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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西太后)시대와 작가 고양(高陽)ㅡ머리말
"서태후(西太后)시대와 작가 고양(高陽)ㅡ머리말" 내용보기
최후의 중국 왕조에 반세기 가까이 군림한 서태후의 모습은, 이 대하소설을 통해 우리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세계 역사의 굴절점에, 세계 최대의 국가를 단 한 사람의 여성이 장악했던 그 스케일의 크기와 용맹함과 위대함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서태후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가 드문 여걸이었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함풍(咸豊)11년은 1
"서태후(西太后)시대와 작가 고양(高陽)ㅡ머리말" 내용보기

 

      

 

  최후의 중국 왕조에 반세기 가까이 군림한 서태후의 모습은, 이 대하소설을

통해 우리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세계 역사의 굴절점에, 세계 최대의

국가를 단 한 사람의 여성이 장악했던 그 스케일의 크기와 용맹함과 위대함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서태후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가 드문 여걸이었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함풍(咸豊)11년은 1861년이다. 이 해에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최초의 포성이 울리면서 남북전쟁의 막이 열렸고,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농노해방령이

선포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수상이 된 것은 그 이듬해였다.

  세계는 그 모습을 바꿔 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생산력의 급격한 증가가 역사가들이 말하는 '제국주의 시대'로 세계를

돌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출발이 늦은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민족국가의 통일을

서툴렸고, 그보다 한발 뒤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근대자본주의, 산업혁명으로의

출구를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처음으로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먼 옛날의

실크로드나 대항해 시대의 모험을 수반하는 교역이 아니라 아편. 면포의 거래와

런던의 금융가가 직접 이어진 것이다 세계는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럽과 미국이 다른 지역을 시장이나 식민지로 분할하는 형태로서의 일체화였다.

 

  이 이야기의 모두에 등장하는 문종(文宗) 함풍제(1831~1861년)는 그 고난의

시대인 청조 제9대 황제이다. 청조의 역사는 17세기 초 누루하치에 의한

심양부(봉천)에서의 건국으로 시작된다.퉁구스계의 수렵 민족인 만족주의 강력한

기마군단은 1644년,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화북으로 침입, 명조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다. 그 군대는 황백홍람의 네 깃발과 그것에 각각 테두리를 두른

여덟 개의 정기 아래, '8기(八旗)'라고 불리었다. 여기에 귀순한 몽고기 한 기를

더한 것이 청조의 정규군이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친, 성조 강희제(1654~1722년)로부터 세종

옹정제(1678~1735년), 고종 건륭제(1711~1799년)까지가 청조의 전성기로, 그 판도

또는 세력권은 동쪽으로는 흑룡강을 넘어 현재의 연해주, 서쪽으로는

서투르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는 베트남과 미얀마에 이르렀다.  물론

불과 수백만의 만주족이 수억의 중국을 제압한 것은,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한

것이었지만, 선배인 정복 왕조와는 달리 한인이나 몽고인과의 평화 공존을

도모하고,정치 행정의 제도도 중국의 전통을 잘 받아들여 정비했기 때문이었다.

  함풍제 즉위의 이듬해인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그 원인이 된 것은

10년 전에 일어난 아편전쟁이었다. 당시 '생활 대국'이 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차잎을 수입하고 그 때문에 은 유출이 문제가 되자, 중국 무역의 독점권을

부여받고 있던 동인도 회사가 식민지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에 수출하게

되었다. 윤택해진 인도에는 영국의 면제품이 수출되었다. 중국은 우격다짐의

형태로 '하나가 된 세계 시장'에 결부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편 밀수를 금지하려는 청국 정부에 '무역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영국이

원정군을 파견한 것이 그 악명 높은 아편전쟁이다. 건국 2백 년, 부패하고 타락한

청국군에게는 이미 예전의 무적의 기마군단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근대

장비의 영국 군대에게 대적할 도리가 없었다.

  패전, 은 유출에 의한 물가의 폭등, 치안의 악화, 정부의 탄압 강화는

홍수전(洪秀全)을 수령으로 하는 태평천국의 난을 유도했다. 태평천국이 멸망한

것은 함풍제 사후인 1864년이니 그는 11년의 재위 기간 내내 내란에 시달리면서

보낸 셈이었다. 

 

  외환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아편전쟁에 패해 굴욕적인 남경조약으로 강화한

1842년으로부터 14년 후인 1856년에 애로호전쟁(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광주(廣州)부근의 강에 정박 중인 '에로호'라고 하는, 중국인 소유이고 선장만

영국인인 배에 청국 관리가 승선해서 해적 용의자를 체포 연행했다. 영국 정부는

영국 국기를 모욕당했다고 항의했는데 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영국은

남경조약으로 그래도 부족한 중국 시장의 개방을 강요하기 위해 전쟁을 걸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백부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꿈구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도

참전하여, 영.불 연합군은 1860년 10월에 북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북경 교외의 이궁(離宮), 원명원(圓明園)은 프랑스군 및 일부 영국군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귀중한 미술 공예품의 약탈에는 장교도 병졸도 열중하여, 그

때문에 북경 성내 침입은 이틀이 연기되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이궁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리고 말았다.

