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군주열전 -선조편- >>
조선군주중에서 가장 병약한 군주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인물이 선조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주 비관적이다 아마도 그건 임진,정유재란 왜와의 7년전쟁을 거치면선 보여준 군왕으로서의 평가의 재위 40년이라는 적지않는 기간을 통채를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선조는 여러가지 진기록을 남긴 군주이다. 우선 7년전쟁을 통하여 전국을 초토화시킨 군주, 그리고 재위기간중 잦은 선위파동, 그리고 최초의 정비의 소생이 아닌 후궁(중종과 창빈안씨)의 손자로 재위에 오른 군주이다. 그동안 조선이라라는 나라는 장자,차자를 떠나 정비소생이 왕위에 올랐다. 폭군 연산군 또한 성종의 적장자였던 점을 보면...
이렇듯 태생적으로 선조는 정통성문제에 있어서 죽는날까지 고민했다. 오죽했으면 나이 52세에 왕비를 새로 간택하여 대군을(영창대군)을 생산하여 왕위계승을 할려고까지 했을까 물론 이점이 또다른 피의 역사를 불러일으키지만, 그만큼 선조의 의식 깊이 서자출신이라는 강박관념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점은 권력장악에도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린다. 이후 본격인 당쟁의 역사가 시작된다(동/서 대결, 남/북 대결, 대/소북 대결)
이 책은 선조시대와 선조시대를 정확히 이해할수 있는 바탕이 되는 연산군부터 명종시대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당쟁의 단초가 된 무오/갑자/기묘/을사 사화를 통하여 이미 돌이킬수 없는 왕권의 추락을 전제조건으로 선조시대의 출발자체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신하들의 의지로 등극한 왕이라느점 그리고 신하들의 구미에 맞게 성장했다는 점 물론 성종또한 신하들이 선택하고 신하들이 가르킨 군주였지만 성종은 친정하면서 철저히 왕권강화에 나섰다는 차이는 있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치욕적으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통쾌하게 생각하는 7년전쟁과 정여립의 난을 빼고는 선조시대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사화도 없었고, 평온한 시대였다. 적어도 7년전쟁이 있기까지는 선조또한 당쟁싸움의 한가운데서 철저히 왕권을 유지하면서 동,서인을 저울질 하면서 두루두루 인재를 등용했다. 이 점은 조선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이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이 말해주고 있다. 이황, 이이, 유성룡, 이덕형, 이황복, 이연경, 정철, 정탁, 이산해, 윤두수,근수형제, 기대승, 성혼,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물을 배출했고, 왕 사후에 추존되는 공식명칭인 존호를 보더라도 무려 38자에 이르는 존호를 가지고 있는 임금이다. 실례로 세종대왕은 26자이다. 그리고 재위기간중에 종계변무를 바로잡았다는 점(조선시대 역대 군주의 가장 희망사항으로 중국역사서에 이성계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잘못기재된 점을 누누히 고치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않은점) 이런점을 보았을때 선조가 무능하고 나라 말아먹은 군주라는 비판은 7년전쟁을 거치면서 보여준 행태가 자신의 재위기간 전부를 덮어버렸기 때문일것이다. 물론 그점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받아야 하겠지만 다른 이면의 평가 또한 적절하게 해야하는 것이 후세인들이 역사를 바로보는 관점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선조는 불운한 군주였다. 당초 즉위 당시의 신분으로 인한 번민과 그에 대한 집착으로 세자 광해군과의 불화 결국 어린아들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인목왕후의 폐모사태까지 가는 참담한 결과를 낳게 한다. 또한 7년전쟁을 통한 리더십이 결여된 지도자의 모습으로 인하여 사실상 군주로써의 권위가 없어진 상태에서 말년을 지내게 된다. 하지만 역사는 한시점만 보는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다음 표현이 인상적인것 같다.
