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유행하는 말중에 쿨하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을 당해도, 혹은 어떤 일을 겪어도 쿨하게 넘기자는 말이다. 가히 포스트모던시대의 특징이라 하겠다. 만약 스스로 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죄와 벌>을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살을 고민하거나 정말 살기가 어렵다고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이 책은 복음이다. 땀내음과 피향이 철철 넘치는 이 책을 읽으며 역설적으로 마음이 순화될테니까. 실제로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쓰끼가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쓴 작품이다. <죄와 벌> 뿐만이 아니다. 빚에 쫒기거나 생활고에 찌들어 쓴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가? 그의 책을 읽으면 숨이 가빠진다. 벼랄에 몰려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지금 실의에 빠져계신 분들이라면 <죄와 벌>을 읽고 다시 한번 감정에 불을 당기시기 바란다. 누구나 충분히 살 이유가 있는 것이다. |
| 나폴레옹과 카이사르는 선을 넘어갔다.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도덕률이 강요되어진다. 하지만 '선을 넘어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인간들에겐 '양심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도덕적 테두리를 넘어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대로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 갈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다. '살인'은 사소한 문제가 되고, 다수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조차도 그들에게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여기에 이런 이성적 결론에 이른 젊은이가 하나 있다. 이 젊은이가 처한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빈민가에 사는 그는 주변에서 극도의 가난과 절망을 목격한다. 더 이상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 그것은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빈민 도시 뻬쩨부르그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그의 정신 세계를 자극한다. 이 젊은이,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 동기는 역설적이다. 세상의 부조리함에 맞서, 이겨낼 수 없는 무력감에 맞서,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 '비범인'의 부류에 속하는 인간인지를 시험해 보고자 한다. 도덕적 테두리를 넘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인간인지를.. 그래서 그 모든 부조리함을 해소하여 자신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인간인지를 시험해 보고자 한다.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존재를 제거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고, 큰 선을 실행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지 않을까? 벌레 같은 인간들을 죽여 현재의 어려움을 해소하자고. 그 선을 넘어서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결국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성만으로의 결론은 위태롭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성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신앙이요 무기이다. 하지만 이성만으로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는가..? 이성은 끊임없는 투쟁을 유발할 뿐 결코 결말을 내어 주지 않는다. 예상과 다른 결론, 유추할 수 없는 결론, 빈약한 증거.. 이 모든 것들은 삶이 이성적으로 유추하기엔 너무도 많은 변수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주인공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살인을 행하지만, 결국 자신에 생각에 따르지 못하고 스스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주인공의 파국에서 보여지는 결정적인 위험성은, 이성만으로는 도덕적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성만 가진 인간에게, 어느 한 순간 '선을 넘어가는 행위'를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에겐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따르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을 넘어가게 된다. 이런 사람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몬스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성 말고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네 학자들이 숭배하는 이성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끊임 없는 이성적 탐구의 끝에는,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의 '삶'이고, 도스또예프스끼에 따르면 거기엔 '종교'도 있다. 서양엔 카톨릭이 있고, 사랑의 사상이 있다. 동양에도 오래 전 부터 내려오는 종교적 사상들이 있다. 유교에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세상에 어긋남이 없다' 라고 말 하고, 불교에선 자비를 강조한다.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을 배제한 이타적인 삶을 역설한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자신이 속한 시대상에 예속된 인물이다. 그가 최종적인 결론으로 '종교'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얻어야 할 메세지는 특정한 종교가 아닌, 종교던 철학이던 이성을 넘어선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은 삶에 있어서 작은 부분만을 차지할 뿐이다. 결코 이성은 삶의 판단을 결정짓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주인공은 순수한 동기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발판으로 쓰레기 같은 사람을 살해하고, 힘 없는 사람을 돕고자 한다. 