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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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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열전 -선조편- >>       조선군주중에서 가장 병약한 군주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인물이 선조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주 비관적이다 아마도 그건 임진,정유재란 왜와의 7년전쟁을 거치면선 보여준 군왕으로서의 평가의 재위 40년이라는 적지않는 기간을 통채를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선조는 여러가지 진기록을 남긴 군주이다. 우선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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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열전 -선조편- >>

 

 

 

조선군주중에서 가장 병약한 군주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인물이 선조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주 비관적이다 아마도 그건 임진,정유재란 왜와의 7년전쟁을 거치면선 보여준 군왕으로서의 평가의 재위 40년이라는 적지않는 기간을 통채를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선조는 여러가지 진기록을 남긴 군주이다. 우선 7년전쟁을 통하여 전국을 초토화시킨 군주, 그리고 재위기간중 잦은 선위파동, 그리고 최초의 정비의 소생이 아닌 후궁(중종과 창빈안씨)의 손자로 재위에 오른 군주이다. 그동안 조선이라라는 나라는 장자,차자를 떠나 정비소생이 왕위에 올랐다. 폭군 연산군 또한 성종의 적장자였던 점을 보면...

 

이렇듯 태생적으로 선조는 정통성문제에 있어서 죽는날까지 고민했다. 오죽했으면 나이 52세에 왕비를 새로 간택하여 대군을(영창대군)을 생산하여 왕위계승을 할려고까지 했을까 물론 이점이 또다른 피의 역사를 불러일으키지만, 그만큼 선조의 의식 깊이 서자출신이라는 강박관념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점은 권력장악에도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린다. 이후 본격인 당쟁의 역사가 시작된다(동/서 대결, 남/북 대결, 대/소북 대결)

 

이 책은 선조시대와 선조시대를 정확히 이해할수 있는 바탕이 되는 연산군부터 명종시대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당쟁의 단초가 된 무오/갑자/기묘/을사 사화를 통하여 이미 돌이킬수 없는 왕권의 추락을 전제조건으로 선조시대의 출발자체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신하들의 의지로 등극한 왕이라느점 그리고 신하들의 구미에 맞게 성장했다는 점 물론 성종또한 신하들이 선택하고 신하들이 가르킨 군주였지만 성종은 친정하면서 철저히 왕권강화에 나섰다는 차이는 있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치욕적으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통쾌하게 생각하는 7년전쟁과 정여립의 난을 빼고는 선조시대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사화도 없었고, 평온한 시대였다. 적어도 7년전쟁이 있기까지는 선조또한 당쟁싸움의 한가운데서 철저히 왕권을 유지하면서 동,서인을 저울질 하면서 두루두루 인재를 등용했다. 이 점은 조선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이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이 말해주고 있다. 이황, 이이, 유성룡, 이덕형, 이황복, 이연경, 정철, 정탁, 이산해, 윤두수,근수형제, 기대승, 성혼,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물을 배출했고, 왕 사후에 추존되는 공식명칭인 존호를 보더라도 무려 38자에 이르는 존호를 가지고 있는 임금이다. 실례로 세종대왕은 26자이다. 그리고 재위기간중에 종계변무를 바로잡았다는 점(조선시대 역대 군주의 가장 희망사항으로 중국역사서에 이성계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잘못기재된 점을 누누히 고치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않은점) 이런점을 보았을때 선조가 무능하고 나라 말아먹은 군주라는 비판은 7년전쟁을 거치면서 보여준 행태가 자신의 재위기간 전부를 덮어버렸기 때문일것이다. 물론 그점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받아야 하겠지만 다른 이면의 평가 또한 적절하게 해야하는 것이 후세인들이 역사를 바로보는 관점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선조는 불운한 군주였다. 당초 즉위 당시의 신분으로 인한 번민과 그에 대한 집착으로 세자 광해군과의 불화 결국 어린아들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인목왕후의 폐모사태까지 가는 참담한 결과를 낳게 한다. 또한 7년전쟁을 통한 리더십이 결여된 지도자의 모습으로 인하여 사실상 군주로써의 권위가 없어진 상태에서 말년을 지내게 된다. 하지만 역사는 한시점만 보는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다음 표현이 인상적인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조선호'라는 낡고 오래된 배의 키를 잡고 있던 사람은 선조다. 애당초 자신이 키를 잡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배에 관한 항해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한줌도 되지 않았고 바다에 나가본 적도 없었다. 갑자기 노련한 항해사들이 와서 열여섯 살 어린 아이를 보고 선장을 맡아줄 것을 강권했다. 사양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선장직을 수락한 후에도 모든 것은 향해사들이 알아서 했고 자신은 뒤늦게 항해술에 관한 수업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 난파 조짐을 보이던 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조금씩이나마 항해를 계속해 나갔다. 마흔 살을 넘어 조금씩 항해에 흥미를 가지려 할 무렵에 태산 같은 파도가 밀려오더니 7년간의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런 상황은 난생 처음이었따. 그동안 익힌 항해술로 대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발 다른 사람이 키를 맡아달라고 수도 없이 호소했지만 아무나 선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자리를 지켜줄 것을 강요했다. 폭풍우가 잦아들었을 때 배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난파는 면했다.

