된 - 여기저기에 밑줄을 긋고 나의 생각을 행간에 채워 넣으며 열심히 읽기는 했지만 - '평범한 책' 축에 끼게 되었다. 내 책상에는 지금,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함께 놓여 있는데, 이걸 보면 정말이지 '철굴'과 나의 만남은 '시대적'인 만남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탈시대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인 만남일 수도 있다. 나와 같은 세대에게 있어, '철굴'과 '사사방'은 그들 자신의 시대를 이탈하여 독자와 만나고, 이따금 하나의 책상에서 저렇게 섞이는 것이다. 나는 같은 시점에 별다른 의식상의 모순을 겪지 않으며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기실 고등학교 때부터 ('다현사'나 '태백산맥'과 함께)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던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냥 서양 근대철학 개설서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고 나니 그만큼 '단순한(평면적인?)'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1993년에 이진경씨가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한 철학 강연을 채록한 것인데, 10년이 지난 지금 이진경씨의 전위적(?)인 사유와 실천의 연장이 되는 철학사 정리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철학사를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언제나 그 이야기하는 자가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 갖고있는 주된 관심의 표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을 펴내며 이 책을 들뢰즈/가타리와의 우정의 기록이라고 하였다면,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다소 경박한 수사가 허용된다면 '들뢰즈/가타리를 위해 새로 쓴 철학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서양근대철학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 시작에서부터 (특히 맑스의 입장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혹은 그 반대?) 근대철학을 넘어서려는 기획으로 충만해 있다. 그만큼 이 책은 - 가치중립적 의미에서 - 편향된 책이며, 그래서 또한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한 교양강연의 원고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제의식의 소산이며 따라서 강의인 동시에 공부이다. 그의 문제의식 하에서 칸트가 너무 '죽은 개' 취급을 받는다거나, 레비스트로스의 연구결과들이 지나치게 요약되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의 공부의 궤적은 좇아가보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열정과 진지함의 흔적을 도처에 남겨놓는다.노마디즘>사회구성체론과> |
| 아주 유명한 철학책. 많은 대학생 독자들이 이 책을 밟고 지나갔으리라. 그리고 나도 그 선배들처럼 이 책을 밟고 지나간다. 철학이 전공인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이 철학적 토대가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만큼, 기초적인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도 많이 읽힌 책을 나도 한번 읽어보자고, 이진경이란 매력적이고 성실한 학자를 단순한 풍문이나 인터뷰 글이 아닌 그의 저서를 통해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내가 읽은 이 증보판은 멋진 표지와 세련된 디자인으로 탈바꿈한 것 이외에, 도판 텍스트를 추가한 것이 눈에 띤다. 무수한 선배들이 읽은 책과는 조금은 다른 셈이다. 곳곳에 삽입된 도판 텍스트는 그야말로 대위적인데, 솔직히 철학을 모르는 나로서는 이쪽이 더 흥미로웠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도판을 볼 때는 가끔씩 눈을 번쩍 뜨기도 했으니. '철학과 굴뚝청소부'라는 책의 제목은 조세희의 소설 <난.쏘.공>에서 빌려온 것. - 문제 : 두 사람의 굴뚝 청소부가 청소를 마치고 내려왔다. 한 사람은 얼굴이 더러웠고,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했다. 이 중 과연 누가 세수를 하게 될까? - 답 :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 자기도 더러우리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철학이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으로 양분된, '굴뚝청소부의 딜레마'를 가지고 데카르트에서부터 푸코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을 훑고 지나간다. 이 책을 쓸 당시 ('근대성' 연구를 위해) 이진경은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이란 개념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철학독서를 감행한다. 그것이 이 책이 다른 서양철학개론서들과는 다른 점이다. 무식한 내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책을 읽고 크게 알게 된 점 하나는, "위대한 철학자는 알튀세르의 말처럼 "극한에서 사고하고 극한을 넘어서려고 감행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20쪽)"라는 것. 그래서인지 철학자들은 정상에서 정상으로, 이리저리 도약한다. 그래서 그들의 우주에서 균열과 경계가 보이는데 이를 더듬어보는 것이 이 책의 작업이었다.난.쏘.공> |
| 살면서 우리는 정말 수도 없는 선택을 한다. 오늘 운동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대학에 갈 것인가 하는 비교적 중요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라는 말을 많이들 들어 봤을 것이다. 아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이러한 스스로의 선택이 '진정한' 나의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묻게 되더라. 이러한 의심은 이진경이 쓴「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으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특히 근대철학의 해체에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러했다. 니체에 의한다면 내가 왜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묻지 말고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 들자면, 무엇이 나를 대학에 진학하도록 만들었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나의 긍정적 의지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었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후자쪽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이해한 (니체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는)푸코에 의거한다면 공교육이라는 제도 자체의 허구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푸코는, 비정상인은 감옥에 수감되거나 '언덕 위의 하얀 집'에 격리되지만,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가르는 기준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기준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 사회는 자신이 정상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비정상인을 만들어내는 듯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가르고 