또한 죄책감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의 범주에 들지 않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한다. 하지만 '살인'을 용납할 만큼 그 자신은 타락하지 않았다. 스스로 계속 부정하지만, 결국 양심의 무게에 짓눌려 극도의 신경쇠약에 허덕이게 된다. 소설에선 직접적으로 양심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급부로 살인 자체에 대해 합리화 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리학 처럼, 그 행동은 오히려 반대쪽을 가르키고 있다. 극도의 불안감은 그가 얼마나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아무런 단서도 잡히지 않은 그였지만, 스스로 경찰에 출두해 자수하게 된다. 그는 유배지에 가서도 끝끝내 자신의 범죄를 범죄로 해석하지 않고 이성적 판단으로 '잘 한 일'로 분류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과 사랑을 아낌없이 베푸는 여인을(이 여인 역시 바닥의 인생을 살아온 여성이다) 보며 점점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기적처럼 어느 한 순간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든 것을.' (p 809) 나는 이 장면을 이 소설의 최고의 명장명으로 꼽겠다. 이 결론으로 다다르는 과정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면이 있지만, 어쨌거나 이 결론에 공감한다. 삶은 변증법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삶은 스스로를 위해 살 때 보다 타인을 위해 살 때가 더 의욕적이게 된다. 사랑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음은 살아오면서 느낀 확실한 사실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박애,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그 모든 것 들로 확대된다. 이 소설은 난해하고, 불친절한 문어체적 3인칭 서술에, 읽는 내내 가슴을 짓누르는 죄악과 절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천천히 곱씹으며 읽다 보면 이 소설이 얼마나 다양한 메세지를 담고 있으며, 다양한 생각 거리를 던져 주는 지 알 수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철학, 신학, 심리학,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은 경지에 올라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 책은 이성을 신봉하고 살아온 나에게 좋은 명제를 던져준 책이다. |
| 솔직하게 말해보자.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는 욧점이 무언지. 뭉개뭉개 피어나는 문학적 상상력을 잠깐 멈추고, 냉동실에 쾅 넣어넣고 개념화시켜보자.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책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한번 보자! 지독한 무신론자에 교활하고 파렴치하기까지한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의 세 아들 중에 과연 미래지향적인 인물로 누구를 등장시키고 있는가! 바로 알렉세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이다. 알렉세이의 직업은 무엇인가! 수도원에서 수도를 하는 수도자이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죄, 벌, 사랑 이런 개념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개념이 아닌가! 죄와 벌에서 도스토예프스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죄"도 아니고 "벌"도 아니다. 바로 "(성서적) 사랑"이다. 우리를 다시 돌아보자. 우리는 어떤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살펴보자. 분명히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고자 했던 기독교적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한 패러다임은 중세시대에 번창했으며, 근세를 통과하면서 여과된 개념들이다. 바로 이점이 이책이 "고전"으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즉, pre-modern한 세계의 관점과 modern한 세계의 경계선을 그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적 유신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긋고 있는 면도날과 같은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이후로 우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알베르 까뮈, 사르트르와 하버마스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과거를 명확하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렸지만, 미래에 대한 처방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는 오진을 한 의사인 셈이다. 현대는 점점 이기적으로 되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도스또예프스끼를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이제 인간의 내부의 어떤 사상으로부터 설득되어지지 않는다. 현대의 인간은 철없는 아이와 같은 것이다. 아마도 미래는 자연, 우주와 인간이 하나라는 절대절명의 명제를 바탕으로 생존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커다란 설득을 해야만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파악한 환자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물론 그의 처방전은 "사랑"이다. "신기루도 없어져라, 일부러 만든 공포도 없어져라 환상도 없어져라! 생명은 있다! 나는 살아 있지 않다는 말인가? 내 생명은 그 노파와 더불어 죽지 않았다. 노파는 명복을 빌면 그걸로 족하다. 이젠 조용히 쉴 때다. 지금은 이성과 광명의 왕국이다. " (사람이 개인적이게 되면 이성적이 되고, 개인이 개인을 만나게 되면, 그 때서야 사람은 감성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죄를 행하고서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면, 이성적이게 되며, 죄를 타인에게 고백하게 되면, 눈물이 먼저 나오게 되는 것처럼) |
