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책을 읽은지가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불행히도 난 이문열의 책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집어들었고, 그 이후 한번도 이문열의 책을 집어들지 않았다. 내가 이책을 읽던 대학시절... 이책은 국문학과에서 교재로도 쓰일정도로 유명했다. 역시 읽어보니 주제에 대한 접근이 놀라웠다. 하지만 점점 힘이 빠지고 흐지부지 해지는것 까지는 이해할수 있었다. 흐지부지 해지지 않을만큼 통찰력있기엔 그때 이문열의 나이는 너무 젊었고, 감히 파헤지기에 너무 난해한 주제였고, 두려움이 들 정도였으니까...끝이 그토록 흐지부지 해서 실망스러운건 정말 용서가 될만큼 신선했다. 하지만 얼마후 니코스카잔차스키의 책을 접하게 되면서 난 분개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읽어보라. 어쩌면 그리도 유사한 내용인지? 그렇게 조잡하게 흉내낼수 있는지? 카잔차스키의 평생에 걸친 영혼의 투쟁이 녹아내린, 그렇기에 흐지부지 같은 말은 갖다 댈수 없을정도로 치밀한 구성의 그 책에 비하면 (아니 비할수 조차 없지만...) 얼마나 조잡한 책인가 말이다. 남의 책을 읽어보고 잠시 상상력을 펼쳐 흉내만 낸 책이라고 밖에 볼수 없었다. 작가 자신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말이다. 그당시 학교 도서관에서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책을 많이 빌려다 보았지만, 지금 검색해보니 모두 절판되어 버렸으니 누가 보기엔 참으로 다행한 일일지 모른다. 아직도 이렇게 인기있는 책이니 말이다. 이 책이 신선하다고 느껴지신다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구해서 한번 읽어보시기를.... |
| 인간에게는 종교에 대한 열망이 있다. 나약한 우리는 절대자를 찾아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고자 한다. 이런 인간의 본성에 따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이 책은 이상적인 종교를 찾는 젊은이를 그린 이야기이다. 주인공 민요섭은 기존의 종교계에서 모순을 느끼고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찾아 헤맨다. 그가 꿈꾸는 완전무결한 '신'을 찾아 헤매는 과정들이 나를 '신'과 '종교'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사람의 아들'은 종교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시대의 진정한 '구원'이나 '행복'을 뿌리깊이 파헤치고 있다. 제목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우리 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아들' 혹은 '신의 아들'이란 예수이다. 예수는 약혼자가 있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뼈와 살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나 님은 여기에 또 하나의 신이 내려보낸 진정한 '사람의 아들'로서 아하스 페르츠를 등장시킨다. 이 소설은 아하스 페르츠의 신학적 방황과 궤를 같이하는 민요섭과 그를 따르는 조동팔이 등장하여 이야기 되어진다. 소설은 살해당한 민요섭의 행적을 쫒는 남경사의 눈으로 진행된다. 일종의 액자 소설로서 민요섭이 남긴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가 담긴 노트의 내용이 중간 중간 나온다. 소설은 우리 종교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지상의 구원'과 '천상의 구원'을 논하고 있다. 당장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병과 고통에 신음하며 이유없는 죄과를 치르는 이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천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뿐이다. |
|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읽는 내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내 머리 속에 남은 화두다. 솔직히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신들을 믿는 종교적인 인간도 아니다. 하나님의 교리를 자세히 알 수 없는 내게 소설 속에서 풀어놓는 하나님과 교회의 교리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수많은 신들의 나열은 작가가 아무리 각주를 통해 설명을 하려 애쓴 흔적이 보일지라도 결코 이해를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위에 언급했듯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질문은 신이란 존재에 대한 어떤 회의라고 할까? 그것이 소설 속의 인물 민요섭과 조동팔이 가진 생각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은 사실이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을 지닌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민요섭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풀기 위해 애쓰는 남경사지만, 그는 민요섭의 행적을 쫓아 단순히 서술하는 서술자의 입장에만 서 있다. 소설 속의 소설, 민요섭이 노트에 적어 내려가던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에 서 있다. 아하스 페르츠는 내가 내린 결론으로 보자면 민요섭이다. 