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운 얘기를 쓰고 싶진 않다. 이 책은 그 당시 소위 지식인이 느껴야만 했다라고 하던- 현실에 대해서 쓰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주인공으로서 분명 어느정도의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한 고민은 인격적으로도 미성숙한 상태에서 알기위한 앎, 고민을 위한 고민을 패거리적으로 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정말 인간을 위해,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주인공이 한 고민은 어디 있는가? 그는 성숙하지 않은 자신을 껴안고 거대담론에 묻혀서 눈물젖은 방황만 하고 있을뿐이다. 그 결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입히고 그 결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상처에 대해서는 자기 연민으로 시종일관한다.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인간조차 사랑하지 못하면서 계급이 어쩌니 하고 민중을 구원할 양, 말만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니,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실 지금 정치인들 중에도 운동 한 번 안해본 사람 없을 텐데, 지금 와서 보수권에서 열심히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이 사람 처럼 자신들이 외치던 가치의 내면화가 되지 않아서 아닐까? 노동자에 대한 폭력이 어쩌고 하면서도 운동권 내 성폭력에 대해서는 별 말 안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람들 아닐까? 소설적으로도 ''부족한 부분이 많고'', 단지 그 시대의 하나의 인간상을 보여준다는 점, 또는 너무나 무거운 현실이 이런 인간상을 만들어 냈다 라는 어떤 현실의 폭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만 이 소설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사의원들은 그 지나간 시대에 대한 어떤 기념비적인 의미로 이 작품에 상을 준 것일까? |
|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격렬함.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후 첫장을 여는 순간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몇 번씩이나 줄을 쳐 읽고 또 읽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토록 참을 수 없게 만들었는가? 그것을 80년대를 이 땅위에서 보낸 우리의 선배들 때문이리라. 80년대. 그 악다귀같은 시대를 이십대의 푸르른 젊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으리라. 이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인 ‘나’와 나로 인해 세상에 눈뜨개 된 ‘라라’. 어떤 방식으로든 열정적 삶을 살아가는 ‘디디’가 이 글을 이루고 있는 주된 인물들이다. ‘나’는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또한 하나의 혈육인 어머니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택해 그를 버리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정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런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인 가정만큼 그가 보낸 이십대의 시대는 더 불안하고 혼돈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무엇이든 잡고 매달렸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이데아와 이데올로기였다. 구원의 의미로 매달렸던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는 어느새 ‘나’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것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 시기에 ‘라라’를 만난다. 그녀는 이념이니 사상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전형적인 대학 초년생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나’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녀는 점차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자신만의 안일한 행복추구를 거부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론을 배우고 그 이론을 민중을 위해 실천한다. 하지만 그녀는 만 22년 6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 ‘라라’에게 왜냐고 묻고 싶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그 불모의 시대에 담담하고 당당하게 살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에 있어서 자신과 사회에 대해서 수많은 벽에 부딪히고 깨졌을 것이다. 22년 6개월의 生으로서는 무겁기만 한 이 시대의 모순이 싫었으리라. ‘라라’의 죽음에 맞물려 ‘나’는 출가를 한다. 그에게서 출가의 의미란 단순한 현실 도피의 의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정리하고 싶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어떤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를 가졌다해도 그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를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시대에 살던 그로서는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라라'의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리내어 울지 않고, 눈물을 보이진 않았지만 ’라라‘의 죽음은 그에게 또 하나의 큰 상실감으로 남았으리라. 