| 홍문서림(합동출판사)에서 1964년 4월 10일에 펴낸 정가 170원짜리 단권완역-엄청 두꺼울거란 상상은 하지마세요-의 죄와 벌은 도저히 읽은 염두가 나질 않더군요.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죄와 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완역,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완역본을 읽게 되었습니다. 상상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작가의 뛰어난 심리묘사는 제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게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작가의 정확한 묘사는 대부분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테지요. 그렇다면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죄와 벌을 완성했을까요? 물론 알 수 없는 일이지만-그럴리가 없지요-확실한 것은 그의 빈곤과 그에 따른 고뇌등은 사실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확실히 소설에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부여할 수 있었던 동기가 됐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었군요. 아직 안 읽어 보신 분들은 손에 손수건을 꼭 쥐고 읽어 보시길 권장합니다. 더운 여름 손바닥에 땀띠날지도 모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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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罪와罰, 이 두 단어만큼 이 소설의 내용을 잘 압축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도스토예브스키는 이 간결한 두 마디로 자신의 소설을 멋지게 표현해내고 있다. 가히 천재적인 제목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전체 6장을 완벽한 대칭으로 이등분 해서 첫 3장을 죄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다음 3장을 벌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짧은 에필로그로 이야기를 종결시킨다. 도스토예브스키의 서술 방식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매우 현실적이고 긴장되는 묘사로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라스콜니코브와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스토예브스키는 마치 자신이 실제로 살인을 한 것처럼 살인자의 심리를 매우 사실적이게 표현한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주인공 Raskolnikov가 살인을 해서 그 결과로 고통스러운 자책감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당시 러시아의 사회 고발, 인간에 대한 철학, 그리고 한없이 큰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사회 고발. ST. PETERSBURG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가 바로 본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한 제국의 수도이니 만큼 여러 사회적 문제가 집중적으로 나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ST. PETERSBURG는 음울하고 건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리의 거지들, 창녀들, 자신으 처지를 한탄하면서 술집에서 매일 하루를 보내는 폐인, 또는 그 비참한 처지를 못이겨 강에 몸을 내던지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ST. PETERSBURG에 주인공 Raskolnikov가 살고 있다. 그는 후에 술집에서 반 폐인 상태인 전 공무원을 만나게 되고 후에 그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Marmeladov의 가족은 실로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직인 아버지는 매일 술에 쩔어살고 있고, 마찬가지로 무직인 새어머니 카트리나는 아이 3을 돌보고 심술궂은 독일인 집주인 아말리아를 항상 상대해야 했다. 그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맏딸인 소냐는 자신의 몸을 팔면서 하루 하루를 연명해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생활은 비단 Marmeladov일가에 한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Ubermensch?. 라스콜니코브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나 그가 살인을 한 것은 금전적 필요나 어떤 원한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 되고 싶어했다. 기존의 사회적 율법을 깨면서 "초인"을 향한 첫걸음을 딛고자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초인은 타인에 의해 설정된 사회적 도덕이나 법적 제도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 초인은 보통사람과 달리 여러가지가 허용될 수 있었다. 심지어 살인까지도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브는 초인이 아니었다. 초인이라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살인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라스콜니코브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살인을 했다. 그 일을 저지른 이후에도 끊임없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아야 했다. 그런 고통을 통해 그는 자신이 초인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초인"에 대한 이론이 먼저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초인에게는 과연 모든것이 허용되는 것이었을까?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죄없는 여인 2명을 죽였을 것인가? 어쩌면 원래 초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스콜니코브의 "분열". Rodion Romanych Raskolnikov는 그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Raskolnikov에서 Raskol은 러사이어로 분열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라스콜니코브는 꾸준히 이중성을 보인다.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어머니에게로 부터 받은 자신의 전 재산을 Marmeladov일가에 기부하는 등 매우 변덕스러운 행동을 반복한다. 이 뿐만 아니라 라스콜은 자신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이론적으로 정당한 자신의 행위가 오히려 자신의 심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카오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그에게는 초인을 향한 자아와 자신이 보통인이라고 외치는 자아가 동시에 공존한다. 그 2 자아는 라스콜니코브를 계속 괴롭히면서 그를 시험하려 든다. 주변인들의 헌신적인 사랑. 