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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뒤에 -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중에서
안중근은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독려한 그의 바람은 지금 우리 시대의 커다란 목표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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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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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안중근 의사 서거 106주기를 맞이한다.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단순히 교과서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다. 흔히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던 이 분은 그 이상의 꿈을 갖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던 분으로 단지 그 직함으로만은 부족한 분이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라도 평전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태어나 30대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그 분의 짧은 생애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들은 너무나도 많다. 이제 그 분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한다. 현 시대에 접목시킬 그 분의 사상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1879년 9월 2일 : 안태훈(부), 조 마리아(모) 사이에서 태어남.
안중근 의사의 삶을 최소한으로 요약해 보았는데 그의 업적을 년도가 아닌 날 수로 따져야 한다. 그 만큼 조국을 위해 하루하루 고민하고 실천해 왔던 것이다.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정신을 갖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설립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한 모습을 보며 그 당시 관료들의 자기 목숨 구하기에 바쁜 모습과 대조적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나서도 당당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과 일제의 침략이 죄악임을 밝히고 한국의 자주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나선 그분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 뿌듯하다. 이런 분을 우리는 영웅이라 불러도 모자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안중근 의사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애국심과 구국운동을 통한 희생정신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평전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았다. 이미 그 당시에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를 구상한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국제열강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고 일본 만행을 알리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탁월한 전략가였고 자민족의 이익이 아닌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강조한 국제 평화주의자였으며 마지막으로 일본군도 글을 부탁할 정도로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훌륭한 필력을 소유한 탁월한 문장가였다는 것이다.
오직 조국을 위해 삶을 맡겨버린 그 분의 삶에 존경을, 조국의 미래만을 위해 고민하며 살아왔을 그 분의 삶에 위로를, 나아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함께 하는 진정한 평화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애썼던 그 분의 생각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100년 전에 이미 조국의 독립과 함께 더 크고 위대한 생각과 계획을 세웠다니 감탄이 절로 난다. 이로서 오늘날 안중근 의사를 조명해야 할 이유는 분명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안중근’ 이름만으로도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단순히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 아닌 탄생과 활동시기에 맞춰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의 구체적인 설명이 곁들여져 역사공부도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책이다. 게다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 몰랐던 면모들이 저자의 평론이 곁들어져 마음에 새길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책을 덮고 나니 긴 숨을 쉬었다. 아마도 이 분의 역동적인 삶의 모습들이 가슴 벅찼던 모양이다. 그리고 뒤이어 귓가에 그 분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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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고 싶은 뮤지컬이 한 편 있다. <영웅>이라는 뮤지컬로 안중근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이제 중학생이 된 딸과 함께 꼭 보러 가야지...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역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위인전, 역사책 보다는 소설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다른 방식으로라도 우리 과거를 알려주고 싶어서다. 아니, 내가 그 작품을 보고 가슴 뜨겁게 감동받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이후, 우리 역사 속에 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가 없다. 교육을 위해 편집되고 짧아진 이야기가 아닌,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담은 위인들의 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이다. 고은 시인님의 <이중섭 평전>을 읽은 후론 앞으로 자주 우리 위인의 평전을 찾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감없이 펼쳐진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와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맡은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모습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감동을 준다.
<안중근 평전>은 그렇게 찾아온 책이다. 3.1 운동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고, 광복절이 어떤 날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우리 역사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얼마 전엔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몰라 곤혹을 치른 걸그룹 멤버가 있었다던데, 아이들과 부모가 이렇게 역사에 관심을 갖고 함께 책을 읽으면 그런 일도 없을텐데 말이다.
