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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왜 강박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는지, 그건 차라리 무례한 짓이었다.'
남녀간의 사랑이란 미묘하다. 서로가 눈을 감고 허공에 각각 돌을 던졌는데 그것이 중간에서 부딪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어긋나는 경우도 많다. 그 '어긋남'의 많은 경우가 상대방의 관심에 대한 다소 지나친 착각에 근거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소위 '나에게 적어도 호감을 갖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관심이 없다면 형식적이나 강방적인 의문을 상대방에게 예의상으로라도 표출해서는 안된다. 그 '예의상'은 오히려 무례하고 무책임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는 강방적 의문은 상대방의 마음을 흔드는 의도하지 않는 Trigger 역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삶이란 습관으로 짜여지는 일상이고 사랑이란 한갓 그 틈새에서 작용하는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을 이성적으로 달랬다. 그녀는 인간의 본질이 89퍼센트 이상 감정으로 조성된 존재라는 것을 아직 몰랐던 것이다. 이성이란, 자신을 장악하는 힘을 읽는 순간 그 단정함과 익숙함은 사라지고 가장 생경하고 무질서한 얼굴로 대면해야 하는 억압된 진실에 다름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모든 폭력과 살인과 광기란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감정이 아니라, 냉혹한 이성이 일으키는 횡포인 것을 몰랐다.'
이성적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생각의 대부분이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기보다는 감정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철저히 이성적으로 사는 것은 많은 인내와 절제를 필요로 하고 그건 반드시 대가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평소와는 다른 취중 행동이나 혼자만의 은밀하고 부적절한 취미 등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대가가 매우 극적인 것일 경우 타인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는 감정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세상에 질리게 만들고 사회적 공포감을 조장하는 여러 범죄 행위 등.. 인간의 본질의 89%가 감정이라면 감정의 표출도 50% 수준 정도는 유지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미홍은 동화의 세계에 빠져 늙어가는 피터팬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나이값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나이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일게다. 그렇다면 본인의 생각, 그 중에서도 감정을 자신의 나이에 맞추어 적절히 조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껍질을 깨고 보다 큰 세상으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이미 깨어져 훤히 보이는 바깥 세상을 외면하고 남은 껍질 안에서 껍질 안 세상만을 보면서 산다면, 그리고 바깥 세상의 넓은 하늘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타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게 좋다. 상대방이 '그로테스크'하다고 느낄 행동은 자신을 더더욱 그안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게 만들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의 상태라고 말하지만, 아니에요. 사랑은 지식이고 무한히 생동하는 방법이고 영혼의 상상력을 삶 속에서 서로에게 실현하는 변태죠. 구체적으로 알지 않으면 사랑할 수도 없어요.'
적어도 사랑을 하려면, 그리고 상대방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하려면 구체적으로 상대를 알려하고, 또 알게 되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매우 위험하다. 그건 '실재'에 대한 사랑이기 보다는 스스로가 만든 '허상'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큰 상처를 만들고 또 상대방에 대한 무책임한 귀결을 만들어낸다.
'심장의 파동이 일치하는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데는 결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랑은 믿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장의 파동이 일치하기에 사랑을 하는 것인지, 사랑을 하기에 심장의 파동이 일치하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전자가 맞다면 거기에는 어떤 '운명'이 필요하다. 그럼 후자의 경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해야 하나? 대개의 사랑이 드라마틱한 '운명의 느낌'으로 시작할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랑을 유지시키는 힘은 이성적 판단에 근거해 볼때 '배려하려는 노력'이지 싶다.
'삶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해도 우리가 존재하는 위치는 별자리처럼 빛나는, 자신이 아픔을 느끼는 바로 그 곳이 아닐까?'
