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완성된 그의 대표 장편소설 '백치'는 다양한 인물들의 갖가지 성격과 그 속에 용해되어 흐르는 갈등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매우 방대한 분야에 관하여 하나의 귀결을 모색하려는 작가의 숨은 노고가(900여페이지를 읽는 매순간) 깊이 와닿는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에서 설정한 시대적(사회적)배경 및 사상은 선과 미와 진실이 공존할 수 없는 사회적 여건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니힐리즘의 팽배로 인한 신에 대한 회의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러한 어수선한 배경에서 등장하는 개성만점의 인물들은 정말 의식적이고 박식하며 때로는 섬망적 히스테릭함으로 무장하고 소설의 시,공속에 차분히 배치되어 있다. 그들의 '발언'시간을 기다리며 우울한 조소와 함께 말이다... '백치'의 핵심적인 갈등구조는 주인공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공작'과 '예빤친 장군'의 셋째 딸 '아글라야',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부터 버림받은 절세미녀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기형적인 '삼각관계'로써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포괄하고 있다. '인간은 전능할 수 없다. 도덕적인 인간은 현실에서의 백치이고, 현실에서의 (정상)인간은 도덕적으로 백치였다...' 미쉬낀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애초에 의도한대로 순결하며, 도덕적이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착한인간의 전형)로써 가브릴라의 탐욕과 나스따시야의 광기, 이뽈리뜨의 철저한 무신론을 사랑과 이해로써 감싸주는 그리스도적 능력을 작가로부터 부여받은 '백치'이다. 그는 충분히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예의를 알고 박식한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성격'탓에 (속세의 흙탕물에 찌들대로 찌든)주위사람들에게 '백치'로 불려지게 된다. 하지만, 자신들을 정상이라 칭하는 (미쉬낀을 제외한)그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는 또다른 '백치'임에 틀림없었다. '신의 덕과 존재를 논할 땐 말과 행동이 아닌 가슴과 영혼으로써 다가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쉬낀은 너무 조심스러웠고, 이뽈리뜨는 너무 '초월'했었다.' 이뽈리뜨는 폐병을 앓는(살날이 몇주 남지않은)18세 소년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폐병과 관련하여 철저한'무신론'을 주장하였고(이는 작가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부분이었다) 모든 우주를 부정하였다. 특히 로고진(미쉬낀의 연적!)의 집에 걸려있던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그림을 본 이후 신에 대한 이뽈리뜨의 회의는 확고해지기에 이른다. 미쉬낀은 이러한 이뽈리뜨의 장관설을 시종일관 진지하게 경청하고(그는 늘 이런식이었다!) 그 주장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뽈리뜨를 진정시키며 '착찹한'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철저한 기독교신자이면서도 이뽈리뜨의 방자함에 절대 토를 달지 않고 체념(?)하는 미쉬낀은 너무 소극적인 모습이다. 반면 이뽈리뜨는 종교의 본질을 주관적인 시각과 가치로 왜곡한 나머지 너무 앞서 나간 모습이었다...(물론 '죽음'이라는 시간의 한계앞에선 불가피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인생도 모두 과거와 환경의 환영이다. 나스따시야의 돌출적행동들과 냉소적인 독단은 절망적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조롱이었으며 로고진은 나스따시야가 창조한 각본의 '반전'이었다.' 아글라야와 나스따시야는 미쉬낀을 사이에 두고 고도의 심리전을 벌이게 된다. 창녀와 대지주 집안의 셋째 딸이라는 신분적인 차이를 놓고 벌이는 갈등의 전개는 소설의 '백미'이며 읽는이로 하여금 비상한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양념역할로써의 성격을 충분히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흥미로운 사건은 두번의 반전을 통하여 소설의 결말을 도출해 내기에 이른다... '승리자' 나스따시야는 미쉬낀과의 결혼식(아글라야는 절망한 나머지 폴란드의 한 장교와 사기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직전에 군중속에 섞여있던 '패배자' 로고진의 품속에 안겨 자신을 데리고 어디든지 가자고 말한다. 이것이 첫번째 반전이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간다... 미쉬낀은 역시 '주인공'답게 이 급작스런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듯 침착하게 로고진과 나스따시야를 찾아나선다. 작가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시체한구(당연히 나스따시야...)가 방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로고진의 집으로 미쉬낀이 동행하면서 우린 두번째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나스따시야는 로고진에게 살해당한것이다... 또쯔끼(자신의 양아버지뻘 되는 부호!)에게 16세때부터 성적으로 농락당한 나스따시야의 파란만장한 운명은 그렇게 (이미 그녀가 짜놓은 각본대로) 일그러진것이다. 이불밑으로 살짝 드러난 그녀의 발가락은 독자로 하여금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함에 충분한 것이었다... 미쉬낀과 로고진은 함께 나스따시야옆에 누워 아침을 맞는다. 살인자 로고진은 미쉬낀의 침착하고 온유한 손길에 어느정도의 안정을 찾게되고 곧바로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15년 시베리아유형을 선고받게 된다. 돈키호테, 장발장, 그리고 미쉬낀 공작... 도스토예프스키의 모험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우린 '순결'과 '도덕'이 무엇인지를 미세하나마 미쉬낀을 통해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