l******e 2008.06.20. 신고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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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 역사를 신문기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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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서술은 사실의 인용, 사실 관계에 대한 논리적 해석, 그리고 주장으로 이어진다. 사료에서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을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다양하고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사료에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을 해야만 좋은 주장이 나온다. 합리적 판단을 거쳐서 나오는 주장만이 합리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면에서 볼 때 이한우의 "선조"는 이상한 책이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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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서술은 사실의 인용, 사실 관계에 대한 논리적 해석, 그리고 주장으로 이어진다. 사료에서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을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다양하고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사료에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을 해야만 좋은 주장이 나온다. 합리적 판단을 거쳐서 나오는 주장만이 합리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면에서 볼 때 이한우의 "선조"는 이상한 책이다. 신문기자답게 신문기사같은 책을 썼다. 먼저 사실관계를 꽤 많이 '정확'하게 인용한다. 그리고 나름의 해석을 한다. 그리고 주장을 펼친다. 그런데 사실관계와 먼 주장을 펼친다. 신문기사 같다. 신문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저자가 속한 신문사 뿐만 아니라 모든 신문사들은 저마다 이념적 노선이 있다. 사람이 글을 쓰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비판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좌든 우든 신문사들은 같은 사실을 인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제목"을 내세우고 주장을 펼친다. 이한우는 역사책에서도 이런 글을 쓴다. 역사적 사실을 가져오고 해석한다. 선조의 공과를 나열하니 장점이 20% 단점이 80%정도로 나뉜다. 하지만 제목은 [선조 : 조선의 난세를 넘다. 탁월한 용인술로 조선의 운명을 지킨 선조의 재발견]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때 제목을 보고 이한우는 선조의 장점을 많이 끌어 모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까?


먼저, 선조의 총명성 - 이한우는 선조가 영명했다고 여러번 이야기한다. 아무리 좋게 봐도 왕들에게 치례하는 정도지 특별한 영명함은 나오지 않는다. 조선왕조 27명 왕중에 어렸을 때 영민,총명하지 않았다는 평없는 왕은 없다. 교육적인 분위기였기도 하고 과거 생활기록부 평가처럼 좋게 좋게 나오는 정도의 영민함일 뿐이다. 그리고 호기심은 많으나 학업은 신하들이 요구하는 수준을 따르지 못한다.

"그 글이 매우 간절하고 요긴하니, 이는 부제학의 말이 아니고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치도에 매우 도움이 있겠으나 다만 나 같은 이 불면한 군주는 능히 행하지 못할까 걱정될 뿐이다."

마지막 문장은 결코 겸양이 아니었다. 이에 이이는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한우는 제목으로 승부한다. "학자 군주 선조의 정신세계"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다. 왜 학자 군주라는 것이지? 그정도는 조선왕 대부분 그랬다. 정조평가때는 학업이 중요한게 아니라더니.


두번째, 그래! 왕의 학업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왕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의 지적수준이 성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볼줄 아는 것과 리더쉽이다. 이한우는 선조대에 이이,이황, 기대승 등 쟁쟁한 인문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선조의 사람볼줄 아는 능력때문이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조선 중기때부터 무르 익은 사림이 명종시대라는 피바람을 피했다가 한번에 등장한 것이고, 사림의 사상적 성취가 이루어진것이다. 다른 저서에서는 대부분 사림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완성되었다고 하지 선조에게 공을 돌리지는 않는다. 그래. 그 시대에 일어난 모든일은 왕에게 공을 돌리니 선조도 그 자리에 있었던 운을 공으로 돌린다고 하자. 그런데 저자는 선조때에 "사화"가 일어 나지 않았다며 선조가 사림을 아꼈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기축옥사는 잊었는가? 훈구에 의해서 저질러지지 않았을 뿐이지 수백에서 천 명까지 추산되는 피해는 무시하고 사화가 없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사화는 훈구파에 의해 저질러진 사림학살이다. 선조때는 훈구파가 모두 사라진 이후다. 사화가 일어날 수가 없다. 물리적으로 선조의 덕이 아니다. 또 이한우는 기축옥사에서 "후폭풍의 무한 확산을 현명하게 조정한 선조"라는 제목을 붙이여 선조가 사림의 피해를 축소시켰다고 주장한다. 