|
|
역사책 서술은 사실의 인용, 사실 관계에 대한 논리적 해석, 그리고 주장으로 이어진다. 사료에서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을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다양하고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사료에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을 해야만 좋은 주장이 나온다. 합리적 판단을 거쳐서 나오는 주장만이 합리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면에서 볼 때 이한우의 "선조"는 이상한 책이다. 신문기자답게 신문기사같은 책을 썼다. 먼저 사실관계를 꽤 많이 '정확'하게 인용한다. 그리고 나름의 해석을 한다. 그리고 주장을 펼친다. 그런데 사실관계와 먼 주장을 펼친다. 신문기사 같다. 신문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저자가 속한 신문사 뿐만 아니라 모든 신문사들은 저마다 이념적 노선이 있다. 사람이 글을 쓰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비판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좌든 우든 신문사들은 같은 사실을 인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제목"을 내세우고 주장을 펼친다. 이한우는 역사책에서도 이런 글을 쓴다. 역사적 사실을 가져오고 해석한다. 선조의 공과를 나열하니 장점이 20% 단점이 80%정도로 나뉜다. 하지만 제목은 [선조 : 조선의 난세를 넘다. 탁월한 용인술로 조선의 운명을 지킨 선조의 재발견]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때 제목을 보고 이한우는 선조의 장점을 많이 끌어 모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까? 먼저, 선조의 총명성 - 이한우는 선조가 영명했다고 여러번 이야기한다. 아무리 좋게 봐도 왕들에게 치례하는 정도지 특별한 영명함은 나오지 않는다. 조선왕조 27명 왕중에 어렸을 때 영민,총명하지 않았다는 평없는 왕은 없다. 교육적인 분위기였기도 하고 과거 생활기록부 평가처럼 좋게 좋게 나오는 정도의 영민함일 뿐이다. 그리고 호기심은 많으나 학업은 신하들이 요구하는 수준을 따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한우는 제목으로 승부한다. "학자 군주 선조의 정신세계"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다. 왜 학자 군주라는 것이지? 그정도는 조선왕 대부분 그랬다. 정조평가때는 학업이 중요한게 아니라더니. 두번째, 그래! 왕의 학업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왕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의 지적수준이 성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볼줄 아는 것과 리더쉽이다. 이한우는 선조대에 이이,이황, 기대승 등 쟁쟁한 인문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선조의 사람볼줄 아는 능력때문이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조선 중기때부터 무르 익은 사림이 명종시대라는 피바람을 피했다가 한번에 등장한 것이고, 사림의 사상적 성취가 이루어진것이다. 다른 저서에서는 대부분 사림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완성되었다고 하지 선조에게 공을 돌리지는 않는다. 그래. 그 시대에 일어난 모든일은 왕에게 공을 돌리니 선조도 그 자리에 있었던 운을 공으로 돌린다고 하자. 그런데 저자는 선조때에 "사화"가 일어 나지 않았다며 선조가 사림을 아꼈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기축옥사는 잊었는가? 훈구에 의해서 저질러지지 않았을 뿐이지 수백에서 천 명까지 추산되는 피해는 무시하고 사화가 없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사화는 훈구파에 의해 저질러진 사림학살이다. 선조때는 훈구파가 모두 사라진 이후다. 사화가 일어날 수가 없다. 물리적으로 선조의 덕이 아니다. 또 이한우는 기축옥사에서 "후폭풍의 무한 확산을 현명하게 조정한 선조"라는 제목을 붙이여 선조가 사림의 피해를 축소시켰다고 주장한다.
