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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세계관이 너무 현실적이다. 가시적인 세계만을 마음에 담고 있다. 진화론과 유물론이 등장한 이후 이 세계는 저자의 말처럼 별을 잃었다. 우리가 유년 시대에 그렇게 찬란하게 우리의 마음에 감겨왔던 별을 잃었다. 그것을 저자는 신이 떠나간 시대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리고 괴로워하고 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통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뭔가 미지의 대상에 대한 사랑도, 그것이 실존적인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고자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몫은 아니다.
저자는 시 속에 나오는 별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 떠난 세상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지난한 세상이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어 간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날 수도, 이겨나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맞서는 방법적인 문제에서 나오는 듯하다.
그러면서 알퐁스 도데의 <별>, 김광섭의 <저녁에>, 윤형주의 노래<두 개의 작은 별>,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을 재료로 가져왔다. 그리고 순수를 얘기하고 있다. 순수 너머의 소중한 의미로 치환되고 있다. 그리움이다. 이성선의 <사랑하는 별 하나> 까지 와서는 그것은 소중한 존재로 나타난다. 저자는 말한다. 저 인류의 유년시절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별과 우주가 나와 동행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현대가 가지는 속성이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속에서 그리움과 꿈을 찾아가는 별의 시인들을 떠올려 보고 있다.
별을 별로 보면 될 것인데 별을 인간의 잣대에 맞춰 생각하다 보니 시인들만 고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들에게도 다시 별을 통해 꿈을 꾸고 그리움을 심어 나가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나가는 그런 세상은 없을까? 시가 현실 감각 속에 딱 들어오니 저자의 강의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물입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조금은 마음의 위안을 가지는 사고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신이 살아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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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어렵게 느껴졌던 책이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조금은 쉽게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되읽는 반복의 효과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읽고 들은 게 보이지 않게 쌓여서 지적 수준이 조금은 성장한 탓도 있을 거다. 재미가 없어서 기억도 안 나던 글을 전혀 다른 장소에서 우연히 다시 읽고 마음에 깊이 와닿을 때도 있다. 내가 경험하지는 못했더라도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수성이랄까. 그런 것들이 두터워진 영향도 있을 거다. 그러나 거의 항상 시를 대할 때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과거 독해의 수준에서 아직 조금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느낀다.
대학생 시절 교양수업으로 문학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감상평을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마음을 울리는 감정의 여운이 있긴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남들이 좋다고들 하니까. 나도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작용한 탓도 있을 거다. 여러 해설본을 읽고 조각조각 짜깁기해서 가까스로 숙제를 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평론가의 해설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니, 이렇게 시의 원문과는 전혀 동떨어진 해석이 맞는 건가? 시를 직접 쓴 시인도 과연 이런 해석을 의도했을까 하는.
가끔 좀 어렵기는 하지만 책이나 영화에 해설을 덧붙이는 평론 방식의 글을 읽다 보면 해석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왜 그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시는 더욱 그렇다. 아직까지 시에서 제대로 된 아름다움과 행간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래서 이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의 정재찬 교수가 들려주는 감상평이 시 자체보다도 더 마음에 와닿는다. 시를 가까이하지 않는 독자들도 추억과 사랑, 낭만이 깃들어 있는 이 책을 통해 시와의 거리를 훨씬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누구나 겪었을만한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 엮어내는 정재찬 교수는 방송에서 먼저 접하게 되었다.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에 가수 요조와 정재찬 교수가 초대되어 이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와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사랑방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하듯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정재찬 교수의 입담은 그중에서도 발군이었는데, 유머와 재치에 더해 방송, 영화, 문학을 아우르는 박학다식함을 마음껏 발휘한다. 듣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재미있어 할 만한지 능숙하게 잘 안다. 그의 그런 말 하기 방식이 어느 정도 책에서도 나타나 있다.
오랜만에 어릴 적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는 글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산속의 양치기 목동이 흠모하던 주인집 딸과 별을 보며 밤을 지새운 내용.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황순원의 소나기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문득 드는 생각은, 왜 그 이야기를 순수하고 아름답게 보는걸까? 라는 거다. 약관의 혈기왕성한 목동이 젊고 아름다운 주인집 여인과 단둘이 밤을 지새웠는데,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아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그러면 하룻밤의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면, 그건 순수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을까? 우리는 왜 그렇게 느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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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서, 운명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 p. 215
어쩔 수 없는 더위 앞에서 나는 무너진다. 에어컨의 가격 앞에서 또 무너지고, 차선책으로 미니에어컨을 찾아본다. 에어컨이라기보다는 냉방기라고 해야 맞는데, 냉방기와 에어컨의 차이가 뭘까. 어찌되었든, 미니에어컨은 공간냉방이 안 된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내가 왜 리뷰에다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나.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이 더위에 참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어서 카페를 가고 도서관을 가게 된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운명이 아닐까.