그것이 오독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느낌은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을 결부시키고 있다. 아하스 페르츠가 그의 나라와 그의 신을 부정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며 만난 낯선 신들, 그리고 또다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종교적인 회의들은 결국 민요섭이 신학대학을 그만두고 자신의 종교에 회의를 품으면서 떠돌며 행한 것들의 모습과 닮아있음은 분명하다. 민요섭이 자신의 재산을 탕진해가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베푼 것들은 결국 아하스 페르츠가 예수와 나눈 대화들 속에서 강조하던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족해지는 정신이 아니라, 그들의 지금 배고픔과 피곤함을 달래 줄 빵 한 조각과 편안함의 기적이다’라는 뜻의 주장들과 닮아 있다. 민요섭과 조동팔이 부랑자들을 돌봐주고 그들에게 억지로 주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펼쳤던 교리는 바로 예수가 말하던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아하스 페르츠가 주장하던 새로운 모습의 신의 교리였다. 그 두 사람이 만들었던 신은 새로운 성서 ’쿠아란타리아서’에 등장한다.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들이 만든 신의 모습은 진정한 신이라면 질병과 가난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상에서의 죄를 갚는 것이며, 그들이 그 죄의 값을 치렀을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대신 그들에게 실질적인 현실 세계에서 이룰 수 있는 구원, 즉 일신의 아픔을 달래 줄 수 있는 약과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줄 수 있는 빵과 포도주 조금이 그들에게는 구원을 주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쿠아란타리아서’가 설명하는 신의 모습이 내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게 구술되었고,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이미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예상은 했었지만, 조동팔이 민요섭을 살해 한 범인으로 밝혀지는 순간들의 미흡함과 민요섭의 예수로의 회귀나 자살을 택하는 조동팔의 행동 또한 아쉬움이 남는다. |
| 학창시절 윤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권해준 책중의 하나였다. 형식은 액자소설을 띄고 있다..기독교에 대한~~~ 엄밀히 말하자면..어떠한 사람들에게는 맹목적일 수 밖에 없는 신에 대해...그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신이 만든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내지는 아픔의 것들을 그들은 꼭 겪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아하스페르츠나..민요섭은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으나 한 인물을 통해..기독교의 이면을 보게된다..자신이 그동안 맹목적으로 알았던..신에 대한 실망으로 그들은 진정한 신을 찾으려고 한다.. 결국 회귀의 길을 걸어 그들은 다시 그들이 전에 알았던 신에게로 돌아간다.. |
| 저렇게 하면 만족스러운 제목이 될까. 이 소설 『사람의 아들』은 '신'에 대해 너무도 여러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으려는 목적으로라도 모두들 교회에는 한번쯤 가 본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 교회를 가보지 않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려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성경을 수 차례 읽어보았다. 그것을 읽으며 많은 물음들이 생겼지만 그것을 한번도 명쾌히 해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익히 들어온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존재는 무조건 적인 사랑과 헌신을 중요시하는 신이었다. 그리고 구구히 들어온 10계명이라는 것도 그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런 신의 이미지를 갖고 내가 읽은 성경에서는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기존의 내 생각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가끔씩 독단적이고 이기적이었다. 몇 번이나 궁금증이 일었는지 모른다. 『사람의 아들』, 이 작품은 민요섭의 신에 대한 생각을 그리고 있다. 그의 죽음을 쫓는 형사의 모습은 그저 그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은 남경사가 찾아내는 민요섭의 행적들과 그의 노트들을 보여줌으로써 민요섭이라는 사람이 지녔던 기존 기독교의 윤리에 반하는 생각들과 질문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기존에 내가 가졌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소설을 다 읽은 후에 남은 것은 다시 질문들이었지만... 이 작품은 액자소설이다. 그러나 그 형태가 단순하지 않다. 작가는 남경사가 찾아내는 민요섭과 조동팔의 이야기를 액자로 보여주며 그 안에서 또 민요섭의 노트 속에 보여지는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를 또 한번 액자로 그려낸다. 