라는 언급을 했다며 선조의 덕을 칭송한다. 한번더 하지만! 이는 벌써 피바람이 다 지나고 난 이후다. 죽일 사람 다 죽이고, 정철에 의해 반대파인 동인이 거의 몰살까지 갔을 때 이런 성음이 나온다. 이미 역모에 흥분한 선조는 정철과 함께 국문을 주도했다. 이발의 82살 노모와 열살 아들까지 고문으로 죽였다. 선조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 조사 김빙은 우연히도 안타깝게도 눈에 바람이 들어가 눈물이 났는데 역도를 불쌍히 여겼다며 죽었다. 최영경은 정여립의 실체없는 윗선으로 몰려 죽었다. 서인이 압박하면 선조가 추인하고 선조가 직접 사건을 확대하며 최대 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위 지시는 사건이 마무리 되어 갈때 쯤인 12월 1일에 나온 말이다. 사건 시작 즈음에 나온말이 아니다. 기축옥사는 10월 2일 밀계로 시작되어 10월 17일 정여립이 자살했으며 10월 27일 친국으로 확산되었다. 12월 1일은 다 끝난상황이다. 다 죽이고 마무리하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세번째, 이한우는 선조의 단점을 말할때도 반대편을 끌고 들어간다. 선조의 가장 큰 실패중 하나는 후계자 문제다. 광해군을 잘못 택했다는 것이 아니라 광해군으로 분위기가 정해져 있었고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었으며 탁월한 업적을 보인 광해군을 끝까지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급할때는 맡기고 전쟁이 끝난후에는 무시한다. 저자도 말했지만 애첩 인빈의 아들 신성군이 눈에 밟혀서다. 공적인 문제에 사적인 감정 그것도 여자문제를 끌어 들인 선조다. 이 후계자 문제는 광해군에게 쓸데없는 짐이 되었으며 광해군이 집권한 후에도 응어리가 터져 피바람이 분다. 인조반정으로 이어지는 후계자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선조다. 하지만 이 문제를 "방계승통과 적장자에 대한 갈증"이라는 제목으로 선조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 하더니 갑자기 단원 끝에는 '성공한 반정, 실패한 반정'이라는 애매한 제목을 붙여 광해군을 깍아 내리려 한다. 이한우는 광해군을 싫어한다. 네번째, 임진왜란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선조의 가장큰 실패작이다. 전쟁 후에도 집권을 유지한게 이상하리만큼 선조의 약점과 단점이 다 드러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한우는 선조의 책임을 물으면서도 면죄부를 하나 둘씩 던져준다. 이순신을 등용한것이 선조고 이순신은 선조에게 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뉘앙스까지 풍기면서 선조의 책임을 축소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살아남았으니 이겼다는 논리를 펼친다.
세상에나. 이런 표현은 왕에게 돌릴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왕은 당시대의 모든 영광을 받으며 또한 무한 책임을 진다. 조선의 피폐함은 무시하고 이후 호란까지 벌어지는 사태는 무시한채 살아남았을을 선조의 업적으로 칭송한다. 조선은 선조가 승리함으로써 후퇴했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거나 정권교체가 더 빨리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전쟁후에 여러 의병장을 숙청한 것도 선조가 그 잘난 보위를 이어가기 위함이었을 텐데 이한우는 왜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종계변무'같은 왕실에게만 위업이고 조선백성에게는 필요없는 업적 칭송에는 한 단원을 할애하면서 의병장 숙청은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이한우도 그 부분은 도저히 막아줄 말이 없었다 보다. 이 밖에도 이한우의 역사인식은 이상하다. 원인이 무엇일까? 이한우는 선조-이승만, 숙종=박정희 혹은 전두환, 정조=노무현 혹은 김대중, 광해군=노무현 이라는 도식을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듯하다. 이후 역사 인식과 인물평가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이 과거 역사 판단에 영향을 준다. 역사는 현대를 기준으로 과거를 들여다 본다고 하지만 현대사를 위한 과거를 왜곡이 심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을 한번에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상한 책이다. 아니면 이한우의 정치적색채에 대한 반감때문에 그의 책을 잘못 해석하는 리뷰일수도 있다. ![]() ![]()
|
|
선조에 대해서는 평이 많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나라를 몰고간 무능한 군주였다며 호되게 비판합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용서될 수 없는 실책(혹은, 고의적인 처사?)이라면,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적일 터입니다.
반면 이 책 저자 같은 분은,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치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고려가 망한 후 시스템을 떠받치던 인재들은 하나같이 지조를 지킨다며 은둔하여 학업만 닦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건국 후 200년이 지나서야 폭 넓게 등용하여 요직에 고루 앉힌 군주는 선조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 4대 임금 세종부터가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선비들에게 벼슬길을 널리 열어 주었습니다만, 이런 바람직한 조치는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인해 전통이 끊기고, 정부 요직은 훈구 대신들이 독점하는 폐단이 이어졌습니다.
