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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혼백의 귀향 (6), 제 2편 운명적인 것 (1~5), 제 3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워낙 긴 이야기, 많은 사람들의 등장으로 앞 선 이야기들을 잊었을까 하는 작가의 배려였을까? 한 인물을 이야기할 때 그가 살아온 역사를 내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과거 속으로 나를 다시금 끌고 들어가서 그들의 기쁨, 고통등 삶의 전반적인 모습들을 돌아보게 한다.
매 권 중요시 다뤄지는 인물들이 있다. 먼저, 오가다와 유인실. 둘은 조찬하를 통해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었고, 오가다는 처음으로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종종 만난 적이 있는 조찬하의 아들이 실은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다정한 부자의 정을 나누는 오가다의 모습은 어찌나 애처로웠는지 모른다. 피의 끌림이란 분명 존재하는 것일까? 이를 통해 조찬하와 오가다의 우정은 한없이 깊어진다. 식민지와 지배자의 백성으로 만난 그들 앞에 놓여있던 많은 장막들이 옅어지는 것을 보는 동안 따뜻해졌다.
양현의 삶이 두드러진다. 이상현과기생 기화 사이에 태어나 길상과 서희의 딸로 자란 아이, 이상현의 처에게 양현의 존재를 알리면서 이양현으로 호적을 옮겼다. 그런 양현은 상현을 사랑했던 또 한 여인 임명희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고, 출중한 외모와 의전 학생으로서의 지적 수준또한 인정을 받았지만 기생의 딸이란 신분은 그녀를 자유롭게 두지 않았다. 순간 순간 터져 나오는 그녀의 신분은 밝게만 세상을 보던 그녀에게는 열등감이면서 족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서희네 가족에 대한 애정은 커져가기만 했다. 송관수의 아들 영광과 그녀는 신분에 대한 동질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묘한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임명희는 오빠를 통해 이상현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아마 그 소식은 양현에게 새로운 아픔을 안겨주지 않을까?
만주땅 신경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던 용이와 임이네의 아들 홍이는 아내 보연이 금붙이를 가지고 있던 것이 발각이 되면서 조선으로 잡혀오고 고초를 겪지만 그것을 계기로 만주 일을 정리하고 처가인 통영에 머물게 되었다. (금은 모두 공출 대상이었기에 가지고 있는 것은 불법이었다.) 홍이는 표면에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지만, 그에게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만주에서 정말 힘들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안함도 있고,독립에 대한 희망의 끈도 놓을 수는 없기에 홍이는 가족들을 조선에 남겨둔 채 자신은 온전히 나라 일에 뛰어들고자 한다. 평사리에 들러 고향 사람들을 차근 차근 만나면서 전해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먹먹해진다. 삶이 어찌 이리 다들 고달픈것일까? 한결같이 그들은 얘기했다. 옛날이 좋았지, 그때가 사람 사는것 같았지.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었다. 호열자로 많은 사람들이 지게송장으로 실려 나갔었고, 보리 흉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지 않을까? 아마, 토지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감정이 한이며 설움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중에 홍이를 통해 아들 석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성환네, 홍이가 데리고 있던 아들 천일이가 고향으로 번듯해져 돌아올 거라는 얘기를 들은 천일네, 몸져 누워 있던 아들이 조금씩이라도 거동을 하자 기분이 좋아진 야무네, 이 세 할머니가 홍이를 위해 닭을 찌고, 나물을 무치면서 소꼽 사는 것같다고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사람 사는 정이란 저런 것이지 싶어 웃음을 짓기도 했다. '슬프게 우는 새가 있고, 즐겁게 우는 새가 있다. 왜 그런가. 다같은 그들 나름의 목소리인데 어찌해서 우리 귀에는 슬프게도 들리고 즐겁게도 들리는 걸까?' -p 344
모든 것이 힘들게만 느껴졌던 그들 세 여인에게 이 순간만큼은 어떤 새들의 울음소리도 즐겁게만 들렸을 것이다. 가족의 안녕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 우리네의 삶이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고, 전쟁은 중심부로 접어들었다. 1942년, 모든 물자를 쓸어갔고, 여자들을 전장으로 끌고 간다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징병제 소식도 들려오며 조선의 손실이 어디까지 갈것이냐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사상범 예비 검속이란 명목으로 형무소에 들어간 전적이 있었던, 길상, 서의돈, 유인성, 선우신 등은 다시 수감이 되었다. 친일분자들은 신이 나서 날뛰고 비협조적인 사람은 무사하지 못할거라는 협박도 나돌아다닌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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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토지] 5부는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억압을 견뎌낸 민족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또한 일제 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후일담 형태로 채워진다. 5부 1권인 [토지 17]에서는 서희와 길상이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며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묻고 있다.)
