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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심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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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YES24를 검색하다가 아래의 어느 분이 쓰신 리뷰를 보고 생각한 바가 있어 글을 적게 되었다. 아래에 글을 쓰셨던 분이 크게 잘못 생각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왜냐하면 아래의 분이 쓰신 대로라면 YES24의 회원들이 이 리뷰만을 읽고서 도스또예프스끼를 자칫 무신론자로 오해하고 또 그런 이미지로 쉽게 규정해버릴 까봐 두려워서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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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YES24를 검색하다가 아래의 어느 분이 쓰신 리뷰를 보고 생각한 바가 있어 글을 적게 되었다. 아래에 글을 쓰셨던 분이 크게 잘못 생각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왜냐하면 아래의 분이 쓰신 대로라면 YES24의 회원들이 이 리뷰만을 읽고서 도스또예프스끼를 자칫 무신론자로 오해하고 또 그런 이미지로 쉽게 규정해버릴 까봐 두려워서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도스또예프스끼는 기독교 작가이지 무신론자가 아니다. 많은 평론가들조차도(꼰스딴찐 모출스끼처럼) 도스또예프스끼가 그려낸 주인공들에 매혹되어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윤색한 경우가 없지 않다고 나는 본다. 아래의 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이반 까라마조프의 <대심문관>의 전설을 마치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의 사상이 직접 투영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사실 도스또예프스끼는 평생에 걸쳐 신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증명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만 보아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일 도스또예프스끼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스뜨로프스끼처럼 공산당 팸플릿 같은 소설을 썼다면 그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서 빛난다. 사실,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의 신비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예수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왜 사람들 앞에 휘황찬란하게 재림해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돌 한 조각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주기만 해도 수 천명은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심문관은 묻는다: 왜 악마의 유혹을 거절해야만 하나? 그 기적으로 더 많은 민중을 구원할 수 있을텐데? 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 구원하는 것 아니냐고.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반의 입을 통해서 그가 피를 토하며 고민했던 문제를 고백한다; 신이 살아있다면 죄없는 인간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만 할까?; 그래서 이반은 대심문관의 입을 빌려 죄없는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기적을 베풀고, 마침내 지상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전설 속에서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반이 틀렸다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대심문관>의 이야기 속에 다 들어있다. 예수의 침묵이야말로 가장 우렁찬 웅변인 것이다. 욕정과 돈 때문에 가족이 서로를 배신하는 지옥 같은 속세 속에서, 기적과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자유의지에 의해서 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수라는 것을 웅변한다.

더 나아가 도스또예프스끼는 대심문관의 이야기 속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실패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예견해낸다. 기적에 의해 지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환상을 민중들에게 심어주고 기독교와 너무나도 흡사한 비전을 제시하는 파쇼야말로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것이다. 사실, 돌이 빵으로 바뀌는 기적은 대심문관 같은 사람들의 손에서가 아니라 민중 자신들의 손에서 일어난 것의 눈속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지 않았던가.

하나 더 지적하자면, 위의 분은 아이들의 등장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셨는데, 아이들이 나옴으로써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비전은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평론가들에 따라서는 마지막에 아이들과 알료샤가 모여 화해하는 장면을, 촌스러운 신파의 장면이 아니냐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도스또예프스끼가 심사숙고 끝에 집어넣은 장면임에 분명하다. 도스또예프스끼는 항상 생활고에 쪼들렸기 때문에 부유했던 다른 러시아 작가들처럼 퇴고를 해볼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인쇄가 되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집필한 것을 깨닫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를 쓸 당시의 도스또예프스끼는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그는 분명히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퇴고를 거듭했을 것이다.

알료샤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를 속세로 보낸다. 그러나 그 자신도 자신이 떠나는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파계의 힌트는 조시마 장로의 형이 죽어가면서 남긴 이 한마디 말에 들어있다:"산다는 게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어요!" 이 짧은 한 마디야말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주제를 단숨에 설명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버지 까라마조프는 살해당하고, 드미뜨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극의 길을 걷게 되고, 이반은 병을 얻어 쓰러지고- 이 증오와 광기의 지옥도 속에서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희망은 바로 아이들의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렇다. 수도원에서 다른 신도들의 죄를 위해 기도하고 독야청청하는 것도 하나의 위대한 삶일 수 있다. 그러나 속세에서 서로를 구원하려고 애쓰고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정말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도스또예프스끼는 아이들에게서 구원의 희망을 보고 인간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부탁 드리건대, 아래에 글을 쓰신 분은 <까라마조프..>를 한번 다시 읽어보셨으면 한다. 이건 문학적 소양이나 서구 소설에 대한 배경지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거야 아무래도 좋다. 만일 이반 식의 무신론을 주장하기 위해 이 소설이 쓰여진 것이라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산만한 구성과 주제의 심오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위대한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방법은 다시 읽어보면서, 또 읽은 후에도 곰곰이 내용을 반추하는 수 밖에는 없다.