세상과 결별해서 철저하게 고뇌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지만 지금까지 그를 지배해온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부질없음을 느끼고 산을 내려온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소멸의 쓸쓸함을 되뇌이며... ‘나’가 상실감으로 불감의 나날, 무감의 나날들을 보낼 때 ‘디디’를 만난다. ‘디디’는 자유로운 여자다. 자신의 세계관으로부터, 기존의 인습으로부터 사회의 제도로부터... 그녀를 이처럼 불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만든 것은 멍에같은 시대 때문이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에 부딪히며 살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디디’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공부만 하던 소녀가 대학에 들어와서 세계의 진실을 알면서, 기성세대의 조직적인 거짓말을 깨닫게 되면서......’ 그녀는 사기를 당해왔다고 느끼고, 어떤 분노를 가지고, 증오를 가졌다. 그 분노와 증오를 폭발하게 만든 결정적 원인은 그녀가 사랑한 선배와 결혼해서 지극히 평범한 가정을 이루려는 작은 꿈을 그 시대의 또 다른 젊은이들에게 짓밟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라라’와 ‘디디’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으면서도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너무 맑아 서러운 날이 있듯 젊은날의 시간이 生에 있어 가장 큰 고통이었다는 것을 둘은 깨달은 것이다. ‘나’는 ‘라라’와 ‘디디’라는 두 여인을 통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된다. 푸르른 스물의 나날들을 울분과 좌절과 피와 눈물로 채워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글쓰기. ‘나’에게 있어 글쓰기의 의미는 혁명가의 어떤 강령보다도 치열한 정신을 요구하는 것이며, 출가 납자들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는 화두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글을 쓴다. ‘라라’와 ‘디디’의 이야기를...... 이루지 못한 그들의 사랑과 희망과 꿈에 대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나’와 ‘라라’ 그리고 ‘디디’의 공통된 특징은 반항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반항, 세상에 대한 반항, 인식에 대한 반항, 사상에 대한 반항, 인습에 대한 반항, 그리고 사랑에 대해 반항한다. 하지만 그 반항은 단지 세상에 대해 무목적적, 무의미적, 무감정적으로 대처한 반항이 아니다. 그들의 반항은 그들이 살아 숨쉬는 이유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아니 그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이유가 그들에게는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소설 여기저기에서 보여지는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이 말은 가슴속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그들에게 남았다. 얼핏보면 이 글은 전체적으로 절망과 좌절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희망이 있다. 80년대의 젊은이들이 그 악다귀 같은 시대에 살아남아 지금 이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지 않은가? 만약 80년대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모습이 있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그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을 딛고 서서 숨을 쉬며 또 다른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도 사회는 존재하고, 이데올로기는 존재한다. 하지만 점점 퇴색되어가는 우리 젊은날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 한 곳이 무겁다. 젊은날의 삶의 방식과 의미는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젊음의 본질은 변하지 말아야 하겠다.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머릿속에 그리며,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80년 선배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
| 어쩌다 이번 휴가에는 이런 책들을 계속 잡고 읽었던지... 마음이 무겁다.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냥 몇자 남겨본다. 사실 소설 기법으로 쳐도 그렇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은 아니다. 실제와 그 실제를 글로 옮기는 작업 과정까지 포함되다 보니, 나중에는 독자에게 한번 들은 얘기를 또 들으라고 반복을 강요하는 식이니... 이 책은 제목으로 벌써 할 말을 다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험난한 격정의 세월을 온몸으로 치고 받은 사람들 가운데, 그야말로 아직도 살아 남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음직한 감정일 것이다. 지금은 그런 세월이 있었나...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먼저 간 사람들에게 평안한 세상에 사는 게 미안하니까... 이젠 빛바랜 종이처럼 글은 생기를 잃고 창백한 얼굴을 드러낸다. 패배자 같은... 하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에 꼭 앓아야 했던 병이었다. 함성과 돌, 화염병이 날아드는 시위 현장, 끝없이 고뇌하며 술과 담배로 지새우던 밤들... 젊은 혈기에 열정과 광기가 합쳐져 표출되던 그 시대, 이제 마치 깊은 병의 후유증을 앓고 난 부스럼의 흔적 같다. 시대의 아픔은 절절하다. 하지만 여기 지성인의 아픔은 어쩐지 더 아픈 척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이제는 빛바랜 사진, 곱게 마른 꽃잎, 뻣뻣해진 낙엽과 같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이 모든 것이 부서져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다. 기억해주리라... 그 시대의 아픔을... |