영광이 어머니 영선네의 편지를 받고 통영으로 가기 위해 서울역에 왔다가 서희가 아파서 보러 간다는 양현을 만난다. 기차가 타고 내려가면서 영광을 보며 양현은 생각에 잠긴다. ‘영광오빠하고 내 운명은 비슷하다. 영광오빠가 결혼 안하는 것도, 내가 결혼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우린 같은 슬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운명에 따라다니는 그 출생이라는 괴물, 그것 때문일 거야. 내 마음 바닥에 항상 그것이 있듯이 오빠 마음속에도 늘 그것이 있었을 거야.’(244쪽) 기차를 갈아타기 위하여 삼량진에서 내리는 양현, 차창밖으로 양현을 바라보는 영광의 마음이 소용돌이 친다. ‘도망치면서 다가가는 마음, 뿌리치면서 매달리는 마음, 영광이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양현이 자신에게 운명적인 여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섬진강 강가에서 기묘한 해후를 했던 자체가 운명적인 것 같았다.’(254쪽) 하얼빈을 여행하던 조찬하가 약국에 들렀다가 수앵의 약국일을 도와주던 유인실을 만난다. 찬하는 자신이 인실의 아이를 입양하여 기르고 있고 오가다가 신경에 있다며, 이제는 진실을 밝혀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인실은 오가다를 만나 자신이 직접 얘기하겠다고 한다. 오가다가 찾아왔다. 송화강 가에서 그들이 만났다.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오가다의 시선도 인실을 따라 강물 쪽으로 간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말이 없어도 이들은 어제보다 훨씬 자유스러워 보였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냥 남자와 여자, 연인으로만 보였다.’(174쪽) 인실이 십일년 전의 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말하며 떠난다. 그대로 잊을 거라며 악을 쓰는 오가다. 그는 찬하와 함께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온다. 오가다는 찬하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이를 그대로 맡아 달라고 한다. 신경에 있던 홍이와 보연이 형사들의 급습을 받았다. 장롱 서랍에서 금붙이들이 나왔다. 보연이 친정에 정양차 와있을 때 사가지고 온 것이다. 홍이와 보연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아이들 외삼촌인 허삼화가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친정의 힘으로 홍이가 풀려나고 보연이 집행유예로 나온다. 보연이 풀려나기 전 만주로 가 공장을 정리하고 돌아온 홍이는 진주에 집을 마련하고 보연과 아이들을 그곳에서 살게 한다. 그리고 혼자서 다시 만주로 갈 생각을 하는 홍이가 평사리에 찾아와 사람들을 만난다.
