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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하고많은 제목 중에 왜 하필 『공부할 권리』라는 제목을 지었을까.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팀과 저자의 합의로 결정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어떻든 언뜻 인문서의 느낌을 풍기는 제목이다. 막상 본서를 읽다 보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한 감상과 비평을 담은 서평집 같기도 한. 독서를 통한 깊은 성찰과 문제의식은 그녀의 인문학적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1. 그림자의 전신前身은 ‘나’
<월간 정여울> 12권 시리즈와 다른 서너 권의 에세이를 완독한 배경으로 그 책들과의 중복과 접점을 이 책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내면화되었던 자신의 ‘상처(그림자)’와 직면하는 용기를 가질 때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자가 치유’에 대해 자신의 작품들에서 누차 언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문제만이 아닌 타인과의 공생이라는 측면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상처 극복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즉, 나와 너, ‘우리’가 함께 개개인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힘을 합쳤을 때, 좀 더 행복한 삶에 근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절감케 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떠올린다. 대중 속에서도 원인 모를 고독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전형을 주인공 뫼르소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추측과 단정이 난무하는 집단의 폭력은 정말이지 무섭다. 그에 몰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뫼르소로 하여금 그를 변명하거나 유예시킬 그 모든 의욕조차 상실케 하는 ‘죽은 집단’의 위력이 『이방인』에 나온다. 단지 따가운 햇살에 짜증 나 총을 난사했다기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의 냉혈한”으로서의 면모가 살인에 더 잘 어울릴 법하다고 판단한 군중은 그렇게 주인공 뫼르소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이 책의 저자도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저자의 문장들은 훨씬 더 무겁고 아프다.
“ 『이방인』을 읽을 때마다 뫼르소의 고독이, 뫼르소의 어찌할 수 없음이 더욱 절절한 슬픔으로 물들어 옵니다. 안간힘을 써서 이 사회에 일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 세상’에 속하기 위해 때로는 온갖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해가 갈수록 더 깊이 느끼게 되기 때문 - 뫼르소는 알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정상이 참작되어 세상에 다시 나가더라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나날은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서서히 자발적으로 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고독한 이방인이었던 카뮈 자신을 『이방인』의 뫼르소에 투사한 것으로 추측한 저자의 말에 의하면, 카뮈는 가난한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문맹에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였던 어머니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문학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등의 엘리트 친구들 사이에서 카뮈가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2. 공감의 대의大義
오래전 티브이 뉴스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된 적이 있다. 그 뉴스를 보던 지인도 나도 자식을 둔 부모로서 ‘세월호’라는 단어는 듣거나 보기만 해도 울컥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던 내게 지인의 말은 뜻밖이었다. “이제 세월호 이야긴 그만 좀 들먹거렸으면 좋겠네. 보상금 더 달라고 저러는 것인가.” 순간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것도 그 지인에 대한 실망감에 비하면 약과였다. “어떻게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일이 내 일이라고, 내 딸이나 아들이 겪은 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무도 그 사건을 책임지거나 밝히려 들지 않는 거겠지요.” 맹렬히 화난 어조로 쉼 없이 내뱉고도 나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평소 내가 알던 지인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도 믿기지도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를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정여울 작가가 위의 내 행동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세월호 사건에 공감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트라우마 또한 들여다봐야 한다고.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화를 참지 못해 속사포로 울분을 쏟아 부었던 내가 자못 부끄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세월호 사건을 피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꿈에라도 겪고 싶지 않았던 그 사건과 마주하길 꺼리던 시절이었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그 사건을 자주 잊고 산다는 데서 오는 자책감도 컸다. 그럼에도 SNS나 뉴스 등 다양한 매체에서 문득문득 그 사건을 접하게 되면 또다시 울컥울컥해지곤 했다. 그때마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아픔이 마치 내 일인 양 느껴졌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겠는 삶’을 견뎌내고 있겠구나... 그들의 아픔에 동참한다는 게 이 마음뿐이라는 것조차 한없이 죄송스러웠던. 공감이란 그런 것이구나. ‘한곳에 집착하다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될 우려가, 거기에도 있었던 거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공감의 대의를 위해 유념해야 할 것들을 저자는 이 책에서 조심스럽게 풀어놓고 있었다.
며칠 전 부탁할 것이 있어 언니에게 전화했다가 면박만 당하고 서운함만 증폭시킨 채 통화를 마친 일이 떠오른다. 힘든 부탁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구는 그녀가 너무 야속하고 미웠다. 고 3 수험생의 엄마라는 것과 내가 부탁한 일은 내 보기에 그리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생각해 보니 언니는 막 50에 접어든 갱년기의 중년이었고, 언니 말마따나 수험생의 엄마였으며, 서울대생 큰 아들을 두었음에도 아직까지도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해 보이는 내적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힘든 일을 더 겪고 있는지도 모를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해서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그렇게라도 못난 나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 아직은 아니야. 언니도 내 맘을 아프게 했으니까.’
“아직 어린 아이들은 ‘내가 빼앗긴 것’, ‘저쪽이 가져간 것’만 기억한다”라고 말한 저자의 말에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수도 없이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잘 다스려지지 않았던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았다. 아직 나는 덜 자란,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제인 오스틴의 소설 『이성과 감성』 속 주인공 자매에 대한 이야기가 내 이야기였음을.
“‘평생 책만 읽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요한 것은 오직 책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소박한 공간뿐-’”(405쪽) 저자는 진정 전생에 나와 헤어진 일란성 쌍둥이일 확률 100%. 어쩌면 이토록 나와 똑같단 말인가. 하지만 예외도 항상 있는 법이어서 나는 장기는커녕 단일 코스 여행도 도전하지 못하는 겁쟁이다. 인터넷이나 SNS 접속에서보다 발로 뛰며 직접 만나는 인연을 선호하는 그녀에게 ‘장기 배낭여행 중독자’라는 별명은 정말 잘 어울리지 싶다.
