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로 풀어쓴 도덕경
하나, 도덕경의 ‘도’는 기독교의 ‘말씀’인가
노자의 도덕경을 읽는 방법이 여럿 있는데, 기독교 측면에서 읽을 때에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한 가지 있다. 바로 도덕경의 도(道)를 기독교의 ‘말씀’으로 읽으려 한다는 것.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 요한복음 1장 1절을 해석하면서 이미 그런 학습을 했기에 그렇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을 번역 또는 해석하는 과정에서 ‘말씀’은 로고스(logos) 또는 도(道)로 이해되었다.
그런 것을 알고 있으므로, 『도덕경』에서 ‘도(道)’라는 말을 만나면 강한 유혹을 느낀다. ‘도’를 ‘말씀’으로 번역하고 싶은 욕구, 그게 마치 믿음에 충실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한 동양고전’을 모토로 하여 이 책을 집필하였”(16쪽)다는 말에서 그런 조짐을 보았다. 그렇다면 혹시 저자도 그런 유혹을 받았을지도 않았을까, 하는,
그런 나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1장 첫 구절부터 그랬다.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
보통 도덕경을 번역하는 경우, 이 부분의 번역은 ‘도’를 그냥 ‘도’라 번역한다.
(최진석)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도덕경, 21쪽)
(기세춘) 이미 가르쳐 말한 도는 참도가 아니다. (노자강의, 340쪽)
그러나 이 책은 도를 ‘말씀’으로 번역한다.
<말씀은 진리다 라고 하면 되느냐? 그러면 늘 있은 도는 이미 아니다.>(21쪽)
다른 곳에서도 그런 번역은 이어진다.
4-1 (도덕경 4장 첫부분 번역)에서도 도를 말씀으로 번역한다.
도충 이용지(道沖 而用之)
<말씀은 그 속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말씀을 사용하면 무진장이다.>(31쪽)
저자의 그런 번역을 무어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저자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저자가 미리 밝혀놓지 않았는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했다는 것을.
둘, 본문 해석에 있어서 이런 구분 필요하다
본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해석을 먼저 윗부분에 하고, 밑에 원문을 실어 놓았다.
그러니까, 윗부분이 해당 원문에 대한 해석인 셈이다.
그런데 그 해석부분이 원문의 내용을
초과한다.
예컨대, 2-4 (27쪽)를 보자.
<큰 공을 세우고도 거기서 발 뻗지 않고
그 안에 들어앉아 살지 않으시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공로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한 일 덕이라고 교만하지 않는다. (A – 편의상 구분하기 위하여)
하늘같은 분이 땅에 머무시면서
이 모든 것이 다 내것이다 주장하지 않고
있는 것도 없는 듯이 사시고
없는 것도 있는 듯이 사신다 (B)
있고 없고를 뛰어 넘으시고
가진 것 못 가진 것에 구애받지 않으시니
도는 늘 스스로 만족하신다
도를 알면 모든 것을 가진다. (C)>
그리고 그 밑에 적어 놓은 원문은 이렇다,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이 부분을 보통의 번역으로 살펴보자.
(기세춘)
<공을 이루어도 머물지 않는다. 대저 (현상의 삶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삶을) 떠날 일도 없다.> (99-100쪽)
(최진석)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 위에 자리잡지 않는다.
오로지 그 공 위에 자리잡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지 않는다.> (35쪽)
따라서 도덕경 중 해당본문에 대한 번역은 이 책에서 번역으로 제시한 A 에 해당한다,
나머지 B 와 C 부분은 원문의 해석이 아니다. 이 해석에 덧붙여 놓은 해설 격이 되겠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시도하는 도덕경 해석은 도를 넘는다.
원문 자체를 해석해 놓은 다음에, 저자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 하려 했다면, 해석과는 별도로 그 밑에 주석이나 해설란을 만들어 거기에 저자의 생각을 표시했으면 어땠을까
그게 도덕경의 원문의 취지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살리는 길이 아니었을까
그런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곳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다.
3-3
(30쪽)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알 것도 없고
탐낼 것도 없도록 하고
헛똑똑이들 장난질 못하게 하면서
지나치게 바라지 않도록 해야 한다. (A)
국민을 속여서도 안되지만
터무니 없는 기대를 가지게 해서는
더욱이 나라 다스림이 어렵게 된다
국민은 수걱수걱 자기 일을 하게 한다 (B)
진나라 여불위의 여씨춘추는
상업의 발달이 나라 경제를 든든히도 하지만
이윤 때문에 경쟁이 너무 심하게 될까
정치가는 생각해야 한다 했다. (C)>
원문은 다음과 같다.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 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이 부분을 다른 번역으로 살펴보자.
