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연휴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사로잡혀 보냈다. 도합 1100쪽이니까 정말 무지무지한 분량이다. 이렇게 두꺼운 고전은 최근 들어서는 1998년 ‘까라마조프’, 2001년 ‘안나 카레니나’ 이후 세 번째다. 연휴 때마다 이런 두꺼운 고전을 읽어내길 소망하지만 시간은 늘 턱 없이 부족하다. 로또가 당첨되면, (맨 먼저 토토로 인형을 산 뒤), 보스톤에 가서, 호텔에서 내내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와 디킨스와 발자크 전집을 읽고 오후에는 보스톤 레드삭스 야구 경기를 보고 주말엔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보고... ‘악령’을 읽으면서 이거야말로 박찬욱의 영화세계에 들어가는 열쇠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줄곧 박찬욱 감독을 폄하했는데, 사실 그는 1990년대말~2000년대 초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발탁한 비평의 만신전에 첫손가락에 들어갈 인물이다. 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이는 홍상수, 임상수, 김기덕뿐이다(봉준호는 ‘괴물’ 이후에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찬욱이 미술과 문학, 임상수가 한국의 현실, 홍상수가 영화의 문법, 김기덕이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봉준호는 자기만의 창을 개설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네명은 인류가 그동안 쌓아놓은 거인의 목 위로 올라 탄 난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거인보다 더 높이 올라가 있다). ‘악령’으로 본다면, 박찬욱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는 ‘복수는 나의 것’에 다 있고, ‘올드보이’는 대중판 ‘복수는 나의 것’이며, ‘금자씨’는 ‘복수’에 대한 부록에 다름 아니다. ‘악령’을 읽으며 두통을 앓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또는 불행히) 그건 없었다. ‘까라마조프’를 읽을 때의 귀신들림 같은 체험은 없었다(‘까라마조프’를 넘어서는 소설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소설을 읽는 자는 불행하다. 더 이상의 행복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너무 엉성한 플롯과 가짜 같은 캐릭터에 지루한 언변들이 날 수시로 괴롭혔다. 그럼에도 ‘악령’은 인류가 쓴 가장 위대한 저작물 목록 안에 늘 들어갈 수 있는 괴짜 같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야말로 눈을 거풀째 지지는 고통과 환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특히 박찬욱 마니아들은 ‘악령’을 다시 또는 처음 읽을만하다). ‘악령’의 핵심 체험은 ‘5인조’의 자중지란 사건이다. 이것에 대응하는 장면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가 마지막에 무정부주의자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다. 그 사건은 1869년,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빚에 쪼들리며 유럽을 돌아다니던 무렵 고국에서 일어난 네차예프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그러니까 박찬욱 영화세계의 기원은 1869년 러시아의 무정부주의다). 짜르 체제에서 신음하던 러시아에선 당시 무정부주의가 유행했다. 네차예프가 이끄는 무정부주의그룹은 내부 밀고자를 죽이고 얼어붙은 호수에 시체를 던져넣었다. ‘악령’에선 표뜨르가 5인조 그룹을 이끌고 스끄보레쉬니끼 공원(주인공 스타브로긴의 영지 구석에 있는)에서 샤토프를 권총으로 죽인 뒤 시체에 돌을 묶어 버린다. ‘악령’은 이 핵심체험을 중심으로 짜여진 무수한 많은 별들의 성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누가복음’에는 귀신들이 돼지 몸속으로 들어가 일제히 벼랑에서 자살한 뒤 귀신들린 자가 낫는다는 비유가 나온다(‘악령’의 서문에도 나온다). 그 귀신이 무정부주의인지, 러시아의 암울한 현실인지, 무신론적인 아비규환인지 작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박찬욱은 도스토예프스키에서 무정부주의를 끌어 들여온다. 박찬욱의 테마인 복수와 심판은 사법기관과 신의 영역을 무시하고 이루어진다. 마치 ‘5인조’처럼. 대신 그는 거추장스러운 19세기적, 도스토예프스키적 무신론을 구석에 처박는다. 왜 도스토예프스키인가. 가장 인간의 끝까지 파고 들어 유신론과 무신론, 타락과 갱생, 자살과 살인의 주제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까지 파들어가 보는 쾌감이 박찬욱에게는 속류화되어서, 영화화되어서 나타난다. 그게 속류화되었을 경우는 배우가 미처 그 바닥을 알지 못하고 이미지 근처에서 떠다녔을 경우(‘금자씨’)이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때는 근친상간 같은(이것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어두운 주제다)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인 주제가 놀라운 이미지의 힘으로 변형되었을 때이며, 그것이 극적으로 가장 큰 완성도를 얻었을 때는 송강호나 신하균 같은 뛰어난 배우의 영혼을 건드렸을 때다. 