| "미쳤군." 이 소설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내가 내뱉은 말이다. 이 글에서는 등장인물 모두 극단적으로 무엇 한가지에 빠져 광기를 내뿜는다. 사상에, 사랑에, 죽음에, 또는 광기, 그 자체에 빠져 헤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스무 살의 '나'다. '내'가 푸른 스물이라고 표현하는 이 나이는 무언가에 심취해야만 하는 나이고, 또한 무언가에 심취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이이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존 레논', '조지 해리슨'등의 작품을 들으며 컸다. 1960년 당시로선 흔하지 않던 '깨어있는 여자'를 어머니로 둔 덕택이다. 반면 아버지는 출가사문, 즉 중이다. 이 사실은 내가 국민학교 육 학년 때 우연히 아버지 사진을 보아 알게되었다. 그러나 내 생전 아버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생사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일까. 어머니는 늘 외롭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던 어머니는 내가 열 아홉이던 해, 가수 존 레논이 죽기 꼭 하루 전에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들으며 자살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열 아홉의 나이에 혼자가 되었고 '나'는 당시 외롭고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에 꽉 차있었다. 남자 나이 열 아홉.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꿈꿀 수 있는 나이. '나'는 갑자기 주어진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한다. 번화가에서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어느 까페 한 구석에서 친구와 영화도보고 도서실에서 밤새워 책도 읽는다. '나'는 도시를 싫어한다. 도시에서 '나'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먼저 배웠고, 자유보다는 분노, 사랑보다는 증오를 먼저 배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증오하는 도시를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하고 그 속에서 아둥바둥 산다. 승자에게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패자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곳, 도시. 이러한 도시에 살면서 '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무미건조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어 데모대의 선봉에 선다. 여기서 만약 주인공인 '나'가 1980년대의 이십대가 아니라 현대의 이십대였더라면 사회주의 운동 대신 연예계나 사이버 문화, 컴퓨터, 과학, 이런 쪽에 심취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1980년대는 사회.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운동권 젊은이들은 밤낮없이 데모대의 최루탄 가스에 취해 지냈고 정치와 경제는 어려웠다. 어느 시대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관심은 정치,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에 끌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열광의 대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택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에 빠지는 것이지 무엇에 빠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러다가 '나'는 라라를 만난다. 그녀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 그녀는 살아있는 자신을 미워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증오하는 그녀는 도시의 숨가쁜 생존 경쟁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누군가 죽어도, 전혀 동요치 않는 도시. 죽은 자는 죽더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그 산다는 것은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타협하는 것이란 사실을 라라는 잘 안다. '나'와 지내면서 라라는 약간의 사상적 변화를 겪는 듯 했지만, 자신의 주관이 너무 강해 결국 자살을 택한다. 내가 출가한 지 6개월만의 일이었다. 라라에게 있어 자살은 그녀를 억압하는 도시에 대한 반항이다. 라라는 '나'에게 죽음과 사상, 삶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종종 소설을 쓰라고도 권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나'의 삶을 바꾸지는 못 했다. 라라의 죽음 후 디디를 만났다. 그녀는 자유롭다. 해보고 싶은 것은 뭐든 해본다. 