"역적의 문도중에 적당의 진술에 관련되지 않는자는 중한 율로 다스리지 말라. 차라리 형벌이 적절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처리하는 것이 옳다."

라는 언급을 했다며 선조의 덕을 칭송한다. 한번더 하지만! 이는 벌써 피바람이 다 지나고 난 이후다. 죽일 사람 다 죽이고, 정철에 의해 반대파인 동인이 거의 몰살까지 갔을 때 이런 성음이 나온다. 이미 역모에 흥분한 선조는 정철과 함께 국문을 주도했다. 이발의 82살 노모와 열살 아들까지 고문으로 죽였다. 선조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 조사 김빙은 우연히도 안타깝게도 눈에 바람이 들어가 눈물이 났는데 역도를 불쌍히 여겼다며 죽었다. 최영경은 정여립의 실체없는 윗선으로 몰려 죽었다. 서인이 압박하면 선조가 추인하고 선조가 직접 사건을 확대하며 최대 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위 지시는 사건이 마무리 되어 갈때 쯤인 12월 1일에 나온 말이다. 사건 시작 즈음에 나온말이 아니다. 기축옥사는 10월 2일 밀계로 시작되어 10월 17일 정여립이 자살했으며 10월 27일 친국으로 확산되었다. 12월 1일은 다 끝난상황이다. 다 죽이고 마무리하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세번째, 이한우는 선조의 단점을 말할때도 반대편을 끌고 들어간다. 선조의 가장 큰 실패중 하나는 후계자 문제다. 광해군을 잘못 택했다는 것이 아니라 광해군으로 분위기가 정해져 있었고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었으며 탁월한 업적을 보인 광해군을 끝까지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급할때는 맡기고 전쟁이 끝난후에는 무시한다. 저자도 말했지만 애첩 인빈의 아들 신성군이 눈에 밟혀서다. 공적인 문제에 사적인 감정 그것도 여자문제를 끌어 들인 선조다. 이 후계자 문제는 광해군에게 쓸데없는 짐이 되었으며 광해군이 집권한 후에도 응어리가 터져 피바람이 분다. 인조반정으로 이어지는 후계자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선조다. 하지만 이 문제를 "방계승통과 적장자에 대한 갈증"이라는 제목으로 선조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 하더니 갑자기 단원 끝에는 '성공한 반정, 실패한 반정'이라는 애매한 제목을 붙여 광해군을 깍아 내리려 한다. 이한우는 광해군을 싫어한다. 


네번째, 임진왜란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선조의 가장큰 실패작이다. 전쟁 후에도 집권을 유지한게 이상하리만큼 선조의 약점과 단점이 다 드러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한우는 선조의 책임을 물으면서도 면죄부를 하나 둘씩 던져준다. 이순신을 등용한것이 선조고 이순신은 선조에게 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뉘앙스까지 풍기면서 선조의 책임을 축소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살아남았으니 이겼다는 논리를 펼친다. 

"적어도 전쟁에 관한 살아남은 쪽이 승자다. 과정이야 어쨌건 선조는 살아남았다. 갖은 굴욕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의 역모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나라를 지켜냈고 또 정권을 유지했다. 상처뿐인 승자도 승자는 승자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수도 있고 살아남는데 필요한 나름의 능력을 발휘한 때문일수도 있다."

세상에나. 이런 표현은 왕에게 돌릴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왕은 당시대의 모든 영광을 받으며 또한 무한 책임을 진다. 조선의 피폐함은 무시하고 이후 호란까지 벌어지는 사태는 무시한채 살아남았을을 선조의 업적으로 칭송한다.  조선은 선조가 승리함으로써 후퇴했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거나 정권교체가 더 빨리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전쟁후에 여러 의병장을 숙청한 것도 선조가 그 잘난 보위를 이어가기 위함이었을 텐데 이한우는 왜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종계변무'같은 왕실에게만 위업이고 조선백성에게는 필요없는 업적 칭송에는 한 단원을 할애하면서 의병장 숙청은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이한우도 그 부분은 도저히 막아줄 말이 없었다 보다. 


