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의 바이올리스트 안네-조피 무터가 카라얀과 남긴 여러 녹음 중에서 최상의 연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의 톤이 꽉 차 있으면서도 섬세하여 대단히 안정감 있는 연주를 들려줍니다. 템포가 약간 느린 편이라 하이페츠나 정경화 스타일의 화끈한 연주 보다 단정한 쉐링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녹음할 당시 18세에 불과했지만 장래 대성을 예감하게 하는 흐뭇한 장면이기도 하지요. 여타 신동 연주자들의 연주는 기교과시와 가식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녀가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카라얀의 반주 역시 이 곡의 모든 연주 중에서 최고에 속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무터를 배려해 주고 있습니다. 협주곡 반주를 할 때조차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그의 스타일을 생각해 볼 때 이례적이지요. 낭만주의 협주곡의 두 대표작을 듣고있으면 아주 행복한 기분이 든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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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곡이 커플링 된 게 잘 어울린다. 일단 멘델스존이 이 곡을 시작한 해에 브루흐가 태어났고, 둘 다 형식미를 충분히 갖췄으면서도 첫 두 악장을 끊기지 않게 하는 등등 심하게 튀지는 않는 어느 정도의 독창성. 이는 형식뿐 아니라 선율에서도 정말 느낀다. 과격한 변혁도 아니면서 기존 틀 안에서 적절한 변화를 시도하는 게, 하나의 이상적 골이 아닌 현실적 다양성을 추구한 아름다움으로도 보인다. 베토벤 등의 고전적 완성미를 녹음이 무성한 여름에 비유한다면, 낙엽이 슬슬 보이는 요즘이 이 곡들 듣기 참 좋은 때다.
특히 멘델스존 곡은 시작하자마자 그의 대표 선율이 거의 바로 뜨니 내가 빠지려 하지 않아도 날 바로 당겨주는 게 좋다. 먼저 들었던 음반 중 빠질 수 없는 하이페츠(59년 뮌쉬 보스턴)는 그의 여느 연주들이 그렇듯이 전체적으로 빠른 템포가 오로지 그의 연주에만 집중하게 긴장시키는 게 난 요샌 편치 않아 영 별로다. 81년 정경화(+ 뒤투아 몬트리올)는 겉으론 날 선 느낌이면서도 속으론 알짜라 악바리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살림도 잘하셨을 것 같다.) 06년 얀센(+ 샤이 라이프치히)은 맑은 수면 위로 또르르 굴러가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은 좀 더 끌어줬으면 해도 차갑게 계속 앞서 가버린다. (차도녀 느낌.) 98년 장영주(+ 얀손스 베를린 필)는 얀센과 비슷한 템포지만 느낌은 아주 달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상함이 언제나 묻어난다.
그리고 이 80년 무터(+ 카라얀 베를린 필)는 조미료 없는 담백함이라고 하겠다. 진국은 아니지만 담백한 맛으로 승부를 거는 맛집과 같다. 처음 접했을 땐 그동안 들었던 연주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밋밋했는데 언젠가부터 가장 편안히 들을 수 있는 이 음반에 손이 자꾸 가는 게, 담백한 맛집에 자꾸 가듯 묘한 중독성이 있다. 부분이 아닌 전체가 기본적으로 슬프다. '이랬었는데'에서 예컨대 정경화는 '이랬었는데!' 하고 뒤에 느낌표가 포인트라면, 그냥 '이랬었는데..' 하고 뒤에 쩜쩜인, 느낌 자체에 초점을 뒀다. 브루흐 곡에서도 하이페츠(+ 라이너 시카고)와 정경화(72년 켐페 로열 필) 역시 대체적 느낌이 위와 크게 달라질 건 없이 들었는데, 난 이보단 77년 아카르도(+ 마주어 라이프치히) 음반을 전집이라 다른 브루흐 곡들도 쭉 들을 때 좋게 잘 듣는다.
무터 어린 시절의 깔끔함이 묻어나는 독주를 카라얀이 그 특유의 스타일로 덮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는 그 스타일이 어디 가겠느냐마는) 적어도 의도하에 경쟁적으로 치달은 식으로 나온 연주가 아니라 뭔가 배려하고 아끼는 단란한 느낌이 있는지라 다른 음반들에 비해 편안하게 들을 수 있으며, 카라얀의 여타 음반들과는 다른 그런 특이한 재미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반이기도 하여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살살 미소 짓게 된다. (한마디로 희귀템 - 구하기 어렵단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희귀템이라서만 좋다는 건 아니다. 물론 원곡이 좋은 점도 한몫하는 건 당연지사. 가을을 맞이하는 곡으로 안성맞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