하기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 역시 도시를 증오한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을 통해 복수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이것이 그녀가 그녀를 억압하는 도시에 대해 복수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도시와의 대립을 견디지 못하고 미치고 만다. 디디 역시 '나'에게 소설을 쓰라는 권유를 한다. 격동의 이십대를 넘기고 삼십대에 들어선 나는 드디어 소설을 쓴다. 라라에 대한 소설이다. 라라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소설에 놀랍도록 집중하는 자신을 보고 '나'는 놀란다. 집필 최대 강령은 '인간의 삶을 위하여 이 시대의 싸움꾼이 되자!'와 '내 글은 철저하게 인간의 삶에 복무한다!' 이다. 아이러니다. 도시를 증오하던 자가 도시에서 도시의 구성원을 위한 글을 쓴다.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작중 인물들이 하나같이 도시를 증오한 것도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방식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증오와 적당한 타협을 하거나 결별을 고하게 된다. 이것이 도시에 소속된 인간의 삶이다. 다시 말해 현대인은 누구나 이 잔인하고 냉혹한 도시를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이 모든 현대인의 모순이고 운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과감히 도시를 버리고 자살을 택한 라라는 현실과 타협한 '나'에 비해 매우 용감한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 도시에 포함되는 것을 완벽히 거부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용감히 맞서지 않고 현실에서 도피해 버린 겁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도시, 다시 말해 이 사회와 이 소설의 인물들처럼 치열하게 대립해본 적이 거의 없다. 미워한 적도 거의 없다. 오히려 공부 잘해라, 착한 아이가 되어라, 라는 말에 꼬박꼬박 순응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바른 삶을 산 것일까? 소위 말하는 엘리트로서, 출세만을 바라고 도시의 부정적인 면,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삶은 외면하며 도시와 잘 타협해왔다. 또 아직 소설 속 '나'가 말하는 '푸른 스물'은 아니지만 여태 무언가에 빠져볼 생각도 해보지 않고 빠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 난 문제아일까. 난 무얼까. 그들이 비판하는 리버럴리스트? 부르주아? 과연 이러한 것 때문에 나를 부끄럽게 여겨야하는가. 부모를 잘 만나 별로 힘들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억지로라도 슬프게 여겨야하나? 나는 나날이 살아있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는 확실한 것이 없다. 그 중 확실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어떤 재앙이 없는 한, 난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란 사실이다. 푸른 스물을 겪고 삼십대가 되면 조금은 정리가 될까. 그때 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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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가 아직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면...지금의 장강명에 주목하지 않았었을 런가...생각을 하며 표백을 읽 ,다가 ...이 멋진 부분을 ㅡ어디서 먼저 접했던것만 같아 기억을 뒤지고 뒤지니 ㅡ 아.. 이 책이 나왔다 . 읽은 지는 오래여도 ㅡ최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을 꺼내 읽으며 또 기억이 환기 된 적 있었음을 ..고백하고... 신랄하나 ㅡ저간 ㅡ향수적 글 쓰기의 한 단면을 보여준 작가 장강명 작가에 오~!하는 놀라움 반 ㅡ역시 ㅡ하는 탄식 반 ㅡ 이 두 책은 시대만 다르고 인물 만 좀 달라 졌다뿐 ㅡ 비틀즈 코드 ㅡ혹은 다빈치 (?!)코드 만큼이나 ..서로 닮은 구석 이 있다는 걸 ...나만 느끼는 건가... 작가들로는 ㅡ서로 흥 !할지도 모를 일 ... 1992년 ㅡ내 첫 사랑같은 책 ㅡ아니었나 ㅡ지독하게 아프고 쓰린 (첫 사랑은 해봤니?) 그러면서 독한 담배같은 구석이 있는 ... 살아 남은 자의 슬픔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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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중해방운동은 그리 긴 역사를 갖지 못한다. 특히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의 해방운동은 정권타도를 외치던 4.19를 시작으로 불을 지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군사구데타로 정권을 잡은 "29만원 밖에 없는데......"의 주인공은 총칼을 앞세우고 광주하늘을 뒤덮어 5.18민주화운동의 신호탄을 날렸다. 민주화를 부르짓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광주는 얼룩졌고 그들의 함성은 조용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동지들의 죽음앞에서 오열했던 살아남은 자들은 그 슬픔을 가슴에 묻은채 거의 30년 세월을 통한의 눈물로 고통받고 있다. 동지들은 간데 없지만 우리들은 남았다. 이 책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지난 92년 제1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품이다. 이 시기는 전대협이 서서히 사라지고 전대협이 등장하면서 학생운동의 변질이 있던 시기다. 