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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에게, 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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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흔한 이름이다. 부르기 쉬운 이름이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조차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두 사람은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남아프리카 사람이지만 지금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존 쿳시는 노벨상을 받았지만 나는 아직 그의 작품을 만나본적은 없다. 다소 대중적인 미국의 현대 작가인 폴 오스터는 반면 몇몇 개의 작품으로 그를 만났지만 아직까지 타자기를 고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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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흔한 이름이다. 부르기 쉬운 이름이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조차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두 사람은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남아프리카 사람이지만 지금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존 쿳시는 노벨상을 받았지만 나는 아직 그의 작품을 만나본적은 없다. 다소 대중적인 미국의 현대 작가인 폴 오스터는 반면 몇몇 개의 작품으로 그를 만났지만 아직까지 타자기를 고집하는 마치 작은 변방의 오래된 무명의 작가를 연상시킨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다. 남자들끼리 이렇게 오랫동안 서신 교환이 가능한 이유는 두 사람이 글을 쓰는 감성을 가진 사람이고,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데서 오는 문학적 교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정의 힘이라는 것은, 특히 남남 사이의 우정이란 것은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으로부터 나오는 게 더 일반적이겠지만, 둘은 오롯이 두 사람이 써낸 책과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는 것으로서도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어떤 기회에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교환되는 서신 속에는 그들이 매우 성공한 소설가로서의 사소한 일상들과 또한 그동안 그들이 매체를 통해서는 하지 못했던 완전하게 정리되지 못한 여러가지 생각들과 고민들, 그리고 확고하게 자리잡은 어떤 가치관과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고스란히 포한되어 있다. 소설가라고 해서, 서로에게 문학적 토론만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스포츠에 열광하는 남성들로서, 각종 스포츠 경기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와 입장 등을 너무 길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그 방면에 관심이 전혀 없는 내게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조금씩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듯 어떤 작은 일들을 계기로 생각들이 교환되고 발전되어 가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소설가들에게 있어서 평론가는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는데, 폴 오스터의 경우 매우 적대적인 평론을 쓴 평론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폴오스터의 책을 엄청나게 비판한 비평가를 폴 오스터는 우연히 식당에서 만났는데,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마치 그 글을 안읽은 것처럼 그를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평론가가, 먹고 사는 방법이 특정 소설가들을 실날하게 비판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배설의 즐거움을 대신해주는 것이라면, 이 책을 읽었을테고, 거기에서 자신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영예를 입었을 듯하다. 폴 오스터나 존 쿳시 정도의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가라면 신문의 비평란에 실린 어떤 비평에도 초월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 그런 심적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방법으로 오스터는 비평을 읽지 않는다고 할 정도니, 미국적 비평이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내가 비평을 자주 읽지는 못하지만, 자주 느끼기에 알아먹지 못할 외계인의 난해한 용어로 문장 하나 하나를 망가진 그물처럼 마구 꼬아놓아 이게 좋다는 소리인지 나쁘다는 소리인지 알 수 없다. 비록 존과 폴에게는 상처를 주는 악평일테지만, 유명 일간지에 비평가라면 단순히 그들의 글을 마구 까는 것만으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일을 취미로 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 비평을 읽어보고 싶다.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폴 오스터는 이메일과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지, 자주 이메일을 시리(와이프)가 전해주었다, 시리가 메일을 못받았다 라는 등의 내용이 많았고, 팩스 용지가 없었다는 등의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말이지 폴 오스터는 아직도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간단한 디지탈 일상에 어려움을 겪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고집같은 것이 계속해서 아날로그적 삶을 지향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선셋파크와 같은 소설을 쓰는 사람, 특히나 도회적인 이미지라는 한국어 수식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팩스로 메일을 받는 시대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일도 드문 경험이다. 


<선셋파크>에는 주인공이 미성년자와 사랑하고 관계를 갖는다. 물론 자극적이거나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장면도 없고, 법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강요나 폭력에 의한 정사 장면은 없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애틋함만이 있을 뿐인데, 오히려 미성년자와의 관계에 대한 법적 혹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방해를 받는다. 폴오스터의 소설은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모양인데, 문제는 그 이전에 썼던 소설 <보이지 않는>에서 남매들끼리의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대조된다는 사실이다. 근친상간은 얼마 전 읽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  <그랜드마더스>에서도 매우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졌는데, 쿳시는 좋은 친구와 형제자매간의 성애라는 소설적 소재에 대해 '신비스러운 미지의 것으로 바뀌는 데서 오는 바로 그런 매력'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한 때 무질과 나보코프 등에 의해 문학에서 중요한 주제였으나 요즘은 사정이 바뀐 것은 틀림없다. 부모와 자식간의 섹스는 금기 중에서도 최후의 금기지만,  형제간의 섹스는 적어도 그에 관해 이야기를 쓰는 정도라면 문제 없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편지에서 이러한 소설 내 성적 금기라는 주제는 자주 언급되는데, 계급 내에서만 성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제한했던 사회에서 먼 길을 떠나온 우리가 피임법의 도래에 의해 괴물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힘을 잃고 전통적인 성적, 인종적 금기로부터 해방되어, 불륜을 포함한 모든 범위에 걸친 금기시된 성행위를 허용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단 한가지 어린이와 섹스하는 성인 남자들에게로 금기에 대한 모든 분노가 집중된다는 것이다.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어린이를 향해 욕망을 품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 분노하고 이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는 정당하다고 본다. 다만 두 사람의 대화의 핵심은 그런 소재가 소설 속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단순히 현상만을 보고 작가까지 쓰레기 취급하는 평론가와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예술 행위에 대한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토로하고 싶어하는 작가들의 대화에 수긍될 뿐이다. 


