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아파트로 모이다" 라는 이치은 저자의 '98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눈에 끄는 책의 디자인, 튀는 제목, 권태로운 제목, 71년생의 작가..이치은의 젊은 나이에 질투를 하면서 고르게 된 책이다. 처음 이 글을 읽기전,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 무척이나 마음이 설레었다. 새로운 시도, 익숙한 소설들에서 따온듯한 주인공들의 이름들, 71년생이 사고를 쳤구나 하는 흥분이 날 압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흥분과 설레임은 권태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에겐 아주 권태로운 책이다. 읽기가 너무나 난해하다. 주제도 분명하지 않고 다만 형식에 치중을 한 탓에 내용이 억지논리로 일관하는 느낌도 없진 않다. 분명히 이 소설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김이소도 여기에서 등단을 시작하였고, 그외 많은 작품들이 마력같이 나를 이끌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도 그 무언가가 있을 듯 싶다. 그 점을 한번 추리를 해 본다. 제목도 기이한 이 소설의 모티브는 "황지우의 소파에 대한 일기"라는 시에서 시작한다. 먼저 이 시의 전문이 이 소설의 앞장을 차지한다. 작가는 솔직히 밝힌다. 이 시에서 자신의 소설이 구성되었다고.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가의 끊임없는 인용은.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은 여러가지 소설에서 차용한다. 르클레지오의 조서, 카프카의 심판, 이상의 날개, 장필립뚜생의 욕조. 씨, 하일지의 경마장 XXXX 등등 15 편내외의 소설의 권태로운 주인공들을 이 소설에서는 또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재등장한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기본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성(城)이라는 단체, 혹은 권력자? 에게서 명령을 받은 "기사"가 권태로운 자들을 살인한다. 권태로운 자들은 세상을 쫌먹는다라는 뜻인가? 여튼, 그 권태의 대명사 등장인물들이 소파씨의 아파트에 그 기사를 피해 모인다는 좀 해괴한 줄거리다.
무엇을 보일려고 했던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문열의 말대로, 단순히 독특한 구성에 만 치중한 신세대문학류의 아류가 아닐까 하는 느낌도 강하게 든다. 그만큼 이 글은 읽기엔 너무나 난해하고 권태롭다. 굳은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물론, 재미없는 내용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어느순간 이 글이 권태롭게 다가왔기에 더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역시! 아무것도 남지 않는 모호함과 난해함만 남아있다. 그토록 높은 점수를 받은 새로운 고안력, 창작력있는 구성만이 그의 소설을 대변할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독자들은 안다는 식으로, 소설 말미에 곁들어진 인터뷰 기사에 "자신의 소설이 독자들을 어렵게 했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이 안나는 그런 소설, 예를 들어 존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야"를 읽고 났을때 그 감정들. 그런 것들을 독자들에게 바란다. 쉽게 읽히는 소설은 사양한다. 난 무언가 난해함을 남기는 소설을 썼고 독자들도 그렇게 읽기를 바란다.." 라고 과감히 일치를 가한다. 과연 독자에게 바라는 것이 진정 그것이었다면 이치은, 71년생의 이 천재(적어도 젊은 나이에 책을 썼으니..나에겐 천재!)는 나에게만은 성공한 듯하다. [인상깊은구절]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중-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식사,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상기,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안을 헹구고(이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양치질 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아내는 싫어한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 간다고 주의를 주었다)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