이 밖에도 이한우의 역사인식은 이상하다. 원인이 무엇일까? 이한우는 선조-이승만, 숙종=박정희 혹은 전두환, 정조=노무현 혹은 김대중, 광해군=노무현 이라는 도식을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듯하다. 이후 역사 인식과 인물평가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이 과거 역사 판단에 영향을 준다. 역사는 현대를 기준으로 과거를 들여다 본다고 하지만 현대사를 위한 과거를 왜곡이 심하다.

"(조광조 평가에서) ~~~마치 우리 현대사의 김구나 여운형에 대한 다소 과장된 평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의 경과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6.25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이승만과 선조~~~"

 이한우의 군주열전을 한번에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상한 책이다. 아니면 이한우의 정치적색채에 대한 반감때문에 그의 책을 잘못 해석하는 리뷰일수도 있다. 


  






      




  




             

YES마니아 : 골드 l****0 2015.01.24.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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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 이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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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 대해서는 평이 많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나라를 몰고간 무능한 군주였다며 호되게 비판합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용서될 수 없는 실책(혹은, 고의적인 처사?)이라면,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적일 터입니다.    반면 이 책 저자 같은 분은, 뛰어난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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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 대해서는 평이 많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나라를 몰고간 무능한 군주였다며 호되게 비판합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용서될 수 없는 실책(혹은, 고의적인 처사?)이라면,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적일 터입니다. 

 

반면 이 책 저자 같은 분은,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치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고려가 망한 후 시스템을 떠받치던 인재들은 하나같이 지조를 지킨다며 은둔하여 학업만 닦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건국 후 200년이 지나서야 폭 넓게 등용하여 요직에 고루 앉힌 군주는 선조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 4대 임금 세종부터가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선비들에게 벼슬길을 널리 열어 주었습니다만, 이런 바람직한 조치는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인해 전통이 끊기고, 정부 요직은 훈구 대신들이 독점하는 폐단이 이어졌습니다. 

 

훈구 대신 중에서도, 지난 책프 리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신숙주 같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인물이 나와 국가 기초를 튼튼히 닦기도 했으며, 선비가 아주 등용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학통과 천거에 의해 선비들이 주도하는 체제는 선조 연간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또, 제승방략제가 와해되고 지방의 영진군이 유명무실화한 건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조의 잘못이 아니라, 그 이전 훈구파의 부패한 행태에 기인한다고 봐야 타당합니다. 따라서 선조는, 임란을 초래한 무능한 군주였다기보다, 오히려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간신히나마 국체를 온전히 보존한 공이 있다는 점도 부인 못 합니다.

 

많은 이들은 "임란과 호란이라는 큰 국난을 치른 후, 조선이라는 체제가 진즉에 무너졌어야 이후 민족 단위의 번영을 맞았을 텐데, 그걸 해내지 못한 게 역량의 한계이자 비극의 단초"라는 주장을 합니다. 일리가 있으나, 어차피 심판은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민초들을 특별히 미개하게 봐야 할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당대의 백성들이 체제를 뒤엎지 않고 지지를 철회하지도 않은 것은 그 나름 존중되어야 할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죠. 아니라면, 이는 역사의 발전 주체가 민중이라는 전제를 논자들 스스로 부인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대주의 스탠스가 아쉽기는 하나, 명나라의 원병을 어쨌든 끌어오는 데 성공함으로써 왜의 야욕을 최종적으로 꺾은 건 분명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선조를 두고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모후가 왕비에 책봉되지 않은 최초의 군주라는 점입니다. 세조는 명백히 소헌왕후의 아들이었고, 중종 역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성종의 계비 정헌왕후의 소생이었습니다. 이후의 인종, 명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조는 자신의 부친을 추존왕으로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 점 역시 독특합니다. 성종은 부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했는데도 말입니다.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이 대원군에 머물렀으니 선조의 모친인 하동 정씨 여시 하동부대부인에 고작 그쳤을 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의의는, 그전까지 왕좌가 직계 혈통으로만 내려왔으나(세조 제외 - 그러나 세조 역시 왕의 정실 소생 왕자였고 대군 신분이었습니다), 선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선대의 왕통이 끊기고 금상의 조카(그나마 이복 혈통)가 즉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조는 이런 취약한 위치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신하들에게 우습게 보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약한 군주, 자리보전이나 하는 임금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기는커녕 교묘한 정치술과 용인의 테크닉으로 오히려 피의 숙청을 때로 일으켜 가며 왕위를 보전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지킨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이, 천한 신분인 김개시를 지나치게 믿어(국정농단?) 반정의 수모를 겪은 건 아이러니컬합니다. 대신 왕좌에 오른 인조 역시 선조의 손자라는 점에서 이 군주가 여튼 역사의 패자 신세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명백합니다. 저 개인적인 추억(?)인데, 중학교 때 국사 담당 선생님이 "이 사람은 모든 면에서 우유부단하여 국난을 자초했고, 심지어 후계 문제마저도 어리숙하게 처리하여 이후의 모든 비극을 예비했다"며 호되게 비판하셨는데, 상당히 실력이 뛰어난 분이셨지만 이 이슈는 그리 단순히 단정될 부분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다소 이기적이고 좀스럽기는 했어도 일방적인 비판을 받을 만한 군주는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김덕령 장군, 이충무공을 다룬 그릇된 처사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v*****7 2022.05.0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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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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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 대해서는 평이 많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나라를 몰고간 무능한 군주였다며 호되게 비판합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용서될 수 없는 실책(혹은, 고의적인 처사?)이라면,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적일 터입니다. 반면 이 책 저자 같은 분은, 뛰어난 인재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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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 대해서는 평이 많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나라를 몰고간 무능한 군주였다며 호되게 비판합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용서될 수 없는 실책(혹은, 고의적인 처사?)이라면,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적일 터입니다. 