박찬욱은 마치 스타브로긴(‘악령’의 주인공)처럼, 냉정한 귀족성과 마귀 같은 영혼과 뛰어난 언변과 매력적인 용모로 이 무정부주의극을 그럴싸한 영혼의 드라마로 바꾸어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스타브로긴을 알 수 없듯이, 박찬욱의 영혼을 캐들어가 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자의식 못지 않은 스타 의식에 사로잡힌 스타브로긴처럼(여기선 그게 박찬욱의 ‘악령’일 것이다) 그는 무수하게 분열되고, 변형되어 수많은 영혼의 별자리가 되고 싶어할 것이므로. 번역자 김연경은 ‘고양이~’라는 소설을 20대 초반에 낸 소설가인데 러시아 문학을 지금 러시아에서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5년 전 번역이니 20대 중반에 낸 것일텐데, 왠만한 중견번역가보다 깊고 성실한 번역이다. 이 사람이 한국에 돌아와서(벌써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큰 사고를 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원래 있던 책은 10년 전쯤 산 건데, 우리 번역물이 그러하듯, 자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번역을 읽느라 난 몇 년을 소비한 것 같다. 이번엔 가차 없이 번역자를 바꿔서 끝까지 달려보았다. 돈은 좀 들었지만 잘한 짓이었지 싶다. |
| 사실 이 소설 상권은 좀 지루하다. 대체 누가 소설의 주인공인 지도 종잡을 수가 없고 대체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건지도 종잡을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주인공들이 나오고 너무 많은 사건들이 산만하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틀림없이 작가인 도스또예쁘스키는 소설 속의 스따브로긴에게 매료되어있다 하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가 해내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는 텅빈 유령같은 인물이다. 오히려 이 소설의 깊은 문학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은 스따브로긴의 주변인물들, 키릴로프, 샤또프, 뾰트르, 쓰쩨빤 기타등등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산만하고 어지럽던 내용들이 하권에서의 그 파티(?)가 끝나면서 동시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폭풍처럼 소설을 끝장내버린다. 일종의 장엄한 파국이다. 각각의 인물들에 할애된 각 챕터들이 하나하나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정치소설로 읽어볼 수도 있고, 철학적인 소설로 볼수도 있고 여러가지로 도스또예쁘스끼 소설을 읽으며 느끼게되는 '압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죄와벌에서 라스꼴리니코프가 예심판사에게 심문당하는 대목이나, 백치에서 주인공이 리자베따에게 고백하는 대목, 까라마조프에서의 법정다툼, 이런 부분에서 느꼈던 놀라운 압축력이 여기서도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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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그 도전의 대상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좀 유별난 경우일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고전(古典)에 대한 도전의식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나의 도전의식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전투적인 의미"를 가진 도전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의식이다. 나의 이 도전의식은 일종의 예의와 존경, 책임감 같은 것과 더 관련이 깊다. 나 역시 다양한 책들을 두루두루 섭렵하면서 다양한 장르들이 주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과 재미에 빠져들기를 즐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독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나 내게 일종의 허전함과 아쉬움을 남긴다. 그때 내면에서 발산되는 그 허전함은 일종의 귀소본능처럼,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본능적인 의무감을 양산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구호처럼, "고전으로 돌아가자!". 오늘날의 인류와 나를 있게 한 위대한 유산들에 대한 도전의식이다. 고전을 읽는 것! 그것은 그래서 내게 읽기 전의 설레는 두려움과 함께, 읽은 후의 은근한 뿌듯함을 동시에 제공한다. 오늘날의 예술과 문학과 사상, 문화의 모든 영역들은 사실 완전하게 새로운 것은 없다. 이 모두는 이전 시대의 유산들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나온 것들이며, 따라서 오늘은 언제나 과거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악령』을 읽음으로 도스또예프스끼 4대 장편 읽기를 끝냈다. 연속해서 읽은 것은 아니다. 그 기간을 연수로 따지면 장장 12년에 걸쳐있다. 한 책을 끝내고 다른 것을 시작할 때까지 몇 년씩 일종의 외도를 한 것이다. 책의 발간 순서를 상관하지 않고 책을 읽었으니 도스또예프스끼 전문가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취급하는 작가의 사상 발전의 궤적을 좇는 것에는 이미 과정부터가 어긋났다. 또 책들 사이의 외도의 기간이 워낙이 길었던 터라 느낌과 판단을 연결시켜서 뭔가 깊이 있는 독후(讀後)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아예 포기해야 할 듯싶다. 결국 충실한 번역자와 전문가들의 해설을 주의 깊게 읽으며 그들의 전문가적인 판단능력에 감탄하며 수용할 밖에.....
