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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불교를 두고 나눈 생물철학자와 인도철학자의 대담
"진화론과 불교를 두고 나눈 생물철학자와 인도철학자의 대담" 내용보기
‘승려와 원숭이’는 인도철학자(심재관)와 생물철학자(최종덕)가 불교와 관련한 자아, 윤회, 감정, 미학, 방편, 진화 등 열두 가지 이슈를 두고 나눈 대담집이다. 최종덕은 종교의 긍정적 역할을 종교만의 필연성이기보다 일종의 문화적 순기능이라 본다. 심재관은 종교를 긍정하지만 초월적 또는 선험적 기준으로만 정의하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 최종덕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진화론과 불교를 두고 나눈 생물철학자와 인도철학자의 대담" 내용보기

‘승려와 원숭이’는 인도철학자(심재관)와 생물철학자(최종덕)가 불교와 관련한 자아, 윤회, 감정, 미학, 방편, 진화 등 열두 가지 이슈를 두고 나눈 대담집이다. 최종덕은 종교의 긍정적 역할을 종교만의 필연성이기보다 일종의 문화적 순기능이라 본다. 심재관은 종교를 긍정하지만 초월적 또는 선험적 기준으로만 정의하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 최종덕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은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심재관은 무아를 강조한다. 심재관은 형이상학이 형성되는 이면에 현실의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주장한다.


불교는 형이상학이 전제된 본질적 존재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심재관은 이 세계 너머에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불교의 통찰이 결과적으로 힌두 철학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무너뜨렸다고 말한다.(그런데 인도에서 불교는 결국 힌두교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종덕이 말했듯 불교가 형이상학적 존재관 또는 불변의 자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체적 현실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최종덕은 불교를 연역적 이론 체계(권위적인 절대 교리를 먼저 갖고 그 교리에 따라 현실 문제를 해결)가 아닌 귀납적 행동 체계(현실 속의 사소한 문제들을 일일이 접근하면서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라 정의한다.(이상 첫 번째 주제 자아: 자아는 없다.)


심재관은 불교의 윤회도 하나의 방편이라 말한다. 심재관은 연기설을 불교의 핵심이라 말한다. 연기설은 모든 존재는 연기적(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념 체계이기에 자연히 자족적이며 절대적인 신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상호의존성은 불교를 존재론적으로 유명론(唯名論)에 근접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심재관은 연기설도 방편,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 최종덕은 현재의 고통이 과거의 업보에 의한 인과적 결과라고 한다면 그 고통을 풀어갈 아무 방도가 없는 것이 아닌가? 묻는다. 이에 심재관은 그 고통을 감당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된다고 말한다. 최종덕의 말은 다소 실망스럽다. 현재의 고통이 과거의 업보에 의한 것이라도 개선의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배층에 의해 이유 없이 정치적 탄압을 받는 경우처럼 벗어나기 어렵거나 특별한 반전이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경우가 있고 병처럼 개선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심재관은 윤회에 대한 최종덕의 생각이 숙명론 또는 운명론적이라 말한다. 심재관은 인도 사회 계급의 문제와 윤회론을 섞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최종덕이 윤회론이 현실의 불평등을 설명하는 도구라 말하자 그런 점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말한다. 가령 기독교의 신정론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악(惡)이나 화(禍)는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에 신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심재관은 업설이나 윤회설이 계급 제도를 공고히 했다거나 경제적 욕구를 위축시켰다고 보는 것은 일방적인 이해라 말한다. 최종덕은 윤회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한 형이상학적 전제나 종교적 설정을 문제삼는 것이라 말한다.