후반부에 갈수록 대화는 조금씩 더 깊어져서 소설쓰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왔다.  그 중 하나가 공간 창조에 대한 작가들의 작업 방식이다. 가끔 나는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서 말하는 공간에 대한 시각적 상상력의 부재로 이해 어떤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려는 시도에 자주 어려움을 부딪치곤 하는데, 폴 오스터는 그 얘기를 하는 거였다. 가령 그는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그 속의 등장인물을 자신이 소년시절 살았던 집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한다. 하지만 '저자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책 속의 방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p259)'라고 그는 말한다. 독자들은 작가들이 만들어낸 인물들과 행동을 자신이 경험한 자기만의 방 안에 넣어놓기에, 독자들 개개인의 개별적인 자기만의 이미지들이 한 권의 소설 안에서 끊임없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즉, 한 권의 소설은 독자의 수만큼의 다른 소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에는 어떨까. 폴 오스터의 경우 자신의 소설 속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공간이라 하더라도, 소설의 인물이 걷는 거리, 앉아있는 방, 그 방 속에 위치한 테이블, 소파 가구들이 어떤 관계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그려놓는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믿게끔 하려면  아니면 믿도록 속이려면 구체적으로 상상력을 다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p260)'는 것이다. '아무도 앉을 일 없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해도 허구의 소파가 허구의 방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p262)'는 오스터와 달리 쿳시의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황량하고 빈 정육면체다. 소파는 필요할 때 넣고, 그 다음에는 주인공의 동선에 따라서 도구류를 둘 수 있는 가구들이 배치된다. 대신 쿳시는 '시각적 이미지 대신, 막연하게 아우라 혹은 조성이라 부르는 것을 갖는다(p272).' 그는 책을 쓸 때 어떤 독특한 아우라 같은 것을 불러내는데, 그것은 책을 다시 쓰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g******1 2016.03.28. 신고 공감 8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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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그 순수한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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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을 주는데, 두 소설가의 우정이 담긴 이 책이 그러했다. 폴 오스터와 존 쿳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는 인지하였으나 친분이 없다가, 우연히 호주의 박람회에서 만나 편지를 주고 받기로 한다. 타자기로 작성하여 팩스로 주고 받는 편지 말이다. 폴은 미국 뉴욕에서, 존은 호주의 아델라이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여 시차에 적응하느라 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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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을 주는데, 두 소설가의 우정이 담긴 이 책이 그러했다. 폴 오스터와 존 쿳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는 인지하였으나 친분이 없다가, 우연히 호주의 박람회에서 만나 편지를 주고 받기로 한다. 타자기로 작성하여 팩스로 주고 받는 편지 말이다. 폴은 미국 뉴욕에서, 존은 호주의 아델라이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여 시차에 적응하느라 불면의 밤을 지새는 두 사람. 팩스기계가 울리는 동안 60대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70살 생일을 맞이한다.


경제, 스포츠, 영화, 언어, 예술, 영화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나누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다. 존의 말에 따르면 “진짜 대화는 대화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이 있을 때에만 가능”(152쪽)한데, 두 사람의 대화가 유연하게 흘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부드러운 번역에서는 편지 발신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폴은 열정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존은 다소 냉소적이다. 아마도 나이 차이,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글을 읽으며 읽고 싶은 책들도 생겼는데 모국어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타자의 단일 언어』이다. 데리다는 자신이 프랑스어 단일 언어 사용자이다/였다 해도 프랑스어가 자신의 모국어는 아니다/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존은 스물한 살에 영국에 가 살면서 자신이 본토박이들보다 더 나은 언어를 말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입을 열면 외국인 티가 났다고 한다. 그는 자신은 ‘책을 통해’, 다른 이는 ‘직감으로’ 언어를 알았노라 결론 내렸다.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가 ‘모국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폴의 아내 시리가 처음 쓴 언어는 노르웨이어였다. 시리는 미국인이고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이지만 가끔 전치사에 대한 실수를 한다. 그렇다면 시리의 모국어는 무엇일까. 두 작가는 ‘모국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이 주로 쓰는 언어가 꼭 모국어라는 법은 없다. 자신이 편하게 느끼고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가 반드시 모국어인 것은 아니며, 모국어이지만 그 언어를 서툴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한 사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아주 흥미로운 주제다. 언어와 문화, 민족과 지역 그리고 분류...


존은 더 이상 젊은이들이 시를 읽지 않는 것,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형성했던 시의 힘. 그는 아마도 어떤 현상에 의해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초부터 예술이 우리 내면을 더 이상 점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이에 폴은 이 문제를 숙고할수록 “나 자신의 시대, 나 자신의 생에 부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견디기 어렵”(138쪽)다 한다. 한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 예를 들어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병사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의 문학적 표현들, 언어의 뉘앙스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폴은 예술이 자신의 주도적 역할을 내 주었음에도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 한다. 예술은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예술(문학, 연극, 음악, 그림) 뿐만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욕구를 충족한다. 존이 얘기하는 스포츠에서의 ‘우아한 순간들’, 너무도 딱 맞아떨어져 박수를 칠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그 상황의 목격자가 된 것만으로도 감사드리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예술의 무용성 때문에, 예술이 중요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일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그것을 행하는 순간 가장 깊고 강력하게 인간적이 된다.


존은 사회에서는 소설 읽기에 대한 무관심이 퍼져 있음을, 읽기에서 얻는 오락이 경시됨을 지적한다. 새로 나온 소설을 읽는 사람은 북클럽이나 독서 모임에 있는 여성들이라고. 이야기의 주제는 전자책으로 옮겨 간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텍스트가 변경되거나 삭제되지 않을까. 전자책과 전자기기로 가득 찬 도서관은 어떠한가. 스포츠의 형태가 텔레비전 중계를 위해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는 보고 읽고 즐기는 순수한 즐거움, 진짜 즐거움을 잊을 수도 있다. 상상할 필요 없이 이미지로 대체되는 책들이라...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은 어쩌면 쉽게 접하고 얻어온 것들,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한 것들을 소수가 독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숱하게 다루어진, 본질이 아닌 이미지를 소비하는 경향 말이다. 소설을 쓸 때, 배경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짜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거실의 가구, 벽지, 색상, 창문 개수 같은 것들 말이다. 폴은 꼼꼼하게 구성하는 편이고, 존은 필요에 따라 배경을 불러낸다. 미국 선거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아파르트헤이트와 이스라엘 시민을 비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전화와 타자기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전화번호부 때문에 옛날 생각이 났다. 예전에는 (조금 과장하면) 전 국민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는 전화번호부가 있었다. 어느 시 어느 동에 사는 김모 씨, 이런 식으로. 요즘엔 개인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예전엔 그런 거 없었다. 공중전화마다 비치되었던, 악력을 보여준다고 맨손으로 찢는 장기로 쓰이기도 했던 그 책... 하긴 공중전화도 찾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두 소설가가 다룬 주제들에 빠졌다 나오니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 싶어 책을 세 권 주문했다.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 헤겔의 책이다.


(오타: 196쪽 시뮬라크라 → 시뮬라크르)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a 2016.04.03.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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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디어 폴》 편지, 그 아날로그적인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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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편지'를 써야 하는 일은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간편하게 문자 혹은 이메일이면 일 분도 안 되어 전송하고 답장까지 받을 수 있는 걸, 굳이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이고, 편지가 도착해서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가 여러 날에 걸쳐 그것을 읽어야 한다면 불필요한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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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편지'를 써야 하는 일은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간편하게 문자 혹은 이메일이면 일 분도 안 되어 전송하고 답장까지 받을 수 있는 걸, 굳이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이고, 편지가 도착해서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가 여러 날에 걸쳐 그것을 읽어야 한다면 불필요한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꽤 오래 전에 펜팔이라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에 나도 펜팔 친구를 만들어 본 적이 있고, 당시만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 편지를 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말이다. ''로 하는 것과 '손글씨' 로 전달하는 생각과 감정에는 분명 차..가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 모두 잊어 버리고 살고 있지만 말이다.