이창호의 <안중근 평전>은 어마어마한 자료집이다. 저자는 평전을 서술하며 자신이 참고한 책을 바로 밝히고 있는데 그 다양함과 양이 엄청나서 저자가 이 "안중근 평전"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원래 위인전은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 이야기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중근 평전>은 그 역사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을 읽으며 이 책이 한 사람의 평전인지, 역사책인지 헷갈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어린 시절은 무척이나 호방했던 모양이다. 앉아 글을 읽기 보다는 밖에서 말을 타고 사냥을 하고 화살을 쏘면서 노는 것을 훨씬 좋아했단다. 뤼순 감옥에서 조목조목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밝혔던 안중근을 생각하면 무척 의외이다. 하지만 청년이 되며 신문을 찾아 읽고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주시했던 점을 생각하면 안중근은 정세에 밝고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는다. 그런 행동력이 안중근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조금은 성급하고 욱 하는 성질이 보였던 것도 같다. 워낙 정의심과 의협심이 강해서 잘못된 점은 두고 볼 수가 없었던 청년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 국가, 세상에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안중근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이제 교육구국사업이나 애국계몽운동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으니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143p
안중근이 어린 시절 동학농민 운동과 관련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읽었던 적이 있지만 사실 확실히는 몰랐었다. 또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하고 처음부터 총과 무기로 일본을 처단하려고 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안중근 또한 교육이 나라의 근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다만 급변하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 속에서 교육 만으로는 일본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안중근이 어떻게 하얼빈까지 가게 되었는지, 누구와 만나고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등 그의 행로에 대해서는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다. 일본의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해 거짓을 이야기하기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한, 많은 자료를 통해 실제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를 추적하듯 서술한다. 그리고 안중근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복원해 본다.
며칠 전 어린이 TV 프로그램의 CF를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위인전 도서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아직 살아있는 유명인이었다. 그렇다. 위인이 아니라 유명인이다. 물론 그들 또한 우리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해냈고, 하고 있다. 그들이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노력은 본받을 만하다. 그렇지만... 과연 아이들에게 우리 위인들의 이야기 대신 그런 유명인의 이야기를 읽혀야 할까? 단지 인기가 더 많다는 이유로? 그런 교육이 계속 되니 안중근 의사의 얼굴도 모르는 20대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역사 교육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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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비교적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할아버지 안인수와 아버지 안태훈이 일찍부터 깨어 있는 분들이었고, 생활도 넉넉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사냥을 즐겨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산과 들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했다. 차츰 성장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와 짐승들을 쫓아다니며 사냥을 하느라고 학업은 뒷전이었다. 이에 그의 부모와 선생들이 크게 꾸짖어도 안중근은 쉽사리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백발백중으로 처단한 사격술은 어릴 적부터 익힌 훈련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의 양곡 문제 때문에 성당으로 피신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천주교를 접했지만, 성당에서 교리를 공부하면서 그 누구보다 순수한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안중근은 1897년 1월, 열아홉의 나이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1910년 3월 죽음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신실한 천구교인으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은 안중근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신앙심을 갖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천구교에 대한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두터워졌다. 이때 천주교는 안중근에게 있어 단지 신앙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안중근은 자신은 물론 사람들 모두 천주교를 믿고 하느님의 교리를 따르며 사람다운 삶을 살기를 바랐다.
이와 같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안중근의 행보는 언제나 당당했다. 학교를 세우고 의병에 나서고 마침내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까지 그의 삶의 지표에는 항상 신앙심이 있었고, 민족의식이 있었다.
안중근이 외국 땅에서 의병을 창설하여 훈련한 목적은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일본으로부터 명실상부하게 독립하고자 함이었다. 일본군은 국내를 비롯하여 중국에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안중근이 참여해 처음으로 시작한 의병전투는 국내 진입 작전이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세 발을 쏘았다. 한국 침략의 원흉,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안중근의 의탄을 맞고 현장에서 쓰러졌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을 쏘아 명중시킨 안중근은 이어서 일본인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모리 야스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 등 세 사람을 연달아 쏘아 이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안중근은 처음부터 적도들을 포살하고 당당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사오가 일제의 침략 죄악을 밝힘으로써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피신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옥중 투쟁을 통해 만국공법의 원칙을 밝히고 국제 열강의 지지를 받아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현장에서 순순히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지 않으면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행위였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리한 일차적인 목적을 이루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라는 목적을 당성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안중근의 의도와는 달리 1910년부터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행한 마지막 유언에서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형을 집행하는 관리들도 앞으로 한일 간에 화합하여 동양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동양 평화였던 것이다. 그가 30여 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인 동양 평화는 안중근의 삶의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정수이며, 그가 존재했던 이유였다.
안중근은 민족 독립의 논리와 동양 평화의 논리를 불가분의 관계로 구조화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주의를 무력화시키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안중근은 자민족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강조하며 지역 협력을 강조한 열린 민족주의자였다. 안중근은 한국독립운동의 영웅으로서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동양 평화의 주창자로서 국제평화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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