최종덕이 윤회설이 현실의 부조리를 합리화하는 쪽으로 기능한다고 보는 반면 심재관은 오히려 다음 생을 좋게 맞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심재관은 그런 점에서 미래를 자유의지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심재관은 다양한 해석들을 포용해야 하지만 가짜는 분명히 가려야 한다고 말한다.(이상 두 번째 주제 윤회: 윤회와 연기는 다르다.) 최종덕은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스피노자의 뇌’에서 감정과 느낌을 구분했음을 지적한다. 느낌은 행동을 촉발하지 못하지만 감정은 촉발한다는 것이다. 최종덕은 이성도 감성으로부터 가지치기한 부수적 능력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깨달았다고 해서 욕망이 없어진다기보다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는 욕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라 말한다. 불교는 감정의 상태를 굴곡이 없도록 단순하게 또는 감정의 진동이 요동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기에 차가운 종교라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의 윤리학이자 감정론은 내면의 동기가 정말 거리낌 없다면 겉으로의 표현에서는 자유로운 것이라 말한다. 최종덕은 감정도 그 나름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내가 이해하기에) 심재관은 최종덕이 불교는 어떤 행동에 대해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닌가 묻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는 욕망(慾望)과 서원(誓願)과 갈애(渴愛)를 구분한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한쪽으로만 쏠린 감정을 집착이라 정의한다. 심재관은 붓다는 욕망과 집착을 칼로 도려내려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집착 속에 들어가 감정을 서로 조화롭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서구 근대성이 감정 표현의 조절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감정 조절에는 무관심했다고 지적하며 그것을 위기의 한 단면으로 본다. 심재관은 자신이 불교의 희생적 이타심을 말하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타성보다 이기성이 판을 치기에 감정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이타심이 어떻게 가능할지 확신을 못한다고 말한다.(이상 세 번째 주제 감정: 욕망과 감정은 나의 것)


심재관은 불교에서 보는 인간은 오온(五蘊)의 덩어리일 뿐이라 말한다.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의 느낌, 감정, 판단, 의식 등의 다발이 뭉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을 접하고 진화의 관성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과 세계는 불완전하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마음을 클루지(kluge) 즉 서툴게 짜 맞춰진 기구라고 주장한 뉴욕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개리 마커스를 생각했다. 심재관은 기본적으로 불교 미학이 성립할 수 있는지 회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미적 감흥이란 것도 결국 불교에서 기피하는 충동과 번뇌의 산물이라 본다. 심재관은 사람들이 예술에서 기대하는 애욕, 분노, 기쁨 등과 불교가 지향하는 평정심이 양립할 수 있는지 회의한다.(내가 이해한 바로는)


심재관은 불교 안에 감성을 해석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불교는 감정의 다발로서의 욕망을 떨쳐버리려는 과정에서 서원의 감성이 갖는 미학적 의미를 같이 버리는 것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서원 차원의 감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라 우려한다. 심재관은 불교는 교리 뿐 아니라 교리 이외의 예술적 표현도 다 방편으로 환원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심재관은 불교 예술의 토대를 탄트라(밀교)쪽으로 가져가면 어떨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탄트라의 관점은 부정관(不淨觀)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초기불교는 물론 대승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을 보인다.(이상 네 번째 주제 미학: 감성과 기억이 예술을 낳는다.)


최종덕이 물 잔이 화려하면 그 외양에 속아 그 안에 독이 담겨져 있어도 마시게 된다는 말로 본말이 전도된 방편과 본체의 관계를 우려한다면 심재관은 물 잔을 멋있게 꾸며 사람들로 하여금 마시게 했지만 갈증을 해결한 이후에도 그 잔을 놓지 못하고 꼭 쥐고 있다는 말로 방편의 문제를 지적한다. 두 사람 모두 방편은 본체를 실현하기 위한, 버려야 할 사다리라 말한다. 한편 이와 관련해 ‘진흙 속의 연꽃’이란 아이디를 쓰는 한 불자는 초기경전에 따르면 뗏목을 버리라는 말씀이 없고 부처님 역시 뗏목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거론해야겠다. 이 필자는 이를 뗏목을 사용하였다면 누군가 다시 활용할 수 있도록 물 가까이 놓으라는 말이라 설명한다.


그런데 이 필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뗏목은 법 또는 가르침이고 구체적으로 ‘팔정도’를 뜻한다고 말한다.(미디어 붓다 2016년 3월 9일 수록 “뗏목을 버려? 누군가를 위해 놔둬야” 중에서)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렇다면 법 또는 가르침, 구체적으로 ‘팔정도’로 비유되는 뗏목을 버린다는 말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법을 버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을 훼손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방해라도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경우를 뗏목을 버린다고 할 수 있을까? 붓다가 어떤 의미의 방편을 말한 것인지 확정할 수 없으나 방편은 말씀만이 아닐 것이다. 교리, 종교 건축, 의례 등이 모두 해당하지 않을까?