홍성숙이 배설자와 함께 진주로 서희를 찾아온다. 양혼의 혼사를 거론하자 서희는 정혼한 데가 있다며 거절한다. 환국의 처 덕희의 언니가 배설자와 함께 덕희를 찾아온다. 덕희는 양현을 그 자리에 합석시키고 혼담을 거론한다. 양현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덕희가 가족들이 없으면 노골적으로 양현에게 불만을 토한다. 양현이 여의전을 졸업하기까지 1년이 남았고, 그때가 되면 자신이 합법적으로 집을 나갈 수 있으니 가족의 화목을 위해 참아 달라고 한다. 명희를 만난 양현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물어본다. 일본이 영,미에 선전포고를 하고 진주만을 기습한다.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길상이 다시 옥에 수감된다. 서의돈, 유인성, 선우신 같은 이들도 수감되지만 임명빈은 자리에 누워 운신도 못하는지라 조사만 받고 나온다. 이때 이상현이 상해에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양현에게 말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명빈의 말에 명희는 환국에게만 말해주면 된다고 한다. 5부 2권은 인실과 오가다, 그리고 양현의 얘기가 길게 이어진다. 식민지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만난 인실과 오가다의 이야기는 남과 여가 아닌 민족의 문제가 가로 놓인다. 한편 양현과 영광의 이야기는 백정의 자식 혹은 기생의 딸이라는 전근대적인 출신 문제가 근대에서도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사고속에 똬리를 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앞길이 어떠할지, 또 홍이는 만주에서 무엇을 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길상과 서희의 이야기는 이대로 끝이 날것인지? 이제 [토지]는 마지막을 향하여 가고 있다. 5부 3권으로 넘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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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세에 비해서 그냥 저냥 그럭저럭 읽고있는 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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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40년대의 상황이란 것이 얼마나 암울하고 비통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쟁으로 치닫는 상황 속, 많은 등장인물들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두 손을 불끈 쥐게 된다. 18권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이 침체된 분위기에도 홍이를 둘러싼 석이네(성환 할매), 천일네, 야무네의 일사분란한 점심 상 차리는 풍경이 있어, 모든 이야기를 상쇄하고 신바람난 그들처럼 신나고, 흥미진진하게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삶을 옥죄는 고통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씨앗만으로도 펄펄 나는 듯, 생기를 찾는 그네들의 이야기가 짧지만 강렬했다. 시간이 지나도 <토지>의 여러 이야기, 풍경 중에서 으뜸으로 각인될 듯하다. 정지에서 폴폴 나는 밥, 닭찜, 참기름 냄새를 마치 나의 기억, 추억처럼 잊지 못할 것 같다. 환국과 순철의 만남, 서희를 찾은 홍성숙과 배설자의 이야기로 시작된 <토지 18권(5부 2권)>은 홍이의 이야기와 오가다와 인실의 이야기였다. 홍이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려 조선으로 돌아온 뒤,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내내 가슴을 졸이게 하였다. 신경에서 통영으로 배경이 바뀌면서 다시금 휘와 영선, 영광의 이야기 그리고 양현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애를 태우게 되었다. 이미 영광과 양현의 슬픈 사랑이 예고되어 있는 탓에 그 전개에 절로 관심이 쏠리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또한 또 다른 비극적 사랑의 당사자인 오가다와 인실의 해후와 여전히 비극적인 상황들이 시대 상황에 맞물려 더욱 비통하게 다가왔다. 이야기를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는 배설자란 인물이 어떤 만행을 저지르면 악의 축에 설지, 우개동의 악행보다 관심이 쏠린다. 또한 만주로 떠난 상현의 이야기가 여전히 베일 속이었다. 그런데 명희를 통해 전해진 상현의 소식에 벌써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와 함께 양현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다시금 19권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진다. <토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줄곧 롤러코스트를 탄 듯 심장이 벌렁벌렁, 두근두근 뛰었다. 아직 남은 시간을 저울질하면 잠시 느긋하게 읽으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느긋함은 뒤로하고, 시대가 갖고 있는 아픔과 비통함에 절로 느린 걸음을 하게 된다. <토지>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아쉬움이 앞서다가도, 책을 펼쳐들면, 해방을 앞둔 시점에서 더욱 치열해진 삶의 단면들, 그 속의 절망과 애끓은 고통들에 마음이 절여온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고, 그간 <토지>로 인해 변화된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게 된다. <토지>를 통해 그 자체로의 삶과 생명의 소중함이 내 안에 새롭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외눈으로 바라보면 편견에 사로잡혔던 숱한 생각들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훨씬 느긋해지고 평온해 졌다는 생각에 일상의 많은 것들이 감사하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토지>가 있어, 삶의 굽이굽이, 힘겨움 속에 많은 위안이 될 듯하다. 매 권마다 느꼈던, 고통 속에 심어진 희망의 메시지를 되새기며 일어설 용기와 지혜를 품게 될 듯하다. “이 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라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320) 범석이 홍이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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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다큐멘터리 제목은 <내 어머니 박경리> 이었다. 