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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에 버트런드 러셀은 사랑에 관한 책을 썼다. 러셀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결혼과 도덕]이 그 책이다. 1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으로 세계가 잿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러셀은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우고자 했다. 그는 고대나 현대를 불문하고 모든 사회는 경제와 성(性)이 밀접하게 얽혀있다고 보았다. 또한 공동체의 성윤리는 법률에 체현되어 있는 확고한 제도들과, 여론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역, 개인의 재량에 맡겨지는 영역 등 몇 개의 층위가 있지만, 총체적인 행복과 복지의 관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성윤리를 찾고자 했다. 물론 그런 성윤리가 어떤 것인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러셀은 과거에 존재했던 제도들과 서구문명사회에서 당시 성행하고 있던 제도들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새로운 사회의 재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혼풍습은 본능적인 요소와 경제적인 요소, 그리고 종교적인 요소의 혼합물이지만 정밀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고 러셀은 보았다. 전통시대 모계사회에서의 관습은 남편에게 아내가 낳은 아이를 보살피고 어른이 될 때까지 보호할 것을 요구했다. 부성(父性)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혈통은 모계로 이어졌으며 따라서 남녀의 성 역시 자유로웠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대개 본능에 부합되기 때문에 실행에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가부장적 사회가 형성되면서 여성의 정절이라는 개념이 구축되었다. 부계사회가 아내의 정절을 강요하는 이유는 혈통의 변조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질투심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자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식을 자아의 연장으로 보았지만, 그 관계는 아내의 정절에 대한 믿음과 결부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부계혈통에 대한 인식은 여성의 정절을 보증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성의 종속을 낳았고, 정절의 범위가 육체적인 측면에서 정신적인 측면으로 확대됨에 따라 굴종과 의무를 낳았다고 러셀은 말한다. 그리고 이를 강화한 것은 종교였다.
초기 농경과 목축시대 인간들이 가장 중시했던 것은 농작물의 풍작, 가축의 다산, 여성의 다산 등이었으며, 사람들은 이를 위해 종교와 주술에 의존했다. 종교는 성을 긍정하는 요소와 배척하는 요소가 공존하지만 기독교가 정착한 곳에서는 배척하는 요소가 긍정하는 요소를 압도하면서, 금욕주의가 성에 관한 기독교의 관점으로 자리 잡았다고 러셀은 보고 있다. 특히 성바울은 결혼이 자손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간음의 죄를 예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고, 카톨릭은 성바울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자손의 출산도 결혼의 목적 속에 포함시켰다. 그 결과 성관계는 혼인관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임신을 위한 성관계 이외에는 죄악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기독교 윤리는 성적 미덕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필연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강등시키는데 기여했고, 이는 다시 여성의 자유를 축소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중세에 들어서 나타난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교회가 성을 본질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과업을 철저하게 수행한 결과였다고 한다. 그러나 러셀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시키고 결혼의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친밀하고 다정하며 현실적인 사랑’(72쪽)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낭만적인 사랑이란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했다.
여성해방은 애초부터 정치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성윤리와도 결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젊은 여성들이 정절을 지켰던 이유는 지옥불과 임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으나, 정통신학이 쇠퇴하고 피임법이 개발되면서 이러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여성들은 도덕과 자유 속에서 평등을 추구했다. 여성이 감수해야만 했던 구속을 남성들에게도 부과하기를 원한 것이다. 러셀은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이제 성윤리와 관련한 모든 문제들은 새로운 사고방식, 즉 새로운 도덕이 필요하고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책임과 의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러셀은 사람들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 무지상태에 갇혀 있는 것을 비판한다. 성윤리는 무지를 이용해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를 입수한 개인들이 자연스레 깨닫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해당된다. 아이들에게 잘못된 성윤리나 올바르지 않은 성교육은 금기사항만을 만들뿐이라며, 그래서 러셀은 ‘젊은이들이 성에 대해 집착에 빠지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성에 관련한 정보를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만큼 제공하는 것’(96쪽)이라고 했다.