나는 방편을 버리라는 말은 두 논자들(최종덕, 심재관)이 말했듯 방편이 본체를 능가하지 말도록 하라는 말이라 생각한다. ‘진흙 속의 연꽃‘은 김성철 교수가 반야심경은 불교의 가르침은 다만 교법일 뿐이고 뗏목일 뿐이기 때문에 도달하고 나면 버리라는 말을 한다고 전한다. 김성철 교수에 의하면 ’뗏목을 버려라’란 말로 수식할 수 있는 경전이 반야경이다.(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을 요약한 경전이다.) ‘진흙 속의 연꽃‘이 버리지 말아야 할 뗏목으로 팔정도를 제시하는 것은 계율의 의미를 강조한 것인가? 버릴 것을 강조하는 반야심경은 초심자용일 수 없고 피안으로 건너간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법회에서 조석으로 낭독되고 있어 문제라는 것이 김성철 교수의 주장이다. ‘진흙 속의 연꽃‘은 팔정도를 버리면 불교가 아니라 말한다.


팔정도는 1.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2.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기, 3.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4.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5.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6.정정진(正精進): 바르게 정진하기, 7.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8.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등이다. ’진흙 속의 연꽃’이 인용한 바에 따르면 김성철 교수는 소승불교에서 해탈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오온, 십이처, 십팔계, 아니면 사성제, 십이연기 등을 반야심경에서는 다만 교법일 뿐이고 뗏목일 뿐이기 때문에 도달하고 나면 버리라는 말이라 말한다. 이는 ‘중론(中論)’을 풀이한 책에서 김성철 교수가 한 말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대승의 주요 교파인 중관불교의 중요 저서이다.


어떻든 내 느낌은 살불살조(殺佛殺祖)의 논리를 보는 듯 하다는 것이다. ‘승려와 원숭이’의 초반부에 불교가 힌두교의 형이상학의 본질(브라만)을 비판함으로써 성립되었는데 선불교나 여래장 불교에서 아트만 또는 그에 상응하는 불성, 여래장, 본질, 불변의 자아 등을 찾는 것은 문제라는 말이 나온다. 살불살조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죽이라는 중국 당나라의 선승 임제 의현의 말이다. 선사들의 표현은 거칠고 과격하다(outrageous)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처나 조사가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는 말인가? 문제가 있다면 집착이든 안주(安住)든 수행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최종덕은 집착된 방편은 자기기만이라 정의하며 진화심리학자들이 자기기만은 타인을 기만하는데 성공도를 높여준다고 말한다고 지적한다. 최종덕은 장엄함은 외적 양식에 존재하는 규모와 꾸밈에 있지만 숭고미는 자아 내부에 존재하는 심리적 의식의 하나라고 구분한다. 최종덕은 불교는 상징적 의미의 초월이고 기독교는 존재론적 의미의 초월이라 정의한다. 최종덕이 오늘날 현실 불교가 이렇게 썩어 있으면 그 모습이 바로 불교의 본질이라 말하자 심재관은 불교는 이미 없어졌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껍질이 본질이고 본질이 현상인 양파 이야기를 한다. 잘 알다시피 벗겨도 벗겨도 알맹이가 나오지 않아 껍질 자체가 알맹이로 비유되는 양파는 불교의 무아론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된다. 껍질 자체가 내 모습이고 진정한 자아라는 말과 오늘날 현실 불교가 이렇게 썩어 있으면 그 모습이 바로 불교의 본질이라는 말은 잘 들어맞는다.(이상 다섯 번째 주제 방편: 방편을 버려라)


심재관은 창조론과 진화론은 서로 관심을 둘 필요조차 없다고 말한다. 이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를 생각하게 한다. 최종덕은 생명이 태어나기까지는 그에 수백만 배에 해당하는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그 가치는 무한하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진화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갈라지면서 다양한 생명종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에 반하는 생각이 정향진화로 진화에는 목적이 있고 인간이 진화의 정점이라는 생각이 해당한다. 물론 유럽인들은 흑인 또는 유색인들은 열등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지금도 적어도 속으로는 그런지 모르지만. 진화는 발전이 아니고 진화의 도상에서 인간은 정점이 아니라는 아니 정점이 없다는 생각을 수용한다면 공생, 공존이 가능하다.