그 제목은 나에게 ‘내 책 <토지>의 어머니 박경리’로 느껴졌다. 그녀의 삶은 딸로서도, 여자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참 쉽지 않았다. 책 <토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처럼. 대작가 박경리이기 이전에 이혼녀의 딸로, 과부로, 사상범인 사위를 둔 어머니로 살아온 그녀의 삶. 5부 1권을 읽은 뒤 한동안 책 <토지>를 만날 수 없었지만, 난 책 <토지>에 전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책 <토지>에 나오는 이들에게서 박경리 선생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5부에 들어서자, 책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1세대를 넘어 2세대로, 3세대로 그리고 또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책 <토지>를 읽으며 책의 흐름에 따라 가다보니, 나 역시 가끔은 너무 많은 세월을 산 듯한 느낌이 들어 왠지 모르게 허전하곤 했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이 어쩌면 이리도 야속하게 느껴지던지. 서희가 조준구를 내몰고 조국 땅에서 최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긴 했지만, 조국은 여전히 독립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일본의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흐르고 많은 이들이 죽고 태어나고 했건 만, 조국의 광복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책으로만 읽고 있는 나도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을 우리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세대가 이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는 더 얽히고설키었고, 그것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는 가슴의 응어리로 남겨지게 되었다. 모두들 가슴에서 그 응어리를 들어내지도, 쉬이 잊지도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비천한 출신이 응어리였고, 어떤 이에게는 놓쳐버린 권력이 응어리였으며, 어떤 이에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응어리였다.
최 참판댁 여인네 역시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윤씨부인에서 별당아씨로, 서희로 또 양현에게로. 그리고 윤씨부인이 가슴에 담겼던 응어리는 조금씩 바뀌어 가며 다음 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제 그 응어리는 서희가 아닌 양현에게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최 참판댁의 양녀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뭐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양현. 하지만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 것만은 아니었기에 그녀의 응어리는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귀하게 자란 것과 달리 비천하게 태어난 그녀. 그 괴리감은 너무나 컸고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 큰 응어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차라리 비천한 출생대로 그야말로 비천하게 성장했더라면 그녀의 응어리는 이처럼 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길 잃은 아기 새 마냥 맑고 순수했기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응어리를 풀기 시작했고,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양현, 그녀 뿐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망만 치던 상현도, 자신의 마음을 꽁꽁 싸매기만 했던 인실도, 틀 안에 자신을 가두었던 홍이도. 단단하기만 했던 자신의 응어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푼 건 가슴 속 응어리만이 아니었다. 세월이 가는 만큼 단단해지고 깊어졌던 응어리가, 다시 세월을 만나 약해지고 얕아지게 된 것처럼.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끈끈하게 서로를 묶던 독립운동의 끈 역시, 점점 더 멀어지는 조국의 광복 앞에서 풀어지게 된 것이다. 난 이미 끝을 알고 있기에 슬프지 않았지만, 이들이 그나마 간신히 유지해오던 독립운동의 끈을 풀어버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이 아팠다.
- 연필과 지우개 -
제5부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확대된 공간을 오가며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박 의사의 죽음, 양현과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실과 오가다의 재회, 길상의 관음탱화 조성, 소목장이가 된 조병수와 아버지 조준구의 처절한 죽음, 후일담형태로 채워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주요 인물간에 얽혔던 한이 한겹씩 풀어진다. 또한 해도사와 소지감 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모임, 이홍의 딸 상의의 일본인 학교생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우개동의 행패 등을 통해 일제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1945년 8월 15일, 양현은 강가에 나갔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를 서희에게 전한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189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달려온 <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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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관계가 얽혀있던, 그리고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던, 아물지 못했던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응어리를 풀어간다고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