(최진석)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 무욕하게 하고,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51쪽)
백보양보해도, 이 책의 번역부분중 C에 거론된 여불위의 여씨춘추는 등장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그 부분은 도덕경의 해석이 아니라, 저자의 보충 해설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런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어떤 구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해석과 해설, 그것을 구분하는 일. 그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혼동을 하지 않고, 도덕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
|
도(道)를 아십니까.......................? ^^* 에궁...! 그걸 알면 ..... 일상의 관계와 생활에서 느끼는 존재감. 천수를 누리더라도 병을 안고 사는 삶은 즐겁지 못하다. |
|
오늘날의 교육환경은 잘 모르겠지만, 나의 학생시절에는 나름대로 중국의 철학 즉 '동방의 철학'이 인성교육에 있어 만만치 않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의 자랑 동방예 의지국" 그 예(禮)의 배경을 공부하기 위해서,(공교육 차원으로서의 교양서로) 사서삼경과 공 자의 논어 등이 추천되고 또 읽히고는 했는데, 물론 이 책의 주제인 노자의 도덕경도 논어에 지지않는 중요한 교양, 또는 선생님들의 입을 통해서 추천되곤 했던 '단골서적'으로서 나의 기 억에 남아있다.
물론 이러한 '철학'이 오늘날까지 가치를 발하는 이유는 끝임없이 '인간의 선함'을 추구했던 학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예로부터(정치.통치의 안정을 위해) 위의 철학 들이 사회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깊숙히 침투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양의 국가들은 서 양에 비교해 안정적인 국가관을 형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반대로 동양은 발전을 위한 역 동성을 잃어버림은 물론 위의 철학들이 곡해되어, 반대로 사람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신분제의 강화와 같은 많은 단점을 안게 되었는데, 결국 동양은 서양의 역동성에 희생되는 침탈의 역사 의 희생양이 되었으며, 그 결과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와 같은 극단적인 부정적 의견 을 불러오기도 했다.
"왕은 왕다워야 하고, 백성은 백성다워야 한다" 이러한 도덕경의 기본철학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물론 조선시대의 양반들처럼 "주제에 나대지말고 신분대로 살아라" 라는 제약의 가치는 아닐것이다. 아니...만약 그러한 가치라면 노자의 가르침은 더이상 이 세상에 필요가 없는 낡은 지식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스스로의 지식과 해석을 담아, 도덕경 을 시로서 해석했다. 그렇다! 저자는 도덕경을 쉽게풀어 독자들로 하여금 읽고 이해하고, 삶의 가치관으로서 중심으로 삼으라 권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이 도덕경을 읽었고 또 이해하 고자 했으며, 결국 나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어 냈다.
분명 도덕경은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기위해 필요한 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자는 올바름, 자기절제, 행위의 조심성, 언어의 무서움, 사회와 국가의 부흥과 쇠퇴의원인에 대한 노자의 결 론을 기록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도' 그렇기에 시대는 다르지만 분명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 로서는 나름대로 많은 기록에 공감을 표하고 또 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도를 아십니까?" (사이비가 아닙니다) 그렇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 도리를 나의 생활에 적용해보고 싶어졌다. |
|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더함과 빼기를 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욕심을 덜 부리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그것은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그건 나 스스로 혼자서 욕심을 덜 부린다 하여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휩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고. 때로는 욕심을 부리고 때로는 나눔을 하는 것.그 두가지를 잘 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며,행복을 찾아가는 길이었다.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는 점이다. 더함과 빼기.그리고 무위자연.세월이 흘러 가는 데로 나에게 놓여진 환경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그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삶이었다.부드러운 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우리 인생 또한 자연스러움 속에서 나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그것이 우리에게 소중하면서도 가치 있는 것이다.여기서 무언가를 이루려는 마음을 더함이라 한다면 나누고 감사하고 덜어내는 것.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왜 비워야 할까.그건 우리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움켜짐으로서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인물이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비움으로서 새로운 것을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비우지 않은채 채워 나가기만 하면 나중에는 스스로를 파괴할 수 밖에 없다는 것..그건 우리의 역사 속에 잘 나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꽉 채우려는 것은 어리석다 쓸모있게 해야 하는데 때로는 비워두고 때로는 채워둔다. 그 조화가 바로 쓸모가 된다. 없음의 미학이 있음으로 유용하고 쓸모있는 가치가 거기에 있다 빈 방이 아니면 사람들이 그 방을 쓸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채우고 비우는 것은 바로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해서 쓸모가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채우기만 한다면 채우려는 물건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그리고 채우면서 있음에도 다시 채우려 한다는 점이다.필요하지 않음에도 나중에 필요할 까봐 채우려는 것..기억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채웠는지 왜 채우려는지 그것조차 모를때가 있다..그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경에서 알 수가 있다. |
