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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새까맣게 누군가를 잊고 살 수도 있는가 보다. 근 10년을 잊고 살았던 한 사람과 재회하게 됐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김정란은... 까스 활명수처럼 막힌 속을 뻥 뚫어주었다. 고맙다.
물론 이 사람의 모든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일정 부분 동화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여성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사춘기, 결혼 무렵, 그리고 내가 여성성과 본격적으로 화해하게 된 40세 전후. 내가 내 안의 여성성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흐름을 수납하게 될 때까지, 나는 내 안에 파묻어 둔 어머니의 자질과 엄청나게 투쟁했다.
'여성적인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도 고맙고. 여성으로서, 여성의 언어로 말하기.
나는 남들에게 칭찬받는 시들을 읽어 보았다. 성에 차지 않았다. 남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언어는 내게는 별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나는 아주 불행했다. 왜 나는 다른 말로, 남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말로 이야기하고 싶을까? 남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 왜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까? 나는 바보인가? (중략)
매사에 의미를 찾는 데 너무 버릇이 들어버렸구나(20쪽)
또 하나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종교성. 그녀가 매우 종교적 인간이라는 것. 종교에 기반한 사회적 정의감.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의 존재론을 "있어야 할 바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직관과 연결시킨다. 종교적 인간의 본래의 심성은 현세계와 분명하게 분리되는 보다 더 나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부정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교정해야 할 어떤 것,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 '통과의 장소'이다. 종교적 인간은 따라서 혁명적인 세계관을 소유한 자이다. 그는 주어진 것,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없는 것쪽으로 움직인다. 그에게 세계는 늘 근본적으로 변해야 할 어떤 것이다. 그 세계관을 실어나르는 것은 바로 '믿음', 지금은 없는 것, 그러나 앞으로 있게 될 세계에 대한 기다림, 그 기다림을 통하여 존재를 들어올리려는 실존의 기투이다. 성 바오로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274쪽).
그러나 깊이를 한번 들여다본 자는 세속적으로 불행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깊이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자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영적 만족감은 빼앗길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37-338쪽).
그녀의 시선은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사회 곳곳으로 향한다. 그녀가 제기하는 문제들 역시 매우 전방위적이다.
언어의 전위가 곧 사상의 전위이며, 정치의 전위(55쪽)
진지함을 비웃으며, 팔라지 않는 문학을 야유하고, 인식이 있는 문학을 귀족놀음으로 치부한다. 대중성을 문학적 진실로 호도하고, 대중적 작품의 판매를 문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순수문학은 죽었다'는 소문을 유포시킨다. 명성이나 부를 좇지 않고 자신의 직관을 따라 성실하게 걸어가는 작가들을 시대의 푼수로 취급한다.
지극히 사적인 의견으로는 '벌떼'는 너무 고상하고 마치 (들)개떼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다는 게 적확한 표현일 것 같다.이러한 속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다른 분야의 출판은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모르겠으나, 문학 장르에만 국한시켜놓고 보았을 때, 과연 내가 앞서 말한 탐미적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책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암담한 심정이다.
한국 문단의 아비투스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전근대적이다. 정치적으로는 주권국의 국민인지 모르지만 이들은 마크로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대신, 미크로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 문화적으로 이들은 스스로 파시즘을 내면화하고, 스스로 자유를 반납한다. 철저하게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길들어 있다. 눈치보기, 알아서 대접해 드리기, 서로서로 밀어주고, 밀어준 대신 서로 억압하기. '개인'을 문제 삼으면서도 늘상 집단으로 행동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문인에게는 '왕따'라는 주홍글씨를 달아준다(69-70쪽).
대체로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고, 매스컴이나 문학 전문지들로부터도 많은 상찬을 받고, 각종 문학상 수상을 통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시들의 패턴은 우리가 앞서 말한 비전을 별로 만족시켜주고 있지 못하다. 이런 시들은 대체로 소재주의의 차원에 머물러 있으며, 우화시들이나 교훈시, 그리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노래하는 이른바 '선시禪詩'의 외양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모든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말에 관하여 가장 자유로워야 할 사람들이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스스로 혀에 재갈을 물리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사람들이 문학을 권력 행위로 변질시켜놓고 있었다. 귀국 후 글을 쓰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한 번 오라"는 권유가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무심하게 몇 번인가 모임에 나갔다가 나는 그 이상한 분위기에 질려버렸다. 왜 그렇게 자신들을 이상한 문화적 아우라로 둘러싸는 것인지.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서로 끈끈하게 얽혀 있는 것도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 이상한 패밀리처럼 느껴졌다. 언론도 이 패밀리에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었다. 서로서로 밀어주고 서로서로 칭찬해주고, 그리고 대중은 황홀한 눈으로 그 올림피언들을 구경한다. 아주 이상한 시스템이었다(310쪽).