반면 이 책 저자 같은 분은,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치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고려가 망한 후 시스템을 떠받치던 인재들은 하나같이 지조를 지킨다며 은둔하여 학업만 닦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건국 후 200년이 지나서야 폭 넓게 등용하여 요직에 고루 앉힌 군주는 선조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 4대 임금 세종부터가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선비들에게 벼슬길을 널리 열어 주었습니다만, 이런 바람직한 조치는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인해 전통이 끊기고, 정부 요직은 훈구 대신들이 독점하는 폐단이 이어졌습니다. 


훈구 대신 중에서도, 지난 책프 리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신숙주 같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인물이 나와 국가 기초를 튼튼히 닦기도 했으며, 선비가 아주 등용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학통과 천거에 의해 선비들이 주도하는 체제는 선조 연간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또, 제승방략제가 와해되고 지방의 영진군이 유명무실화한 건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조의 잘못이 아니라, 그 이전 훈구파의 부패한 행태에 기인한다고 봐야 타당합니다. 따라서 선조는, 임란을 초래한 무능한 군주였다기보다, 오히려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간신히나마 국체를 온전히 보존한 공이 있다는 점도 부인 못 합니다.


많은 이들은 "임란과 호란이라는 큰 국난을 치른 후, 조선이라는 체제가 진즉에 무너졌어야 이후 민족 단위의 번영을 맞았을 텐데, 그걸 해내지 못한 게 역량의 한계이자 비극의 단초"라는 주장을 합니다. 일리가 있으나, 어차피 심판은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민초들을 특별히 미개하게 봐야 할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당대의 백성들이 체제를 뒤엎지 않고 지지를 철회하지도 않은 것은 그 나름 존중되어야 할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죠. 아니라면, 이는 역사의 발전 주체가 민중이라는 전제를 논자들 스스로 부인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대주의 스탠스가 아쉽기는 하나, 명나라의 원병을 어쨌든 끌어오는 데 성공함으로써 왜의 야욕을 최종적으로 꺾은 건 분명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선조를 두고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모후가 왕비에 책봉되지 않은 최초의 군주라는 점입니다. 세조는 명백히 소헌왕후의 아들이었고, 중종 역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성종의 계비 정헌왕후의 소생이었습니다. 이후의 인종, 명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조는 자신의 부친을 추존왕으로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 점 역시 독특합니다. 성종은 부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했는데도 말입니다.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이 대원군에 머물렀으니 선조의 모친인 하동 정씨 여시 하동부대부인에 고작 그쳤을 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의의는, 그전까지 왕좌가 직계 혈통으로만 내려왔으나(세조 제외 - 그러나 세조 역시 왕의 정실 소생 왕자였고 대군 신분이었습니다), 선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선대의 왕통이 끊기고 금상의 조카(그나마 이복 혈통)가 즉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조는 이런 취약한 위치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신하들에게 우습게 보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약한 군주, 자리보전이나 하는 임금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기는커녕 교묘한 정치술과 용인의 테크닉으로 오히려 피의 숙청을 때로 일으켜 가며 왕위를 보전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지킨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이, 천한 신분인 김개시를 지나치게 믿어(국정농단?) 반정의 수모를 겪은 건 아이러니컬합니다. 대신 왕좌에 오른 인조 역시 선조의 손자라는 점에서 이 군주가 여튼 역사의 패자 신세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명백합니다. 저 개인적인 추억(?)인데, 중학교 때 국사 담당 선생님이 "이 사람은 모든 면에서 우유부단하여 국난을 자초했고, 심지어 후계 문제마저도 어리숙하게 처리하여 이후의 모든 비극을 예비했다"며 호되게 비판하셨는데, 상당히 실력이 뛰어난 분이셨지만 이 이슈는 그리 단순히 단정될 부분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다소 이기적이고 좀스럽기는 했어도 일방적인 비판을 받을 만한 군주는 아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김덕령 장군, 이충무공을 다룬 그릇된 처사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이죠. 