그래서 말인데, 무엇보다도 역자에게 칭찬을 해 주고 싶다. 러시아는 사실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나라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러시아는 더군다나 우리와 무관하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에게는 도무지 생소한 것들이다. 그런 사고에서 나온 19세기 러시아 언어를 그 어떤 세련된 한국어로 번역한들, 그 외면 의미와 행간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고 설득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문체가 그리 깔끔하고 명확한 것 같지도 않다. 문장은 여지없이 길고, 대화도 어찌 보면 혼돈 그 자체다. 앞 문장과 뒤 문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수십 번이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최소화해 준 역자의 노고를 인정하고 싶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절대 러시아에서는 역사상 사용되었을 리가 없는 현대 한국어의 유행하는 표현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 표현들이 문맥과 구성의 흐름에 역행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생기를 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번역을 지탄하는 전문가들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 당시 사용된 러시아어 표현으로 직역해 냈을 때 현대의 우리 독자들이 도무지 느낌을 파악할 수 없는 그런 표현이라면 문장이 상하지 않는 한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야 말로 탁월한 번역가의 자질이 아니겠는가..... 러시아 문학 전공자다운 전문성과 충실함이 단긴 곳곳의 역주들도 작품을 읽고 이해해 나가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가장 큰 도움은 역자가 정리한 작품 해설인데, 단지 『악령』이라는 한 작품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전체 작품 속에서 『악령』이 차지하는 위치와 작자의 사상의 발전과 정립된 세계관 전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해석의 틀은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한도에서 하는 말이다.
작품 자체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역자 해설」에서 논할 수 있는 상식적 이해의 대부분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4대 장편의 저술 시간상의 배치가 도스또예프스끼 사상의 발전 과정과 일치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결국 그의 사상의 총체와 작가로서의 역량은 장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절정과 결말을 동시에 맞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인상깊은구절] ("악령"의 에피그래프) 때려 죽인다고 해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군. 길을 잘못 들었어. 이제 어떡한담. 아무래도 악령이 우리를 들판으로 내몰아서. 사방읗 헤매게 만드나 봅니다요. -푸쉬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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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인가...책을 읽을때나 읽지 않을 때나 마치 러시아에 살고 있는 거 같은 이 기분. 난 꼭 가볼거다. 그에 고향에. 러시아에. 거기에 뭐가 있길래 그로하여금 감히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있게하는지. 혹시 아직도 표도르 도스또예프스키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이 리뷸 보고 읽을까 어쩔까 망설인다면,아직 참아달라고 부탁하고싶다. 아직 읽지말라고 정말 부탁하고싶다. 왜냐하면 그를 만나고 나면 세상 모든 책들이,소설뿐 아니라 철학,인문, 역사, 심지어는 종교까지. 어떤 분야의 책이라 할지라도 모두 시시해 질테니까. 그까짓거 밖에 안될테니까. 그래도 좋다면...그래도 잠시 숨고르길. 정말 바쁘고 급한 일은 없는지 살핀 후 책을 펴시길.. 왜냐하면, 절대 끝까지 읽지않고는 못 배길거니까. 다 읽는데 제법 시간이 걸리니까... 그럼에도 책을 펼쳤다면..이제 기대해도좋다!! 도스뜨예프스키가 만든 악령의 세계는 너무나 매력적이니까.
그가 만든 세상은 정말 놀랍다!!! |
| 이 작가의 작품은 쉬지 않고 읽게 된다. 그 이유가 다른 가장들의 추천에 있지 않다.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인간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의 깊이는 작가의 문체만큼 혼란스럽고 길고 깊다. 나는, 작가의 작품, 특히 악령을 통해 볼 때, 그 수 많은 인물들에게서 내 모습의 일면을 보게 된다. 누군가의 말대로 욕망은 다중적일 수 밖에 없다면, 이러한 관찰한 지극히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연을 확인하는 과정은 지루하고도 고통스럽고도 지극히 중독적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 부분이나, 죄와 벌의 허무한 결말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처럼, 이 작품의 주인공 스따브로긴의 행적도 아주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길든 짧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통해 자기 변명을 시도해 봤던 기간이 있었다는 것은. 그래서, 부끄럽고, 그래서, 다시 길을 가게 되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의 인물들은 낯설지 않다. 우리일뿐. 단, 아주 깊은 곳의 우리일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