훈구 대신 중에서도, 지난 책프 리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신숙주 같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인물이 나와 국가 기초를 튼튼히 닦기도 했으며, 선비가 아주 등용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학통과 천거에 의해 선비들이 주도하는 체제는 선조 연간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또, 제승방략제가 와해되고 지방의 영진군이 유명무실화한 건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조의 잘못이 아니라, 그 이전 훈구파의 부패한 행태에 기인한다고 봐야 타당합니다. 따라서 선조는, 임란을 초래한 무능한 군주였다기보다, 오히려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간신히나마 국체를 온전히 보존한 공이 있다는 점도 부인 못 합니다.
많은 이들은 "임란과 호란이라는 큰 국난을 치른 후, 조선이라는 체제가 진즉에 무너졌어야 이후 민족 단위의 번영을 맞았을 텐데, 그걸 해내지 못한 게 역량의 한계이자 비극의 단초"라는 주장을 합니다. 일리가 있으나, 어차피 심판은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민초들을 특별히 미개하게 봐야 할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당대의 백성들이 체제를 뒤엎지 않고 지지를 철회하지도 않은 것은 그 나름 존중되어야 할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죠. 아니라면, 이는 역사의 발전 주체가 민중이라는 전제를 논자들 스스로 부인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대주의 스탠스가 아쉽기는 하나, 명나라의 원병을 어쨌든 끌어오는 데 성공함으로써 왜의 야욕을 최종적으로 꺾은 건 분명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선조를 두고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모후가 왕비에 책봉되지 않은 최초의 군주라는 점입니다. 세조는 명백히 소헌왕후의 아들이었고, 중종 역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성종의 계비 정헌왕후의 소생이었습니다. 이후의 인종, 명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조는 자신의 부친을 추존왕으로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 점 역시 독특합니다. 성종은 부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했는데도 말입니다.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이 대원군에 머물렀으니 선조의 모친인 하동 정씨 여시 하동부대부인에 고작 그쳤을 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의의는, 그전까지 왕좌가 직계 혈통으로만 내려왔으나(세조 제외 - 그러나 세조 역시 왕의 정실 소생 왕자였고 대군 신분이었습니다), 선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선대의 왕통이 끊기고 금상의 조카(그나마 이복 혈통)가 즉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조는 이런 취약한 위치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신하들에게 우습게 보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약한 군주, 자리보전이나 하는 임금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기는커녕 교묘한 정치술과 용인의 테크닉으로 오히려 피의 숙청을 때로 일으켜 가며 왕위를 보전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지킨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이, 천한 신분인 김개시를 지나치게 믿어(국정농단?) 반정의 수모를 겪은 건 아이러니컬합니다. 대신 왕좌에 오른 인조 역시 선조의 손자라는 점에서 이 군주가 여튼 역사의 패자 신세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명백합니다. 저 개인적인 추억(?)인데, 중학교 때 국사 담당 선생님이 "이 사람은 모든 면에서 우유부단하여 국난을 자초했고, 심지어 후계 문제마저도 어리숙하게 처리하여 이후의 모든 비극을 예비했다"며 호되게 비판하셨는데, 상당히 실력이 뛰어난 분이셨지만 이 이슈는 그리 단순히 단정될 부분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다소 이기적이고 좀스럽기는 했어도 일방적인 비판을 받을 만한 군주는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김덕령 장군, 이충무공을 다룬 그릇된 처사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
|
선조에 대해서는 평이 많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나라를 몰고간 무능한 군주였다며 호되게 비판합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용서될 수 없는 실책(혹은, 고의적인 처사?)이라면,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적일 터입니다. 반면 이 책 저자 같은 분은,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치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고려가 망한 후 시스템을 떠받치던 인재들은 하나같이 지조를 지킨다며 은둔하여 학업만 닦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건국 후 200년이 지나서야 폭 넓게 등용하여 요직에 고루 앉힌 군주는 선조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 4대 임금 세종부터가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선비들에게 벼슬길을 널리 열어 주었습니다만, 이런 바람직한 조치는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인해 전통이 끊기고, 정부 요직은 훈구 대신들이 독점하는 폐단이 이어졌습니다. 