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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이후로 한자를 배우지 않은 저로써는 동양 고전을 읽는다는 건 연애와 더불어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간 여러 책들이 동양 고전을 쉽게 풀어 설명해 주었지만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은 지금의 내 처지에서 동양 고전의 정수를 내 몸으로 받아들이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사상은 중원에서 비롯되지요. 오랑캐는 중원을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은 돕니다. 예전에는 철학도 사상도, 심지어 과학도 이들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다스림을 받는 사람, 여성은 열외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 오랑캐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민중에게, 가부장주의에서 억눌려온 여성에게 있습니다. 이 책은 이름을 바로세우려는 공자와, 이름 없음을 가르쳐 중용보다 한 걸음 더 왼쪽에 서라한 노자와, 실천으로 사해만민 사상을 가르친 묵자로부터 배운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해줍니다.
모든 성인의 가르침이 그렇듯이 그 길을 따르는 일은 어렵습니다.왜냐하면 세상의 가치와 멀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어라, 원수를 사랑하라, 중용보다 한 걸음 더 왼쪽에 서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그러나 생각합니다. 비겁하게 권력을 잡을수도, 돈을 향해 뛸수도 있지만 그러지는 않겠다구요. 비록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양심껏 살겠다구요. 세상에 이름 한 자 남길 수는 없을지라도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름없는 여자 오랑캐로 사는 일이 가치 있다는 걸 문득 깨우쳐 주고, 이런 삶의 방법을 오래 전부터 가르쳐 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우쳐준 좋은 책입니다. [인상깊은구절] 탈레스의 인생 삼락이 중심주의에 대한 강박의 전형이라면, 우리처럼 오랑캐로 태어난 이들은 다른 인생 삼락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는 부강한 나라에 태어난 대신 분단된 약소국 오랑캐나라 코리아에 태어나 행복하다. 평생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유하고 뼈대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대신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하다. 평생 성실히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는 이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이 두 가지만 누리고 있다. 이 땅의 절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세번째 행복은 이런 것이다. "나는 남자로 태어난 대신 여자로 태어나 행복하다. 평생 차별과 불합리한 관습에 시달리면서 인간과 인생에 대해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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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0. 14. 완독.
책을 사기는 1년이 된 것 같은데, 이제서야 읽는다. 살 때 조금 읽다가 미룬 것을 마침내 끝내었다.
논쟁의 문화도 덕쟁의 문화도 만들어낸 일이 없는 조선 같은 주변부의 오랑캐 겨레는 오히려 아무런 걸림 없이 다양한 문화를 고루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이 있다.(327쪽)
주변부에서 중앙에 편입하고 싶은 것이 거의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중앙에 이론에 사상에 매몰되지 않고 '오랑캐'와 같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쳤으면 하는 게 저자의 생각인듯. 내가 잘 이해했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동양 현자들의 철학에 대해 비교를 해 나간다.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이고. 도식화하는 위험이 있지만 고대 그리스는 논쟁으로 나아가 '형식 논리학'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동양은 덕쟁으로 나아가 덕에 관한 수많은 일화에 이른다.(323쪽 참조)
나 안의 중앙에 편입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연에 어울리고자 하는 마음이 충돌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상깊은구절] 근대 유럽이 구성한 ‘과학’의 원리에 맞지 않는 모든 전통은 다 미신과 몽매와 신화라는 판정을 받았고, 유럽 바깥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만든 빵과 옷감을 얻는 대신, 자연과 어울려 평안하게 깊은 잠에 빠져드는 방법과 어떤 틀에도 매이지 않는 상상력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던져 버렸다.(324쪽) |
