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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어렵다. 실은 많이 어렵다. 허벅지 찔러가며 끝까지 읽었다. 억지로 다시 한번 읽어야 할 오기가 생기는 책이다. 그러나 사유의 변증법적 측면에서 보자면 유익한 책이었다. 이런 말 하면 죄송한데 (나 역시 저질스러운 학력,학벌주의적 생각이 깔려있나보다.) 그리 좋은 명문대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녀의 글과 시는 어렵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점점 더 독자와 괴리감을 생기게 할 수도 있을텐데. 우리나라의 석학 중에 예를 들면 황동규 같은 분은 황순원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수석으로 입학에,21세에 등단하고, 에딘버리랑 뉴욕대 나와서 서울대 지금 문리대 부교순가. 암튼 영문과 교수로.. 등등. 근데 황동규의 시랑 글은 쉽다. 물론 내가 그 분의 시세계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데 왜 김혜순의 글과 시는 어려운가. 학벌적 스트레스나 열등감을 표출하는 방식이 아닐까.
정말 서평이 왠 망상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학벌타파. 괜한 구호 한번 불러보고 다시 서평으로 돌아가자면, 바리데기 텍스트의 심층적이고 집요하기까지 한 분석에 놀랍다. 기아모티브에서부터 페미니즘 시각에까지 바리데기가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의 모태가 되는 것 같은데 처음 안 사실이다. 그렇구나. 고개 끄덕이게 했다. 나, 너, 우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여성성에 대한 설명도 굉장히 설득력있게 들린다. 여자로 태어난 것을 불만으로 느끼지도 않았고 사회적 부당함을 몸소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나의 여성성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고 나의 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온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하는 책이다. 또한 자연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대로 에코 페미니즘에 대한 나 나름되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었다. 그녀는 에코페미니스트이자 여성적 지성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성과 자연은 뗄수 없는 존재이자 시가 가지는 여성성에 대해 묘한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책으로 지성과 감성을 갈망하는 여성이라면 아니 그런 여성을 사랑하는 남성 역시 한번 (아마 한번 읽어서 다 이해되는 사람 별로 없을껄) 봐야 하는 책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잘 쓰지 않는 어려운 말이 꽤 있어 집중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공부하는 측면에서는 좋을 수 있지만) 구성적 측면인데 가운데 검은 이야기 파트는 재미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의 그 위치가 과연 이 책에서 효과가 있는 자리인가 하는 반감이다. 산만해 있는데 이것이 더 원문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가운데 떡하고 버티고 있지말고 오히려 그 파트를 한쪽 페이지로 몰라버리던가 아예 한 파트 뒤에 가서 읽게 해주는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래야 힘내서 다음 단락을 읽기가 쉬울 테니까.
*생태주의,에코페미니즘,생태시.. 잠수함과 토끼(사명적 문제)등, 한번더 생각해보자. [인상깊은구절] 묘사 되에 잠언을 갖다붙여 묘사를 잠언의 하수인으로 삼는 시적 언술을 참기 힘들어 한다. 현대시의 해석은 내용이라든지 모티브 분석이 아니라 그 진술방법에 집중되어야 한다. Mr. Theme, Where are You? -그리고 시적 현실이란? 위 파트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말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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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 누군가 무턱대고 이렇게 질문한다면, 간단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는 글이지. 하고 대답하겠다. 진정성이 묻어나는 글이랄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독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양하게 쌓아온 기억을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와 상호 관련시키면서 자신의 텍스트를 짜 나갈 수 있게 하는 책이랄까. 그렇다면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성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글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의 언어는 이제까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터져 나온 언어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 울림으로 내뱉는 언어인 것이다. 더불어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몸으로 쓰는 시에 대한 부분이다. 김혜순은 몸으로 쓰는 시는 감각기관들이 쓰는 시가 아닌 몸의 움직임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쓰는 시라고 말한다. 내 몸이 반응하고 터져나오는 시 말이다. 이 말은 몸이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으로 쓰는 시라고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욕망은 정복이나 소유의 욕망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운채 몸 속에 부재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욕망이다. 시인은 이와 반대로 시의 몸에 대해서도 말한다. 시의 몸은 자연의 형식이고 조응하는 몸의 형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는 생태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장르라고 말한다. 자연을 관찰하고 함께 ‘행’하는 것을 시의 형식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의미 이전의 소리들을 여성의 언어로 묶어 시‘쓰는’ 것이 아니라 시‘하는’ 행위를 통해 시인의 몸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문학에 대한 논의를 리비도에 치중한 정신분석학적 비평이나, 마르크스주의 비평이 아닌 의식을 주제로 하는 비평들이 쏟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같은 시인의 입장에서 시에 대한 성찰을 담은 나희덕의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나, 평론가의 입장에서 여성 시인을 이야기하는 박혜경의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도 같이 읽기에 좋았다. + 덧붙여 책의 편집 중 시인의 일상에 관한 단상들을 텍스트 중간에 작은 박스에 담았는데 시인의 산문을 더욱 시적으로 만드는 글이라 귀했지만, 작은 박스 편집으로 읽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각 장의 끝나면 뒤에 묶어서 편집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 박스 편집으로 구성된 글 중, 남성의 시체를 애무하고 제의를 치르던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시체를 사랑하는 이유는 잘못된 성애착증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나면, 사람의 몸에 기생하며 살던 미생물들이 점점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녀는 또다른 생물이 소생하는, 죽은 생물의 몸을 먹기 시작하는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다른 생물들의 삶터가 된 몸이 내는 에너지에 매료된 한 여성이 그 시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실존을 유희하는 여성. 글 전반에 걸쳐 전해지던 김혜순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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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까지의 문단이 남성들에 의해 주도된 것은 사실이다. 청소년 시절 문학소녀라고 일컫어 지는 여성의 문학 친화성이 모두 희미해지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적 구조로 인해 생긴 모순에 불과했다. 시를 쓰던 수많은 남성들은 그들의 육체만 남성일뿐 펜을 쥐고 흔드는 영혼은 바로 여성성에 기인한 것이다. 김혜순교수는 이 책에서 시인은 여성의 장르이다 라고 못박아 외친다. 그리고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끊임없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술과도 같은 언어가 바로 시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참고로 읽은 이야기도 풍부하며, 작가의 놀라운 기본지식으로 충만된 책이다. 앞으로의 여성시인과 남성시인에게 던지는 거대한 화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