v*****7 2020.05.07. 신고 공감 0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논란의 지도자 선조를 다시 고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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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아니 대한민국의 역대 지도자 중 가장 질책을 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선조와 인조가 단골로 거론된다. 두 임금이 욕을 먹는 공통점은 치세 기간 중 일어난 외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선조는 임진왜란(필자는 임진왜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하 임진왜란은 임진전쟁으로 표기한다.), 인조는 병자호란(마찬가지로 병자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겪을 때 무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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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아니 대한민국의 역대 지도자 중 가장 질책을 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선조와 인조가 단골로 거론된다. 두 임금이 욕을 먹는 공통점은 치세 기간 중 일어난 외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선조는 임진왜란(필자는 임진왜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하 임진왜란은 임진전쟁으로 표기한다.), 인조는 병자호란(마찬가지로 병자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겪을 때 무능한 지도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선조의 경우, 역사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과의 비교 때문에 비난의 강도는 더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책은 그런 선조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선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을 자제하고, 선조의 공과 사를 냉정하게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었다. 비난 일색의 선조에 공과 사를 구분하여 밝힌다고 했는데, 일반적인 국민 정서와 견해와는 대치되는 부분이 있기에, 책의 평가 역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추측됐다. 아니나 다를까 네이버를 비롯하여 여러 도서사이트에 이 책의 서평을 읽어봤는데, 좋다는 평도 있었고, 나쁘다는 평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책의 평가는 낮은 편이었는데, 내용은 이성이 아닌 감정적인 공분을 앞세운 글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선조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군왕이지만, 너무 여론몰이식으로 매도하여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고루 존재한다. 위대한 인물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며, 역사적으로 악독한 악인들에게도 손톱만큼이나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선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임진전쟁 때의 선조의 처세를 생각하여 무지막지하게 비난하지만, 그런 선조도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책은 그런 선조의 장점을 최대한 고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을 참고 자료로 읽었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선조의 장점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나 스스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은 결과, 의외로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선조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생각한 바, 내가 생각한 선조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치세의 시기에는 정치력이 상당히 괜찮았던 지도자였다. 우리는 흔히 선조를 생각할 때 리더십이 없고 줏대 없이 무능한 모습만 보인 군왕으로 생각하는데, 실제 선조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정치적인 식견과 권력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발달한 군주다. 선조는 알다시피 방계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다. 그렇기에 역대 다른 국왕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미숙하며 소극적으로 활동할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노회한 신하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하며, 자신의 권력 즉 군주의 권한을 차츰차츰 강화했다. 실제로 임진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선조의 정권은 매우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임진전쟁이 끝난 뒤에도, 선조는 현실 권력을 잃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권력의 핵심을 잘 간파하고 있었으며, 권력의 역학관계를 깊이 있게 이해한 군주였다.