있는 경계선은 그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려는 힘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는 공교육의 과정을 통해 정상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공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사교육의 '혜택'까지 누리며 고3때까지 죽어라 공부하는 것은, 그것도 모자라 대학에 진학해서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인으로 구분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고, 바꿔 말한다면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아부함으로써 그 자신도 어느 정도 제한적인 선에서 힘과 권력을 더 많이 행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진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공교육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는 무관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도권 교육은 결국 다른 사회의 부당성을 입증함으로써 이 사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힘과 권력의 소산일 뿐이다. 이러한 푸코의 관점을 좀 넓게 적용시켜 본다면 내가 하는 모든 선택 또한 그러한 권력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힘과 권력에 저항하는 힘이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푸코는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물로서의 즉, 수동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중시하는 입장인 것 같다(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들뢰즈의 말처럼 개인의 능동적인 의지를 외면하지는 않지만,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푸코의 입장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이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려면 그러한 메커니즘이 부적절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머리는, 아래의 글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를 비판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진정한 내가 되는 길이고 나의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말한다지만, 우리가 살아온 날들 만큼 이 사회에 익숙해져버린 몸은 이미 머리를 압도하게 된 지 오래인 것 같다. 이 사회의 지배적인 메커니즘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자살 행위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혁명은 이러한 개개인의 탈권력의 노력에서 온다기 보다 차라리 극소수의 (들뢰즈의 개념으로서의)긍정적 의지에서 온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혁명이라는 것도 결국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인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 본다. 저자가 말하는 알튀세르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고 한다. 돈을 받았으니 그만큼 일을 해주는 건 당연해, 라고 생각하듯이 우리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나는 어떻게어떻게 해야 해, 라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없이는 이 사회에서 내가 선 자리는 무엇이고, 거기서 무얼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없을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이데올로기 하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현재의 자신이 속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부적절하다고 느껴져도, 자신이 스스로의 이데올로기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승격시키지 않는 이상 진정한 내가 될 수 없다,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던 홉스의 말과 근본적으로 뭐가 다른가. 홉스는 '모든 사람의 합의 하에 권력을 국가에 양도한다'고 말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한편, 알튀세르의 말마따나 인간에 앞서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면, 이것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첫 이데올로기는 무엇에 의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인간에게 '장착'되었던 것인가. 다시 조금 앞으로 되돌려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 책은 여러 의문을 남기는 동시에 내 의식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그다지 쉬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려운 개념들을 나 같은 사람들도 알기 쉽게 풀어내려고 꽤나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나는 이 책을 통해 라캉이나 푸코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졌는데, 이는 이 책의 유기적인 구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누구 사상은 이렇고 누구 사상은 이렇다, 대충 넘어가는 게 아니라 그들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뭐, 내가 양서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처지는 못 되는지라 책 추천은 삼가는 편이지만, 이 책은 그러고 싶을 만큼 내게 유익하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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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밝혀주는 학문"이다. 또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philosophy "지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밝혀주고 어떤 지식을 사랑한다는 것인지. 도대체 사랑은 하는 것인지. 철학을 머리 속에 떠올릴때면 머리 속이 더 어두워지고 지식을 더 멀리하고만 싶어지는 것은 철학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아내고 보면 더 irony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푸코나 레비 스트로스, 알튀세, 들뢰즈 등 우리와 잇닿아있는 철학자들의 기이한 상상력과 잠시라도 만나보면 우리는 그저 철학은 다시는 발을 들일 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굳이게 마련이다. 이진경씨의 '철학과 굴뚝 청소부'는 덤불이 무성해서 길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앞이 캄캄한 철학이라는 무성한 덤불숲에서 경계와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문제설정'이라는 알튀세식 개념을 차용하여 이진경은 우리로 하여금 철학적 사고에 한걸음 다가 서게 하고 독자 스스로 철학자가 되어 보게 한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 경계선을 고민하고 더 나아가게 도와준다. 이 책이 지니는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마침표를 찍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이후 맑스와 알튀세, 들뢰즈, 푸코를 열심히 뒤지게 한다는 것. 어쩌면 나는 이제 굴뚝 청소부로서 내 앞의 굴뚝 청소부의 말끔한 모습을 보고 내 얼굴의 티를 의심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인상깊은구절] 철학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철학의 역사 안에 그어진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 경계선마다에 새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