지난주 크리스마스 만찬에서 가족 중 제일 어린 아이들 (일곱 살, 열 살, 열다섯 살)에게 매년 똑같은 음식을 -그 어떤 변화도 없이- 먹기가 고역스럽지는 않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들 음식이 아주 좋다고, 똑같으니까 즐겁다고, 해마다 진심으로 그 만찬을 고대한다고 하더군요.

의례가 주는 위안이랄까요. 종교가 관여하지 않는 의례입니다. 가족 의례의 위안입니다.

                         2012 1 12일 오스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와 미국의 대중 문학 소설가, M 쿳시와 폴 오스터, 이들 두 작가가 어떻게 함께 편지로 우정을 나누게 되었을까. 순문학과 대중문학으로 서로의 스타일도 다르고, 나이대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너무도 다른데 말이다. 이들의 만남은 아주 우연한 기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문학 축제에서의 첫 대면 이후 정기적으로 편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쿳시가 했고, 오스터 또한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가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들을 바탕으로 서로의 일상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첫 만남이 있었던 2008년부터 2011년까지, 3년에 걸쳐 79통의 편지를 나누게 된다. 당연히 대화의 피드백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한 쪽에서 자신의 생각을 길게 풀어놓으면, 그 편지가 반대편에 전달이 되어 그걸 읽고 상대방이 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식이니 말이다. 이들의 편지는 빠르면 단 며칠 만에도, 사정이 있거나 바빴을 경우에는 한 달여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들이 팩스로 주고 받은 수십 통의 우정 편지들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양한 분야에 걸친 수다와 자신의 삶과 글에 대한 생각들이라서 이것 자체로도 한 편의 문학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말이다. 스마트폰 세대인 우리는 무조건 빠르게 답변하고, 가능한 짧게 대화하고, 오래 생각하지 않고 쉽게 결정을 내리고는 한다. 요즘은 문자를 보내고 나면 상대방이 그걸 읽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표시까지 있어서, 현대인의 조급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문자를 읽지 않지? 에서부터 문자를 읽어놓고 답을 왜 안 하는 거야? 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우리에게 '여유로움'이란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릴 테니 말이다 

스포츠에는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굳이 입 아프게 말할 것도 없이(너무 빤하지 않습니까?), 승자보다 거기에는 패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 중 대다수는 이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스포츠는 우리에게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에 관해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져도 괜찮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진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스포츠에서는 전쟁과 달리 패자가 승자에게 목을 잘리게 되지는 않으니까요.

2010 7 19일 쿳시

 

쿳시의 이 편지에 대해 오스터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야구를 여전히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당신이 편지에 쓴 바로 그 점입니다. 자주 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 말입니다." 라고. 특히나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경기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거의 매일매일 경기를 치뤄야 하기 때문에, 그날의 승리를 마냥 기뻐해서도, 그날의 패배에 마냥 침울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패배를 대수롭지 않게, 승리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기뻐해서는 안 되는' . 그래서 흔히들 야구를 인생의 거울로 비유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오스터의 답장에는 당시의 스포츠계에서 있었던 이상한 일들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풀어 놓는다.

존과 폴의 편지에는 각자의 성향과 색깔, 성격, 가치관등이 뚜렷하게 대조적으로 드러나있어 더욱 읽는 즐거움을 준다. 나는 폴 오스터의 웬만한 국내 출간작은 거의 다 읽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편지를 통해 색다른 점을 깨닫게 되기도 했고, M 쿳시의 작품은 국내에도 이미 출간된 것이 몇 권 있어서 한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타자기를 좋아하는 폴 오스터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래서 오랜 만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물씬 느낄 수 있는 멋진 작품이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로얄 r*******n 2016.04.03.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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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와 존 쿳시의 지적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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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열린책들 출판사를 통해 오스터의 작품들이 출간되는데, 출간될 때마다 구입하여 읽고 있다. 물론 구입한다고 다 읽은 건 아니다. 일반 소설과는 달리 조금은 난해한 오스터의 스타일이 읽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부분에서 더 매력적이고 흥미를 끄는 작가이기도 한다.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오스터의 어린 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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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열린책들 출판사를 통해 오스터의 작품들이 출간되는데, 출간될 때마다 구입하여 읽고 있다. 물론 구입한다고 다 읽은 건 아니다. 일반 소설과는 달리 조금은 난해한 오스터의 스타일이 읽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부분에서 더 매력적이고 흥미를 끄는 작가이기도 한다.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오스터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나 일기를 다룬 [내면보고서]와 함께 노벨문학상 작가인 존 쿳시와의 편지를 다룬 [디어존, 디어폴]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존 쿳시는 [야만을 기다리며]같은 명작을 쓴 소설가이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도 아직 그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은 없다. 이 책으로나마 존 쿳시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 책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폴(편지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고, 존 쿳시도 이렇게 부름)과 당시 주로 호주에 거주하고 있는 존(존 쿳시 역시 이렇게 불림)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이다. 폴은 전형적인 미국인답게 스포츠와 영화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존은 남아프리카에 거주한 경험 때문인지, 국제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존이 조금은 까칠하게 느껴진다. 폴과의 대화에서도 가끔 사소한 의견 차이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주로 폴이 수용하거나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둘의 대화는 비교적 따스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깊다.
 
둘의 대화는 주로 가벼운 내용들이 많다. 여행과 그 여행의 과정에서 서로 만난 경험들, 주변 지인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들 일상적인 내용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반복되는 주제는 '스포츠'이다. 특히 폴 오스터는 야구광이고, 스스로도 야구나 테니스 경기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 반면 존은 활동적인 스포츠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축구 경기를 좋아하여 월드컵을 관람하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실제로는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은 싫어한다. 대신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체스에 빠져있었고, 한때는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갔음을 언급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스포츠에 대한 공통인식을 가지고 있다. 스포츠에서 승리보다 참여하는 것이 더 값지다는 인식이다. 존은 조금 더 예리하게 스포츠에서의 패배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우리 중 대다수는 이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스포츠는 우리에게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에 관해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져도 괜찮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진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습니다. 스포츠에서는 전쟁과 달리 패자가 승자에게 목을 잘리지 않으니까요.
어린 소녀의 삶에서, 가짜 스포츠를 졸업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짜 스포츠에서는 어른들이나 형들이 항상 그에게 승리를 양보하여 어린 왕이 된 기분을 만끽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경기에서는 공을 맞히지 못하면 아웃이고,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에게 방망이를 내주고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야 합니다. 어린 소년의 정신세계에 이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고함을 지르고, 성질을 부리고, 부모님에게 먹혔던 온갖 속임수를 시도해 보고 싶어집니다. 현실을 자신의 자아에 복종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것이 스포츠의 위대한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매번 지지만 게임을 계속하는 한 언제나 내일이, 다시 시작할 때 기회가 있습니다.
이 패배의 위대한 학교에서 당신이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다면, 게임의 판결은 거부하고 위풍당당하게 물러나 홀로 고립을 택하지만 않는다면, 낙제하는 일이 없습니다. (P223)
 