두 번째로는 인재를 보는 눈이다. 선조가 인재를 잘 본다니 그럼 이순신과 같은 명장은 왜 못 알아봤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선조는 이순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그랬기에 4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는 지도자다. 다만 선조가 이순신에 관한 인사를 판단했던 때는 바로 '난세'였다. 앞에서 고찰했고, 뒤에서 밝히겠지만 선조의 리더십에서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난세에 보여줬던 아쉬운 리더십이다. 반대로 선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앞에서 고찰했듯 치세의 시기에 보여줬던 리더십이다. 이런 치세의 리더십에서 가장 빛을 발휘한 부분이 바로 인사권이다. 선조는 사람을 잘 간파하고 잘 읽어냈다. 특히 문관들의 인사에 있어서는 굉장히 탁월한 안목을 보여줬던 군주다. 치세의 시기에 권력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사람을 잘 읽어내는 인사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로 중화사상 즉,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다. 선조의 인사 정책, 그리고 선조의 성향을 잘 고찰해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보이는데 바로 편파적인 사람이나,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온화하고 온건하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신권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정철과 같은 극단적인 서인을 기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선을 넘을 때에는 가차 없이 내쳐버렸다.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등등 선조가 주로 중용했던 인사들은 당파색이 있는 인물이지만 대체로 온건하고 과격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선조가 이순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순신의 극단적인 단호함에 거부감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네 번째로 선조는 실증적이고 자연과학적인 탐구정신이 많았던 지도자다. 선조가 집권할 당시에는 학문적 흐름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선조 역시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성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하지만 경연을 하거나 신료들과의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얼음'에 대한 질문, 그리고 '땅과 우주'에 대한 실증적인 질문을 하는데, 이런 부분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자들이 대답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질문이었다. 또한 임진전쟁 때부터 애독했던 《주역》은, 일반적으로 점을 치는 책으로만 생각하는데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역》은 자연현상을 인문적, 철학적으로 풀이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항간에서는 《주역》을 동양 최초의 인문 과학서로 칭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만약 선조가 21세기에 환생한다면, 실증을 바탕으로 한 과학 과목에 굉장히 흥미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학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으니 아마 오늘날에 환생한다면 자연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선조는 치세의 시대에서는 세종과 같은 먼치킨 능력을 가진 군왕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의 정치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실제로 당시 집권세력인 사림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군왕으로 선조에 대한 기대가 많았고, 선조의 지적 능력 역시 그런 신하들의 기대를 충족하기에 충분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시대에 만약 임진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혹평을 받는 군주로 역사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난세의 시기 선조의 무능한 리더십이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행정의 체제적 문제, 그리고 신하들의 탁상공론으로 인한 문제 등등을 간과하고 임진전쟁의 결과적 책임을 선조에게만 돌리는 것 역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점을 가진 선조였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어쨌든 임진전쟁은 그의 집권기에서 터졌고 그랬기에 선조의 문제점은 그런 난세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조의 단점을 열거해보자면 첫 번째로는 여색에 대한 집착이다. 선조는 유독 여색에 집착했다. 집권 초에는 군왕 수업을 받고 가르치려고 드는 대신들로 인해 마음이 외로웠고, 그런 외로움을 후궁들에게서 해소했다. 이런 호색은 임진전쟁 때에도 이어졌으며 집권 말기에는 왕후를 새롭게 들여서 훗날 왕실의 분란을 예고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줏대 없는 행동이다. 임진전쟁 때에 선조는 유독 줏대 없는 행동을 많이 보였다. 치세의 시기에는 나름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전쟁이 터지자 서생 특유의 문약한 모습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정을 번복하고, 백성들에게 성을 사수한다 약속한다며 자신은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으며, 여색과 줏대 없는 행동이 결합된 결과, 훗날 대권 구도에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불렀다.

세 번째로 자신감이다. 선조는 늘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정치에 있어서는 늘 한발 물러나고 온건한 방향만을 고집했다. 물론 온건한 방향이 사회통합적인 면에 있어서는 장점으로 적용하지만, 때론 지도자가 자신 있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때도 있다. 특히 난세의 경우는 더더욱 지도자의 강단을 요구하는 때가 많다. 그럴 때에 선조는 늘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에 있어 자신감이 부족한 선조의 심리에는 분명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임진전쟁 직후에는 전쟁에 대한 속죄 의식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 결여는 결국 책임 의식 결여, 현실 기피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선조는 말로만 전쟁의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의 결과를 책임지는 모습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네 번째로 그릇의 크기다. 선조의 집권기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바로 속 좁은 도량이다. 사실 군왕들은 자신의 명성을 넘어서는 신하를 경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조는 유독 그런 부분에 있어서 질투심이 심했다. 그래서 자신과는 대조적인 이순신을 경계했고, 의병들의 활동을 소극적으로 인정했다. 물론 치세의 시기에 군주의 명성을 넘어서는 세력이 생긴다면 경계의 필요성이 있겠지만, 때는 난세였다. 이런 난세의 상황이라면 허심탄회하게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영웅들을 인정하며 그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지도자의 바람직한 도량인데, 선조는 그런 그릇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좁은 도량을 가졌기에 4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온 국민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권 말기의 모습이다. 선조의 정권은 전형적인 용두사미 정권이다. 정권 출범 당시에는 굉장히 안정적이고 선조의 정치력 역시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기점으로 그 후의 모습은 초심을 잃은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았다. 정권 초기에는 영민했기에 공부를 하며, 정치력을 키워나갔고, 현실 정치도 치우침 없이 배우던 군주였지만, 정권 말기에는 국난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바탕으로 한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영민한 모습은 영악한 모습으로, 뛰어난 자질을 기대했던 정치력은 음험한 모략가의 기질로 바뀌었다.