종종 많은 경우에 자신이 '존재하고 싶은 곳'과 '존재해야 할 곳'의 차이를 헷갈린다. 그것은 이성과 감정의 차이를 말하는 건 아니다. '존재하고 싶은 곳'은 '소망'이나 '욕망'처럼 감정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목표'나 '포부'처럼 다소 이성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해야 할 곳'을 부정한 그러한 원망(願望,바라고 원함)은 인생에 메워지기 힘든 텅 빈 공백을 만들고 그 공백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처절한 보복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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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재미있고 나름 의미있는 소설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매 페이지마다 튀어나오는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의 묘사보다, 무심한, 그래서 매력없는 남자들은 잘 모르는 여자들의 남자에 대한 감정이나 사랑에 대한 느낌의 적나라한 표현이 더욱 흥미있는 소설이다. 좀 더 어린 나이에 읽었다면 많을 참고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는 잘 파악하기 힘들었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세태를 반영해 점점 물질화되고 상품화 되어가는 성에 반하여 '여성이 원하는 사랑과 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거 같은데.. 그렇다면 왜 그렇게 슬프고 왜곡된 형태로 보여주려 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미없고 평범한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진정으로 '여성이 원하는 사랑과 성' 역시 요즈음의 세태, 정서, 윤리의 폭력 안에서는 반듯하게 설 수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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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슴, 감각과 영혼 사이 - 전경린, 『열정의 습관』 전경린이 지은 『열정의 습관』은 주체와 타자의 교감이라는 의미망 속에서 조형되고 있다. 이 소설은 미홍, 가현, 인교라는 37세 동갑나기 여성-주체들을 내세워 성을 둘러싼 여성들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공허하고 단정한 모범성”에 역겨움을 느끼며 “사랑은 정말 몸에 대한 요구인가?”를 화두로 삼고 있는 가현, 스무 살 때 겪은 “강간” 같은 첫 경험 때문에 남성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는, 그리하여 “나에게 섹스는, 칼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밝히는 인교, 또 “진정한 상대가 아닐 때는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미홍 등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여성의 성에 드리워진 자유와 구속 문제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이 소설에서 제기되는 물음은 전경린이 앞서 발표한 『내 생에 꼭 한 번뿐일 특별한 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 생에』가 새로운 여성 주체의 탄생을 예시하는 차원에서 끝난 소설이라면, 이 소설은 구체적으로 새로운 여성 주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묻는다. “오르가슴은 현실 안에 드러낼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 육체 속에 저마다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미홍의 고백에 표현된 대로, 작가는 “우리 육체 속에” 존재하는 “다른 형태”의 ‘오르가슴’을 여성들의 성 담론에 접근하는 매개로 선택한다. 그것은 “작은 방울 소리”나 “순수하게 즐거운 간지럼”처럼 대부분 육체적인 징후로 표현되지만, 한편으로 인교의 경우처럼 “영혼의 오르가슴”이라는 정신적인 징후로 나타나기도 한다.
요컨대 그녀들이 말하는 ‘오르가슴’의 담론은 육체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육체는 주체의 느낌이 타자의 느낌과 합치되는 상태를 지향하는 ‘욕망하는 육체’이다. 타자의 육체는 그녀들에게 주체의 내면적인 욕망으로 환원되지 않는 ‘친밀감’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육체가 친밀감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업젝트(abject)한 대상으로서 육체(특히 성기)에 대한 공포감에서 그녀들이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남자의 페니스를 처음으로 손안에 넣었을 때, 미홍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 감촉의 기억은 뜨거운 주전자에 처음 손바닥을 대었을 때보다, 처음으로 손이 빨갛게 얼도록 얼음 조각을 쥐고 있었을 때보다, 손바닥의 생명선을 찔렀던 푸른 병 조각의 예리한 기억보다, 까까머리 남자애의 머리에 처음 손이 닿았을 때보다…… 감각의 도화선처럼, 그 모든 감각을 압도하며 손에 관한 최초의 기억이 되었다. (10~11쪽) 라는 미홍의 기억이나 “그것은 아주 커다랗고 우뚝 솟은 남자의 성기였어. 내 목 높이만큼까지 올라왔지. 나는 천천히 다가갔어. 뿌리와 머리 부분, 그리고 정교한 바느질 기법으로 꿰맨 것 같기도 한 긴 이음새 부분, 표면은 너무 연약하고 말랑말랑하게 보였어” (28쪽) 와 같은 가현의 꿈속에 표출되는 “남자의 성기” 상징 등은 그녀들의 욕망이 타자의 몸에 대한 감각에 기반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타자들의 몸을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 오르가슴의 세계에 들어서는 바탕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르가슴은 무엇보다 타자와 감각을 공유하는 육체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라캉 식으로 표현하면 오르가슴은 페니스에서 오는 게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교감하는 몸(육체가 아니다)에서 온다.