라스콜니코브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배풀어주는 이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Svidrigailov와 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Razuminkhin은 라스콜니코브의 헌신적인 친구이다. 그야말로 붕우유신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라스콜의 괴팔하고 공격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도와주고 보살펴주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라스콜은 사랑스러운 어미나와 여동생이 있다. 그의 여동생 두냐는 가족을 끔직히 사랑해서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별로 내키지도 않는 혼사를 치르려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소냐는 절대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 라스콜이 살인을 했음을 알면서도, 라스콜이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음에도 그녀는 라스콜을 용서하고 사랑한다. 이 모든 사랑 앞에서는 그 냉담한 라스콜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그는 사랑을 통해 구원에 가까워진 것이다. 소녀에 의한 구원.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세요, 밖으로 나가서 사거리에 서서 절을 하세요. 우선 당신이 모독한 땅에 입을 맞추고 그리고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향해 절을 하세요, 그리고 외치세요 '나는 살인을했다고...', 그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삶을 되돌려 드릴거에요." 라스콜이 끝없는 나락에서 빠지는 것을 막고 구해낸 이는 소냐 마르멜라도바이다. 라스콜에 비해서 특별히 나을 것이 없는 소냐는 자기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라스콜을 무한히 사랑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해쳐나가는 라스콜니코브에게 등불이 되어 길을 밝히는 역할을 "창녀 소냐"가 맡은 것이다. 라스콜과 소녀는 매우 특별한 것을 공유한다. 성경 속에서 나오는 "라자루스의 부활"에 대한 믿음 또는 바램이다. 소냐가 자신을 해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느님에 의한 기적에 대한 순수한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에 대해 회의적이던 라스콜니코브도 사실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죄책감을 없에주고 평안을 되찾아주는, 자신을 재탄생 시킬 수 있게 하는 기적을 바란것이다. 그리고 라스콜니코브는 그런 기적을 소냐에게서 찾았다. 그녀의 영향 덕분에 그는 결국 자수하게 되고 형벌을 받음으로써 죄책감의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라스콜니코브는 그 어떠한 고통도 달게 받아들인다. 고통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작용한 것이다. 그가 소냐에게서 "십자가"(고통의 상징)를 요청한 것도 그런 맥락해서 해석할 수 있다. 소냐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줄 대상을 찾음으로써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룬다. 에필로그. 죄와 벌의 끝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완성적이고 동시에 여운을 남긴다. 다시 말해서 요즘 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깔끔한 결말이다. 라스콜니코브에 대한 소설이 또 나온다면 분명 라스콜의 재탄생을 이야기 하는 내용일 것이다. 이 소설의 종결은 매우 인상적이기 때문에 전체 단락을 인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남자의 점진적인 갱생, 점진적인 부활,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동, 지금까지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현실의 인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 책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야기는 이제 종결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협소하고 지저분하고 음침한 동굴 속에서 출구를 향해 발버둥 치고 싶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음과 동시에 독자는 어두웠던 주변이 갑자기 눈부신 빛으로 찬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죄와 벌, 고통과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한 구원, 인간의 미묘함과 사랑의 엄청난 힘을 알려면 이 책은 필독해야 하는 명작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세요, 나는 살인을 했다고..." |
| 1. 외국소설의 경우, '짜증나는' 번역때문에 책읽기의 재미가 반감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열린 책들>의 <죄와 벌>은 그런 점에서 아주 훌륭하다. 막힘 없이 술술 읽히고, 설명이 필요하다 싶은 부분에서는(그당시의 사회상황, 작가의 이력등) 각주까지 친절하게 달아놓아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좋은 번역이다. 2. 책크기, 편집등도 마음에 든다. 열린책들의 <죄와 벌>이 마음에 들어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상하권을 주문해 오늘 받아보았다. 두권다 모두 상당히 두껍다. 세권으로 만들수도 있었을텐데 독자의 부담을 덜어준 배려같아 그 마음씀씀이에 약간 흐뭇해진다. (민음사에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전집> (민음사의 경우도 번역이 좋다). <인간의 굴레> 1,2권을 무척 재미있게 읽고 흡족했지만,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1,2권으로 나누어펴내는 것에 약간 실망했다. 한권으로도 충분한 양이기 때문이다.) 번역, 편집에 모두 별 다섯. 책내용은 별다섯이 부족하다. 정말 훌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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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출판사는 아니지만 죄와 벌을 한번 읽어보았다.
어렸을적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했던 책..
이책의 표지에는 없지만 종교에 구원을 받는다는 스토리라 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주인공이 과연 구원을 받는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머리가 더 커야
이해할는지..
또한 이 소설에서 눈여겨볼만 것은 인물간의 심리묘사이다
어렸을적 아버지 지갑에서 한번 슬쩍 해 본 적이 있다면, 가난해 본적이 있다면,
인간이라면 공감가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을것이다.