사실 선조의 자취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적인 연민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군왕이 된 것이 아니다. 윗선과 신료들의 의논으로 인해 왕위가 결정 났고, 그런 상황을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는 수구적인 훈구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사림은 그런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선조를 성리학적 이념에 걸맞은 군주로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 역시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황과 이이, 기대승 등등의 최고의 성리학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림이 요구하는 지도자의 윤리와 도덕관은 자신이 실천하기에 너무나도 높은 이상이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 출신인 그였기에, 최대한 신료들이 원하는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 앞에서 선조는 한없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신료들 사이에서 선조는 고독감을 느꼈다. 그랬기에 여색을 통해 그런 고독과 열등감을 해소했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서울대를 갈 수는 없다. 똑똑하고 영민하다 하더라도 공부 스타일이나 방법론에 따라 서울대를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다. 선조도 그랬다. 그는 나름 똑똑하고 영민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과 이이로 대표되는 사림은 그런 영민한 선조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기대했다. 어느 순간 선조는 그런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런 후로는 신료들의 강압적인 가르침을 건성으로 들으며, 자신이 행할 수 있는 한도를 설정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나름의 노력도 임진전쟁을 겪은 뒤로는 뒤틀려버렸다. 그렇기에 그는 당시 인간이라면 가장 높은 위치라 할 수 있는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지만 결코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모습에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민은 감정적인 부분이고, 냉철한 이성으로 선조를 생각해보면 역시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의 위치는 연민만으로는 변명할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고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다. 그랬기에 임진전쟁이 터졌을 때, 좀 더 의연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난세의 시기 너무나도 문약했고 비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약한 그의 내면에 연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비판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지도자란 책임을 지는 자리이고, 당시 그는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책임감으로부터 선조는 도망쳤기에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지도자는 태종 이방원이다. 조선 역사, 그리고 한국 역사를 통틀어 난세에 있어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보여준 군주는 태종 이방원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태종처럼 흔들리지 않고 조금 더 자신감을 발휘하여 정치에 임했으면 아마 임진전쟁이라는 난세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항간에서는 아들인 광해군과 선조를 비교하며 광해군을 칭송하고 선조를 내려깎기도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다. 외교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광해군이 선조보다 나은 실리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치와 조정 신료들을 다루는 부분으로 생각해보자면 광해군은 선조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광해군이 몰락한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측근 정치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는 당파만을 믿고 편협하게 사람을 임용하였으며,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결과, 몰락했으니 말이다. 반면 선조는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당파의 신료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했다. 광해군이 만약 선조의 스타일대로 온건하고 치우치지 않은 인사정책을 따랐더라면 어쩌면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책을 통해 선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았다. 물론 책 부분 부분에는 나의 해석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점도 있다. 변명하는 선조의 모습을 진심 어린 모습으로 해석하는 부분 등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지적하는 선조의 장단점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선조를 이야기할 때 여론과 일반적인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무조건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사실 그랬는데, 이 책과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선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책의 장점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당시 정계의 판세와 흐름을 명료하게 정리하여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당파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대립했는지, 선조의 정치적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며, 지도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고, 엄청나게 피곤한 자리이며, 엄청난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는 교훈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오히려 선조가 군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훨씬 행복하고 멋지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조는 학구적이며 탐구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시와 서예를 잘 쓰는 풍류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그런 인물이 강압에 의해 억지로 왕이라는 옷을 입고 행동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또한 그렇게 노력하며 집권하는 당시, 임진전쟁이라는 큰 핵폭탄이 터졌으니 서생 기질이 다분한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그래서 나는 선조의 인생에서 1차 비극이 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2차 비극이 그의 집권기에 임진전쟁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인생을 과연 행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저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k******m 2018.11.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