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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자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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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죽는 것이야말로 늙지 않는 길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늙지 않음이란 당사자의 육신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진정한 의미의 늙지 않음이란 오직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일체가 정지해버린 상태를 늙지 않음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 쿤데라는 <불멸>이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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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죽는 것이야말로 늙지 않는 길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늙지 않음이란 당사자의 육신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진정한 의미의 늙지 않음이란 오직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일체가 정지해버린 상태를 늙지 않음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 쿤데라는 <불멸>이란 소설에서 불멸을 둘로 나누었다. 그 둘은 생전에 그를 알았던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는 작은 의미의 불멸과, 그를 몰랐던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는 큰 의미의 불멸이다.

 

쿤데라적 의미에서 책은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을 작은 불멸의 객체에서 큰 불멸의 객체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매체 중 하나이다. 헬렌 켈러의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를 읽으며 나는 책의 바로 그런 미덕에 대해 생각했다. 특별히 헬렌 켈러의 삶을 총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다수임을 감안하면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헬렌 켈러를 큰 불멸의 객체로 거듭나게 할 책이라 할 수 있다.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1880 - 1968). 그는 말할 수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삼중의 육체적 질곡을 극복한 위대한 인간 승리의 상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과서나 역사 책은 그가 누린 88세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20여년의 삶을 서술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 한 외신은 시각 및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 것으로 알려진 그가 FBI의 주의를 끈 정치적 급진주의자였고 영성신학자 스베덴보리의 영향을 받아 책을 저술하기도 한 신비주의자였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 원제는 My Religion>는 그의 그런 다층적인 삶의 전모를 밝힌 헬렌 켈러 특유의 자서전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 정신이 남달랐던 헬렌 켈러는 어느 날 우연히 몸이 아닌 영(靈)으로 바다를 건너 수만리 먼 곳에 다녀오는 영체(靈體) 체험을 한다. 그것을 통해 그는 공간과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실재성’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성경을 확신하지 못했다. 특히 사랑의 하나님과, 계시록에 등장해 용과 뿔 달린 짐승들과 싸우는 하나님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열세 살이 된 어느 날 자신의 삶에 결정적 선을 긋게 해준 존 히츠라는 사람을 만난다.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던 그는 헬렌 켈러로 하여금 자연의 아름다움과 오묘한 이치를 통해 하나님의 영을 체감케 한다. 또한 헬렌 켈러에게 점자로 된 <천국과 지옥>(스웨덴의 영성신학자 스베덴보리의 책)을 소개해 헬렌 켈러를 새로운 영적 단계로 도약하게 했다. <천국과 지옥>을 통해 헬렌 켈러는 당장은 암흑에 싸여 있으나 언젠가 영적인 눈으로 이 세상보다 더 훌륭하고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영원의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굳게 가졌다고 한다.

 

새 교회(스베덴보리의 신학사상을 따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일원이 된 헬렌 켈러는 자신이 믿음을 받아들인 것인지 믿음이 자신을 받아들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비장애인들을 무색하게 하는 깊은 학식으로 스베덴보리가 태어난 18세기 및 스베덴보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헬렌 켈러를 보면 마치 건강하고 정열적인 학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의 설명을 통해 드러난 스베덴보리는 인문학적 소양과 자연과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보기 드문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며 천재이다. 그는 특히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주었는가 하면 <성경>의 창조론을 문자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에 위배된다며 반박했다고 한다.(79 페이지)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는 <천국과 지옥>에서 언급된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체험에 대한 짧은 배경 설명을 보충해 준다. 아니 보충 정도가 아니라 훨씬 자세하고 충분하다. 또한 헬렌 켈러는 <성경>의 문자 뒤에는 오직 상징으로서만 읽을 수 있는 영적 의미가 있다는 말을 한다.

 

상술할 공간적 여유가 없지만 헬렌 켈러의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 가운데 ‘지성소 안으로’를 읽으면 조나단 싱어의 <자연과학자의 인문학적 이성 죽이기>라는 책이 생각난다. 헬렌 켈러는 <성경>과 하나님을 증거하려 한 사람이고 조나단 싱어는 무신론적 과학자였음에도 말이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에 의해 주창되고 헬렌 켈러가 인정한 기독교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헬렌 켈러는 회심(回心)을 특정 교리의 수용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139 페이지)

 

이번 독서를 통해 하나님의 제한적 의미의 전능에 대해 안 것은 소득이 아닐 수 없다.(132 페이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요한 1서의 구절(4장 7절에서 21절)이 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이 저주를 속성으로 가졌으며, 천국에 수용될 사람의 수를 예정(제한)했으며 당신에게 가해진 모욕에 대해 보복하고 벌을 주는 징벌적 존재라는 잘못된 인식을 불식하는 데 유용한 구절이다. 즉 하나님은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닌 분으로 지옥행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지은 자 스스로 가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한편 토마스 아 켐피스와 스피노자에 대해 언급하며 그들을 의미있는 신비주의자라 규정한 대목은 스피노자의 정신을 사랑하는 나를 흐뭇하게 한다.(169 페이지) 헬렌 켈러는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숨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영적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한 것처럼 자신은 자신의 암흑 경험을 활용할 만한 솜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172 페이지)

 

일반적으로 헬렌 켈러는 신비주의자라 불린다. 'My Religion'이라는 원제를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라 고쳐 지은 것 역시 무리는 아니다. 특히 그의 영체(靈體) 체험이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비주의자라기보다 남다른 합리성을 갖춘 이성주의자라 해야 옳다. 때로 혁명가적 언술 능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는 역시 조용한 내적 경로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 영성, 사랑과 생명의 가치 등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 사람이다. 다음의 말을 새겨들어보자. “만일 바깥 세상을 이해하려는 수고를 하지 않은 채 신비적 감각만을 사용한다면 나의 발전은 좌절되고 내 주변의 모든 일은 뒤죽박죽이 될 것입니다.” (208 페이지) 헬렌 켈러는 종교 없는 삶을 심장 없는 육체에 비견한다.(213 페이지)

 

자신의 삶에 신앙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헬렌 켈러의 말은 믿음직스럽지만 비감하게도 들린다. 왜일까? 그가 육체가 성하지 못한 삶을 살다 간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쉽지 않은 내적 신비의 삶을 살았고 무엇보다도 비장애인들을 능가하는 학식을 지녔던 분이다. 열여섯 살 이후로 스베덴보리가 전해준 교리를 확고하게 믿었다는 헬렌 켈러는 자신의 생애의 모든 날들이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입증해준 날들이었다고 말한다.(226 페이지) 그런 그가 들려주는 스베덴보리 사상의 요약은 이렇다. 하나님은 신성한 사랑으로서의 하나님, 신성한 지혜로서의 하나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231 페이지)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는 내게 오랜만에 감동을 안겨준 책이다. (지난 10월 말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스베덴보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인 헬렌 켈러는 내 기억 속에서 장애를 극복한 인물이었지만 이번 독서를 통해 드러난 종교영성적 면모를 통해 적어도 내게는 새로 태어난 분이 된 셈이다. 헬렌 켈러라는 한 옛 인물이 쿤데라적 의미의 불멸로가 아니라 새 탄생으로 다가온 것이다.

m******1 2011.10.07.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