시를 잊어버린다면, 어쩌면 운명을 잃어버리는 것 아닐까.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는 부제답게 재미있게 강의한 내용을 글에 맞게 옮겨놓은 글이다. 그 중의 한 인상적인 강의가 있다. 천상병에 대해서 나오는 강의
그러던 그가 1970년 겨울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문우들은 그가 마침내 육체와 정신의 쇠약으로 어디선가 죽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참 아까운 시인 하나가 요절했다고, 그래도 시집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친구들은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시를 묶어 당시로서는 호화 정장의 유고 시집 <<새>>가 출간되기에 이르고, 그 소식은 매스컴을 통해 번져 나갔다. 그러자 시립 정신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행려병자로 끌려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정작 천상병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생 앞에 감히 누가 억울하다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 쏘냐? 그 역시 앳된 피리 부는 소년이었다. 누가 그의 얼굴에 그토록 찌그러진 주름살을 덧입히고 그의 눈에서 광채를 빼앗아 갔던가? 그런데 바로 그가 그러한 자신의 생애를 아름다웠노라고, 아름다웠던 소풍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경이이고 감동이다. - pp.253~254
어쩌면, 이 더위도 경이이고 감동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더위를 견뎌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 견뎌내는 상황들은 시가 주는 감동처럼 제각각 다르기에 시라는 아름다운 유희는 더욱 더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아픈 건 불행이다. 하지만 아픈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는 건 아픈 것보다 더 큰 불행이다. 이가 썩으면 통증을 느끼게 해 주는 치아의 신경 덕에 우리는 썩은 이 고칠 생각을 하게 된다. 통증을 모르면 우리는 죽는다. 심지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슬픔을 아는 자는 정녕 복이 있도다. 슬픔은 슬픔을 고칠 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지도 모르고 있는 이미 죽은 사회다. 그래서 신은, 그리고 시인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에게 슬픔을 선물로 주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 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은, 그러므로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다. - p.92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읽어가면서 느끼는 묘연함은 이 부분에서 절정에 달한다. 저주가 아닌 사랑. 그 사랑이 고통이란 이름의 선물을 주게 될 줄이야. 속수무책인 사랑과 운명. 그 운명을 지고 가야 할 시의 운명은, 때로는 처량하고, 때로는 심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너무도 아파 참을 수가 없기도 하다. 시를 보아야 하는 이유, 시가 내게 주는 많은 것들. 좋은 시집은 두고두고 보기 때문에 그 값의 몇 배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보면서 그런 나의 생각에 나 스스로 공감을 해 버린다. 시 한 편을 통해 이렇게 많은 의미를 찾을 수가 있었구나를 다시 깨닫는다. 그동안 모아놓았던 시집을 다시 펼칠 때는, 한 편 한편 다양성을 가진 시의 의미들을 나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본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같은 깊고 넓은 생각들이 나의 문학적 가치를 높여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시를 잊은 그대에게 』에 실린 박목월의 <배경>을 올려본다. 어쩔 수 없다는 구절이 와 닿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더위. 그래도 이겨내야겠지. 운명은 맞닥뜨려서 쓰러뜨려야 한다. 이 더위의 승자도 내가 될 수 있게.
제주읍에서는 어디로 가나, 등 뒤에 수평선이 걸린다. 황홀한 이 띠를 감고 때로는 토주를 마시고 때로는 시를 읊고 그리고 해질녘에는 서사에 들르고 먹구슬나무 나직한 돌담 문전에서 친구를 찾는다. 그럴 때마다 나의 등 뒤에는 수평선이 한결같이 따라온다. 아아 이 숙명을, 숙명같은 꿈을, 마리아의 눈동자를 눈물어린 신앙을 먼 종소리를 애절하게 풍성한 음악을 나는 어쩔 수 없다.