그는 또 결혼은 법률적인 제도라는 점에서 다른 성관계와는 구별되지만, 법률적인 제도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습을 구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결혼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은 잘못된 성교육이나 사랑을 의무로 여기는 사고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혼이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하려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인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사랑의 자유로운 발전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제도는 나쁜 제도라며 쉽게 이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애결혼이 올바른 방향을 향한 일보진전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나는 자식과 관련되지 않은 일체의 성관계는 순전히 사적인 일로 여겨야 하며, 남녀가 자식을 낳지 않고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거기에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 결혼의 생물학적 기능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아내가 첫 임신을 하기 전까지는 결혼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149쪽) 그가 말하는 우애결혼은 혼전 동거를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한 성관계를 결혼과 구별하고, 낭만적인 결혼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생물학적인 결혼관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결혼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211쪽)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셀이 이혼하기 쉬운 것이 결혼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본 것은 아니었다. 즉 러셀은 남편과 아내는 법률의 규정이 어떠하든 관계없이 사적인 생활영역에서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행복한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러셀은 또한 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호기심을 억제하게 된 것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며, ‘유년기부터 시작해서 청년기를 거쳐 결혼생활에 이르기까지, 인습적인 도덕은 갖가지 방식을 동원해서 사랑을 망가뜨리는데 성과를 올리고 있다’(252쪽)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성간의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어떤 편견과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의 실현을 방해할까 싶어서 육체적인 토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대등한 결합을 이루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밖에도 러셀은 결혼생활에서 가족관계와 아이가 차지하는 역할,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국가로 인한 아버지 역할의 축소, 떨어지는 출생률에 따른 인구감소, 우생학 등에 인간들의 성관계와 성윤리가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도 한다.
이처럼 러셀은 사랑과 결혼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초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억압받고 구속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며, 결혼과 도덕에 대한 새로운 성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윤리는 현재의 세계에서 바라보아도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아니 근대의 역사가 억압으로 점철된 우리의 입장에서 보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일정부분 현재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 올바른 조기 성교육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성에 따른 남자와 여자의 관계 등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성과 결혼에 대한 온갖 담론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행복한 결혼의 정수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하는 데 있다. 이런 요건들이 충족될 때 남녀 간의 진지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체험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것이 된다.’(28쪽)는 그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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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시작을 보면,
지식과 산업이 무한히 발전하던 시대 (1929년)에 그릇된 성 윤리에 의한 고찰을 러셀은 이 책으로 담았다. 1929년이라는 당시의 현재에서 올바른 견해를 세우기 위함이라는데 100년 전임이 무색하게 현재에도 제대로 세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과거 미개한 제도부터, 당시의 성행하고 있는 제도의 특징들, 그리고 그 고침을 담았다. 유년시절 받은 인습적인 금기와 자제로 이뤄진 그릇된 성 윤리는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방식보다는 남의 자유를 간섭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러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한다면 남녀 간의 진지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체험 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것이라는 말하는 러셀이다. 그러니까 러셀이 말하는 성 윤리는 마구 날뛰어도 된다는 방종이 아닌거다.
1929년, 이 책은 당시 금기시되는 도발적인 성 담론이 담겨있다. 금욕주의를 표방했던 개신교에 치명적이었던지 실제 러셀은 기독교의 반대로 대학교수 임용 자리가 취소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 노벨 심사위원들은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이 책을 꼭 집어 그에게 문학상을 주었다. 그가 추구한 3가지 이상 중 인류애를 담은 이 책을 꼭 한번 읽어 보시길……. 읽고서 바람은 피우지 마시길……. 사전에 얘기해주길……. (가장 풍요롭다니 나도 분발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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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결혼과 도덕>은 백여 년 전에 쓴 글이지만 현재에도 시의적절하게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 본질을 꿰뚫는 저자의 사유를 간략히 정리해 보면,
인류가 아주 오래전 원시생활을 할 때 대부분의 부족은 모계혈통만이 인정되었다. 남녀의 관계에서 성적 결합은 있었으나 가족의 개념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자식의 소유권은 어머니와 외삼촌에게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낳은 자식이어서 사랑으로 아이를 대하지만, 아이가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누가 진짜 아버지의 아이인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적으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부계 혈통이 널리 인정되고,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자, 아내가 낳은 아이가 정말 자신의 아이인지가 중요하게 되었다. 사냥을 위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낳은 아이라면, 자식의 소유권에 문제가 생긴다. 이제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지 않은 것이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여성의 정조관념, 성적 억압이 발생하게 되었고, 종교와 결합하여 중세와 근대를 거쳐 최근까지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거짓 통념을 만들어왔다.