|
바쁘다,바쁘다를 연신 외치면서도 짬짬이 고전읽기를 스마트폰 어플을 통해 강의를 듣던 때가 있었다.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또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하는 내 스스로에게 답 조차 구하지 못하는 숱한 질문 속에서도 동양고전은 뜻밖의 지혜를 내게 선사해 준다.동양 사상가 누구 하나 빠트릴 수 없으리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 깊숙히 그들의 이야기가 비수처럼 꽂히기에 그것을 게으르더라도 가까이 하는 이유이다.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 노자(老子)를 좋아한다.노자의 도덕경을 보며 힘이 들고 마음이 지칠때 수시로 꺼내 읽을만큼 아끼고 아낀다.노자 사상의 특징은 무위자연,반이성주의를 들 수 있지 싶다.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도(道)를 본받아 자연에 순응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무위(無爲)의 삶을 살 것을 주장하며 그 도의 작용을 덕이라 해 도덕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책 서문에 언급했듯이 도덕경은 현실도피의 책이 아니라 현실에서 가장 심오한 책이라는 말에 절대공감한다.'시로 풀어 쓴 도덕경'의 핵심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했다는 점이다.도덕경 8장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씀을 늘상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데 이처럼 물의 성질을 비유하며 43장의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無有入無間 (무유입무간)吾是以知無爲之有益 (오시이지무위지유익)을 보면서도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음을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다.본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해 놓은 주해를 보면서 다소 난해할 것은 해석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와 닿았던 듯 하다.
'시로 풀어쓴 도덕경'이 가볍게 읽히어지는 책은 아니다.그렇다해서 무겁고 난해하지도 않다.우리가 얕게든 깊게든 알고 있는 노자의 앎을 그 이상으로 끌어 올려주며 우리가 사는 지금 적어도 삶의 지표를 찾아갈 수 있는 지혜를 통해 사뭇 노자의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부러울 게 없을 것 같기도 하다.다만,노자의 전체 흐름 속 하나하나의 흐름이 내게 의미부여와 함께 깊이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전환점을 주고 있는 듯 하다.현대인은 차고 넘치는 정보화 시대에 속도전에 미쳐 앞만 보고 달려가지만 그 속에서 적잖이 혼돈을 겪고 있으며 마지못해 지닌 지혜마저도 잃어가고 얻지도 못하며 겉치레 속 보여지는 모습에 연연해 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이제부터라도 '시로 풀어쓴 도덕경'을 읽고 그 안에서 우리 삶의 수많은 오류를 바로 잡고 보다 더 넓고 깊어지는 우리의 안목을 키워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그야말로 도덕경은 과거가 아닌 현 시대에서도 그 가치가 빛나고 여전히 살아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였던 듯 하다. |
|
<도덕경>에 관련된 책은 여러 권 읽었지만 도덕경 전체를 읽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책들이 <도덕경>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저자 자신의 생각과 설명을 곁들여 독자들이 도덕경을 조금 더 쉽고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성이라 각 구절에 대한 해설이 저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누군가에게는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해설을 곁들이지 않는다. 오로지 도덕경 원문과 이를 시처럼 풀어쓴 해석만을 들려줄 뿐이다. 그렇기에 도덕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닫는 것은 독자 자신의 몫일뿐이다.
저자는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도덕경>의 저자 노자와 <도덕경>에 관해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5천 자에 불과한 도덕경은 그 깊이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면서 평생 옆에 두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이할만한 점은 저자가 ‘기독교 관점에서 재해석한 동양고전’을 모토로 이 책을 집필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성경, 특히 요한복음의 내용을 도덕경 해석에 대한 주해로 사용하고 있고, 본문의 해석도 성경적인 내용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별다른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기에 단락 하나를 읽더라고 깊이 고민하게 된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무위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는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독자 자신이 만들어가는 책이다. 노자가 던진 화두를 스스로 깨우쳐가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큰 부담 없이 끊임없이 읽다보면 노자와 그의 생각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도덕경의 깊은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
|
시로 풀어쓴 도덕경 – lalilu
이 책은 도덕경의 내용을 쉽게 풀어 시라는 형식에 담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