이런 폴과 존의 대화는 때로는 심각한 문제에 대한 대화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문제는 팔레스타인 문제이다. 특히 존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으로 태어났기에 오래전부터 흑백 갈등을 보았고, 백인들의 흑인 탄압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는 네탄야후 같은 유대인 극보수주의자들을 증오하며, 이런 극복 수주 의자들이 결국은 남아공에서처럼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반면 유대인이면서도 폴의 생각은 조금 엉뚱하다. 존이 생각이 매우 정치적이고 예리한 반면, 폴은 유대인들에게 미국의 놀고 있는 땅을 주자는 등의 조금의 몽상가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인 패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패배라는 것은 그런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패배해 왔습니다. 운명이 아무리 쓰라릴지라도 그들은 맛 보아야만 하고, 그것을 참된 이름으로 부르고, 삼켜야만 합니다. 패배를 받아들이되 건설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대로, 건설적이지 않은 방법은 내일은 뭔가 기적이 일어나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히게 되리라는 보복주의자들의 꿈을 계속 키워 주는 것입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건설적인 방법에 관해서라면 독일의 1945년 이후를 보면 될 것입니다. (P197)
 
또 당시의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 대한 생각들도 나온다. 둘 다 단지 숫자놀음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이렇게 커다란 파급효과를 미치는지에 대해 어리둥절하면서도, 그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문가 이상의 시각으로 세계의 금융위기를 진단한다. 특히 폴의 시각은 예리하며 놀랍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허구의 힘이고, 우리 세계에서 최고의 허구는 돈입니다. 돈은 무가치한 종잇조각이 아니고 뭡니까? 그 종이가 가치를 얻었다면 그것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은 믿음 위에서 작동합니다. 진실이나 현실이 나니라 집단적인 믿음 말입니다.
당신이 언급한 숫자는 이러한 믿음에서 태어납니다. 그 숫자들은 종이 위에 나타나고, 큰 금융 거래에서 그 종이가 사라지고 숫자로 변환됩니다. 숫자들은 숫자들에게 말을 겁니다. 우리는 순수한 관념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의 동굴에 대한 당신의 언급은 적절합니다. 그 숫자들은 벽에 가물거리는 그림자입니다. 혹은, 시리의 아버님께 곧잘 하시던 말씀대로라면 이렇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 돈이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숫자들이 우리를 겁주기 시작한 시대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진짜 위기가 아니며, 그 어떤 구체적인 사실과도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당신에게 동의합니다. .......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갑자기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평온했는데 오늘은 공포가 퍼져 나갑니다.
 
그 외에도 둘은 사무엘 베케드의 작품에 서평을 쓰는 문제나 평론가와의 갈등 문제 등,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주고받는다.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자신의 분야에서 지적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참 소중하면서도 부럽게 느껴진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i*******3 2016.04.01. 신고 공감 2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디어 존, 디어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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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멕스웰 쿳시와 폴 오스터. 두 작가의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이메일도 있고, 간편한 sns도 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타자기로 글을 쓴다고 한다. 최신 기계에 대한 거부감, 혹은 너무 가볍고 간편해진 사람들 간의 대화가 못마땅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특히, 쿳시는 현대인의 짧은 대화, 지속적이며 간편한 연결성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두 작가가 국가와 나이를 넘어 우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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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멕스웰 쿳시와 폴 오스터. 두 작가의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이메일도 있고, 간편한 sns도 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타자기로 글을 쓴다고 한다. 최신 기계에 대한 거부감, 혹은 너무 가볍고 간편해진 사람들 간의 대화가 못마땅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특히, 쿳시는 현대인의 짧은 대화, 지속적이며 간편한 연결성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두 작가가 국가와 나이를 넘어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신기했다. 쿳시는 다소 신경성에 비판적인 사람인지라 걱정스러운점도 있었는데, 쿳시의 비판과 불만을 오스터가 잘 대꾸해주며 받아주는 것 같았다. 책에서도 그러했는데, 쿳시는 다소 비판적이며 학구적인 스타일을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쿳시가 불만꾼이여도 그의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쿳시의 글 위주로 읽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은 안부를 물으면서 주제에 관한 비판적인 생각을 나누곤 했다. 주로 쿳시가 현안을 잡고, 문제거리를 만들면 오스터가 자신의 생각을 뒤받침해주는 식이었다. 두 사람은 잘 맞는 사람들 같았다. 쿳시는 앞서 얘기한대로 비판적이었는데, 스포츠에 관해서도 그렇고, 구경하는 자신과 사람들에 대해서도 시간낭비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미국에서 벌어진 금융위기와 숫자로 대변되는 세계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충돌한 점도 있었는데, 모국어 문제와 소설속에서 휴대폰을 비롯한 첨단기기를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오스터는 소설속에 첨단기기를 등장하는 게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지만, 쿳시는 그렇지 않았다. 계속해서 연결되어 실시간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현실이 무언가 사람 사이에서의 우연과 갈등, 사건을 미리 폭로하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소설속에는 등장시킬 생각이 없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하고 축하해주고, 편들어주기도 했다. 근친상간과 어린 여성에 대한 사랑, 법률의 이상함에 대하여. 나이차이와 사진과 예술. 쿳시는 나이어린 여자와 만나는 남자는 불법이라 잡혀가지만, 실제 남자친구와 할짓 다했어도 아무렇지 않아한다면서, 법이 사람들의 잣대에 의해 적용됨을 지적한다. 그의 소설 추락에서도 등장했는데, 어린 여학생과 사랑을 나눈 교수가 추락하게 되는 내용 말이다. 수치를 당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는 흑백갈등과 남녀 사이의 그 성적약탈을 여기서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그의 소설속에 유대인에 대해 비난하는 글이 있는데, 독자인지 편집자인지, 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소설속에 쓰면 저자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멋대로 판단한 모양이다. 소설속에 히틀러가 등장하면 나치주의자라고 생각한 것일까. 유대인을 비난하는 글이 있더라도, 저자의 의도나 생각, 가치관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오스터는 그런 편지는 당장에 버리라면서 그의 편을 들어준다. 쿳시는 또한 미국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입국 심사도 따로 받았던 경험을 들려준다. 그가 베트남 파병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란다. 미국은 정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가장 제국주의 국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쿳시의 글 위주로 읽은 건, 그의 글이 날카로우면서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d******m 2016.03.22.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디어 존, 디어 폴 / 폴 오스터. J.M 쿳시
"디어 존, 디어 폴 / 폴 오스터. J.M 쿳시" 내용보기
누군가와 오랜 기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본다. 최근에는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맘 먹어야하는 일(?)이 되어 버려서인지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적은 학창 시절,서투른 영어 실력으로 해외 펜팔을 했던 기억, 예쁜 편지지 사서 모으고 그것에 편지를 주고 받는 재미로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전부인 것 같다. 그나마 그렇게 쓰던 편지도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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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오랜 기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본다. 최근에는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맘 먹어야하는 일(?)이 되어 버려서인지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적은 학창 시절,서투른 영어 실력으로 해외 펜팔을 했던 기억, 예쁜 편지지 사서 모으고 그것에 편지를 주고 받는 재미로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전부인 것 같다. 그나마 그렇게 쓰던 편지도 이메일, 다양한 SNS가 등장하면서 쉽고 간편하게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게 되다보니 어쩌다 한번 하게 되는 일이 되버렸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로바로 사연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편리한 점은 있지만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편지를 넣은 후 답장이 올 때까지의 그 기다림, 설레임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쉬운 요즘이다.