주체-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억압된 대상, 곧 업젝트한 대상을 ‘말해야만’ 한다. 이런 대상들을 ‘말하는 주체’가 탄생해야만 ‘여성’은 해방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세 명의 인물 중 가현이 ‘오르가슴’의 세계에서 가장 멀리 위치하고 있는 것도, 그녀의 섹스는 “밤에, 소등을 하고 불빛이 물샐 틈 없게 커튼을 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친밀감이 철저히 배제된 섹스였기 때문이다. 가현에게 남편의 몸은 어둠 속의 실루엣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욕망하는 육체’를 억압하는 행위일 것인데, “아주 커다랗고 우뚝 솟은 남자의 성기”에 대한 꿈 이미지는 그녀가 억압하는 세계의 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페니스”와 관련된 미홍의 “최초의 기억” 만큼이나 꿈속의 “성기”는 가현에게 그녀가 갈망하고 있던 또 다른 세계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그 세계는 지금 현재의 가현이라는 존재를 넘어서는 ‘잠재성’의 세계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금기를 ‘말하는 주체’로서 가현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루엣으로서 남편이, 금기의 대상으로서 남편의 성기가 잠재성의 세계를 가로질러 ‘현실화’된다. 금기를 현실화하는 이런 인식은 그녀로 하여금 “남편의 몸을 구석구석 만져봐. 남자가 무엇인지, 무엇을 가졌는지, 또 그 곳에 닿는 느낌이 무엇인지 손과 혀로 알고 싶어져서, 그리고 남편이 내 속에 들어올 때,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나의 성감대가 어디어딘지, 내가 육체를 통해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 그 비밀을 바닥까지 알아내고 싶어서”와 같이 개방된 성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바탕이 된다.
가현이 이처럼 뒤늦게 자신의 몸에 내재된 감각을 깨우쳐가는 인물이라면, 미홍은 가현과는 달리 애초부터 자기감정에 충실한 인물이다. “피부과 의사”의 무조건적인 구애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있거니와, 미홍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중요시한다. “잘못된 섹스란 의외로 영혼의 그림자를 잠식하는 법”이라는 말에 나타난 대로 그녀는 소통할 수 있는 섹스를 소망한다. 섹스가 소통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결코 혼자서는 해결될 수 없는 허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섬 같은, 타인의 피부와 체온과 손길과 눈빛, 점막의 다정함이 절실히 필요할 때”를 그녀는 섹스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나의 정신에 감응하는 황홀을 똑같이 육체에 감응하는 황홀로 증폭시킬 수 있는 (…) 풍부한 사랑”을 갈망한다. 구체적으로 그 사랑은 “당신 곁에서 걷는 느낌이 이렇게도 익숙”한 감각인 사랑으로 드러난다. 그 감각이 서로 연결될 때 그녀는 “아득한 적멸을 지난 오르가슴”의 상태에 도달한다. 앞서 지적한 “페니스”에 대한 감각적인 기억에서 나타나는 대로, 미홍이 말하는 소통의 전제는 몸에 대한 감각의 깨어남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섹스를 타자와 소통하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홍이 “피부과 의사”에게 했던 말, 곧 “여자에 대해 알아야”한다와 비슷한 질문을 그녀에게 되던질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남자에 대한 미홍의 인식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그녀는 타자들의 행동을 스스로 평가하고 해석하며, 거기에 자신만의 의미를 덧붙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의미망으로 포섭되는 타자는 소통 가능한 타자가 되지만, 거기에서 벗어나면 소통 불가능한 타자, 곧 “여자”를 알지 못하는 타자로 의미화된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타자와의 소통 여부가 결정되는 주체 중심적인 관점이 미홍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미홍이라는 인물에 내포된 부정적인 측면은 상대적으로 인교라는 인물이 지닌 가능성을 부각시킨다. 미홍과 가현이 꿈꾼 오르가슴의 세계가 육체에 대한 깨달음에 맞닿아 있다면, 인교가 추구하는 그 세계는 상처받는 정신의 치유와 연관된다. 스무 살 시절을 “섹스 장난감”으로 평가하는 그녀의 생각처럼, 인교에게 스무 살 시절의 섹스는 “폭력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상황에서, “스무 가지의 체위와 스무 가지의 테크닉”만이 존재하는 기능적인 섹스였다. 이 때문에 그 이후 섹스는 인교에게 남자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적개심”의 한 양태로 표현된다. 적개심에 기반을 둔 섹스는 타자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동반하며, 그것은 그만큼 그녀의 상처만을 더욱 부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정현주라는 인물을 통해 인교가 느끼는 “영혼의 오르가슴”은 그녀의 말대로 “어느 순간에 20여 년 동안 하루도 나를 잊은 적이 없다는 그 말이 그만 진실이 되고 마는 어떤 화학적 작용”의 결과이다. 요컨대 정현주의 “그 말”은 인교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일 것인데, “너를 회복해. 가장 너다운 너를”이란 정현주의 말에 드러나는 바, “그 말”은 타자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말일 것이다. 상처는 그 상처를 인정하는 타자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 언뜻 너무나 일상적인 이 진실 앞에서 인교는 “지금은 다시 방황할 때”라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다. 