s******0 2003.03.06. 신고 공감 25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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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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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중 단연 죄와 벌이 가장 유명하고 독보적인 작품인 줄 알았다. 그러나 죄와 벌 보다 한수 더 쳐주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장 구입하여 보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작가는 우리의 의식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까라마조프씨네 집안의 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한다. 이야기는 그의 장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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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중 단연 죄와 벌이 가장 유명하고 독보적인 작품인 줄 알았다. 그러나 죄와 벌 보다 한수 더 쳐주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장 구입하여 보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작가는 우리의 의식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까라마조프씨네 집안의 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한다. 이야기는 그의 장남인 드미뜨리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거의 당연하게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짓고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한 사람들과, 자연, 그리고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무생물들의 평가인 것 같다. 실제로 나도 나의 친구들에게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었다. 친구들은 너무도 답이 뻔한 질문이라는 듯이 욕을 해대며 이름모를 그 아들을 욕해댔다. 죄와 벌에서도 그랬지만 드미뜨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여자관계가 문란하고, 자신의 자식들인 자신들을 어렸을적 부터 키우기 귀찮아 버려버린 사실등에 분노한다. 막내인 알료사를 빼고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생각지 않고 쓰레기 보다도 못한 인간으로 치부해 버린다. 심지어 기독교인인 알료사가 다니는 교회의 장로들에게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무례한 행동들을 범한다. 저자도 이야기의 처음에서 밝히고 있듯이, 까라마조프는 책으로 그 생애를 다룰만큼 위대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죄와 벌과 같은 관점으로 보자면 오히려 죽은 것이 잘된 인간인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돈을 도둑맞을까봐 끌어안고 자신의 혈족들 마저도 천대하며 멀리한 아버지는 시체가 되었다. 기독교에서 모든 사람은 형제라고 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으니 당연히 큰 죄이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마도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죄를 추궁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대 인간으로써 하찮고 예수를 욕보인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해 묘한 변론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타락한 인간을 벌하는 인간인 셈이다. 사람들의 의식과는 반하는 이 사실. 무수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이 책에서 유독 이 점이 나의 눈에 핵심으로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범인이 누구냐는 것은 중요치 않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사실에 대한, 아니 그 사실, 그 공간, 그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셈이다. 사람들의 의식에 도전한 도스또예프스끼... 그러나 묘하게도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벗어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확연한 답이 없어 보이는 책... 어쩌면 내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고, 애초에 해답따위는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존속살인에 대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립시킨 이 작품은 과연 대단히 위대한 작품이다.