직접 쓰지는 않으면서도 편지.. 라는 말 만으로도 아련한 그 무엇인가를 느끼기에 이렇듯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 받은 서간집은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작가들의 편지라니.. 일반 편지와는 달라도 뭔가가 다르겠지.. 하는 호기심에 꼭 읽어 보고 싶은 맘이 들었다.

 

 

폴 오스터(좌) 와 J.M쿳시(우) - 출처: 한국일보

 

편지를 주고 받은 두 작가 폴 오스터와 존 맥스웰 쿳시..

폴 오스터의 작품은 <달의 궁전>으로 시작해서 최근 <선셋 파크>까지 전작은 아니지만 대표작들을 읽었다. (뉴욕3부작, 부르클린 풍자극, 환상의 책,보이지 않는)

그의 작품은 첫 문장이 인상적이고 환상적인 요소와 함께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잘 어우러진다고나 할까..

반면에 쿳시의 작품은 아직 접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래도 좀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 폴의 편지를 좀 더 편안하게 읽게 된 것 같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다양한 부분에 대한 자신들의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우정,사랑에 대해 영화, 스포츠에 대해, 정치와 지금의 경제에 대해. 국제적인 정세에 대해..

그러고 보니 조금씩이라도 다루지 않은 영역이 없는 듯 하다. 다양한 부분에 대해 합일점이 있기도 하지만 대척점도 보여준다. 서로의 의견을 보완해 주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한 모든 이야기 속에는 두 사람의 신뢰가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고 주고 받은 이야기들 속에서 이 두 작가의 작가관들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경쟁의 쾌감, 때로 의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강렬한 집중력, 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실패에 대처할 필요성, 그 밖에 수많은 다른 화제들도 말입니다. 나중에 아무때고, 다른 것을 하던 중에라도 앉아서 그 편지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p71 폴)

 

경쟁이라고 하면 제게 떠오르는 것은 쾌감이 아니라 단 하나의 말도 안 되는 목표에 미친 사람처럼 온통 정신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아무런 관심도 없고, 이전에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 볼 일 없는 낯선 사람을 이기고 말겠다는 목표 말입니다.(p75 존)

평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심오하게 논쟁을 하는 모습이나 접근하지 어려운 심각한 문제들을 유쾌하게 주고 받으며 비판하고 비웃는 장면들이 역시 당대의 작가들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논쟁속에서도 서로의 건강과 가족들의 근황을 물으며 만날 날 만을 고대하는 기다림등도 볼 수 있어서 역시 남의 편지를 이렇게 읽어보는 것은 유쾌한 일(?)임을 또 한번 알게 해 준다.

그들은 이메일이라는 편리한 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쓴 편지를 펙스를 통해 주고 받는다. 그들이 편리한 수단이 아닌 낡은 매체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이러한 편리에 의해 쉽게 모이고 흩어질 수 있다면 극적인 구성을 만들어내는데 애로 사항이 있을 것 같다는 그들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지며 그들을 작가로서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두 사람이 만나 대담을 하는 형식이었다면 내용은 이것보다 더 진솔하지 못했을 것 같다.

편지를 보내고 어떤 답변이 올까를 기다리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한번 더 정리하고 그렇게 정리된 것들을 다시 한번 공유하고.. 바로바로 나오는 이야기보다는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는 더욱 깊이 있고 인상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후 그것이 바닥에 닿는 콩.. 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이제 그 편지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일만 남는다. 그 기다림끝에 다가오는 반가움 그리고 반가움과 함께 만나게 되는 편지 저쪽의 사람.. 폴의 말처럼 편지를 주고 받다보면 마치 상대방이 <부재하는 타인> , 즉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고안한 상상의 친구와 같은 존재..(p310)처럼 느껴질 것이다. 옆에 없지만 무의식중에 말을 걸고 대화를 하고 있는..

 

2008년에서 2011년까지 약 3년여간 오고 간 그들의 편지를 통해 작품으로서가 아니가 그들의 생생한 육성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기에 웬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만난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관심사들과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조만간 쿳시의 작품을 만나봐야할 것 같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n******m 2016.03.2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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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편지교환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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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가 시선을 끈다거나 드는 두 손에 착 감긴다거나 느낌이 좋다면읽는 내내 기분이 좋다.그만큼 책디자인이 중요한 것이리라.물론 내용이 좋아야함은 당연하다. 더 욕심을 내어 표지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내 시선을 잡아봐라고, 책꽂이에 멋지게 꽃힐 디자인으로 쌓여 있음 흐믓하지 않겠냐고.이번에 겉과 속이 다 마음에 드는 책을 손에 쥐었다.띠지또한 버릴 수 없게 한 통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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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가 시선을 끈다거나 드는 두 손에 착 감긴다거나 느낌이 좋다면

읽는 내내 기분이 좋다.

그만큼 책디자인이 중요한 것이리라.

물론 내용이 좋아야함은 당연하다. 더 욕심을 내어 표지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내 시선을 잡아봐라고, 책꽂이에 멋지게 꽃힐 디자인으로 쌓여 있음 흐믓하지 않겠냐고.

이번에 겉과 속이 다 마음에 드는 책을 손에 쥐었다.