  영.불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군해 오자, 함풍제는 열하(熱河:승덕)의 피서

산장으로 피난했는데 그는 끝내 북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 소설은 열하로 도피한 이듬해 봄부터 시작된다. 후사를 위임받은 황제의

배다른 동생, 공친왕 혁흔이 영. 불측과 교섭하고 있는 동안 이곳에 있는 황제와

후비, 측근들은 사무친 망향과 몰락의 슬픔에 줄곧 시달리고 있었다.

  열하는 북경의 북동쪽에 있는 역대 황제의 피서지이면서 수렵장이기도 했다.

훌륭한 궁전이기는 하였으나 황제의 몽진(천자가 도읍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라는

특이한 사태에 모두들 암울한 심경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겨우 여섯 살의 나이로 즉위하는 제10대 황제 목종

동치제(1856~1875년)의 생모, 서태후(함풍제의 측실인 의귀비, 동치제 즉위 후에는

자희황태후. 1835~1908년)가 사실상의 전제 군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또 한 사람, 이 열하 이궁에서 문종 함풍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최고의

실력자로서 위세를 떨치는 사람이 숙순(肅順)으로, 그의 친형인 정친왕 단화와

재원 등과 함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함풍제는 그들의 환락에의 유혹에 빠져 음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으며

폐결핵으로 내일도 모르는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황제의 사망 이후

의귀비(훗날의 서태후)의 숙순 일파의 잠행하는 필사적인 대립이 제1권의 주요

장면이다.

 

  이 책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군기대신(軍機大臣)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낯선

직명이다.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세워진 청조는 중기 이래, 참모 본부에

해당하는 군기처를 상설하게 되었다.  청나라 최초의 최고 정치기관은 여러 명의

의정왕(議政王)대신이었으나, 명의 제도를 이어받은 내각으로 그 실권이 옮겨

갔다. 내각은 만주족, 한인 각 두 명의 내각대학사(재상), 각 한 명씩의 부재상의

합의기관인데, 복잡하고 비능률적이라 하여 정치와 중핵은 다시 군기처로 옮겨

갔다.  군기처는 내각대학사, 6부(중요한 중앙 행정기관)의 상서(尙書:장관),

시랑(차관)에서 뽑힌 몇 명의 군기대신으로 군사뿐만 아니라 일반 정무도

맡았다. 이것이 실질적인 내각이었다.  이것을 보좌하고 문서의 기안 처리를 하는

것이 군기장경들로, 군기대신과 더불어 청조 특유의 직위였다.

  이 소설에서는 감초격으로 크게 활약하는 것은 태감들이다.  청조에서는 환관을

태감이라고 했는데, 중국 역대의 왕조처럼 정치의 중추에 참여시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환관은 중국, 이슬람,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고대 중세의 왕조에서

널리 보이는데, 중국에서의 환관은 빼어나게 화려한 존재였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환관의 양자의 자식이었고, 당나라 현종 황제를 섬긴 고력사는 재상보다

상위인 표기대장군이 되었다. 명나라의 유근(劉瑾)은 무종 황제를 대신해서 정치를

맡아하는 형편이었다.

  청조에서는 환관의 폐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하는데, 안덕해(소안자)처럼

서태후의 심복으로 활약하는 인물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20세기까지 환관 제도가

존속했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소설은 원제 자희전전(慈禧全傳)이하 옥좌주렴(玉座朱簾),

청궁외사(淸宮外史), 모자군신(母子君臣), 인지정, 영대락일(瀛臺落日)로

이루어진 웅장한 대하 드라마이다(전권의 제목은 '자희전전(慈禧全傳)'이다).

  작자 고양(高陽)의 본명은 허안변으로 1922년에 절강성 항주에서태어났다. 

 허씨 일가의 명조 말부터 이 고장으로 옮겨 온 호족으로, 광동 학정이나

강소 순무를 거친 고관도 나왔으며, 지식인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고양의 모친은

역사나 시사 문제에 정통한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또 몇 대인가에 걸쳐서 정부 고관이었던 선조의 전기나

궁정 및 관계(官界)의 자료도 풍부하게 접하고 있었다.

  8년간의 일본과의 전쟁 때문에 대학은 졸업하지 못했지만,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문학에 열중했으며 오 헨리와 역사소설을 탐독했다.

  1946년, 공군사관학교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1957년에

참모총장 왕숙명 대장의 비서가 되었다.  1960년에는 매스컴 쪽으로 전향하여

중화일보 주필로서 1982년 정년 때까지 활약했다. 1950년대 초부터 저작 활동을

시작하여 1964년에 발표한 『이왜(李娃)』로 역사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뒤이어 『자희전전(慈禧全傳)』의 폭발적인 인기로, 중국어 문화권에서 인기 최고의

지위를 확립했다.

  중국의 요승지가 창립한 중국 최대의 출판사 우의(友誼)출판공사의 고명한

편집자 곽보진 여사는, 고양을 '중국 대륙에는 11억의 인구가 있으나,

고양과 같은 작가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고 평한 바 있다.

  그의 고증의 정확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고, 뛰어난 묘사력에 의한 작중 인물은

광채를 발산한다. '재야 한림' 이라고 일컬어지는 해박한 지식에 의거한 중국

고전문학의 연구 저작도 많이 있다.

  고양의 역사소설의 인기는 파란만장한 줄거리의 재미와 인간성의 숭고함과

추악함을 파헤치는 날카로움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의 전통과 역사. 지리.

풍물. 정서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작가 고양은 1992년 6월 6일, 70세의 나이에 대북의 한 병원에서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s****0 2014.10.0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