한낱 소시민이 이런 책을 평하는 것은 우스울지 몰라도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책이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물론 내가 읽은 책이 번역이 너무 안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난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줄 수 있다. |
|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기조가 되는 사상이다. 이것은 비록 이 작품을 통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작가는 가장 보편적 이고 당연한 생각에서부터, 인간존재의 가장 변할 수 없는 진리를 추구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이 소냐에게 정신적으로 감화되면서,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인종의 사상을 갖게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 당시 널리 퍼져있던 서구적 합리주의에 대한 단죄는 물론,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호소하는 휴머니즘적인 사상까지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식과 이러한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죄를 범하는 인간들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내 생각에 인간의 지니고 있는 공통된 감각의 마비나 대중 속에 스며들어 선악의 구분조차 할 수 없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예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현대사회의 외관 상의 껍질과도 같은 평형을 뒤흔드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보이는 인간내면의 선과 악의 투쟁과 파멸하는 인간들. '무신 론 사상의 허상과 인간의 파멸을 그린 '악령'등의 작품을 참고해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선구자적인 면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현대인들의 불안 과, 행동으로 전환하지 않고서는견딜 수 없는 내면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작품이 더욱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존재 하는한 변할 수 없는 진리에의 물음과 추구를 다루고 있기때문인 것같다. 비범인적 사고 방식과 범인적 사고 방식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라스콜리니 코프의 흔들리는 자아, "지금 당장, 십자로에 서서 대지에 입을 맞추고, 전 세계를 향해 자기가 죽였노라고 말씀하세요.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소냐의 그리스도적 사랑... 이것은 인 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풀지 못하지만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심성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듯하다.. 7월의 무더운 여름날,, 상처입은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읽은 소설 '죄와 벌'.... 항상 죽음의 인식론적 문제에 대해 사념을 거듭하던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한 책이었다. .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껴야 했다. 불쌍한 라스콜 리니코프! 얼마나 괴로웠을까? 라스콜리니코프를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는 라스콜리니코프 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두냐 때문에 얼마나 슬펐을까? 하지만 내가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가난속에 있더라도 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비록 가난하였고, 전당포 노파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죄 없는 리자베타는 어떻게 죽였을까? 하지 만 가난하지만 깨끗한 마음을 가진 소냐가 아니었다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영원히 괴롭고 슬퍼했을 것이다. 소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자수를 할 수 있었을까? 난 라스콜리니코프가 징역 8년을 받게 된 것이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큰 벌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비록 책 속의 인물이지만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그리고 두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 모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두 노파를 살인하고 그로 인해 겪는 심리적 갈등과 그 사이에서 알게 되는 소냐라는 여성을 통해 변화되는 모습을 그린 책이다. 이 책은 러시아의 대표적 작가이며 세계 문학의 거목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적 작품이다. 또 한명의 러시아 작가인 톨스토이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로 글을 쓴다. 톨스토이가 율법적이고 구약적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은혜를 강조하고 신약적이다. 이 둘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성경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유감없이 잘 지적하며 또한 은혜와 사랑의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흉측한 살인범이지만 소냐라는 여자를 통해 점점 새로운 인간이 되어 간다. 이책을 보고 있노라면 예수님과 우리의 모습을 떠오른다. 우리의 흉측하고 악한 죄를 보시고 주님은 놀라시지만 주님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할 때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 고통을 함께 짊어주신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이 죄악된 우리를 변화시킨다. 작가는 타락한 인간의 내면과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라는 두 인물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탁월한 작품이다. |
| 제목에서도 그렇듯 이책은 인정해주는 세기의 문학중 하나로 손꼽힐정도의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수있다.도스또예프스키의 특유함과 그의 철학이 녹아져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인정받는'문학이 아닌 자신이 '인정하는'작품을 좋은 기회로 다시금 접하여 감사히 여기고 있다 이책의 줄거리는 라스꼴리니노프라는 가난한 대학생이 전당포의 노파와 그의 동생을 죽이고 우연적으로 '완전범죄'를 달성하게 된다.'선택된 자들은 사람을 죽이고서도 당당하질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는 철학을 가진 라스꼴리니노프는 처음에는 말할수없는 아픔(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그러나 그 역시 선천적 악인이 아니였기에 그이 아픔은 더욱 크게 변하는듯 하였다. 경찰의 꿍꿍이도 간파한 명석한 청년이 살인을 하여 그것을 인정할때 까지의 심리적 묘사가 압권을 이룬다 그리고 술집에서 만난 퇴역관리의 딸(창녀)에게 모든것을 고백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으로 치닫는다...라는 간단한 줄거리일지라도 읽고 나면 나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지게끔 만드는 '몇안되는 명작' 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라스꼴리니노프 라면........? 그리고 고백을 하지 않을정도의 악인일수 있겠다라는 부도덕에 다시금 치를 떤다.... 인간은 죄와 속박속에서 강한것인가? 아니면 약한것일까? 물론 사람에 따라 극으로 나뉠수도 아닐수도 있는문제이다.자신의 신념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느냐 하는것 역시 사소한 차이일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사고 방식의 변환으로 끝내 그것을 인정하고 아픔(죄의식)을 벗어나서 살수있다는 것이 '죄와벌'의 모티브일것이다. 요즘의 사람들은 자기관리로 인해 죄의식을 벗어나가고 마음속으로 발버둥을 치며 죄여오는듯한 갑갑한 자체에 무뎌져 있는것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