띠지또한 버릴 수 없게 한 통속이다. 보통은 시작부터 버림을 당하는 존재가 띠지 아닌가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끼고 읽었다.



미국작가 폴 오스터와 남아프리카공화국작가 존 쿳시의 2008년에서 2011년 까지의 서신교환집이다.

이런 서간집은 개인적이기도 한 내용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두 사람간의, 더구나 유명한 작가들의 서신교환인지라 그들의 성격과  개성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또한 있었는데

그들 문화를 바탕으로한 사상과 독서,스포츠에 대한 생각, 정치등이 일상사에 대한 이야기 속에 솔직하게 묻어난다.

투덜거림도 정중한 겸손함도 때로는 서슴없는 비판도 하는 그들의 우정이 사랑스럽다.

 누군가에게 직접 쓴 편지를 보내고 싶어지는 책이다.


'' 실은 불평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신사들,인간희극의 노련한 관찰자들,

   모든 것을 보았고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현명한 쟂빛 머리의 사람으로서,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위선,부정,

    어리석음을 불평하고 꾸짖는 것, 공격하는 것이 우리의 할일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떠들고 있을 동안 젊은이들은

   눈알을 굴리건 말건 내버려 두라지요. 그리 젊지 않은 자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무시하게 놔두라지요. 우리, 멸시당하면서

   황야에 대고 외치는 선지자들은 최대한 경계를 눚추지 않아야 합니다 ㅡ 우리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싸움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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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디어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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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이 지배하는 세상은 실체보다 허구를 쫓게 만들고 우리의 감성을 0아니면 1로 양분하게 만들어 버린것 같다. 디지털 형식의 편지, 이메일은 지성과 감성을 교환하는 도구로써의 편지가 아닌 형식과 속도 공식적이거나 마케팅에 이용되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격동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옛 감성을 그리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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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이 지배하는 세상은 실체보다 허구를 쫓게 만들고 우리의 감성을 0아니면 1로 양분하게 만들어 버린것 같다. 디지털 형식의 편지, 이메일은 지성과 감성을 교환하는 도구로써의 편지가 아닌 형식과 속도 공식적이거나 마케팅에 이용되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격동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옛 감성을 그리워 하면서도 현재의 시스템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요원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디어 존, 디어 폴>은 폴 오스터, 존 맥스웰 쿠체라는 두 거장이 손편지로 주고받는 서로의 생각들이다. 철학적, 사회적 그리고 내밀한 개인의 생각들을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에 깔고 주고 받는 손편지들은 (떄론 이메일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지성인들이 고민하고 나누는 대화의 질과 양을 엿볼 수 있게한다. 때로는 거시적으로 때로는 미시적으로 두 사람이 다루는 주제는 떄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게 느껴진다. 어찌되었든 이 책에 실린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비교적 최근에 주고받은 (2008년~ 2011년)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내용에 아날로그 감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손글씨 편지를 써 본것이 언제적 인가 돌아보았다. 지금의 아내와 연예를 시작할 즈음엔 인터넷이 있긴 했지만 크게 활성화 되어 있진 않았고, 이메일 보다는 손글씨 편지를 주고 받을 시기여서 그런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내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냈던것 같다. 문구점에가서 예쁜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고르고, 내 손에 맞는 펜을 골라 연습장에 테스트름 몇 번 해 본후 생각을 고르고 정리하여 써 내려갔던 편지들은 분명 정성과 시간 그리고 과정의 미학이 그대로 담겨 있었던것 같다. 그렇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은 상대방이 답장을 보내기 위해 들였을 정성과 시간을 가늠하게 하고 내용의 진정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니터 화면위에 뿌려지는 텍스트와는 질적으로 다른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폴과 존이 주고 받은 편지들도 두 사람의 우정을 위시한 폭넓은 관심사와 사색이라는 표면적인 부분과 더불어 편지라는 형식이 실어 날라주는 온기와 솔직 담백함이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0과 1로 양분된 스피디한 세계에서 잠시 한 발을 빼고 현대 문학계의 두 거장의 빛나는 지혜와 유머로 가득한 <디어 존, 디어 폴>을 느릿하게 읽어 보도록 추천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골드 c******g 2016.04.0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지금 여기에 그들과 있다 -디어 존, 디어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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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보고 디자인적 색상의 표지에 감탄했다. 사실 나는 띠지를 싫어하고 책을 한 번 감싼 표지도 싫어한다. 보통 띠지는 눈에 띄는 문구라던가 잘 팔릴 듯한 광고문구가 대부분이라 가차없이 버리는데 이 책은 표지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폴 오스터’의 담배를 물고 있는 그림과 띠지의 어울림(색상과 글씨 색, 표지와 연결된 가는 흰 선의 뒷배경 이미지까지)이 흠잡을 데 없
"지금 여기에 그들과 있다 -디어 존, 디어 폴-" 내용보기

처음 책을 보고 디자인적 색상의 표지에 감탄했다. 사실 나는 띠지를 싫어하고 책을 한 번 감싼 표지도 싫어한다. 보통 띠지는 눈에 띄는 문구라던가 잘 팔릴 듯한 광고문구가 대부분이라 가차없이 버리는데 이 책은 표지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폴 오스터의 담배를 물고 있는 그림과 띠지의 어울림(색상과 글씨 색, 표지와 연결된 가는 흰 선의 뒷배경 이미지까지)이 흠잡을 데 없었다. 더군다나 띠지 안쪽에는 서신을 주고받은 저자들의 약력이 고스란히 단정한 색상으로 인쇄되어 절대 버릴 수 없게 만든 영리한 디자인이어서 맘에 쏙 들었다. 샘 메시가 그린 폴 오스터의 그림이 날 바라보면서 그래, 니가 내 편지들을 읽어보려고? 그럼 어디 한 번 그래 보시던지..’라고 말을 건네는 듯해서 책을 읽으려고 표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즐거웠다

 

이 책은 미국의 유명 작가인 폴 오스터와 노벨문학상을 받은 존 쿳시2008년부터 2011년까지 만 3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그래서 책 제목이 디어 존, 디어 폴이다. 좀 예스럽기도 하고 좀 정겹기도 하다. 이 말은 이메일을 비롯해 편지글 어디에도 쓰이나 이상하게 편지지에 연필이나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종이책으로 글을 읽어서일까. 아님 표지의 타자기와 날아다니는 글자판 때문일까. 모르겠다. 실제로 그들은 편지를 타자기로 타이핑해서 팩스로 주고받았다. 간혹 팩스에 문제가 생기면 한참만에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낸 것을 놓쳐서 이메일로 받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참으로 재밌다

 