종교 중에는 기독교와 카톨릭이 대표적으로 성을 죄악시했다. 금욕을 지키는 것이 선이고 욕정을 참지 못할 경우에는 결혼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성경에는 아마도 남녀 간의 애정이나 사랑, 행복한 결혼이란 것을 중요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결혼은 오로지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간음의 죄를 예방하기 위해 결혼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정작 자유로운 성관계를 권장한 것도 아니다.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성관계는 오로지 아이를 낳기 위한 목적에 국한된다. 출산의 행위만이 신을 믿는 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숭고한 작업이었으므로 성적 결합의 유일한 예외가 된다. 여성이 성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도 터부시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성은 인습과 도덕에 의해서 억압되어왔다. 그럴수록 성에 대한 욕망은 커져만 갔다.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어 한다. 굶주린 사람의 음식에 대한 탐욕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음식을 먹도록 해주는 거다. 주린 배를 채우면 한동안 음식에 대한 필요 이상의 탐욕이 생기지 않는다. 성욕도 이와 같다. 채우지 않거나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더 깊숙이 숨어들어 육신과 정신을 괴롭히게 된다.
낭만적인 사랑을 등장하게 한 것이 전통적인 성 윤리의 유일한 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정신적인 사랑만이 아름답다고 여겨졌으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낭만주의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
결혼이란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서로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념, 관심사, 성격이 맞지 않을 경우 한 평생 살겠다는 약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참기 힘든 고문이 될 수도 있다. 결혼이 불행하게 귀결되지 않으려면 자유롭게 이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나, 부부간의 애정과 성적 결합 외에 아이를 키우는 가족의 역할을 감안한다면, 이혼이 도덕적으로 권장할만한 일이 되어서도 안된다.
프랑스의 경우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겠다. 미국은 결혼한 상대방의 바람기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 대신 이혼하기가 어렵지 않다. 미국의 가족이 그렇다고 행복하거나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프랑스는 이혼을 많이 하지 않는다. 가족 간의 유대가 훨씬 돈독해 보이고 자녀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다한다. 대신 상대방에 대해 엄격하게 성적으로 구속하지 않는다. 서로의 자유를 허용한다.
이상적으로는 모계사회에서의 어머니가 아이를 소유하고 양육하며, 아버지의 역할은 국가가 맡는 것이 좋은 대안이 된다. 아버지는 남성의 폭력성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은 대부분 국가가 대신할 수 있다. 민족국가와 군국주의는 전쟁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국가의 역할은 국경을 초월한 국제기구, 즉 세계국가가 담당하는 것이 옳겠다.
철학자 러셀은 결혼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서로 간에 평등하고, 견해가 일치하고, 자유를 허용하고, 책임을 다하여 아이를 돌볼 수 있다면 결혼은 서로 다른 두 명의 남녀가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결합이다. 플라톤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까지도 국가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현대의 과학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밝혀냈다.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 따뜻한 접촉을 통한 위안은 생존에 필수요건이고 유일하게 부모만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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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행위의 사회적 행위는 결혼? 버트런드 러셀은 사랑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가장 뛰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반전 운동과 새로운 전쟁을 경고하며 전방위적인 사회 활동을 펼치던 러셀이 갑자기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을 집필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학자로서 러셀은 1 1=2라는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공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세하게 감지되던 수학 세계의 균열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수학의 확고부동한 기초를 닦고자 했기 때문이다. 러셀에게 있어 사랑과 결혼에 대한 탐구는 이와 동일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단지 그 주제가 수학에서 인간사회로 옮겨갔을 뿐이다. 이 책에서는 러셀은 사랑과 결혼이 사회의 가장 기초가 된다는 것을 밝히고, 지금껏 억압받고 구속되어 왔던 사랑을 위한 새로운 결혼과 도덕을 제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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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지만, 난 사랑과 결혼은 오래 오래 같이 가기 꽤 어려운 개념같다. 사랑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다르지만 사랑은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게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라 사랑 = 그 사람을 자유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혼을 해서 배우자의 자유를 사랑하기는 정말 어렵고 주로 먼가 바라게 되는 것 같다. 돈을 더 벌어 오던가, 애를 좀 더 잘 봐주던가, 집안일은 도와주던가 결국 생활 공동체 , 육아 공동체 남고 사랑은 안드로메다로 가는 여기서 필요한 것도 중용일까? 결국 행복한 결혼의 정수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 하는데 있다. 이런 요건들이 충족 될때 남녀간의 진지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체험 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것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