그 방황이 제 길로 들어설 때 인교의 남자-타자에 대한 적개심이 치유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그러한 적개심에 논리성이 부여되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르가슴’의 담론을 이야기하면서 미홍, 인교, 가현이라는 세 인물은 타자와의 교감을 꿈꾼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오르가슴의 세계는 타자와의 교감이 성사되는 장에서 이루어지는 쾌락의 세계이다. 따라서 전경린이 추구하는 쾌락의 세계에는 동일화된 주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주체가 있다면, 그 주체는 “먼저 여자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여자란 타자를 의미하는 것일 터, 타자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쾌락은 결국 주체만의 고립된 쾌락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크 라캉은 여성의 희열은 불가능한 환상이라고 말했지만, 전경린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은 그 희열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희열은 선택일 뿐이다. ‘페니스’라는 상징에서만 오는 저열한 쾌락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에 대한 사랑, 또 타자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희열’을 가능케 한다. ‘희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기존의 성 담론을 반영하는 소설과 대별되는 『열정의 습관』만의 미덕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
| 내 몸에 여섯 가지 감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든건 중학교 시절 그 녀석의 갑작스런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남들도 나처럼 그 녀석이 저렇게 변할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은 한참 사춘기에 접었던 저를 우울하게 만들어 버렸지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시각,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지만 아랫도리 감각만큼은 주인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언제나 돌출행동을 하였지요. 가끔 전철 안에서 이상한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그 아랫도리 물건이 커지면 정말로 난감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정작 필요할때 그 물건이 커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마저 생기게 할 정도로 골치 아픈 녀석입니다. (그런 순간이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고, 앞으로 찾아올지도...모르지만 말입니다) 그 순간 아랫도리 물건의 크기에 따라 상대방의 만족도가 비례하는 것은 않겠지만 말입니다 과연 잊혀지지 않는 섹스란 있기나 한 것일까요? 아니 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관계가 끝난 뒤 '오늘, 좋았어'라고 물어보는 바보 같은 남자들의 머릿속에는(그런 건 말로 안 해도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는 섹스란 있기나 한 것일까요? 섹스라는 단어만큼 우리의 사고력을 흐리게 하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남자들이 생각하는 섹스와 여자들이 생각하는 섹스가 너무나 다르다는 건 우린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그걸 애써 부인하려고만 듭니다. 알리스 슈바르쳐가 [아주 작은 차이]에서 말한 것처럼 남성이 여성들에게 원하는 그 섹스가 얼마나 바보 같이 여성을 굴욕적으로 만드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건 아니자만 그저 충동에 이끌려서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돈을 주고 누군가의 아랫도리를 벌리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욕망을 분출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입니다. 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돈으로 그 욕망을 사고 판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건 내 생각이 너무나 비정상적이기 때문일까요? 전경린의 소설 [열정의 습관]을 보면서 저는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너무나 뜬 금이 없었습니다. 물론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솔직한 담론들을 끄집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린 세계는 내게는 너무 낯설고 이질적인 세상처럼 보였습니다. 섹스처럼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시키는 소재는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통신 게시판에 섹스라는 제목이 있는 글들이 유난히 조회수가 높은 건 그 때문이겠지요.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않고 타인에게는 솔직함을 강요하고, 남들 앞에서는 신사인척 하면서도 그런 곳만 가면 사람이 변하는 건 왜 일까요? 사랑과 욕망 사이 거기에 섹스라는 단어는 어느 쪽으로 가고 싶어할까요? 