사상투쟁과 노선갈등으로 분열위기에 놓인 학생운동은 구심점을 잃어가고 점점 외면하는 시선속에서 그 마지막 오기와 열정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책의 줄거리는 바로 독재타도를 외치며 정권야욕을 무너뜨리려했던 시민들을 포함해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일궈낸 87년 6월 항쟁을 다루고 있다. 사랑했던 동지들은 떠났지만 비겁한 변명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우리들은 살아남았다. 주인공 나는 존 레논이 지구를 떠나고 광주의 불쌍한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던 80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자살한 어머니를 회상한다. 어머니는 26평짜리 아파트와 얼마의 돈을 남겨놓고 신이 먼저 부른다며 그렇게 홀로 떠나났다. 주인공인 나는 어머니를 친구처럼 애인처럼 그리고 마돈나와 창녀로 표현한다. 여기서 창녀의 의미는 몸둘곳을 모르는 청년의 안식처쯤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라는 인물의 길찾기가 제대로 형상화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을 추구한다. 그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학생운동, 그리고 졸업, 노동운동, 그리고 해고, 그리고 감옥, 출옥 후 출판문화운동, 그리고 저술노동자생활. 그리고 수배. 그리고 종교운동...... 이제 더 이상 어디로 갈 것인가? 결국 '밥'의 문제가 제기된다.(29쪽)
이야기속에는 '나'이외에 '라라'와 '디디'라는 두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존재다. 라라는 6.10항쟁을 전후로 해방과 민주화운동의 거센 변화에 못이겨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나로 인해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라라는 결국 나로 인해 고통을 안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는 떠났지만 살아남은 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한다. 살아남은자로 룸팬의 자식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 소외된자로 전락하는 '나' 나는 그녀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오버랩하면서 큰 상실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디디를 만난다. 학교를 다니며 남자와의 성관계를 자유의 특권인양 생각하는 자유분방한 그녀를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치유할 곳을 찾는다. 바로 안식처에 날아드는 날개잃은 새들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역사속에 묻혀지고 있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열의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 90년대 초 전대협이 한총련으로 바뀌면서 학생운동이 사상화는 더욱 집중됐지만 이탈자들과 노선변화는 그 수십새 수백배에 이르게 된다.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등록금투쟁으로 바뀌게 되고 지금은 이 역시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운동권이니 비운동권이니 학생회의 노선을 정해놓고 그들은 행동한다. 지금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회이슈, 그리고 광우병과 같은 초미의 관심사에 매달리고 있다. 이 역시 정권퇴진과 건강권 사수, 그리고 국민으로서의 권리 보장 등의 구호가 등장한다. 대통령 직선제를 이룬 국민들의 함성이 어느덧 22년이란 세월의 메아리로 다가온다. 거리로 뛰쳐나가 독재만은 더이상 않된다던 국민들은 지금 그들의 생업을 이어가며 만족과 개탄을 거듭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남아 슬픔의 역사속 소용돌이를 견디고 있지만 나머지 죽은자들은 그들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두운 땅속에서 생각할 것이다. 이 책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들의 민주화와 해방의 의식이 사그라지지 않았는지 점검해볼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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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여러가지 나 삶의 일부 때문이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그에 관한 기사를 찾아본다. 그 중에 가슴아픈 부분이 들어온다. 박일문씨에게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가져다 준 책이라는...그중의 내용이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을 표절하였다는 그런류의 글도 있다. 안타깝다... 이러한 글을 볼 때면... 나는 잘 모르지만..가끔씩 이렇게 책들이 비평을 받을 때.. 그것마저도 감수하여하 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모두... 살아온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동시에 다 똑같이 충족하리오... 난..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을 겨우 두권 밖에 보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나에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소설이라는 것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 그리고 삶에의 귀의... 난... 항상.. 뭐든지 이 소설의 주인공 나 처럼.. 선택해서 받아들인다. 난 이 소설에서 라라와 디디의 삶을 내 삶과도 비교해 본다.