- 박목월 <배경> - pp.118~119
덧붙여: 일전에 나는 내일의 글은 지금의 글보다 더 잘 쓸 수 있다는 글을 올렸다. 근데,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을 보면, 이전에 글보다 더 낫다는 느낌을 내 스스로 못 받겠다.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때 올린 글의, 나의 오만을 인정한다. 다만, 나의 오만도 나의 모습이므로 삭제는 안 할란다. 나, 가끔 오만해질 때도 있다. 그럼, 자만하는 거겠지.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 하겠지만, 겸손해지지도 않으련다. 겸손은 나와는 거리가 먼 손님이다. 그런데, 오만과 자만은? 으....나랑 가까운 손님이 될 것 같다. 앞으로 주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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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시를 읽어주시던 감성에 이끌려 책을 샀어요. 어쩌면 적당한 시를 시의적절하게 잘 뽑아내시던지, 또 나긋하게 읽으시는 그 음성은 시에 다시 한 번 빠져들게 했네요. 적당하게 꾸며진 시와 노래 가사가 된 시를 맛나게 설명해나가는 선생님의 글과 흑백의 사진이 묘하게 가슴을 울렁이게 합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뭐, 말할 것도 없이 시에 관한 이 한 권 만으로 족합니다. 이런저런 머리 복잡케하는 책들 잠시 덮어둡니다. 오늘 지난 밤에 비가 와서 그런지 아침나절 도로위를 뒹구는 낙엽이 더 많아졌고 찬기운도 더 깊어 따뜻한 차 한 잔 앞에 두고 넘기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꿀맛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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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많을 때 나는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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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의 톡투유를 통해서 첫 만나게 되었던 저자의 시 낭송. 무엇보다 시인의 마음으로 시를 대하고 시를 전하려던 그의 모습과 눈빛과 언변에 감동하였었다. 그가 교수라는 것과 그것도 국어교육을 담당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기에 그런 것이리라.
시라는 것을 낭송하거나 어느 한편에서 읽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겠지만, 문학도가 아닌 이상, 문학소녀가 아닌 이상 시집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요즘에 있어서는 엄청난 노오력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인문학이 강조되고, 시나브로 나태주 시인의 시가 유행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유행을 타고 있는 레트로 감성에 의한 것일지는 지켜 보아야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모쪼록 시와 가사, 조금 더 나아가 소설의 일부분까지 소개하는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강의를 가다듬고 독자와 함께 호흡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한 호흡에 다 읽기보다 시간의 틈을 두면서 곱씹어 보기에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 제목에서 예측하여 볼 수 있듯이, 시라는 존재를 잊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에게 전하여주는 조금은 긴 편지이리라.
어쩌면 교과서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시들을 다시금 읽게 해주며, 문예의 부흥을 꿈꿔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일 것이라 믿어봄직한 이 책은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시를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엔 화자가 아니라 독자라고 말이다. 그래서 출판사의 이름처럼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시의 참다운 기능이지 않을까.
오늘밤 잠을 청하기 전에 시 한편 읽고서 생각에 잠겨보는 것은 어떨지 권하여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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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날씨에 맞는 정재찬님의 감성적인 글..
자꾸만 자꾸만.. 반복해서 읽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저 신발사진을 보다가 울컥해진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내안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에서 벗어나려 한 것도 끝내 아버지를 닮고 마는 것도
다 아버지의 그늘 탓이다.
그러게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있다.
이젠 기억으로만 가슴에 남아있는 아빠..
언젠가 하늘에 가면 그땐.. 못했던거 다 잊고..
아빠 우리 잘해보자요.. 그립다요..
살아계실때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왜 이런건 꼭 늦게 알아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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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매력적인 시낭송 목소리에 끌려 공대생의 마음을 울린 강의라는 제목에 빠져 촉촉한 표지에 마음이 동해 그저 일차원적 감각에 의존해 읽고 보고 기억하던 시, 소설, 노랫가사를 선생님께서 풀어주시니 새롭- 어떤 시는 갸우뚱 어떤 이야기는 심쿵 또 어떤 노랫가사는 눈물이 뚝 선생님의 목소리를 리플레이하며 읽게 된다는 읽은 지 좀 되었는데 리뷰쓰다보니 다시 읽고 싶어졌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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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내용도 흥미있는데 음악을 군데군데 소개하고있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솛솛하고 찾아가다보면 어느새 다읽어서 아쉬움이 남고 다시금 일게 한다. 한줄한줄 읽고 책속의 책을 또 읽고 듣고 그래서 손에서 놓지않고 가지고다니면 오디오와 이렇게 맞아떨어질까 생각하다가 버려지지않고 세대를 아우르는 지성들의 향연에 찬사를 보냅니다 은근하게 따뜻함을 전해주는 시와소설들 말은 자취도 없이 공중으로 살아지는데 활자는 한사람이든 만인이든 상관없이 울림이 있어서 빠져들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