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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일, 후쿠시마 재앙이 일어난 몇 달 뒤에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강연을 들었다. 선생님은 후쿠시마를 새로운 문명의 전환으로 받아들였다. 제국주의 일본은 히로시마 핵폭탄으로 끝나고, 주식회사 일본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끝났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후쿠시마가 계기가 되어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셨다.
이소마에 준이치에게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종교학과 역사학 연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일어난 뒤 4년 동안 현장을 찾았다. 저자를 그곳으로 끌어당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경제적 번영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지역 사람들의 목소리, 즉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의 목소리를 결코 일본사회의 중심부에 닿지 못했습니다. 목소리가 되지 못한 소리들은 고도경제로 끓어오르는 대도시의 교성에 지워졌습니다. 동일본대지진이 보여준 현실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이 전후 일본사회의 번영을 지탱해왔다는 것, 많은 일본인이 인정하기 어려운 추한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경제적 격차를 벌리고 일부만이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시스템이 전 세계를 뒤덮은 이상, 이는 모두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행복을 손에 넣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동일본대지진이라는 국지적 사건에서 전 세계인들이 배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지진을 중심으로 목소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어판 서문, 8-9쪽)
복종을 강요당하는 사회적 약자는 자기의 목소를 낼 수 없다. 그러기에 사회적 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을 사회적 의미로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당사자인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그들의 말은 영원히 들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죽은 자의 말을 산 자에게 전해 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무당 같은 존재다. 저자는 동일본대지진 현장을 돌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살아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들려준다. 제목이 ‘죽은 자들의 웅성임’이 된 까닭이다. ‘웅성임’보다는 ‘웅얼거림’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을까 싶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너무 가슴 아프다.
지진이 일어난 것은 14시 46분. 쓰나미가 덮친 것은 15시 37분. 이 50여 분 동안 아이들은 계속 교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부모가 데리러 온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에게 산으로 올라가 피하자고 한 아이도 있었다. 그중 몇몇은 스스로의 판단 하에 산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교사들에게 제지당했고, 대부분은 나중에 온 쓰나미에 목숨을 잃었다.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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