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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임은 틀림없다고 하겠지만, 난해하게 이론적으로 적어놓은 글들은 아니다. 저자가 정신병치료를 받던 기간에, 그러니까 아내를 살해하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집필하기 이전에 있었던 인터뷰와 서간문, 그리고 강연원고를 모은 글들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소프트하다.
알튀세르의 저작이라면... 그가 말하는 철학은 당연히 맑스주의 철학이리라. 그리고 맑스주의 철학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포이에르 바하에 관한 테제를 이야기 한다. 그중에 "이제까지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뭐, 판본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 번역이겠지만)"라는 테제가 가장 매력적이겠지. 이에 대해 노년의 알튀세르는 이런 얘기를 한다. "이 문장은 원리상 부정확합니다. 마르크스는 세계를 해석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따라서 추상적인, 무엇보다도 수동적인, 따라서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려 하는 듯 합니다. 실상 모든 철학은 능동적입니다. 철학은 항상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 합니다. 세계를 혁명적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그리하든, 반동적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그러하든, 보수적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그리하든간에 말입니다." 맑스가 철학을 정의하는데 부정확했다는 소린가?
알튀세르의 논점은 그게 아니다. 우선 그는 철학 일반론적인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철학이 사고하는 세계는 탈구되고 재절합되었기에 통일된 세계이다. 그것은 질서부여된 세계이다. 그것은 분해되고 재조립된 상이한 사회적 실천들이 구분 및 위계의 일정한 질서, 의미 있는 그러한 질서 속에 배치되는 세계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철학이 자신의 대상들을 지배한다는 점이 아니라, 철학이 이 대상들을 구분 및 내적 위계의 일정한 질서속에 배치하기 위해 이 대상들을 분해하고 재조립한다는 점이다." 철학을 철학으로써 쓰는, 써왔던 철학자들의 철학이 그러하다는 점. 유명한 알튀세르의 '철학의 공백 혹은 여백'이란 테제는 이러한 철학 일반론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된다. 즉 철학의 여백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 혹은 후방에 있다는 것. 물론 맑스의 철학이라는 것도, 정의가 가능하다면(알튀세르의 주장처럼) 이러한 여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맑스는 철학을 철학으로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장 피하려고 노력했기에 철학자로서 교육받은 그가 <자본>을 통해서 철학을 표현하고 실천하려 했다는것이다. 자세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유명한 알튀세르의 여러 저작들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논리들을 간략하게 담은 책이다.
또한, 맑스주의 철학을 이야기하자면 또한 절대로 빠질 수 없는게 두가지 있다. 유물론에 대한 것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 일단 유물론/관념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말이다. "나는 어떤 철학에서도 관념론적 요소와 유물론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주어진 어느 철학 속에서 두 경향 중 어느 하나가 지배하지요. 다시 말해 근본적이고 난폭한 분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내 생각에 관념론을 분별할 수 있는 특징은, 그것에는 단 하나의 동일한 질문이 붙어다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 질문은 두가지로 이중화합니다. <근거율>은 기원만이 아니라 또한 목적과 관계됩니다. 게다가 기원은 아주 자연스럽게 목적으로 복귀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원에 대한 질문은 목적이라는 질문에 입각하여 제기됩니다. 목적은 자기 자신을 예견하면서, 기원에 대한 질문 위에 그리고 그 속에 스스로를 투사합니다." 앞의 인용문은 일반적으로 철학을 바라봐야하는 시각에 대한 조언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데, 한마디로 관념론 철학과 궤를 같이하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관념론의 기원/원인 쌍 이론은 유물론의 과학성에 대한 강조의 근거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은 이데올로기들 아래 놓인 상이한 사회적 실천들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주고 그것들에 제자리를 잡아 주는 범주들의 배치를 생산합니다." 결국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관계는 이렇단다. 사실, 상대적으로 쉽게 읽히는 편집이었으나, 막상 한 문장문장을 해석하기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전술했듯이 근원과 목적의 동어반복적인 관념론이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과학적 혹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비판의 주체라 할 수 있는 맑스주의 유물론 철학은 <자본>을 통해서 혹은 그중 어떠한 것을 근거로 무엇을 확실히 추구할 수 있는가? 과연 합목적적인 계몽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논리전걔는 어찌보면 서구대륙철학계에서 어쩔 수 없이 밟아갔던 여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이러한 귀결에 이르렀다.
"그렇습니다. 우발적 유물론은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이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세계로 돌아가 볼 수 있겠지요. 기본 테제를 상기해봅시다. 세계 형성 이전에 무한한 수의 원자가 허공 속에서 평행으로 낙하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확언의 함의는 강력합니다. 1) 세계가 있기 전에는 형성된 어떤 것도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동시에 2) 세계의 모든 요소들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세계가 있게 전부터 고립상태로 존재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전자가 뜻하는 것은 세계의 형성 이전에는 어떤 의미도, 또 어떤 원인도, 어떤 목적도, 어떤 근거나 부조리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합리적 목적론이든, 윤리적,정치적 또는 미학적 목적이론이든 간에 모든 목적론의 부정입니다. 첨언하자면 이 유물론은 주체(신이든 프롤레타리아트이든)의 유물론이 아니라, 지정할 수 있는 목적이 없이 자기 발전의 질서를 지배하는 (주체 없는) 과정의 유물론입니다."
구조주의 혹은 아나키즘의 냄새도 나지만, 어째 동양의 기론이랑 연결되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드는 정리다. 맑스의 철학이 의미가 있다면, 그의 구체적인 실천에는 필연적으로 특정한 외형과 지향을 지니고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인 의미는 이러한 유물론 철학을 철학이 아닌 실천을 통해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여백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어쩜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개인'이나 '질서의 부분', '결절점'등에 착목하는 것도 이러한 오랜 시대에 걸친 성찰들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생각마저 들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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