이는 연기적, 인연적 가르침을 펴는 불교와 상통하는 바이다. 심재관은 불교에서 부정하는 것은 의식 현상의 기저에 영혼이나 초월적 주체 같은 것들을 상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심재관에 의하면 불교는 식물 돌 등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식물이 생명이라면 불살생에 위배되기 때문인가?) 심재관은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무시무종이라 설명한다. 최종덕은 진화론에서도 시간의 시작과 끝은 없다고 말한다. 진화론에서 종과 종 사이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유전자의 갈라짐(예컨대 침팬지에서 보노보가 분기한 것)은 몇만 년 또는 몇십 만년이 흘러야 눈에 띌 정도로 차이나게 드러난다. 유전자상으로 차이나는 것도 현상적으로는 감지하기가 어렵다. 종 사이는 불연속적이다.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생명개체의 정체성은 불변의 유전자 차원의 형질(진화의 단위가 되는 요소)을 유전형으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차이를 표현형이라 한다. 최종덕은 우리들의 피 속에 네안데르탈인종의 피가 섞여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다. 우리는 섞이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고정된 본질은 없다는 의미이다. 진화론적 사유의 출발은 차이와 다양성이다. 진화론적 사유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적 존재이다. 심재관은 경전이나 성경의 성립도 자연선택의 결과라 말한다. 심재관은 본래부터 이단이거나 정통이었던 것은 없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진화를 변이가능성이나 다양성의 상태로 본다면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진화적이라 말한다.


기독교는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명확한 반면 불교는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불교가 그런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방편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전들은 특정 권위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에 따라 형성된 것이어서 치밀한 체계성이 약하다는 것이 심재관의 주장이다. 심재관은 불교는 경전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교파를 이단시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경전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이상 여섯 번째 주제 진화: 무시무종이라 시작도 끝도 없다.)


심재관은 붓다는 정신적 행복과 물질적 행복을 구분한 적은 없고 다만 일시적 행복과 지속적 행복의 차이를 강조했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1960년대 서구의 동양 문화에 대한 흠모 및 수용이 서구의 인간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기보다 반작용에 따른 결과라 말한다. 심재관은 20세기 초 서양의 불교는 초기 경전의 가르침과 남방 계통의 상좌불교의 양식을 받아들인 것이기에 극동 아시아의 변형된 불교가 아닌 원형에 가까운 불교라 말한다. 최종덕은 1960 - 70년대의 반문명 운동의 깃발을 들었던 히피의 등장과 불교의 서구 유입과정이 매우 연관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최종덕은 1960년대 서구사회는 동양사상 일반을 지나치게 신비로운 것으로 알고 수용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감성적 저변 확대는 이성적 이론 연구의 기반이 되기에 신비화를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미국에 수입된 동양 종교들이 신과학 운동에 끼친 영향을 부정적으로 본다. 최종덕은 신과학 운동을 학술활동이 아닌 문화활동으로 본다. 심재관은 서구사회가 동양 고전이나 동양 종교를 전적으로 신비화시켜 수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종덕은 존 닐이 쓴 ‘호모 내런스’(이야기하는 인간)를 거론하며 그런 본성은 인간 모두의 특성이라 말한다. 심재관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과 억압이 지속될 때 양 극단의 경향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혁명과 폭동이 하나이고, 그런 사회의 움직임을 거의 도외시하거나 무시한 상태로 자신이 기대하고 꿈꾸는 사회를 찾는 것이다.(이상 일곱 번째 주제 문화: 동서양이 만나다.)