이 소설에서 그녀는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미홍, 가현, 인교 이 세명의 여성을 통해서 그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전혀 살아온 환경이 다른 세명의 이 여성들을 통해서 '솔직한 성의 담론'을 이야기 해 보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후반부에 왜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일까요? 누군가를 만나면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그리고 기억하기조차 하기 싶은 일들 앞에서 허둥대는 그녀들의 모습과 작가의 모습과 왜 다른 점이 하나도 없을까요?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녀들의 모습에 때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때로는 이건 아닌데 라고 생각이 드는 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정말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섹스란 과연 사랑이란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욕망의 비상구 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인가요. 포르노에서 굴욕적인 자세로 남자가 원하는 자세로(그 장면에 남자들의 아랫도리는 발기할지도 모르지만 여성들은 오히려 그 장면에서 역겹다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해주는 여성들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걸을 왜 남자들은 그 순간 그걸 잊어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자신의 성적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서 상대방에게 평생 지울수 없는 상처를 주는 바보 같은 행동을 왜 하는 것일까요? 서로를 사랑하면서..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서로에게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 과연 이 세상에는 사랑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섹스는 언제나 뒷골목에서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언제나 전 그것이 궁금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
| 후후후..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지만 오방이 이 책을 집어들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매우 간단하다....열정의 습관이라..과연 어떤 습관일까..몬가 진지한 듯 보이는 책의 제목...그리고 저자 전경린의 몽롱한 듯 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분위기...그리고 가장 말초신경을 강력하게 자극하며 오방에게 책을 권했던 그 단어...입에 올리기 약간 부끄러우나 한 마디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설명할수 있는 단어...오 마이 갓...말할까 말까...바로 'SEX'였다...우스갯소리로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공항에서 출입국서류를 작성하던 어떤 묘령의 아가씨...작성란에 'SEX'라고 써있는 것을 보고 음흉한 미소와 발그레한 얼굴로 조심스레 보일랑 말랑 작게 '10회'라고 적어놓았다는 이야기...기억나겠지? ㅋㅋㅋ 오방만의 느낌이라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지만 이처럼 영어로 'SEX'라고 적어놓은 것은 그래도 양반이나...한글로 '섹스'라고 적어놓고 보면 더더욱 자극적이고 머리가 곤두서는 설레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정말로 묘한 한글의 미학(?)이 아닐수 없다...자꾸 '섹스'운운해서 조금 역겹게 느낄수도 있으나(그렇담 용서하시라^^ 암쏘리) 이 소설을 '섹스'라는 키워드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그만큼 이 소설은 여성의 입장에서 매우 솔직하게 쓰여진 글이다..저자 처음에 머리글을 통해 고백하듯이 아마도 저자 혼자만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쓰여졌다고 믿기에는 매우 자세하면서도 적나라한 묘사들이 가감없이 좌악 펼쳐지고 있어...불과 십여년전에 쓰여진 마광수교수가 교수보직해임과 동시에 반인륜적인 인물로 홍역을 치룬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바로 그 말이 정답이다...여성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성적인 묘사라서 더 짜릿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오방을 속물로 볼테인가...그러진 마시라...^-^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30대 중후반에서 40대가 되지 않는 연령대를 가진...가정을 꾸렸다면 자식 한둘은 충분히 키워보았을...남편에 대한 기대는 이제 좀 시들하고...자신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기에는 조금 두려운 수준의 나이를 가졌다고 할수 있겠다....마치 개봉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압권이었던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여자 주인공의 모습들을 연상시킨다고 할까...좋게 말하면 솔직하고...밉게 보면 너무나도 노골노골하다고 비아냥 거릴수 있는 여성들의 삶을통해 저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성'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한다..흐음..남성의 입장에서 크게 동의할 수준은 아니지만 여성들이 그렇게 느낀다면야 오방도 그렇게 믿고 싶다...동시에 재섭도록 뿌리깊은 여성들의 순결지향주의를 까부수자고 말하는데 흐음...이건 좀 동의할만 하긴 하다...