| 내용이 알찬 책이다. 특히 나와 같이 철학의 틀거리를 '논쟁'에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몸에 밴 사람에게 '덕쟁'을 힘주어말하는 이 책이, 내 사유에 얼마만큼의 '외부'를 덧붙여주었음은 자명하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덕쟁'이 '논쟁'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말하지않는, '중심주의'에 대한 견결한 견제가 돋보였다. 전통적 서구철학의 존재론/인식론의 지반이 '부정'의 수사학에 머물러있음 -'논쟁'의 형태가 가장 적나라한 예다. 논리가 서로 경쟁하여 우월한 쪽이 승리하는 것.- 을 상기해볼 때, 그 외부적 상상력으로써의 '해방의 사유'가 필요함을 인정할 수 있다.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해방의 사유'는 '부정과 대안'으로 압축되는 헤게모니와 패러다임의 세계관을 넘어서는, 다시읽기와 반성적 자기성찰로 가능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사상은 사유의 무덤"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찬찬히 곱씹어볼만하다. 이 책의 장점은, 보통 '고리타분한' 혹은 '유유자적하는', 그래서 현실의 삶과는 동떨어진 '도덕론'이라고 오해하기 쉬운 동양철학을 삶의 논리, 현실의 이론으로 다가오게끔 쉽고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은 중용의 철학, 그것도 '역동적 균형'의 견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양가적(ambivalent)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순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극단적인 양자를 외면하고 무조건적으로 '중도'를 외치는 게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중용'은 정세의 철저한 분석과, 스스로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기의 균형감각에서 우러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공자의 '정명론'은 보수의 정적 논리가 아니라, 깨어있는 사유로 '이름에 알맞게', 또 '알맞은 이름으로' 재규정하고자 노력하는 동적-실천적 이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노자의 자연과 관용의 급진적 철학하기는 언어/존재론/이분법 등등에 관한 웅숭깊은 비판에 다름아니다. 본질/非본질의 분리와 '보편적 idea'를 추구하는 기존의 서구철학 논리에 대해, 노자는 다각도에서 비판의 지점들을 형성한다. 즉,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구성하는 논리이지, 부정과 대립의 관계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류/非주류의 헤게모니 다툼, 패러다임의 전환과정을 노자는 '상반상성'의 철학으로 덮어버린다. '있음'만을 주목하고, 그것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면에 '없음'의 공백이 존재하고 있음을 노자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중심주의'에의 유혹을 '관용'으로 극복해나가는 것이 노자의 철학일진대,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그의 사상을 허무주의나 절대적 상대주의로 오독하지 않는 일이다. 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것"이라 했다지만, 언어의 외부 또는 공백에 대해 노자는 사유할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한 공백이 있기에 '있음' 또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빈 그릇'의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그렇기에 서양 형식논리학의 외부를 채울 수 있는 것이 노자의 '모순에 가득 찬' 철학인 것이다. 긍정/부정의 논리를 벗어나 모순의 대립항을 '조화'의 보다 큰 보편성으로 껴안아내는 노자의 철학하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反논리와 反문화로, 주류가 아닌채로 세상을 변혁하고 견제할 수 있는, 근원적이고 중단없는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노자의 철학이 '없는 듯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다. 이 책에서 나의 흥미가 가장 동했던 대목은 바로 묵자의 사상에 관한 부분이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철저하게 '실천'에 중점을 두는 묵가사상은 그 어느 사상보다 '당장' 적용시킬 수 있는 대목이 많아보인다. 반전주의라든지, 조직적 실천을 중시했다는 점 등등. 무엇보다도, 옳고그름의 기준을 '실천'이라고 얘기하며, 노동자-인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실용주의, 절용주의를 주창했던 묵자는, 저자의 말마따나 '성실한 좌파'였음에 틀림없다. 하여 두께가 없이 널리 그리고 고르게 사랑하라는 '겸애(兼愛)'라는 말은 공명정대한 '보편성'을 중시하는 묵자의 생각들을 잘 요약하고 있다. '현실세계에서, 모두가 고르게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의 획득, 그리고 그것을 위한 집합적 행동체로써의 조직'. 오늘날에 와서도 참으로 유효적절한 그의 논리라 하지않을 수 없다. 더하여, 평화주의자-현실주의자로써 자리매김되는 손자의 논의들은 아(我)의 상황만을 살피는 우(愚)를 범하지않고, 상대의 모습까지 살펴보는, '관계의 동학'이라는 점에서 또한 주목할만하다. '실사구시'와 '허허실실'의 조심성은 그가 전쟁을 '어쩔 수 없을 때 취하는' 제한적인, 필요악이라 생각했음을 뒷받침해준다. 어떠한 명분의 전쟁이건 그것은 결국 민중을 괴롭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제적인 조직의 연대로 전쟁을 막아내고자 했던 묵자와 "무기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설파했던 노자, 그리고 "온전함으로써 천하를 다투라"고 주장한 손자의 모습은 너무도 닮아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천하인민' 혹은 '세계시민'이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일 것이다. 이러한 반전주의, 실용주의, 보편주의의 '역사적 좌파'의 논리는 현시기에도 너무나 적절히 들어맞는다 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온전하지 못함'으로써 세계를 제패하려는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이 있지 않은가! 