이 책은, 목차를 항상 살피는 내가 그 단계를 건너뛰고 마지막에 훑은 몇 안 되는 책이다. 왜일까. 역시 모르겠다. 편지에 제목을 붙인다는 걸 생각해 보지 못해서일까. 당연히 그럴 것 같다. 실제 책 속의 편지들에는 발신 날짜만이 붙어 있지 제목은 없다. 오직 목차에만 나와 있다. 그래서 책을 몽땅 읽고 목차를 읽어도 별 죄책감이 없었다. 오히려 목차를 보면서 편지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편지의 내용이 생각보다 방대하고 박식하고 따라가기 벅찰 때가 있어서 날짜로만 기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유용했다. 편지의 제목을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영문판을 검색하니 날짜와 장소정도만 있는 것으로 보아 출판사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에서 폴과 존은 세상에 대한 관심사에 대해 서로 가감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한다. 스포츠이야기, 정치이야기, 본인들의 책이야기, 성적인 이야기 등. 분야를 나누지 않고 의견을 주고받으며 어떤 때는 팽팽하게, 어떤 때는 격하게 동감하면서 서로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가끔은 학회나 초청으로 만날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그 결과 직접 만나서 기뻤던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폴 오스터쿳시에 비해 보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인 듯 하지만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쿳시는 남아프리카인이라 격변의 그 시대를 살았고, 또한 미국에서도 7년을 살았으나 베트남전쟁 반대시위로 영주권을 거부당해 지금도 미국에 오갈 때 버거움을 느낀다. 이런 여러 상황이 평생 미국에서 살아온, 유대계이나 미국인인 오스터와 생각부분에서 차이를 만들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사실 이 둘의 사적인 편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쏠쏠한 재미를 준다. 우선 내가 그들이 편지를 타이핑하는 타자기 옆에서 유령처럼 몰래 그들이 쓰는 글을 훔쳐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읽다보면 내가 그 공간에 들어간 느낌이 든다. 또 그들이 나누는 방대한 지식들이 유익하고 재미있다. 간혹 의견차로 충돌은 있으나 존중하는 부분도 좋다. 한 대치고 한 발 물러서서 그럴려고 한 것은 아닌데...’라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서로 내 하고 싶은 말을 침을 튀기며 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샛길로 빠져나가는 글을 읽다보면 순간 멍해지면서 뭐야?’하고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 최고 매력적이다.

만일 그들이 스카이프로 얼굴을 마주보며 마이크 달린 헤드셋을 끼고서 이런 이야기를 그 날짜에 나누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들이 나눈 대화를 책으로 냈다면, 그 때도 이 책과 같은 느낌이 났을까. 왠지 내가 그 옆에서 몰래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은 나지 않았을 것 같다. 언어로 드러나는 이야기보다 표정이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에 더 마음을 뺏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편적으로 불쑥불쑥 좋아하는 주제들이 찾아오기에 어느 것이 좋은지 꼽기가 참 어렵다. 그 나름의 의미가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편지, 국제 분쟁(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부분쟁 등)에 대한 편지, 책과 출판사, 비평가에 대한 편지, 스포츠에 관한 편지, 정치에 관한 편지, 성에 대한 편지 등. 그 중 좋았던 것 두 개를 굳이 꼽자면 스포츠, 특히 야구에 관한 부분과 정치에 관한 부분이다. 모두 폴 오스터가 보다 많이 이야기한 내용인데 야구 이야기는 내가 야구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 스포츠라는 것에 대해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많을 줄 몰랐다. 여러 날짜의 편지에 나오기에 즐겁게 읽었다. 또 하나는 정치에 관한 부분인데 이 또한 여러 날짜에 흩어져 나와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각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도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각 나라마다 비슷한 비율로 사람들이 구성되어 있구나하는 생각.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는 그런 것. 그들의 정치 이야기는 재밌으면서도 아팠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생각 때문에.

중간중간 기름칠처럼 본인들의 책이야기와 영화화된 이야기가 재미를 준다. 특히 폴 오스터의 살짝 드러나는 자뻑기질의 글들이 웃음나게 만든다. 이런 것이 편지와 잘 조화되어 있어서 거부감없이 가볍게 지나간다

 

지라는 것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마음이 더 드러나 다른 글을 읽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 좀 냉정하게 읽을 수 없는 느낌? 그런 느낌이다. 차갑지 않고 따스함이 근본적으로 깔린, 아니 그런 것을 기대하고 읽게 되는 느낌? 그런 느낌이다. 이들을 책으로는 접해봤으나 개인적인 연결은 전무한 나이지만 어쩐지 내가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그들과 같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담배 물고 타이프를 두드리는 오스터의 모습이나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생각을 끄집어내는 쿳시의 고뇌에 찬 모습 등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이 책의 묘미다. 내가 그가 아니지만 마치 내가 그인 것과 같은 느낌. 그래서 편지의 바깥까지 상상하고 그 사이 좁은 틈에 나를 우겨넣어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이 책 읽기가 참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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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1) 앞에서도 말했지만 표지가 너무 맘에 들었기에 영문판 표지는 어떠한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이런... 미국판은 논문책같은 느낌으로 폴 오스터와 존 쿳시의 이름만 크게 박혀있는 무미건조한 표지였다. 한국과 미국의 취향차이일까. 다른 나라에 출판된(구글에서 보니 33개의 edition이 있다는데 우리나라가 빠진 걸 보니 더 있을 것 같다) 책들도 미국판과 대동소이하게 이름만 박히거나 두 사람의 얼굴을 집어넣은 것들이었다. 특이하게 북유럽 나라들만 아기자기한 표지가 많았다. 난 우리나라 표지가 맘에 들지만 존 쿳시는 제외된 것이라 좀 맘에 걸린다. 노벨상도 탄 유명한 사람인데 우리나라에 폴 오스터가 유명하다고 그를 박대(?)하다니...

 

사족2) 표지 그림이 맘에 들었기에 어디 출처인지 찾으니 2002년 폴 오스터가 글을 쓰고 샘 메시가 그림을 그린 타자기를 치켜세움(The story of my typewriter)’에 들어있는 그림이었다. 어쩐지 타자기가 있고 폴 오스터가 있고 손이 있고 자판이 날아가더라. 멋진 그림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진 않았지만 분명 샘 메시의 그림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텐데 온라인서점의 저자부분에 그의 이름이 표기되지 않아 아쉬웠다.(또 다른 사족이다.) 어쨌든 디어 존, 디어 폴에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사족3) 맨 뒷 표지에 ‘Here and Now’라는 말이 띠지 위에 과하지 않게 은근히 노출되어 감동하면서 봤었더랬다. 심리 상담부분에서 들었던 말이었고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지금 그리고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아 예술적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알고 보니 이 문구가 영문판 제목이었다. 'Here and Now'.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어렵다.