오방 역시 타고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사실 여성운동하는 언니에게 야릇한 메일 보냈다고 인간말종이하의 개무시당한 아픈 기억도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여성들 얼마나 불쌍한가...얼마전 설 명절때도 느꼈지만 남성들은 윷이나 던지고 세뱃돈이나 준비하고 술이나 먹을 줄 알았지 모 손가락 까딱하지 않아도 명절 가족모임은 변함없이 잘 돌아가는게 당연지사 인데 반하여...여성들은 명절내내 일용할 양식을 손수 준비하랴 애들 신경쓰랴 허리가 끊어지게 일하면서도 본전치기 이상의 공은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명절이 끝나고도 설겆이에 집안정리까지 이어지는 스트레스에 시달려 대한민국 공식 신드롬인 '명절 증후군'을 유발시킬 수준 아니신가...골때린 상황은 이것만이 아닌데..남성들 군대 가기전에 친구들간의 우정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아리와 청량리등 텍사스촌에서 소위 '남자구실'을 제대로 할줄 아느냐 여부를 검증받고 몸을 노곤하게 풀어주는 세레모니를 치르게 되는데 이토록 동정의식과 정조관념이 남달리 허술한 대한민국 남성들이 반대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애인 혹은 와이프가 될 여성들에 대해서는 태어날때부터 첫날밤을 보내기 전까지는 반드시 정조대를 동여매고 동정녀 마리아 이상의 순결함을 간직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던가...어릴적부터 자전거타지 말라고 혼내키는 엄마들 과연 대한민국 말고 어디 또 있을까...골때린다...정말. 물론 이 소설 '열정의 습관'에는 지극히 '성'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본 대한민국 대표 여성들의 삶이 너무도 극사실적이어서 부담되는 문체로 등장하긴 한다...과연 숨기는 것이 사실적인가 까발리는 것이 사실적인가에 대한 판단은 완전히 전적으로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맡겨야 할 사항이긴 하지만 그 해답을 온전히 제공하지 않기에 독자들로써는 보다 주관적인 자세로 도출된 문제들을 적절히 분석하고 해석하여 소화하는데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이다..오방 역시 그랬으니깐...ㅋㅋㅋ 과연 그런 상황이라면 오방도 그런 감정이었을까...궁금...다른 남성들이라면 크게 공감이 갈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면부지의 존재할지 의심스러운 여성상을 앞세워 성적인 억압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을 소화하기란 다분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온 오방에게는 조금 껄끄러울수 밖에 없는 것이 어쩜 당연하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강력해서 마치 까질듯한 껄끄러움때문에 큰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수 있다는것을 인정하는 것 역시 이 책을 읽은 독자들로써는 도달하기 어렵지 않은 느낌이리라 믿는다...주연여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인 '미홍'의 친구인 대한민국 대표아줌마가 등장하는 대목은 더욱 그러한데...남성의 참을수 없는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오랜 결혼생활동안 수동적이고 잔뜩 겁먹은 잠자리만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고..자신외의 모든 여성들은 그런 상황을 겪을수 밖에 없는것 아니냐고..다른 뾰족한 방법 있냐고 체념하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대표아줌마의 결혼이후의 성생활 묘사는 약간은 극단적인 아줌마를 대입함으로써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할 우려도 있다...그러나 어릴적부터 보고 배운 마초근성때문에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의 수준에서 여성을 다루는 남성들로써는 그 일방적인 공격을 다시 생각해 볼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 역시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것 아닐까...꼭 오방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누가 오방에게 돌을 던지랴...던질테면 던져보라..다시 힘껏 되던져 줄 테니...ㅋㅋㅋ 여성들의 성적인 즐길(?) 권리를 강조한다는 것은 자칫 남성들 사이에서는 고추가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놀림을 당할만한 약간은 겁이 나는 행동임은 부정하지 않겠다...그러나 당신의 딸 혹은 당신의 여친이 남성중심으로 똘똘 뭉친 마초들의 세상에 짓눌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는 남성들 역시 많지 않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하나만 낳아 잘 길러야 할 요즘에는 볼수 없는 추억일수도 있겠지만 태어날때부터 고추가 없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갈굼을 단단히 당하게 마련인 여성들의 삶은 고추달린 남성들이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그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여자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일수 있느냐고 잡아먹을듯 꾸짖으려는 마초들 때문에 여성들이 지레 겁먹고 포기해야만 하는 금녀의 영역은 분명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조직생활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쉽지 않은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21세기에 이 무슨 오버성 멘트인가 생각할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대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명절때만 되면 알아서 부엌으로 기어들어가 칩거하며 기름밥 먹어가며 하루종일 허리가 끊어져라 전을 부쳐대는 우리 엄마가 있는 반면에 고추하나 더 달렸다고 나이도 새파란 꼬마녀석이 벼슬이나 한 마냥 배 두들기며 놀고 자빠져있는 백태를 보라...