정리하면, 결국 저자가 되풀이해 말하고 있는 것은 중심주의의 지양과 부정과 배척이 아닌 인정과 관용의 사유, 보편의 다양한 특질에 집중하는 철학하기다. 그것이야말로 이른바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일 터, 잡식하는 오랑캐의 다양한 영양 섭취와 부족하고 희미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외부적 상상력의 발휘가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러한 노력들이 보다 숙련될 때 비로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숨막히는 강변의 획일화를 극복해나갈 수 있는 한 가능성이 될 수 있지않을까 기대해보며, 나 스스로의 고민 또한 조금이나마 진척시킬 수 있는 기름진 밑거름일 수 있도록, '일상에서의 되새김질'을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을 새삼 확인한다. |
| 살다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도 한 때 마음의 감기를 달고 살았다. 명확히 골라낼 수 없는 감정선을 타고서 뚜렷한 대상이 없는 분노를 느끼고, 전후좌우를 가리지 못하는 서운함에 늘상 젖어 있었다. 사는 것이 너무 편해서 그런다는 스스로의 질책에 부끄러워 하기도 했고 비슷한 상태의 아줌마들끼리 모여 운동도 해보고 취미생활도 해보고 수다도 떨어보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콧물기침으로 범벅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감기에는 특효약이 없다고 했던가. 그저 푹 쉬고 잘 먹는것이 최고라는 것에 올~인. 노닥노닥 시작한 인터넷 구경이 한창 재미를 붙여갈 무렵, 인터넷서점 이라는 데가 할인율도 크고 요즘 뜬다는 소문을 듣고 예스24에 구경을 갔다. 신간코너에 떡하니 떠 있는 신간 하나가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제목이 특이해서 살펴보았더니 이미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을 통해 대충 연재를 읽은 [이상수의 동서횡단]을 책으로 묶은 것이었다. 바로 주문했다.. 예스24에서의 첫 구입이었다. 한겨레21 기자이고, 둘째아이 출산을 계기로 일년간 강원도에서 귀농생활을 하며 집필한 이상수씨의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찬찬히 읽으면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예상치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 분류가 철학이라 어렵지 않을까 겁도 먹었지만, 어떤 쟝르의 책이든 1/3 정도 진도가 나가기까지는 작가의 시스템에 적응하려 절규?고뇌?하는 내 습관도 역시 아주 오랜만에 이겨내었다. 한 번 잡으면 사흘 밤낮을 새고 독파해야만 했던 나의 책읽기방식을 되살려준 고마운 책이다. 그만큼 나름대로는 꽤나 진지했었던 것이다^^* 그랬다.. 진지~~ 지금은 그 모습 빛을 잃었지만... 기분이 쳐진 사람의 속내를 다독여 줄 다정다감한 주제가 아니지만 이상수씨의 글에는 엉킨 실타래를 한올한올 풀어가듯 팍팍한 세상에 대한 투쟁심에 뿌리부터 시선을 돌려 결국은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똘레랑스의 뉘앙스가 행간을 채우고 있다. 사람이 이삼십년을 살면서 형성된 사고의 궤도를 수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의 의도로 선택하고 결정한 길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예상치 못했던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고 현실적인 굴절에 부딪친다면 그 마음에 바이러스를 키우며 살기가 쉬운것 같다. 생각해보면,오로지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왔던 시간들과 오로지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할 미래는 그 얼마나 무거운 인생의 짐덩이인지,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의 감기가 폐렴으로 진행되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 만큼 나는 늦되는 사람이었다. 어렴풋이나마 그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비록 사는 일이 원래 그렇게 쪼잔한 일이라 하더라도 사는 일에 너무 그렇게 쪼잔해지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바이러스를 이겨보려고 그동안 삼킨 아스피린과 항생제의 분량이 치사량에 달하지 않았음을 다행스러워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때때로 사는 것이 버겁다거나 마음에 무리한 욕심이 출렁임을 깨닫게 될 때마다 이 책 펼쳐들고... 어느덧 내게 필요한 위안과 새로운 용기가 생겨나고는 한다. 별다른 회의없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나 관점에서 벗어나 세상을 관조할 선택을 할 줄 아는 것, 다른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오래된 습관과 사고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일상의 시야를 넓히는 일은 넓음과 가벼움 진지함과 솔직함처럼 좋은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참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그래서 나는 지금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가. 아쉽게도 말 그대로 그닥 글쎄다.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안다는 것과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즐겁게 읽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