 

사족4) 이 책은 존 쿳시가 폴 오스터에게 쓴 편지로 시작하고 끝이 난다. 그렇기에 제목을 디어 폴, 디어 존으로 짓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었고 읽는 내내 그 부분이 걸렸었다. 이 또한 폴 오스터가 우리나라에서 좀 더 유명하기에 그랬으리라 내 맘대로 생각했다. 마치 폴 오스터가 먼저 다정하게 존 쿳시를 부르며 편지를 쓴 것처럼 말이다.

 

사족5) 이 책의 목차는 다 읽고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편지 내용에 제목을 붙이는 것은 이상하기도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을 그 쪽으로 확정해 버릴 수 있어서 반드시 좋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 나름 책을 읽고 목차를 훑는 편이 낫다고 추천한다.

 

사족6) 이 책을 소중히 만들었다고 느꼈다. 앞서 말한 표지뿐 아니라 책의 크기, 두께, 글자, 편지형식의 일관성 등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목차에서 2008년 편지의 쪽수는 오른쪽에 적혀있고, 2009년은 왼쪽에 적혀있다. 각 연도마다 쪽수가 적힌 위치가 다르다. 세심하게 만들어서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보관해도 손상 없다는 사철방식(실로 꿰매어 제본하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뭔진 모르지만 책을 펼칠 때 책등 위쪽에 파랗게 굵은 실이 같이 구부러졌다 펴졌다 하면서 기분을 좋게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s*****5 2016.04.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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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디어 폴][우리는 계속 생각하고 배워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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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디어 폴][우리는 계속 생각하고 배워야합니다.][2016. 3. 26 ~ 2016. 3. 28 완독][열린 책들 출판사 서평단 활동]하지만. 문득, 그게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p11 우리 중 대다수는 이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스포츠는 우리에게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에 관해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져도 괜찮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p223 음~. 무엇보다도 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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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존, 디어 폴]


[우리는 계속 생각하고 배워야합니다.]


[2016. 3. 26 ~ 2016. 3. 28 완독]


[열린 책들 출판사 서평단 활동]





하지만. 문득, 그게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p11

 우리 중 대다수는 이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스포츠는 우리에게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에 관해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져도 괜찮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p223



 음~.

 무엇보다도 책의 질감이 너무 좋다. 표면이 까끌까끌 한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기분좋은 쓸림이라 좋고, 냄새 또한 좋다. (ㅂㅌ? 항상 책이 읽기 전에 냄새를 맡아보는데 다 달라~) 이것이 양장본(하드커버)의 힘?! 일단 기분좋게 책을 시작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해두자.


 <디어 존, 디어 폴>의 디어(Dear)라는 표현은 대부분 편지를 시작할 때 쓰이는 문구이다. 친애하는 존에게, 친애하는 폴에게 라고 쓰고는 서로간의 안부를 묻고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그 편지 말이다. 가상의 편지도 아니도 실제로 살아있는(?) 두 사람의 편지를 엿보는 경험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육체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면요. 일단 섹스가 개입되면 끝입니다.

p21

좋은 친구는 성애에 요구되는 신비의 요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p25


 특정 주제에 대해 타인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 내것으로 만드는 것과 편지에 쓰여있는 타인의 말을 읽어 내것으로 만드는 것의 차이는 뭘까?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타인의 말을 끝까지 듣고 거기에 맞춰 얘기를 하거나 분위기를 보고 말을 하는 비언어적인 측면과 충분한 준비가 없이 내뱉는 말로 감성이 상할 수도 있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겠다.


 하지만 글로써, 편지로써 타인과 대화를 하는 경우는 재미있는 측면이 있다. 오직 두사람만이 생각을 나누고 있는듯 보이지만 내가 슬쩍 끼어들어 말을 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감정을 상하게 할 경우도 없으며, 다른 생각이 들면 다시 대화를 시작해도 좋다. (물론 풍성한 대화를 위해서라면 전자가 좋다.)


​ …… 그것들은 항상 같은 책이지요. 같은 이야기가 미묘하게 변주되면서 끝없이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그러한 소설들을 지칠 줄 모르고 갈구합니다.


(중략)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회에 갈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이미 그 곳을 외울만큼 잘 알고 있지만 이 특정 피아니스트가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할지 듣고 싶은 거지요.

p56


 언제 어디서나 접속 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SNS나 E-mail을 쓰지않고 굳이 편지로 꾹꾹 눌러쓰는 그 감성이 좋다. 상대방의 안부에서 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요즘 하고 있는 일, 앞으로의 계획은 제쳐 두고 신변잡기(身邊雜記)처럼 써내려가는 두 작가의 특정 주제에 대한 대화가 흥미롭다.


 편지를 통해 친구와 우정, 남여간의 우정, 정치, 문학, 문화, 스포츠, 쾌락, 섹스, 언어, 여행에 이르는 토론이 자못 진중하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가감없는 토론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점이 아닐까? 의견이 갈려 벽에 도달했을 때도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성숙한 모습이 아름답다.



제 책에 대한 논평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체 읽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가 쓴것을 읽으면 낯선 사람한테 습격당한 기분이 들거라는 얘기는 다른 이들로부터 들을 만큼 들었습니다.

p163

 

 독서를 독려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p238



 모든 주제 중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역시나 책에 대한 이야기.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리스의 <윤리학>, <슬로우맨>, <유령퇴장> ... 그들이 봤거나 추천하는 책을 찾아보려고 노트에 적어내려가다가 너무 많아서 적기를 멈추었다. 역시 독서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사람은 대단하다 싶다.


 안량한 내 독서편력(遍歷)따위를 가지고 어디에 들이댄다는 자체가 우습다.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말이지... 항상 겸손해야지.


 전자책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세계는 책에 대한 관심이 자꾸 떨어져가나 보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독서를 장려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니...쩝.. 뭔가 서글프다. 다양한 취향은 존중해줘야 마땅하지만 장점이 단점보다 많음을 누구나 인정하는 독서를 말만 취미로 가지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니 말이다.


 나도 저런 대화 상대를 구하고 싶다!!

이런 생각으로 책이 마무리 되네... 작가가 누군지는 별로 상관이 없고 관심도 없다. 그저 그들의 대화가 부러울뿐.. 느린 편지에 묻어있는 숙성된 고찰이 좋은 책.

 


 세상은 그러한 경이를 계속해서 토해 냅니다. 우리는 계속 배웁니다.

p330

 



+ 이 리뷰는 <열린책들> 출판사 서평단 (yes24 리뷰어) 활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덧. 리뷰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10일 동안 책이 11권 왔거든요...)

 

k****c 2016.03.2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