누가 어릴적부터 대놓고 가르쳐 준 적 한번 없긴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동으로 보고 배워 몸으로 체득하는 문화 아닌가...누가 가르쳐 준적 한번 없다는 점...반드시 기억하시라...한국남성들처럼 보신문화에 눈알이 새빨개지는 인간들 없다고 한다...불쌍한 남성들...별로 내세울것이 없는 불쌍한 존재들인 관계로 내세울 것만을 찾아 혈안이 되어있던 가운데...내세울 것 하나 제대로 만들어 준다고 선언하며 뱀이다 웅담이다 먹어보시라 하니 어찌 먹지 않을수 있겠는가...재미있다..자신이 정복하고 군림하기 위하여..노력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눈물겹도록 가상하나 그 강력한 마초들은 결국 상대여성들이 그리 원치 않는 것들을 위해 자기만족에 빠져 허상을 잡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매우 짜릿하지만 그 짜릿함 뒤에 등골 서늘함을 전달해주는 전경린의 소설...다른 작품 한번 더 구해 느껴(?)볼수 있는 기회 갖도록 노력하마...연휴가 끝나고 오늘 첫 출근을 하였는데..아직 사회부적응자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글고보니 금요일..다시 휴일모드로 들어가야 할 판이군..ㅋㅋㅋ 바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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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씨의 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를 읽고 실망한 터라,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예스 24의 폭탄할인 덕분에, 40%나 할인되는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 섬뜩한 까만꽃들도 무지 예뻐보이더군. ^^; 삼류소설의 섹스와 중앙문단 내의 섹스는 어떻게 다를까? 그녀가 섹스를 말하는 것만으로 이슈가 되는 건 왜일까? 작가가 말하는 건 무얼까 ? '정신과 육체가 합일된 완벽한 섹스가 곧 사랑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섹스치들은 모두 나가있으라는 얘기인가? 미홍과 진성은 사랑하고 있는 걸까 ? 작가가, 줄거리가 없고,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메시지만 잔뜩 뿌려놓는 스타일이라서 이 책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책을 덮은 후의 그 황당함이란.... 과연 진성이란 인물이 현실로 존재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환타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인물. 잔털 하나 없는 새하얀 손등과 탄력있고 싱그러운 피부는 둘째치고, 어떤 면에서는 아이와 같은 어리고 유연하고 싱그럽고 중성적인 몸을 가진 남자였고 동시에 철인 경기에 출전한 병사처럼 집요하고 강력한 40대 중반의 남자. 모든 것에 긍정적이고 현실적이면서 순수하고 집요하지 않지만 철저하고 긴장하지 않지만 진지한, 어둡지 않지만 슬픔의 정서를 배면에 지니고 있고 너무나 깊고 먼 상상력의 소유자이고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데 일종의 유희와 같은 여유만만한 실행력을 지닌 남자, 내면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적 장악력을 갖춘 남자, 더구나 완벽한 섹스를 밤낮으로 하는 남자.. 이 인물설정을 보면서, 사실 좀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춘기 소녀의 상상적 결과물. 원고의 분량으로도 좀 실망스러웠다. 장편의 분량이 아닌데, 너무 상업적인 건 아닌가 ? 그의 <난 유리로...="">를 볼 때도 기분이 상했었는데.... 타이트하게 편집해서 단편도 묶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 하지만 이런저런 불쾌함과 실망감에도 '역시 전경린이다' 하게하는 그녀의 풍부한 문장력과 묘사력. 삶에 대해 진지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글귀도 참 많았다. 하여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책꽂이에 꽂힐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진지한 권태란 틀림없이 긍정적이고 대담한 변태를 생산해 낼 것이다.난>난> |
| 이 책의 여성들은 자신의 섹스가 정당했음을 설명한다. 이점이 섹스를 소재로 한 국내에 소개된 외국 작가의 소설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국내에 소개된 섹스에 관한 소설이 제한적이라 섹스를 소재로 한 모든 외국 소설이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섹스가 정당했음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변태적이라고 불려지는 행위일지라도….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너는 어떻게 김치찌개를 좋아할 수 있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개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통상 어떤 고기보다 맛있다는 얘기를 한다. 섹스가 그렇다.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회 일반에게 정당성을 인정 받아야 하는 행위. 그것이 섹스이다. 그것이 밀폐된 공간에서 행해지고 마는 것이라면 문제가 안되지만 대중에게 읽혀지는 글이라면 다른 문제이다. 이 글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왜 그걸 해야 하는지 그리고 했는지. 왜 그걸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한다. 