액자 안에 또 한번 액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해본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가 살던 시대의 실재 인물이다. 그는 예수와 같은 시대에서 몇 번이나 예수와 질답을 나눴음에도 그가 가진 물음들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지금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보는 아하스 페르츠는 정녕 예수를 유혹하는 사탄의 모습일까. 내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인지 나에게 있어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는 수긍이 가는 또 하나의 이야기였다. 그는 사탄의 모습이 아니었다. 굳이 뭐라고 칭하자면 '신을 묻는 자' 라고나 할까. 문득 정찬의 『세상의 저녁』이 생각났다. 그 소설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접하는 종교적 색채를 띈 소설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달랐다. 정찬의 『세상의 저녁』에서의 황인후가 신과 함께 하는 인물이었다면 <사람의 아들="">의 민요섭은 신을 마주하는 인물이랄까. 소설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맨 마지막 부분이었다. 남경사가 조동팔에게서 민요섭을 죽인 이유를 들을 때 조동팔은 그가 기존의 신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 민요섭은 그렇게 마주하던 신에게 그렇게 쉽게 돌아갔을까? 작가의 말에서는 개정판을 내면서 그 점을 보충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직 그 부분은 명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부분이다.사람의> |
| 사람의 아들을 접하게 된것은 나에게 뜻깊은 일이었다. 나의 책고르는 솜씨는 어떻게 보면 인스턴트 식품에 맛들려 편식하는 어린애같이 별다른 사고가 필요없으며 껍데기만 화려한 것만 골랐었다. 본인의 그러한 악습관을 무의식중에 고치고 싶었는지 얼마간의 반성후 학교장서실에 가서 평소에 제목을 자주 접할수 있고 이문열작가의 평역삼국지,수호지를 읽은터라 자연스럽게 손을 뻗게 되었다. 이 작픔을 읽으며 초반에는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집안도 천주교 집안에다 나역시 유년기에 성당에 매일가다시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작품 초반에 나오는 믿기위한 신이란 말이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종교라는 주제를 다룬책을 접하지 못해서인지 신선함도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사춘기를 거치고 머리가 굵어지며 지금 생각하면 수박 겉껍질보다 얇은 지식가지고 지적오만에 빠져 지난날의 천주교 생활을 부정하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종교에 대해 파해쳐가는 아하스페르츠의 기행,물음에 흥분했다. 나 자신이 사춘기시절 종교에 대한 반항심에 던졌던 질문과 현재까지 이렇다할 성과없는 사색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보이는 듯도 했다. 이 책의 초기부분을 보면 수많은 종교와 그에 따른 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있지만 책을 다읽어보며 내가 느낀점은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 책이라는 것이다. 후반부분의 민요섭과 조동팔이 나름대로 정의한(민요섭은 결국 기독교로 다시 돌아가지만) 신도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느낀점은 글의 논리성과 사건진행의 속도나 현대의 민요섭,조동팔과 과거의 아하스페르츠의 기행이 잘 조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문열작가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보면 자신의 사상을 자칫하면 잃기 쉽다는 점이다. |
|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기독교에 그리 심취한 적이 없었던 나로선 별 흥미를 못 느꼈다. 하품하면서 겨우 겨우 책장을 넘겼다. 5년만에 다시 읽어도, 그리 충격적이진 않다. 왜냐면, 여러 철학 사상을 접하면서 서양 기독교 논리가 별 볼일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니체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더 그리 된 듯. 다시 이 소설을 읽게 되리라 여겼던 걸까. 기독교 논리를 자근자근 잘 씹어 부셔 놔서 그랬나. 이문열의 그 많은 소설책 중에 <사람의 아들="">만 책꽂이에 있었다. 우연치고는 유별나다. 인간에게 신은 뭘까? 신과 인간의 관계는? 그 관계 속에 인간 존재의 의미는? 이런 물음은 정말 배부른 소리다. 생계를 위해 돈 벌기 바쁘고, 가끔 시간이 나면 휴가 즐기기 바쁜 우리 현대인들에겐. 솔직히 교회에 가는 이유는 뭔가. 신의 말씀, 웃기지 마쇼. 빵 조각 주니까, 교회에 가서 주기도문 외우고 찬송가 불렀지. 신의 말씀이 우리를 행복하게 교회에 간 건 아니외다. 신의 은총, 농담 마쇼. 교회에 가서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 둬야 장사가 잘 되니까 아멘 했지. 신의 은총을 받자고 예배 보는 건 아니외다. 사람은 돈, 명예,섹스, 자동차, 컴퓨터, 게임, 집 따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귀하면서도 숭고한 그 무엇을 원하며 그것을 추구한다. 요즈음 그런 사람은 많이 줄었지만, 어쨌든 물질만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게 있다. 사랑, 우정, 정신적 교감. 이것만으로도 인간은 만족치 않는다. 그 외 또 무엇을 추구한다. 그것은 진리 혹은 신이다.사람의> |