훈구 대신 중에서도, 지난 책프 리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신숙주 같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인물이 나와 국가 기초를 튼튼히 닦기도 했으며, 선비가 아주 등용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학통과 천거에 의해 선비들이 주도하는 체제는 선조 연간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또, 제승방략제가 와해되고 지방의 영진군이 유명무실화한 건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조의 잘못이 아니라, 그 이전 훈구파의 부패한 행태에 기인한다고 봐야 타당합니다. 따라서 선조는, 임란을 초래한 무능한 군주였다기보다, 오히려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간신히나마 국체를 온전히 보존한 공이 있다는 점도 부인 못 합니다. 많은 이들은 "임란과 호란이라는 큰 국난을 치른 후, 조선이라는 체제가 진즉에 무너졌어야 이후 민족 단위의 번영을 맞았을 텐데, 그걸 해내지 못한 게 역량의 한계이자 비극의 단초"라는 주장을 합니다. 일리가 있으나, 어차피 심판은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민초들을 특별히 미개하게 봐야 할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당대의 백성들이 체제를 뒤엎지 않고 지지를 철회하지도 않은 것은 그 나름 존중되어야 할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죠. 아니라면, 이는 역사의 발전 주체가 민중이라는 전제를 논자들 스스로 부인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대주의 스탠스가 아쉽기는 하나, 명나라의 원병을 어쨌든 끌어오는 데 성공함으로써 왜의 야욕을 최종적으로 꺾은 건 분명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선조를 두고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모후가 왕비에 책봉되지 않은 최초의 군주라는 점입니다. 세조는 명백히 소헌왕후의 아들이었고, 중종 역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성종의 계비 정헌왕후의 소생이었습니다. 이후의 인종, 명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조는 자신의 부친을 추존왕으로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 점 역시 독특합니다. 성종은 부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했는데도 말입니다.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이 대원군에 머물렀으니 선조의 모친인 하동 정씨 여시 하동부대부인에 고작 그쳤을 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의의는, 그전까지 왕좌가 직계 혈통으로만 내려왔으나(세조 제외 - 그러나 세조 역시 왕의 정실 소생 왕자였고 대군 신분이었습니다), 선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선대의 왕통이 끊기고 금상의 조카(그나마 이복 혈통)가 즉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조는 이런 취약한 위치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신하들에게 우습게 보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약한 군주, 자리보전이나 하는 임금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기는커녕 교묘한 정치술과 용인의 테크닉으로 오히려 피의 숙청을 때로 일으켜 가며 왕위를 보전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지킨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이, 천한 신분인 김개시를 지나치게 믿어(국정농단?) 반정의 수모를 겪은 건 아이러니컬합니다. 대신 왕좌에 오른 인조 역시 선조의 손자라는 점에서 이 군주가 여튼 역사의 패자 신세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명백합니다. 저 개인적인 추억(?)인데, 중학교 때 국사 담당 선생님이 "이 사람은 모든 면에서 우유부단하여 국난을 자초했고, 심지어 후계 문제마저도 어리숙하게 처리하여 이후의 모든 비극을 예비했다"며 호되게 비판하셨는데, 상당히 실력이 뛰어난 분이셨지만 이 이슈는 그리 단순히 단정될 부분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다소 이기적이고 좀스럽기는 했어도 일방적인 비판을 받을 만한 군주는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김덕령 장군, 이충무공을 다룬 그릇된 처사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이죠. |
|
조선의 임금, 아니 대한민국의 역대 지도자 중 가장 질책을 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선조와 인조가 단골로 거론된다. 두 임금이 욕을 먹는 공통점은 치세 기간 중 일어난 외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선조는 임진왜란(필자는 임진왜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하 임진왜란은 임진전쟁으로 표기한다.), 인조는 병자호란(마찬가지로 병자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겪을 때 무능한 지도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선조의 경우, 역사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과의 비교 때문에 비난의 강도는 더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