내가 바라는 나.. 세상이 바라는 나.. 내게 주어진 환경..이 어쩔 수 없는 환경...그리고 그들과 다르게 내 삶속에서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바라는 나..... 난... 그속에서 가끔씩 아주 많은 방황을 하고 있다. 하지만 결코 죽음으로 그것을 귀결짓지는 않으리라. 더러는 냉소로 그것을 귀결 짓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그 무엇들... 우리의 이론을.. 한 알의 씨처럼 땅에 썩혀.. 행동으로 나오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 386 세대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우리 언니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인생의 황금기가 누구나 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 길을 걷고 있는 그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의 상실의 의미, 상실한 것들.. 그것과 너무도 대조되는 .. 그들이 상실한 그 무언가... 진정 그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결국.. 세계라는 세상은 바위이고.. 우리는 하나의 계란 일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하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세상이란 조류에 휩쓸려 살아가는 한 사람인가.. 역사에 한 점 남지도 못하는 인생..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언젠가 우리언니의 친구인 숙희 언니가 하던 말... 역사에 하나의 점이라도 되고 싶다던 그 언니 생각이 난다. 그 언니도 라라처럼 노동자로 뛰어들었던 적도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모두 그 때 만큼은.. 세상의 어떠한 이념보다도 이 땅의 민중으로 다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그 마음만이 존재했고.. 정말 그것을 위해 투쟁했던 것 같다. 씁쓸한 책이기도 하다. 내가 386세대였다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를 일이다. 난... 조용히 내 삶을 조명해 본다. 세상과 타협할 것도 안할 것도 없는 지금의 내 인생.. 푸르른... 20대..... [인상깊은구절] 라라와 결혼을 하자. 라라는 나와 결혼할 권리가 있다. 라라에게도 행복할 권리는 있다. 우린 지금까지 눈앞에 보이는 행복마저 팽개쳐왔다. 나는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라라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생활적인 모든 것들을, 일상적인 모든 것들을 소시민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폄하하고... 라라와 나는 우리들의 손을 잡을 수 있는 행복마저, 손 안에 굴러 들어오는 기쁨마져 내던져 왔다.. ---p.258 이젠 모든 것이 홀가분하다. 나는 나를 구속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학교도 그만두었다. 라라의 기억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디디와도 이떤 식으로든 이별인 것이다. 나는 이제 자현이 말했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 나가면 되는 것이다. 정보간 나라를 버리는 왕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작가의 길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글쓰는 사람의 고통과 고독을 알 것인가. 이제 나를 구속할 수있는 것은 오로지 이 현실의 폭력, 억압, 거짓화해, 가짜 욕망, 온갖 허위.. 그런 것 밖엔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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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속에는 '나'이외에 '라라'와 '디디'라는 두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존재다. 라라는 6.10항쟁을 전후로 해방과 민주화운동의 거센 변화에 못이겨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나로 인해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라라는 결국 나로 인해 고통을 안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는 떠났지만 살아남은 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한다. 살아남은자로 룸팬의 자식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 소외된자로 전락하는 '나' 나는 그녀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오버랩하면서 큰 상실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디디를 만난다. 학교를 다니며 남자와의 성관계를 자유의 특권인양 생각하는 자유분방한 그녀를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치유할 곳을 찾는다. 바로 안식처에 날아드는 날개잃은 새들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역사속에 묻혀지고 있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열의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 90년대 초 전대협이 한총련으로 바뀌면서 학생운동이 사상화는 더욱 집중됐지만 이탈자들과 노선변화는 그 수십새 수백배에 이르게 된다.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등록금투쟁으로 바뀌게 되고 지금은 이 역시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운동권이니 비운동권이니 학생회의 노선을 정해놓고 그들은 행동한다. 지금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회이슈, 그리고 광우병과 같은 초미의 관심사에 매달리고 있다. 이 역시 정권퇴진과 건강권 사수, 그리고 국민으로서의 권리 보장 등의 구호가 등장한다. 대통령 직선제를 이룬 국민들의 함성이 어느덧 22년이란 세월의 메아리로 다가온다. 거리로 뛰쳐나가 독재만은 더이상 않된다던 국민들은 지금 그들의 생업을 이어가며 만족과 개탄을 거듭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남아 슬픔의 역사속 소용돌이를 견디고 있지만 나머지 죽은자들은 그들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두운 땅속에서 생각할 것이다. |
| 이 책은 줄거리와 인물의 연관 관계를 뚜렷히 설명해 놓지 않고 흐트려져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소설속의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핏줄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아주 관망하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고 라라와 디디에 대한 서술에서도 정확한 연계없이 나타나져 있다. 어떻게 보면 소설로서는 정형의 틀속을 아주 벗어난 책이지만 읽는이로 하여금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어느 한 곳에 깊이 파고들어 집착해 있는 개성 강한 인물이 아니라 너무나도 무념무상의 자기가 알고자 하는 것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는 평범한(?)인물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주인공이 출가를 하는 면에서도 어느 고도에 이르기를 아님 자아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보단 자신의 일면의 느끼는 감정에만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독특한 형식이면서 읽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다는 묘한 마력이 있는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