| 이 작품은 민요섭과 조동팔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기독교의 현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추적하고 있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서구 중세사회가 합리성과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근대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더 이상 기독교적 세계질서는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민요섭과 조동팔은 야훼를 부정했던 아하스페르츠라는 인물을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출하려고 시도하지만 끝내 좌절하고 만다. 물론 [사람의 아들]은 겉으로는 기독교적 질서의 의미를 묻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비참과 고통에 휩싸인 모순된 현대적인 삶의 근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려는 속셈이 놓여 있는 작품이다. 결국 신을 부정해야만 할 만큼 악화된 우리 시대의 삶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 아래 쓰여져 읽는 이로 하여금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 작품의 배경은 물론 1970년대 한국이지만 인간의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어 있지 못한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
| 고등학교때부터 교회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항상 그들의 신앙을 의심하곤 했다. 그 친구들에게 있어 교회란 신앙의 장소인지 사교의 장소인지 기독교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나였지만 유난히도 그들 교인과 교리에 대해서만은 독선적인 말을 내뱉곤 하였다. 나는 맹목적인 신에게의 믿음보다는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과 논리를 더욱 중요시 했을지도 모른다. 맹인인 어느 소녀가 몇년간의 기도 끝에 눈을 뜨게 되었다. 혹은 불치의 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예수의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완치가 되었다는 등의 교회 홍보책자에 실린 사례들, 낯선 교회아줌마의 끈질기다 못해 일요일 아침잠을 깨우려 드는 괴롭기까지 한 전도활동..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난 그들 신의 교리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넉넉한이해심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릴적 멋도 모르고 친구따라 한두 달 교회에 다닌것 외엔 성경을 들여다 본적도 없는 나로서는 교리에 대해 함부로 지껄인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지고 독단적으로 보일런지는 상상이 된다. 한권의 책을 근 3주간에 걸쳐 읽었다. 무슨 신중함이나 대단한 관심으로 꼼꼼하게 읽은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며 받는 혼란함이 자주 책을 놓게 만들었다. 반대로 한번에 책을 읽지 못한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연결하지 못하고 더욱 이해가 어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강 페이지만 넘긴 책을 두고 소위 독후감을 쓴다는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또한 책의 주제가 위압감을 지닌 것이라 함부로 말하기 어렵지만 말그대로 단상에 불과함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라며 엉성한 비판을 너그러히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민요섭이란 인물의 살인사건을 담당한 남경사의 사건의 추적 속에 아하스 페르츠를 주인공으로 하는 민요섭의 소설이 또 하나의 이야기로 담겨 있는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민요섭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서 기독교의 원리와 질서체계에 회의하고 부정하는 반기독교적인 모습을 아하스페르츠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태초에 야훼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에게 낙원을 내려주셨을 때 선악과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힘과 지혜도 주지 않고 원죄로 단죄하여 훗날 이브의 후손에까지 고통의 나날로써 대가를 치르게 하셨을까. 인간에게 악이 있다면 그것은 천지를 창조한 야훼의 책임이며 야훼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악이라면 전지전능의 신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의 신은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방관한채로 언제일지 모르는 훗날의 막연한 구원만을 기다리라 하는 것인가. 또한 헐벗고 굶주린 인간으로서 지키기 어려운 구원의 조건 - 하늘에 재물을 쌓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의 - 을 갖춘 사람만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야훼의 말씀은 또 무엇인가. 