h*******e 2004.11.05.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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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찾아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찾아서" 내용보기
방대한 분량도 대작의 요건 중 하나인가? 촘촘하고 빈틈없는 글자들과 판형, 그리고 녹록치 않은 양이 시작부터 나를 버겁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말도 독서를 더디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초심자에게 무엇을 안겨줄 것인가? 완독에 거의 3주가 걸렸다. 덕분에 독서를 위한 호흡이 좀 더 길어 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소설은 과연 가벼운 글쓰기도 부답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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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분량도 대작의 요건 중 하나인가? 촘촘하고 빈틈없는 글자들과 판형, 그리고 녹록치 않은 양이 시작부터 나를 버겁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말도 독서를 더디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초심자에게 무엇을 안겨줄 것인가? 완독에 거의 3주가 걸렸다. 덕분에 독서를 위한 호흡이 좀 더 길어 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소설은 과연 가벼운 글쓰기도 부답없는 글 읽기도 아니다'라는 점을 확실하게 새겨 준다. 소설, 나아가 문학작품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당대인들로 규정되는 그 시대와 시대정신의 반영이자 우리들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초역사적, 본원적 질문에 대한 탐구와 모색, 이해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전자의 맥락에서 발견하는 특수성과 후자에 대한 보편적 해답들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 작품과 작가의 이해를 위해 나름대로 근대(주로 19세기) 러시아문학의 계보를 간추려 본 것도 작은 소득이다. 푸쉬킨과 고골에서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거쳐 체호프와 고리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러시아적 전통과 토양속에서 이들이 빚어 낸 문학작품들은 과연 동시대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인의 공감속에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 가지 느낌, 도스토예프스키도 '러시아인들은 철학자들'이라고 자부심 넘치게 피력하고 있는 데, 어쩌면 (환경결정론적 편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북극에 가까운 춥고 매서운 기후가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와 사유를 풍부하고 깊이있게 축적시키고 단련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진정한 러시아 인들은 철학가들이기 때문이지(p.1027)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시대를 거친, 19세기 후반(농노해방과 그 이후) 러시아 사회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작가는 '까라마조프 적(的)'이라는 표현을 여러차례 등장시킨다( 호색한과 탐욕과 유로지비, 하느님으로부터 정욕을 선물받은 벌레, 광적이고도 채 다듬어지지 않은 대지의 힘, 아주 극단적인 모순, 서로 다른 두 심연, 머리 위에 있는 있는 천상의 심연과 우리들 발 밑에 있는 가장 저열하고 악취나는 타락의 심연......). 더구나 프랑스를 필두로 한 유럽 절대왕정과 그를 둘러싼 상류사회의 출구없는 퇴폐와 허영, 쾌락의 탐닉과 방황,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바야흐로 수면 위로 부상하려는 거역할 수 없는 사회변혁의 기운들, 이를 반영하는 사상과 인식, 감정과 정서들의 대립과 대결의 임박함은 알게 모르게 그 때를 사는 사람들에게 감지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시대는 단지 까라마조프 뿐만아니라 사회가 온통 히스테리적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요즘 정신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p.1008) - 오오, 우리 러시아 인들은 모두 극단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선과 악의 놀라운 혼합체인 것입니다.(p.1218) - 미친 듯이 달리는 삼두마차, 방종과 질주, 개화와 문명을 위해 광포하게 질주하는 환영, 그 불안의 소리((p.1260) 이 작품을 통해 표출되는 작가의 사상, 인생관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신(神)과 인간(人間)의 문제이다. 과연 신(神)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교회의 사회재판과 그 권리의 범위문제(p.116)"가 가지는 내포와 외연속에서 작가의 인식을 살필 수 있을 것같다. 역시 그 압권은 제5권 찬반론 중의 "대심문관"편이다. 박상륭(죽음의 한 연구)이 떠오르고 이문열(사람의 아들)이 그보다는 조금 덜 뚜렷이 떠오른다. 그것은 곧 영생에 대한 믿음을 인간으로부터 박탈해 버리면 당장 사랑뿐 아니라 인류 생활을 지속시키는 모든 활력이 고갈되고 말 것이라는 입장에서 그 반대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는 이른바 지질학적 변동이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념만을 파괴하면 되는 걸, 만일 인류가 한 사람씩 하느님을 거부한다면, 과거의 모든 세계관과 도덕률은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는 거야. 인신(人神)이 등장하는 거야. 인간은 거대한 신적 자존심으로 위대해 질 것이며 스스로의 의지와 과학으로 무한히 자연을 정복하면서 그때마다 그로 인해 커다란 희열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천국의 희열에 대한 과거의 희망을 보상해 줄 수도 있겠지.......(p.1133참조) 두번 째로, 이 작품의 모티브이자 핵심 골격인 '친부살해'사건-그것도 돈과 여자를 매개로 한-의 변론을 통해 호소하고자 한 윤리(倫理)와 가족(家族)의 가치문제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무너진 윤리에 대한 비판과 그 복원에 대한 상투적 호소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부모와 자식, 가족에 있어 교육문제를 중요하게 제시한다. 아름다운 추억이 우리를 커다란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아름다운 추억, 특히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추억들은 미래 생활에 숭고하고도 강렬한 그리고 유익하고도 아주 건전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그런 추억들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면, 그 추억은 언젠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p.1351)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마도 그러하였던 것이고 나 역시 그런 것같고 내 아이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우선 강하게 뇌리에 남는 점은 작가의 대단한 내공이다. 