심재관은 인도의 브라만 즉 전문 종교기능인과 슈라마나(사문沙門) 즉 완전히 사회의 관습적 체제를 포기한 방랑 수행자들을 언급한다. 심재관은 사문의 전통이 있었기에 불교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사문은 공동체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았다. 심재관은 처음에 스승이고 선생님이었던 사람들이 후대에 신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 추앙되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경우 처음에 랍비(스승)로 불렸다가 후에 메시아(구세주)로 불렸고 초기 교회에서는 신의 아들이 아닌 단지 피조물인 인간으로 인식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종교의 본질이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선입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유일신 개념을 문제삼는다. 최종덕은 자신을 무신론적이라 소개하는데 무신론적이면서도 충분히 종교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가 가장 꺼리는 단어가 절대와 불변인데 무조건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중생의 범위 안의 존재로 본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한국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이 샤머니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동물, 인간, 신 등은 윤회하는 존재로 그 위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조로아스터교와 힌두교는 하나의 뿌리를 갖는 종교였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집단의 양면성을 이야기한다. 집단을 운영하려면 권력 구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심재관은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사판승이 없어도 존속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사찰이나 종단 운영, 소유 등은 재가신도들에게 완전히 맡기고 모든 승려는 수행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덕은 조계종 해산을 요구한다.(이상 여덟 번째 주제 종교: 무엇이 종교인가.)


최종덕은 이타적 행위의 기준은 애매하기 때문에 진화생물학에서는 이타성 대신 협동성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종교집단이 아닌 다른 집단도 윤리적 가치를 지향해왔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종교를 윤리 차원만이 아닌 구원과 행복 차원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집단의 공동체주의가 가장 잘 발휘된 것이 종교라 말한다. 심재관은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공동체주의가 크면 원시종교에 가깝고 보편성과 공존성이 크면 세계종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배타성과 적대성, 폐쇄성에서 공존과 관용으로의 혁명적 변화라는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탄생을 본다. 최종덕은 텍스트가 먼저 만들어져서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성이 누적되어 그런 텍스트가 나왔다고 말한다.


텍스트가 우선이며 택스트에 의존해 집단권력의 배타적 성향을 설명하는 것은 연역적 방법론이라는 말을 하며 최종덕은 자신은 그와 다른 자연주의적 방식을 택한다고 덧붙인다. 최종덕은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등을 자연주의로 종교를 관찰한 기념비적 성과로 본다. 심재관은 최종덕이 종교를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작용 - 반작용으로만 치우쳐서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붓다가 무아론을 주장한 이유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데 있었다는 주장은 아무데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종교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럴 경우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철학적 해석, 역사적 분석, 종교적 도그마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이상 아홉 번째 주제 집단: 종교는 집단이다.)


심재관은 불교 내부에도 믿음의 요소가 완전히 박탈된 것이 아니라 말한다. 최종덕은 앎과 판단과 행동을 접착제처럼 서로 연결해주는 고리를 믿음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체계화되고 관습화된 강한 믿음은 앎 또는 인식이 들어갈 자리에 인식처럼 복제된 믿음을 채운 뒤 판단과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고 설명한다. 최는 깨달음이 반드시 믿음의 장르만은 아니라는 말을 한다. 심재관은 깨달음 자체가 비약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깨달음이란 말 대신 앎이란 말을 사용한다. 최종덕에 의하면 불교는 앎의 종교이다. 의식작용으로서의 믿음과 신앙으로서의 믿음이 다름을 인정하는 최종덕은 신앙은 믿음이라는 의식작용으로부터 특수하게 확장된 것이기에 믿음과 신앙은 결국 같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사실에 가까운 믿음을 정당화된 참된 믿음으로 보는 서구 철학자들의 이해가 서구 인식론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붓다의 가르침은 믿음이 아니라 인식이라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믿음을 통제하는 자아의 실체가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 말한다. 최종덕은 믿음이나 지식이나 가릴 것 없이 둘 다 의식의 한 형태로 보며 이를 자연주의 인식론이라 설명한다. 이는 선험적이거나 초월적인 전제를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최종덕은 행동을 준비하는 의식상태를 믿음이라 정의한다. 심재관은 우리가 말하는 앎이란 사물의 흐름이나 나의 생각 밑에 깔린 인과론의 고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란 말을 한다.