가족이 바라는 ‘나’가 아닌 나 자신조차 몰랐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스토너』는 기웃거리기만 하고 아직 만나보지 못한 소설이다. 일명 ‘자아 찾아 삼만 리’ 작품은 나에겐 필독서다. 그녀에게 바로 그 위시리스트를 자주 안내받고 있는 나는 진정 행복한 독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데미안』의 감동보다 더했던. “학문과 자유의 이름으로 허락된 아주 작지만 소중한 가치, 세속성과 속물성의 치외법권 지대로서의 대학”(412쪽), ““대학은 헛소리를 지껄일 자유”가 있는 유일한 곳”(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 그래, 대학이 그런 곳이었지. 그런 곳에서 나는 참 많이 아프기만 했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아들러는 이런 처방을 내립니다. “14일 만에 좋아질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정해서 매일 그 사람을 어떻게 기쁘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438쪽) 이 글을 읽고 떠오르는 사람은 당장은 우리 언니. 그녀에게 빨리 사과를 해야 하는데...
3. 마침내 ‘사랑’으로 귀결되는 가슴 훈훈한 이야기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말하면서 가슴 훈훈하긴 참 어렵다 싶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여울 작가는 그걸 가뿐하게 해 냅니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나 쓸 법한 서간체, 구어체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그녀의 글은 나의 모든 힘든 상황을 망각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이른바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한 비관주의를 허물고 희망과 사랑으로 말랑말랑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힘. 20대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던 저자는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20대에 그 작품을 써냈다는 점 보다 그들이 더 놀라웠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 - 이들이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세계는 만지고 다듬고 고칠 수 있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494쪽)이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젊은이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이 세상은 혼자만의 힘으로 고칠 가망이 없다는 비관론과 그런 고로 “세상과 싸울 생각 따윈 하지 말라는 명령”조의 낙인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한 개인으로서나 시민으로서 마땅히 성숙한 개개인으로 거듭나야 할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권력의 남용을 이토록 유연하게 꼬집을 수 있다니. 그동안 보아왔던 수많은 날선 비평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 ‘무엇’을 나는 자주 그녀에게서 보고 배운다. 보고 배운다고 해서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게 다 ‘사랑’을 말하기 위함이었음을 예감하게 되는.
“그저 내 직업과 내 수입과 내 꿈만 생각하면 이 무서운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함께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495쪽)
4. 위시리스트를 어서 읽자는 행복한 채근採根
“어느 날 유리창에 달라붙은 매미를 본 일이 있다. 나무에 달라붙어 있을 때는 등짝만을 보아 왔는데, 유리에 달라붙으니 전혀 볼 수 없었던 매미의 배를 보았다 - 매미와 나 사이에서 유리는, 매미를 나로부터 보호하기도 하고 나를 매미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 차단되고 싶으면서도 완전하게 차단되기는 싫은 마음. 그것이 유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사전』, 김소연)
저자가 읽은 책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읽으면 나도 그러고 싶어진다. 미처 인연이 닿지 않아 읽지 못했거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책(또는 영화)과 작가를 소개받았을 때의 기쁨이라니. 그렇게 소개된 김소연 시인의 시집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은 정여울 작가의 ‘사물들의 속삭임’이라는 주제로 내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유리창에 붙은 매미를 본 영감으로 쓰게 된 산문 <유리와 거울>은 액자 소설처럼 저자가 인용한 문장을 다시 발췌하고 싶어지더라는. 그러고 보면 인용과 발췌의 목적은 그 문장들을 마음에 새기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과 정신분석에서 빠질 수 없는 칼 구스타프 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여울 작가 책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해몽하는 데 도움을 받을까 하고 구매했던 『꿈의 해석』부터 우선은 완독해야겠다. 그다음은 융의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정여울 작가의 책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찾아 읽는 편임에도 이 책은 e북으로 다운로드해 놓고 읽는데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읽게 되었을 때는 가독성 갑인 것이 그녀 책의 또 다른 장점.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타인의 고통』의 저자인 수전 손택 등 독서로 접한 작가들이 곳곳에 포진돼 있다. 글 쓰는 독자로서 그녀가 읽은 책에 대한 언급과 감상은 반갑기 그지없다. 그건 마치 비대면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에 대한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것과 같다고 할까.
읽을수록 어떤 책과 어떤 작가가 나올까라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도 ‘서평 에세이’의 매력이다. 나는 그녀의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장르 따지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내 식으로 분류하자면 내게 그녀의 에세이는 인문학적 ‘서평 에세이’ 그 자체다.
나는 그녀의 책들에서 그녀를 보고 배우곤 한다. 정작 당사자에게 허락받지 못한 상태에서 내게 그녀를 공부할 권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가끔 책에서 만난 그녀의 일상에 나를 데려다 놓고, 책 모양 벤치에 앉아 가만히 한곳을 응시한다거나 그녀와 작은 미소를 주고받는 상상을 하며. 그녀에 대한 공부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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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권리는 딱딱하고 고단하기만 한 수험생들에게 그 동안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치열한 고민을 가능케 해 준 수작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이 지식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과정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공부가 현실 도피가 아닌 삶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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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북클럽에 참여하면서 고독함을 함께할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독자는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간의 만남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가 있었지않나 돌아봅니다 보이는 글자에 신경을 쓰면서 그렇지않은것에 소흘하지 않았나 지켜봅니다 공부함으로써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을 만나면 지금의 나에게 용기를 줍니다 밀턴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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