방대한 작품속에 씨줄과 날줄로 짜여진 수많은 사건과 만남과 대화들은 정작 아주 짧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펼쳐진 것들이다. 이러한 수많은 장면들과 파편들을 입체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조립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대단히 세밀하면서 지칠줄모르는 성격과 심리묘사는 다름 사람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돋보인다. 따라서 그 여운도 짧지 않을 듯하다. 어려운 작업이었음에 틀림없었을 번역의 무난함도 덧붙이고 싶다. 18-19세기 소설들에 부쳐 평범한 하인들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도 나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므로...(p.185) - 그나마 도스토예프스키에서는 소위 상류사회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도 다양한 지위를 가지고 등장하고 있는 점은 상대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다. 이 점 역시 그 자신의 삶의 궤적과 실존적 경험의 제한적 반영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인상깊은구절]
마음에 남는 구절들 - 나는 인류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며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구체적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p.111) - 논리 이전에 사랑해야 해요. 반드시 논리 이전에라야만 그 의미를 깨닫게 되죠(p.410) - 마음이 속삭이는 대로 믿을지라, 하늘나라의 보증이 없을지라도(p.440)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p.505) - 평생 동안 나는 고작 한 뿌리의 파를 적선했을 뿐이며 그것이 내가 한 선행의 전부예요(p.624) -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예요.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르겠어요. 비록 우리들이 추악하기는 하지만, 추악한 동시에 좋은 사람들이예요, 추악하고도 좋은 사람들(p.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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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진리에서 선험적 진리로
"경험적 진리에서 선험적 진리로" 내용보기
우리에게 허용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우리에게 금지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또 우리에게 강요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죄'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아마 처음에는 관습적이거나 종교적인 것, 그러니까 토템totem과 타부taboo라 불리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서 인간은 굳이 명문화된 죄의 개념규정을 할 필요가 없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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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허용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우리에게 금지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또 우리에게 강요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죄'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아마 처음에는 관습적이거나 종교적인 것, 그러니까 토템totem과 타부taboo라 불리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서 인간은 굳이 명문화된 죄의 개념규정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 집단의 크기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명령에 따르기라도 하듯 곧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기를 거듭했다. 공동체의 크기가 워낙 크다보니 기존의 관습, 다시말해 오랜 암묵적 동의는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는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런 아노미anomie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결국 사람들은 삶의 세세한 규칙들을 명문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허용된·강제된·금지된 것을 깨는 것은 영웅이거나 무뢰한이다. 물론 무뢰한은 누구에게나 비난을 받게 마련이지만 그에 반해 영웅의 인습타파는 찬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영웅에 의한 사회발전은 과대망상적 영웅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그것을 『죄와 벌』에서 다룬 바 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크게 인간의 규범, 즉 '죄'의 개념규정에 대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 만약 인간의 행동이 성문법에 의해서만 행동이 제약된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인간이 가진 소중한 보물이 아니라 단지 영원한 천형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들을 본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 내부의 소리, 양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의 중심 줄거리는 대체로 '드미뜨리 까라마조프가 친부살해의 혐의를 받은 재판과 그 재판을 둘러싼 전후관계'가 될 것이다. 드미뜨리 사건이 작품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히 섬세한 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드미뜨리의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한 것은 스메르쟈꼬프였다. 따라서 실제로는 법적인 책임을 스메르쟈꼬프가 져야 했으며 다른 사람은 표도르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마 온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드미뜨리와 그의 이복동생인 이반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은 실제로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미뜨리의 경우, 그의 성품으로 볼 때 그의 아버지를 그가 충동적으로 구타할 수는 있으되―실제로 구타한 적이 있다―아버지를 살인할 성격은 못 된다. 