그들의 정치적 진보성은 어째서 그렇게 쉽게 수동적, 감상적 위안과 퇴행적 멘탈리티와 타협할 수 있었을까?(87-88쪽)
시는 근원적으로 불온하다. 그러므로 시인은 래디컬한 사람이어야 한다.
카다레의 전언은 분명하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 '하기'가 창작이든, 읽기이든, 연구이든, 그 궁극은 결국 '시인-되기'라는 것. 존재의 혁명이라는 것. 호머는 바로 시를 구하는 당신 자신이라는 것.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잃어야 한다는 것. 특히 세속으로 향한 눈을. 깊은 눈을 얻기 위해서. 그러나 '치명적인 도약'은, 훌쩍 공짜로 얻어지지지 않는다는 것. 문학은 텍스트 읽기도, 텍스트 연구도 아니라는 것. 문학의 최종 임무는 바로 당신 자신이 문학의 소명을 자신의 존재 안에 통합해 넣음으로써 '시인-되기'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89쪽).
현대사회는 치열한 자기 성찰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 정신없는 상황 안에서 언제라도 유령의 처지로 떨어져버리고 만다. 다시 정신을 채우지 않으면, 이번에는 몸이 정신을 잡아먹을 것이다(113-115쪽).
이런 측면에서 김정란이라는 사람은 매우 일관적이고 정직한 사람이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하는 사람도 아니고.
글쓰는, 불온한 시인, 김정란. 이것이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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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말(Horse)을 그리워 하는 책이 아니다. 행방이 묘연한 행불의 말(言)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 이다.
억눌리고, 조작되고, 멸시받아 꽁꽁 땅속깊이 쟁여져 있는 말들이 물꼬를 트고, 싹을 틔우며 나타났던 2001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 이다.
권력에 억눌려 '빨갱이란 이름'으로 봉인된 말들. 철갑을 두른 듯 짱짱하게 권력과 서로 빨대를 꽂고 활력을 나누던 조선일보가 조작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 내지는 '불손한 것'으로 전락해 버린 말들. 수구꼴통에 의해 암묵적 사회적 동의에 기반이라는 살벌한 기류로 둘러싸 '가치없는 말'로 싸잡아 멸시해 버린 여성의 말들.
김정란이 돌아오길 바라는 세가지 큰 맥락의 말들은 이 것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이 책에서 잠깐 언급된 것 처럼 이 땅의 교육시스템 또한 체계적으로 말의 귀환을 방해하는 장치로 작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말'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 및 평가체계. 찍기로 대체된 의사를 밝히는 채널. 그들이 지지하는 '말 못하게 하는 세상'의 틀은 여전히 사회속에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함'이 이윽고 '듣지도 못함'의 외투를 겹겹이 껴 입고 있는 형상이라고나 할까.
다양한 말들이 섞여 혼란의 단계를 거친 후 명징해지는 프로세스와 방향성, 듣고 기다림의 시간을 체득하지 못한 어정쩡한 시대에 머문 이 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여전히 둘러앉아 몇개의 찍기-투표라는 것을 면죄부로 내세워-라는 방법으로 합의 되었음을 선포하는 우스운 결과 밖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음을 실랄하기도 하고 큰 언니의 안타까움으로 말하고 있다.('말하였다'라고 하기에는 이 책속의 모든 주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상당히 다양한 주제와 논점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말의 귀환'인 것처럼, 말의 귀환을 막고 있는 다양하고 거대한 때로는 소소하지만 퀘퀘묵은 장벽들이 걷히고, '말 할 줄 아는 자 들이 부활'하여 말이 귀환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다행히도 바다 깊숙히 매장된 엄청난 양의, 지구를 순식간에 멸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갈 수 도 있을 엄청난 포텐셜로 잠자고 있는 얼음덩이 매탄가스처럼 단단한 동면을 마친 말들이 인터넷, 유비쿼터스, 소셜네트워크등등 다양한 이름의 '열린 틈'을 뚫고 솟아 나고 있다.
이 말들이 혼란으로 치닫거나, 그렇게 되기를 조작하는 힘들을 이겨내고 날선 움직임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준비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김정란은 지식인이 깨어 나기를, 입을 열기를 종용하고 있다.