| 서양근대 철학은 곧 데카르트에 의해 세워진 절대적 주체의 개념이 흄에 의해 무너지고 다시 칸트에 의해 세워지며, 헤겔에 의해 절정을 이룬 뒤 맑스와 니체, 프로이트를 걸쳐서 다시 해체되어지는 과정이지 않을까.그리고 이 절대적 주체는 절대적 이성이며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철굴은 바로 이러한 서양근대철학의 흐름을 진짜 명쾌하게 보여준다.. 많은 철학 입문책이 있지만 철굴보다 더 괜찮은 책은 솔직히 말해서 못 봤다. 그 덕에 철굴은 대학에서의 학회나 동아리의 철학교재의 가장 기본으로서 변함없이 사랑받아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생으로서의 철학적 사고의 기본 소양을 가지기 위해서 이책은 아마 필독서, 교과서이지 않을까.. |
| 다들 알다시피 이 책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철학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근대 철학의 선구자라고도 불리는 데카르트에서 부터 시작하여 스피노자,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맑스, 프로이트 등 한번쯤은 들어보았던 철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알기쉽게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어 더욱 이해하기가 쉬운 철학책. 서양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꼭 한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것이다. 근대철학자들의 주체와 진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깊이 알려고하면 할 수록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더욱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한다. |
| 오래전에 읽었었는데, 우연히 다시 읽게 됐습니다. 이 책은 근대적 주체 형성의 역사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룬 주제를 계속 확장시켜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 중간 결산이 '맑스주의와 근대성'입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이후 주체는 신으로부터 독립합니다. 그 이후 철학의 역사는 독립한 주체의 생존과 자기 확인의 역사입니다. 신에게서 주체가 독립하면서 자연스럽게 객체는 주체로부터 독립합니다. 이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이전까지 신이 제시해 주던 진리를, 신이 사라진 지금 누가 보증해 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저자는 이 역사를 데카르트, 스피토자, 칸트, 헤겔, 니체, 맑스, 프로이드, 라깡, 푸코등을 거치며 서술해 갑니다.(이 이외에도 수 많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있지만, 이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옮겨 봤습니다) 진리를 어떻게 보증해 줄 수 있느냐, 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헤겔에게서 칸트가 진리를 주체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노력등을 통해 발전합니다. 그러나, 이 것도 신화이죠. 그렇다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스피노자와 니체 맑스 푸코등이 선두 그룹을 형성합니다. 어쨌든 주체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닌 것은 확실하게 됐습니다. 주체는 근대적 이성이라는 신화에 의해 규정될 수 있을수도 있구요. 근대적 문제제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어떤 역사적 정화이 어떤 유형의 주체를 만들어가는가. 최종적으로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주체를, 어떻게 '생성'시켜 나갈 것인가. |
| 이진경씨의 글은 이번에 처음 접했지만 나에게 아주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이 책이 원래 그의 강의록을 토대로 지어진 것이긴 해도 마치 저자와 독자가 대화하는 듯한 문체가 철학이란 주제의 무거움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 사실 철학에 흥미는 있지만 책도 워낙 많고 해서 양서를 고르기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양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말로만 추상적인 철학을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그림이라는 두 가지 도구를 통해 근대 철학의 내용들을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 중에 하나가 철학은 고리타분하고 일상과는 상관없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생활에 대한 간접적이면서도 가장 직접적인 학문이 이구나라는 것이었는데 나의 이런 생각은 아마도 텍스트와 그림이라는 두 가지 도구의 context에 기인하는 것 같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철학'과 '굴뚝청소부'라는 두 단어를 묶어서 제목을 지은 것은 아마도 위에서 말한 견지에서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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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선택한 것은 책 제목부터가 기발하였다. '철학'과 '굴뚝청소'라는 것 자체가 너무 안어울리게 보였다. 근대철학에서 현대의 철학까지를 설명해 놓은 근대철학서 같기는한데 제목이 안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왠지 안어울리는 제목이 이 책을 끌리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제목이 안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기발하다고 생각되었다. '철학'과 '청소'는 전혀 안어울리는 것이 아닌것 같다. '청소'가 깨끗이 정리, 정돈하는 것이듯이 '철학'을 통해 우리들 머리속의 생각들을 정리, 정돈 한다고 생각된다. 다만 머리속을 정리정돈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철학을 아는 것과 철학을 하는 것은 다르다. 철학을 아는 단계를 넘어서 철학을 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정리정돈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책의 제목역시 책의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책의 제목이 사람을 아주 이끌어주는 책들중의 한 권이다. [인상깊은구절] 치고받는 이 투쟁을 통해 철학자들이 얻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철학 밑에서 사고되지 못했던 것, 또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아내고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의 지배적인 사상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고 사고되지 않게 된 것을 찾아내고 확보하는 투쟁이 바로 철학인 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