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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판 연암집 하권은 1797년 정조의 어명으로 지은 서이방익사(제6권), 중년에 지은 소품 산문을 모은 종북소선(제7권), 그리고 한문소설로 간주되는 초기 전 9편을 묶은 방경각외전(제8권),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유고를 편집해 추가한 고반당비장(제9권)과 엄화계수일이 (제10권)로 구성된다. 연암집 제6권 별집 '서이방익사'는 정조 21년(1797) 7월 충청도 면천 군수로 부임한 후 정조의 어명에 따라 제주 사람 이방익의 해외 표류기를 쓴 것이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은 그 서문이 박지원의 글이 아니라 선귤당 이덕무의 글이라는 것이 오늘날 정설이다. '종북'은 종각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이덕무가 살던 인사동 집을 의미한다. 종북소선이란 책 제목은 '이덕무가 엮은 작은 선집'이라는 뜻이다. 종북소선의 자서는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실수로 연암집에 수록된 것인데 '종북소선'이란 권명에 속하는 글들은 원래 공작관집에 실려야 한다. 1768년 백탑 근처로 이사를 한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자주 어울리게 되는데, 연암집 종북소선에 실린 글들은 대체로 이들과 관계가 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연암은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의 우두머리다. 정조 5년 연암은 박제가의 북학의에 서문을 써주면서 북학파의 기본 주장을 펼친다. 참고로 박제가는 정조 2년(1778) 사은겸진주사의 일원으로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지었고, 연암은 정조 4년(1780) 5월부터 10월까지 진하겸 사은별사의 일원으로 북경과 열하에 다녀온 뒤 열하일기를 지었다. 연암은 <북학의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예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서 생긴 폐단이다."(하권 66쪽)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은 9편의 한문소설이다.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이 실려있고, 내용이 유실된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은 제목만 남아 있다. 연암의 한문소설들은 대부분 박지원의 삶과 주변인물에 토대를 둔 자전적 소설이 대부분이다. 특히 민옹전과 김신선전에서 연암이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에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유머와 해학이 녹아든 이야기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연암의 심사를 읽어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애정어린 각별한 관심과 더불어 속물적인 인간관계나 염량세태에 대한 통철한 풍자가 돋보이기도 한다.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귀지.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다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로 사귀는 것일세. 위로 천고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리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라네."(하권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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