민요섭은 후세 기독교인에 의해 사탄의 아들로 알려진 아하스 페르츠를 인간의 정의와 지혜로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인간세상을 구하려는 진정한 '사람의아들'로서 그려내고 있으며,이에 맞서 야훼의 아들인 예수를 독선의 상징으로 하여 거짓 '사람의 아들'로 부정한다. 이는 죄많은 인간을 말씀으로써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고 말씀으로서만 죄업으로부터 회개시키기 위한 예수를 일곱번 만나 공박하는 부분에서 잘나타나고있다. 아하스 페르츠와 예수는 대립의 인물이다. 아하스 페르츠가 진정한 사람의 아들로서 지혜와 정의를 추구하며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부정하는 인물이라면 예수는 신의 아들이다. 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며 순종과 숭배를 요구한다. 민요섭은 신을 부정하고 대립하는 아하스페르츠에 만족하지 않고 급기야는 새로운 신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타향에서의 방황을 끝낸 아하스 페르츠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쿠아란타리아 광야에서 만난 <위대한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위대한 지혜="">는 야훼와 대립적인 위치에 서지 않고 선과 지혜의 조화를 이루려한다. 후에 민요섭과 조동팔의 합작품인 '쿠아란타리아서'에서 기존의 천지창조설을 수정하고 야훼의 일방적인 인간의 지배에 맞서 애초에 인간을 만들었던 야훼의 선과 <위대한 지혜="">의 지혜를 합일하여 빼앗겼던 인간이 자유를 찾아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신의 창조에도 불구하고 민요섭은 끝내 기독교로의 회귀를 결심하게 된다. 그토록 신랄하게 야훼와 예수의 말씀에 회의를 느끼고 부정하며 새로운 질서체계를 이룩하기에 이른 민요섭의 갑작스런 신으로의 회귀는 책을 읽으며 때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내게나 민요섭의 이론이 행동지침이 되어 실질적으로 쿠아란타리아서의 교리를 실천하던 조동팔에게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조동팔의 일탈적이고 과격한 행동의 지탱이 되어주던 새로운 신의 창조자인 민요섭의 흔들림은 조동팔의 정신적인 바탕의 존립마저 불안하게 하였고 끝내는 민요섭을 살해하고만다. 작가는 개정 증보판에서 민요섭의 회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였다고는 하나 혼자의 힘만으로 <사람의 아들="">을 단순히 종교를 주제로 한 소설로만 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책이 쓰여진 197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사회적인 입장에서 본 기독교의 원리에 대한 부정은 사회에 편재해 있는 온갖 부정과 불평등에 대한 특권층의 합리화를 부정하기 위함이다.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으려 한 민요섭과 조동팔의 시도가 끝내는 실패한 까닭도 사회의 모순에 있다고 한다. 사회의 잘못에 무감각한 인간들과 어쩔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의 인식속에서 민요섭은 지치게 되고 조동팔의 의지도 꺾이고 만것이다. 이들이 세운 신은 인간들 스스로의 자체적인 구원을 희망한다. 신의 힘으로 인간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 인간의 정의를 통한 용서와 구원,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의도는 기독교의 모순을 통해 사회를 성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두 젊은이의 시도를 실패하게 하는 원인으로 사회의 모순과 무감각을 들고 있다. 여전히 선과 지혜의 두 아들과 하나로 조화되고 합일된 두 신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동팔처럼 민요섭의 기존 종교의 질서체계를 부정하는 교리에 감화를 받은나 역시 '징벌 없는 악과 보상없는 선'을 떨쳐버려야 하는건지.. 신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간을 심판하는 존재로 남겨둠이 옳은 건지..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모든 신은 인간의 고통이 만들어 낸 위안과 숭배의 대상일 뿐이라는 무신론적인 생각이 더욱 확실해 지는 것 같기도 하며 역시 인간은 신에 예속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람의>위대한>위대한>위대한> |
| 종교문제란 민감한 부분이다. 사람의 아들에 드러난 종교는 신의 존재와 그와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모두가 바라던 신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한다. 평범한 경찰인 남경사의 사건 추적과 살해당안 민요섭이 쓴 소설이 함께있는 구조이다. 소설 속의 소설인 아하츠 페르츠에 관한 부분을 보며 처음에는 아하츠 페르츠를 통해 민요섭 자신의 삶을 비추는 것이 아닌가 생각 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 믿던 예수의 세계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그는 이야기의 초점을 모두가 사탄으로 여기는 아하츠 페르츠의 삶에 맞췄다.결국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 했던 부분에서 새로운 생각을 가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종교라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종교와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