그는 법이 없어도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727쪽)려고 했을 정도로 여린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반의 경우는 드미뜨리보다 더 아버지를 경멸하였지만 그 역시 그것을 실천할 수는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서사시인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대심문관의 입을 통해 유물론적 사회주의 사상을 내비침으로 무신론자임을 확연히 드러내긴 하지만, 규범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 후반부에서 이반이 정신분열증의 일종으로 추정되는 섬망증을 앓게 되는데, 그것이 최고조로 달한 것은 그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라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반의 성격과 '죄'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스메르쟈꼬프는 처음부터 그들과는 다른 '죄'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니힐리즘은 '죄'를 번거롭거나 난처한 것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스메르쟈꼬프로서는 그런 드미뜨리와 (특히) 이반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드미뜨리는 서로 다른 두 심연(1221쪽) 속에서 오가며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을 거듭한다. 그것은 비단 드미뜨리에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드미뜨리와 같은 고민을 안고 산다. 드미뜨리는 언젠가 알료샤에게 아름다움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넌 그 비밀을 알고 있니?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란 사실은 정말 끔찍스러워. 거기에서는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싸움터는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지. 아름다움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이성을 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의식이 이성과는 다른 루트로 생성되는 것이라면 그런 죄의식은 아름답다. 그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다. 드미뜨리는 꿈을 꾸었다. 아귀(餓鬼)에 관한 꿈이었는데 드미뜨리는 거기서 처음으로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무언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조시마 장로는 앞서 가족회의 때에 드미뜨리에게 크게 절하며 <용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장로는 나중에 알료샤에게 그것이 <앞으로 그에게 닥칠 위대한 고난>을 향한 것이었다고 일러준다. 작가 스스로 작품의 주인공이라 말하고 있는 알료샤도 독특한 역할을 이어나간다. 그는 모두가 본받을만한 성품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로가 죽자마자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것이 알료샤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와 그분의 손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며 의아해한다. 그러나 곧 알료샤는 <그리스도께서는 최초로 기적을 행하실 때 슬픔이 있는 곳이 아니라 기쁨이 있는 곳을 찾아주셨고 인간의 기쁜 일을 도와주신 거야…….>이라는 해답을 얻고 가슴이 뛰었다. 여기서 결론에 해당하는 일류샤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들의 결심이 놀랍도록 알료샤와 닮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죽은 일류샤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의 가슴 속에서 자라는 것은 다름아닌 사랑이었던 것이다.진부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이 결론은 방대한 소설 한 권을 거치면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 되었다. 결국 이런 믿음 속에서만이 우리는 장례식장처럼 슬픈 이 땅에서도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기쁨을 위한 믿음이요, 사랑이다.

[인상깊은구절]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넌 그 비밀을 알고 있니?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란 사실은 정말 끔찍스러워. 거기에서는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싸움터는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지.
s******z 2004.12.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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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책..하지만 그 열매는 너무 달콤하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책..하지만 그 열매는 너무 달콤하다.." 내용보기
90년대 초반은 내 대학 생활도 초반이었던 시절이었다.. 멋모르는 책 욕심에 수많은 책들을 허겁지겁 읽어 나갔지만 나를 좌절시킨 두 가지의 책.. 에코의 "장미의 이름"(1권짜리..-_-;;)과 범우사 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 중 "장미의 이름"은 시간 남아 돌던 군대 말년 기간(아마도..96년도)에 독파해 지금은 무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내 납량 독서물로 선정되어 해마디 읽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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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은 내 대학 생활도 초반이었던 시절이었다.. 멋모르는 책 욕심에 수많은 책들을 허겁지겁 읽어 나갔지만 나를 좌절시킨 두 가지의 책.. 에코의 "장미의 이름"(1권짜리..-_-;;)과 범우사 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 중 "장미의 이름"은 시간 남아 돌던 군대 말년 기간(아마도..96년도)에 독파해 지금은 무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내 납량 독서물로 선정되어 해마디 읽히고 있으나 이 책만은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차일피일 독파를 미뤄오곤 했다. 그러다가.. 이번 봄에 큰 맘 먹고 열린책들에서 출간되 상, 하 두권을 한꺼번에 구입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왜 도스또예프스끼의 책을..아니 러시아 문학 작품을 대하기 어려운가 하면 첫째는(많은 사람들도 동의하겠지만) 등장 인물들의 인명이 책 내용에 몰입하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할 만큼 생소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우리 나라 고전 소설도 그렇지만 서구의 대표적인 고전 소설 대분분,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 시점의 장점은 학교 시절 신물나게 배워왔으나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거의 소설의 중심 사건과 편집자적 논평이 같은 비중을 가지다보니 그것을 신경 쓰다가 독서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내 자신이 이 책을 처음 잡게 된 그 시절부터 독파를 끝내기 직전인 순간까지.. 이 책을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배경 지식이 제대로 여물지 못했다는 점을 솔직히 밝히고 싶다.. 이런 갖가기 이유(솔직히 핑계..)를 극복하고 나서 이 소설을 독파했을 때 나는 새삼 고전 읽기의 당위성을 깨닫게 되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전 소설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어디에서나 역설되고 강조되어 왔다. 