최근 말하던 많은 분들이 이 땅을 떠 났다. 김대중, 노무현, 김수환추기경, 법정스님....그 뒤를 이어 이젠 우리가 '말'이 제자리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하여야 하지 않을까. 진정 우리의 자녀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래야 하리라. 말의 궤를 잠그는 학원이 아니라 대화하고 그 목소리를 듣고 내 말을 전하는 일을 시작해야 하리라. |
| 김정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복학을 하던 1993년 가을이었던가? 좁은 연구실, 비닐 소파에 앉아서 정말 낯선 말들을 만나던 것이 벌써 십년 가까이 되었다. 선생께서는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쿠션을 무릎에 올려놓고 깔깔깔 웃기도 하고, 구슬피 울기도 하고, 천천히 천천히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시기도 하고,간간이 오는 전화를 받으려고 책상으로 몸을 구푸리기도 하셨었다. 책상 위에는 두 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지난 해 '용연향' 출판기념회 겸 송별회에 갔더니 큰 아들 녀석이 다자란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처음 보았을 때는 더벅머리 고등학생이었던가? 선생께서는 늘 어머니 같았다. 우리에게 글이 삶이라고, 문학은 쓰는 것이라기보다는 살아내는 것이라는 얘기를 해주시곤 했었다. 선생께서 살아오신 길을 보면 그이가 왜 그런 얘기들을 했는지, 순간순간 깨닫는다. 글을 읽으면서, 다시 그의 말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좁다랗던 연구실 - 베니아로 막아놓은 열악한 연구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이를 천천히 그리워하는 일로 이 책을 읽었다. 이전에라면 집에 가서 서명과 함께 받았을 책을, 이제는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읽는다. 표지는 손이 닿는만큼 낡아지는 종이다. 비닐코팅도 무광코팅도 되어있지 않는 가슬가슬한 짙은 고동색의 겉장이 맘에 좋다. 돈을 주고 사서 읽는 책이지만, 선생님을 읽으면서 늘 어머니를 생각한다. 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쓰던 시도 대부분 고향에 계시던 내 어머니였으니...이제는 다시 선생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조용히 부른다. 어머니...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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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은 시인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여러 정체성 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정체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정란은 '여성'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여성의 목소리로 말한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자랑스럽다. 조선일보에 반대하고, 학교 재단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행동한다. 그런 그녀이기에 이 사회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말의 귀환』은 그런 그녀가 내뱉은 세상에 대한 말을 모은 책이다.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 좋다. 때로 어려운 언어들로 당황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어려울지라도 가슴으로 느껴보길 바란다. 지금까지도 힘든 길을 걸어 자기 몫을 해내고 있지만,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모습과 말들이 더욱 기대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안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도대체 나는 누구였던가. 나는 누구로서 시를 쓰고 말해왔던가.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도대체 뭘 무서워했던 거냐? 도대체 너 자신을 숨기고 웅크린다고 누가 너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준단 말이냐? 그렇게 남성 권력자들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 그들이 편안해하는 대로 얌전하고 이쁘게 쓰면 될 것 아니냐?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여자로 말하고 있는 것을 들킬까봐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거냐? 그날 이후로 나는 '여자의 말'이라는 주제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나는 내가 남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말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마녀에게 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나는 말도 못하면서 왕자에게 나를 알아봐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말에 의하여 나이다. 당신들이 나를 인지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난 내가 지은 내 말의 집에 살 거야. 나는 그 집에 살면서 내가 말하고 싶은 방식으로 말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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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시인의 글은 참 인간적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녀의 문제는 글이 어렵다. 이 책은 시인이자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리스트인 김정란씨가 여러 잡지등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그녀의 두번째 사회문화 에세이집이다. 하리수, 아줌마, 영어공용화, 여성 폭행사건등 사회적 이슈들을 짚어내고 있지만 여전히 그녀의 주테마는 안티조선일보이며 여성의 글 이다.
솔직히 다른 에세이스트들인 진중권씨나 김규항씨의 비슷한 책에 비해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 나는 그 이유가 그녀의 글에는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프랑스 철학이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용어의 사용에 대해 문제점을 안고 있듯 그녀의 글이 가진 최대한 단점은 그녀 자신도 알고 있듯이 단어선택이 대중적이지 못하다.
학술집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대중들에게 좀 더 쉬운 글쓰기로서의 접근을 의도했던 책이라면 그리고 글쓰기였다면 그런 배려는 간과할수 없다고 본다. [인상깊은구절] 반조선일보 운동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몰상식과의 싸움이다. 반조선일보 운동은 시대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냉전의 유령을 끌고와 국민을 계속 전근대의 몽매에 묶어두려고 하는 몰상식한 집단과의 싸움이며, 개인적인 입장을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숨쉬기 운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