최종덕은 깨달음이란 대상 전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생태학적 앎과 같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단박에 깨친다는 것은 수도원의 제례(制禮), 경전의 교리 등 형식적 절차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 공부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번쩍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심재관은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은 무한대와 같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누구나 깨칠 수 있다고 해서 종교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 말한다. 최종덕은 종교는 진화의 산물일 수 있다고 본다. 최종덕은 종교도 문화적 인지능력을 진화시켜온 결과물이라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의 깨달음이란 우주적 맥락에서 본 인지과정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인간에게 욕망의 본성만이 아닌 붓다의 본성이 있는 양면성은 모순의 논리가 아닌 공존의 논리라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가 감정과 감각을 무조건 탈피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불교는 다만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쓸데 없는 감각의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최종덕은 감정의 흐름과 감각의 드러남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눈을 앎이라 말한다. 최종덕은 절대자로서의 신의 존재도 믿음의 소산이라 말한다. 최종덕은 자신이 말하는 앎은 식(識)의 의미와 정반대라고 말한다.(식이란 감각기관으로부터 얻어낸 인식을 말하는 것 같다.) 식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 앎이라는 의미이다.(이상 열 번째 주제 믿음: 믿음을 버리고 앎을 향한다.)


심재관은 초기불교의 아라한과 대승의 보살은 대비되기보다 후자에 의해 전자가 포괄된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보살은 먼저 자신의 수행을 완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대승불교도 무작정 아무런 준비도 없이 타인을 돕거나 하는 것을 자비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심재관은 대승이든 소승이든 불교는 개인 중심의 수행인 것이 기본이라 말한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심재관은 수행은 혼자서 이루어야 할 가장 외로운 과정이라 말한다. 최종덕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행동 유형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최종덕에 의하면 인간은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을 함께 지닌 존재이다. 최종덕은 이기적 행동 유형과 이타적 행동 유형을 구분하는 대신 계산된 행동 유형과 계산되지 않은 행동 유형을 구분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이타성과 이기성은 배척 관계가 아닌 공존관계라는 것이 최종덕의 주장이다. 심재관은 불교는 외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한다고 말한다. 최종덕은 각자 살아가면서도 생태계의 묘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차가운 공존이라 말하다. 최종덕은 생태계 안의 개체 생명들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개체들 사이에서 모종의 상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설명한다. 최종덕은 이를 차가운 공존으로 부르며 불교적 의미의 공동체성이라 설명한다. 이런 설명에 심재관은 외로움에서 차가운 공존의 의미를 도출한 것이라 풀이한다. 이 주제에서 가장 돋보이는 말은 외로움을 피하거나 극복하려 할 때 거꾸로 엄청난 불안과 갈등을 맞게 된다는 최종덕의 말이다.(이상 열한 번째 주제 고독: 외로움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심재관은 붓다의 가르침이 문자로 계승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최종덕이 그렇게 힘들게 형성된 불교가 어떻게 바로 그 인도에서 사라졌는지 묻자 심재관은 그 원인을 간단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불교는 태생부터 공동체를 박차고 나온 종교이기에 대중들의 시주를 얻는 것 또는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심재관은 당시 인도인 대다수는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붓다가 비슈누 신의 화신 중 하나로 여겨진 것도 중요하다. 한 힌두 경전에 붓다를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 보는 구절이 있다.


심재관은 불교 경전의 난해함도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한 요인으로 본다. 심재관은 기본적으로 불교는 츨가자의 종교, 힌두교는 세속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심재관은 인도와 ‘네팔 및 스리랑카’의 차이는 불교를 보호하려는 왕권의 의지, 그에 기반한 대중들의 후원의 유무라 말한다. 이슬람의 침공도 불교 쇠퇴의 한 요인이 되었다. 심재관은 팔리어본이나 산스크리트본이 원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중국어 경전이 오리지널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인쇄된 경전을 보고 있지만 그 경전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계통의 전승과 각 전승에 따른 무수한 필사본들이 존재했었다. 심재관은 팔리어라고 원형은 아니며 붓다가 팔리어로 말했다는 증거도 없다고 말한다.

m******1 2016.03.20. 신고 공감 2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