나도 그런 표현들을 이젠 식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인 만큼 고전 읽기가 모든 세대에 걸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늘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표현은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고전 작품은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본성과 본질, 심리를 다양하게 엿보게 해주는 보고(寶庫)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세상과 다가올 미래를 전망하게 해 주는 단서도 제공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나는 그런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작가의 위대함 함께 이 방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군(群)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걸 느꼈다고 해서 방금 위에서 말한 고전 작품의 장점을 삶에 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얻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삶을 유추해 적용해 보는 시간과 생각을 얻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한 번 독파를 끝낸 후라면 반드시 생길 뿌듯함~! 적어도 그 느낌을 아는 수많은 독자(적어도 내가 이 소설을 잡았을 때 보다 젊은..^^)들이 이 책의 가치를 몸소 체험했으면 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c******y 2004.05.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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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내가 바라본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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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젊은시절 반역죄로 사형당하기 직전 황제의 칙사로 총살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저자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성경을 깊게 읽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여기에서 얻은 깊은 성경적 지식과 믿음이 그 이후의 주옥같은 명작을 쓰게 된 계기가 됩니다. 저는 먼저 백치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이책을 읽게 되었고, 이 후 러시아 문학, 정확하게 도스또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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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젊은시절 반역죄로 사형당하기 직전 황제의 칙사로 총살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저자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성경을 깊게 읽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여기에서 얻은 깊은 성경적 지식과 믿음이 그 이후의 주옥같은 명작을 쓰게 된 계기가 됩니다. 저는 먼저 백치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이책을 읽게 되었고, 이 후 러시아 문학, 정확하게 도스또예프스키에 푹 빠지게 되었는데 먼저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을 비워 두고 편한 마음으로 읽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점을 삼형제, 사생아, 아버지의 관점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량의 책을 읽을 때 꼭 필요한 것이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제가 마치 삼형제, 그리고 사생아, 아버지의 속성을 다 갖고 있는 듯이 생각이 되더라구요, 그리고 작가의 서술이나 묘사가 놀랍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독교이야기인데요, 마치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성경속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첫째도 될 수 있고, 둘째도 될 수 있는 것 같아서요) 처음 200쪽 정도는 읽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그런데 마음을 비워두고, 읽어보시면 놀라운 명화를 보는 듯한 감동을 얻으리라 생각하며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w***g 2003.08.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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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흡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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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달여 만에 책걸이를 했습니다. 처음 도입부의 지루함. 아마도 러시아에 대한 생소함과, 종교와 사상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이었기에 더 더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본 내용으로 들어가서는 그시대에는 "생부 살인사건" 이런 소재의 사건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생소하고, 더 충격적이었을거란 짐작을 해봅니다. 크게 내용을 살펴보면, 표도르 까라마조프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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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달여 만에 책걸이를 했습니다. 처음 도입부의 지루함. 아마도 러시아에 대한 생소함과, 종교와 사상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이었기에 더 더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본 내용으로 들어가서는 그시대에는 "생부 살인사건" 이런 소재의 사건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생소하고, 더 충격적이었을거란 짐작을 해봅니다. 크게 내용을 살펴보면, 표도르 까라마조프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부인에게서 얻은 드미트리와 두번째 부인의 두아들 이반과 알료샤, 또한명, 사생아인 스메르자꼬프 세명은 한명의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았지만, 개성도, 성격도 모두 천지 차이가 나게 다름을 알수 있습니다. 욕정과, 탐욕으로 똘똘뭉쳐 자식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도 이행하지 않는 표도르, 불행한 유년을 격음으로 비뚤어지고, 사랑에 대한 집착이 불 같은 드미뜨리 지적이지만 너무나 냉철한 이반, 가장 따듯하고, 선을 상징하는 알료샤, 사생아로서 나머지 세명과 달리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비뚤어진 사고를 갖게 된 스메르자꼬프가 중심 인물입니다. 