사회일반에 동의를 얻기 위해, 아니면 스스로의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것은 여성이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교육 받은 섹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 섹스는 단순히 동물적인 성교가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이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섹스를 지나친 수식어로 덧칠한다. 어쩌면 섹스는 그저 동물적인 충동 이상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경계선에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동물적인 영역에 속하는 섹스 행위는 인간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오르가슴이나 사랑 등의 관념적인 기준으로 동물의 그것과 인간의 그것으로 구분된다. 인간의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고상한 이유로 설명되어야 한다. |
| 전경린... 그녀를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란 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불륜을 미화한 소설이었고 나의 관심이 되었다. 물론 사회의 잣대에서 보면 불륜은 백번 천번 단죄받아 마땅한 파렴치하고 더러운 죄목임은 확실하다. 하루하루 시대가 변하고 패미니스트가 늘어나고 여권신장을 부르짖으며 여성의 남성화, 남성의 여성화가 전혀 이상해 보일 것이 없는 현재 어째서 성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구시대적인지 어째서 남성은 인정하고 여성에겐 씻지 못할 죄가 되는지... 물론 이런 이유로 여성의 불륜을 정당화시켜보자는 건 아니다. 단지 남자든 여자든 자신들이 가진 성에 대해 당당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책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경린 그녀만이 할 수 있음직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것도 나처럼 이미 바람에 깎이고 비에 무너지고 눈 따위에 굳어져버린 이미 사회라는 곳에서 적응능력을 확고히 확립해버린 이해관계나 따지고,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과 섹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의 유사품, 불량품, 사랑을 모방한 사랑, 섹스를 모방한 섹스... 이 책의 마지막에 작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의문을 던진다. 사랑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생애에서 몇 번째의 것일까요. 나...나에게 사랑이란 건 그 의미는 제쳐두고라도 사랑은 나에게 과연 다섯 손가락 안에 들수나 있을 것인가. 그건 용기가 필요하다. |
| 독신의 멋진 생활만을 나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바라본 독신은 너무나 저질스럽다고나 해야할까..어른들이 되면 정말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내가 너무 지금 나만의 세계에 빠져서 진정한 어른들의 세계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일까..그래서 이렇게도 이 책이 낯설게 느껴지고 어른들의 비정하고 무감각한 세계가 싫어지는 것일까..그냥 내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열정과 이 책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의 열정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냥 인간 본연의 모습은 정말로 이러한 모습인 것 같다. 버려지고 버리고 처절하고 모멸감을 주고 받고..외로워서 발버둥치다가 곧 열정 속으로 빠져들고..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곳이 어른들의 세게인 것 같다. |
| 어릴 때 소박함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었다. 마냥 순수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아픔이나 고통은 없을 것이라고 누구나가 장담을 하는 그런 어린시절이다. 대학교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러지 않았을까..무한한 자유를 누리면서 너무 큰 자유와 젊음을 누리면서 우리는 삶이 이렇게 언제나 아름답고 내 편일 것이라고만 단적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그렇게 삶이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아픈지 그 아픔의 고통의 깊이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남녀의 사이에 빠져서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됨에 빠져서..더이상 자신의 내면은 찾지 못하고 허물을 깊게 입고는 빠져들게 됨을 느낀다. |
| 내가 즐겨보는 미국의 시트콤이 있다. 그 곳에서 나오는 여성들을 보면서 나는 도시 속의 여성들의 외로움과 또 그들의 성생활 그리고 그들이 도시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업정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일 것이다.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서 겉으로는 멋있어보이지만 그 어느 곳에더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 안절부절하는 스타일 그리고 지나치게 안정된 소속감을 강조하여 테두리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여성..이들의 생활을 보는 재미가 이 책에는 있다. 물론 너무 지나치게 성적인 면으로만 표현을 한 것 같아서 지하철에서 읽어나가기는 민망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