주요인물들과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보면, 대체적으로 다혈질적이고, 냉소적이고, 비정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듯 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아버지와 아들 드미뜨리간에 그루센까라는 여자를 차지하려고 하는 와중에 있어서는 안될 부모자식간의 비극적인 살인사건입니다.물론 드미뜨리가 아버지를 죽이진 않았지만, 거의 그렇게 될수도 있었고, 또 다른 자식, 숨겨둔 자식인 스메르자꼬프에 의해 또다른 생부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스메르자꼬프에 의해 너무도 철저한 각본에 의해 벌어진 사건의 진실을 찾아 가면서 가족의 의미와 진정한 사랑을 깨닭아 갑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첫째 아들 드미뜨리는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고, 작은 아들 이반은 자신이 스메르자꼬프에게 잘못된 사상을 유입시켜 사건을 발생시켰다는 자책감으로 열병에 걸려 죽음 직전에 당면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단순한 구조인데.. 이런 장편의 서술이 필요할까 싶기도 햇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엔 단편단편의 글들이 독립적으로 삽입되어 있어서 또다른 느낌을 얻을수 있고, 러시아인에 대해 알게 될수 있는것 같습니다.. 첨 읽는데 한달여의 시간이 들긴 햇지만. 후에 다시 한번 내용을 곱씹으며 읽고 싶습니다. 그때는 너무나 생소한 러시아를 조금은 파악할수 있기에 더 가슴에 남는 교훈이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첨 200여 페이지의 지루함을 견딘다면, 1300여 페이지 까지 넘어 오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들은 자식들에게 불가능한 자제심을 요구할수 없는것입지다.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는 아버지의 행동은, 더구나, 자기 또래의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의 합당한 행동과 비교해 볼때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마음속에 비통한 의문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문을 품은 자식이 들을수 잇는 판에 박은 대답은 아버지가 너를 낳았다. 너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았다. 그러니 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자식은 아버지는 나를 낳을때, 과연 나를 사랑햇을까? 하고 더욱더 충격을 받으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나를 위해서일까? 아버지는 분명히 그 욕정의 순간에, 어쩌면 술에 잔뜩 취한 그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 알기는커녕,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상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다만 나에게 음주벽만을 물려주었으며 그것이 아버지가 나에게 준 은혜의 전부인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낳고도 한평생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 아버지를 사랑해야만 한단 말인가? 하고 자식은 생각할게 분명합니다.
o******6 2003.03.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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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의 화두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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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의 내 나이가 부끄럽도록 여느 사람들에 비하여 독서 량이 부족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남들이 흔하게 읽은 책 중에서도 내가 안 읽은 책은 허다하다. 이런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보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 대문호들의 책을 하나 둘씩 읽기 시작했고, 몇 권 읽지 않은 그들의 작품은 나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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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의 내 나이가 부끄럽도록 여느 사람들에 비하여 독서 량이 부족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남들이 흔하게 읽은 책 중에서도 내가 안 읽은 책은 허다하다. 이런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보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 대문호들의 책을 하나 둘씩 읽기 시작했고, 몇 권 읽지 않은 그들의 작품은 나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래서 이번 수행평가에도 책을 선택할 때 이번을 기회 삼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문학적으로 수준이 한참은 떨어지는 나에게 이 책은 처음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나는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책이 나에게 심어준 생각들이다. 감동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제목과 같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며 깨달아야 할 화두를 얻게 되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지극히 러시아적이라는 것이다. '닥터 지바고'와 같은 러시아의 영화나 문화를 접할 때마다 풍기는 향기랄까? 그런 것이 이 책에서도 묻어났다. 표도로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를 가장으로 한 카라마조프가와 그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소설은 장남인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형을 받는 것을 주 줄거리로 하고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4부자는 그 당시 러시아의 여러 형태의 인물로 각 세대를 대표하며, 내 생각에 작가가 그 당시 러시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도 작품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은 작가가 평생동안 가졌던 사상의 집대성이자 종결점으로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가 해왔던 생각과 고민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곳곳에서 그의 사상과 고민을 찾아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을 통하여 선과 악 사이를 천착한 인물이다. 그러하기에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배타하는 악을 작가는 여기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본질에서 악을 보여주며, 작품에는 아주 선한 인물에서 아주 악한 인물까지 묘사하고 있다. 한없이 성스러워 보이는 조시마 장로는 선이요, 드미트리의 아버지 살해소식을 듣고 속으로 기뻐한 것을 고백한 리즈는 악이다. 또한 그렇게 성스러운 조시마 장로에게조차 젊은 날에는 어두운 시기가 있었다. 카라마조프가의 3형제 역시 표도르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이어받아, 드미트리는 방황을, 이반은 냉쳘한 무신론자, 알료샤는 천사 같은 광신자가 되었다. 표도르 자신에게 이런 선과 악이 모두 잠재되어 있었고, 표도르도 선과 악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지친 그의 행동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하나의 고민은 신에 대한 것이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실제로 유신론자였던 작가가 이반과 같은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을 보면, 그는 적어도 신에 대한 의혹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반의 모습을 볼 때, 특별한 비중이 없이 그냥 등장시킨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인물이다. 하지만 신을 믿는 것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종교적으로 신을 믿는 것, 또 하나는 여기에 나온 것이다. 신을 존재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신이 필요하다는, 우리가 신이 필요해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의 부정인데, 즉 무신론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작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유신론이 아니라, 신이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교인이며, 종교적으로 순수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내가 읽기 가장 불쾌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정말로 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의 악을 제어해 주며, 우리가 힘들 때 위로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이다. 작가가 평생을 걸어 얼마나 고민했을지 알고 있다. 또 그의 그러한 생각이 특이하다고도 생각되지만, 정말로 신을 믿는다면 그러한 것은 신에게 모욕이 되는 발언이 아닐까?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이상했던 한 가지는 아이들의 등장은 큰 의미를 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의 새로운 세대의 전환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러하기에는 너무 아이들의 의미가 작고 반면에 필요 없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 굳이 그렇게까지 아이들을 위한 하나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잠시 다른 곳으로 갔던 이야기를 다시 돌리자면, 위에서 말했던 작가의 선과 악 사이에서의 고민,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고민, 그것은 바로 우리의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며, 악의 유혹을 느낀다. 신을 믿으며, 존재에 의혹을 갖고, 신을 부정하며 자기도 모르게 신의 존재에 의지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인다. 이 책 속에서 했던 작가의 이런 고민을 우리도 평생 하며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제 자체가 삶을 살아가며 하는 이러한 고민을 우리에게 내려주기 위함이 아닌지.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평생의 화두를 얻었다. 작가의 고민이자, 이 책 속 주인공 모두의 고민, 이것은 아마 내 평생의 화두이며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나에게 선사한 것이다.
d******2 2003.01.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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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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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근원도 다양하다. 그 근원이 사라지면 인간은 살아가는 목적을 상실하게 되어 자살하거나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지닌 이상과 현실이 충돌할 때 스스로를 지탱했던 근원이 없다면 그의 이상은 사라져 버리고 현실에 굴복하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성과 용기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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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근원도 다양하다. 그 근원이 사라지면 인간은 살아가는 목적을 상실하게 되어 자살하거나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지닌 이상과 현실이 충돌할 때 스스로를 지탱했던 근원이 없다면 그의 이상은 사라져 버리고 현실에 굴복하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성과 용기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근원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이 책은 네 형제의 삶을 통해 인간의 근원을 파헤친다. 미쨔의 근원은 정열과 질투다. 자신의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그는 그루센까를 사랑했고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열정을 다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패기있고 자유분방하며 사랑외의 감정에는 무감각했다. 이반을 살게 하는 근원은 사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이 굳어지기도 전에 극심한 혼란에 빠져 현실에 굴복하여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스메르자코프의 근원은 증오와 복수다. 사생아로 태어나 온전한 아들로 대접받지 못한 그는 오직 증오 속에서만 생기를 얻을 수 있었다. 마침내 자신의 소원대로 복수를 하지만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자 그는 극심한 절망에 빠져 자살해 버렸다. 알료샤의 근원은 인간에의 사랑이다. 그의 관념은 추상적인 기독교에 빠져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바탕이 종교이기 때문에 사랑을 자신의 근원으로 삼을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을 살아가게 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바탕이 존재한다. 그게 사랑일수도 있고 증오와 복수일수도 있으며 사상일 수도 있다. 작가는 그 누구의 삶이 더욱 이상적이다라고 결론짓지는 않는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이 삶을 지탱하고 영위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의 근원은 무엇일까?
YES마니아 : 로얄 i*****t 2005.03.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