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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그려져 있는 이 책은 내게 일본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고 깔끔하면서도 정갈한 풍경이었다. 그런 풍경의 일본의 한 어촌이 이 작품이 전개되는 장소이다.
인형을 등에 업은 다섯 살배기 요꼬와 등교거부 중인 고등학생 소키치는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나고 함께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와 바다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한순간 새빨갛게 물들이는 해님이 바다라는 이불을 덮고 자러 들어가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게 얘기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시작된다.
등교거부라는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소키치는 어찌 보면 청소년기의 반항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언뜻 보면 그렇다. 하지만 소키치를 학교에 나오게 하려고 찾아다니는 담임선생님을 피하는 소키치, 토산물 가게를 하는 누나와의 갈등, 그럭저럭 혼자 사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도 하는 소키치, 도시락 집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또 밤에는 음악을 들으러 술집에 가는 소키치를 따라다니다 보면, 소키치가 단순히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학교를 안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사춘기에 겪을 수 있는 반항기는 기성세대 사회와 학교가 만들어 놓은 교육 체제, 그 체제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라는 획일화된 존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부모 세대와의 갈등 등 여러 가지가 섞여들고 있지만, 소키치의 문제는 좀 다른 양상을 띤다.
뼛속까지 어부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어부 일을 그만 두고 어울리지도 않는 민박집을 하면서 대기업이 송전탑 세우는 일을 돕는 일을 한 것, 그리고 그 일을 소키치가 이해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버린 아버지의 일이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시기와 맞물렸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 그 고장이 겪고 있는 어려움, 그 안에서 사는 많은 또 다른 청년들, 자신 같은, 또는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서 소키치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섬에서, 바닷가에서 어부라는 1차 산업 직종이 사양길에 들어서고 농촌이나 어촌을 버리고 도시로 나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끔 배를 타는 소키치는 왜 아버지가 어부라는 직업을 버렸을까. 뼛속까지 어부라고 느낀 아버지, 그 자신도 그 피를 물려받은 것처럼 느끼는 소키치에겐 그 의문을 푸는 것이 자신을 찾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게 될 것이었다.
‘집안 대대로 해오던 고기잡이를 포기하면서까지 아버지가 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인지 소키치는 좀 더 알고 싶었다. 안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일 뿐이다. 자신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른 채 살아간다면 수동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소키치의 여정을 따라가며 어부 또는 자연과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1차 산업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 그리움과 추억이 함께 살아난다. 산업과 자본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거대 기업들,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결국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정치권, 그에 희생당하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성까지도 씁쓸한 대비를 이루며 작가의 섬세한 필치 아래 그려져 있다. 무작정 반항하는 청소년, 마음엔 안 들지만 벗어날 용기가 없어 불평을 일삼으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불행한 과거를 겪었지만 새로 태어나려고 노력하는 소녀 등 그들의 고민과 휘청거리는 태도 그리고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 모두 자연스럽고 간결한 문체로 표현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의 바다가 만들어내는 세차고 아름다운 소용돌이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소키치의 아버지 그리고 그가 한 일 모두를 짐작하고 알게 되는 소키치는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깨닫고 그를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개발도 최소의 자연파괴를 염두에 두고 하는 애정을 담은 건강한 자연관이 그대로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절제되고 간결한 대화 속에서도 서로의 진심이 녹아드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소통과 이해가 아닐까. 개발과 자본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라는 현대의 평범하지만 중요한 주제를 청소년의 입장에서, 청소년의 입을 통해 다룬 작품이었다.
히데요와 소키치의 잔잔하면서도 설익은 우정 같은 사랑의 싹틈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눈부셔, 나한테는.” 이런 말이 최고의 사랑 고백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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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나이가 되었다.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기에 이제 타인이 된 청소년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때, 청소년에 속해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그 단어는 어딘가 어색했다. 타인, 그것도 소위 기성세대에 의해 지칭되는 소속에 대한 단어로 청소년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전적 의미는 소년과 청년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하니 여전히 그것이 규정짓는 시기에 속해 있지만 그 단어가 주는 상반된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제 내게 청소년이라는 소속감은 그리움의 대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청소년이라는 단어의 상반된 어감이 무엇인고? 하니, 쉽게 흥분하고 좌절했던 사춘기 시절의 미숙한 추억이 하나이고, 색다른 것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한 무한한 가능성의 충만함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일순간 떠오른 기발한 생각에 들뜨기도 하고, 사회를 보는 시각도 자못 날카로워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 때. 하지만 이내 그런 관념은 가족과 학교 등 조직의 균형에 막혀 좌절감만 맛보게 했었다. 조금은 과장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나는 패배감에 휩싸인 사춘기 시절의 추억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그저 그런 인간이 돼버린 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 때 어떤 행동을 취했더라면 이 비겁한 자격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또는 바른 목소리를 내는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사춘기 시절의 기억을 당당히 회상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을 이 책, <바다의 풍경>(양철북. 2007)에서 발견한 기분이다.
바다. 그것도 공업의 항구가 아닌 자연의 형태를 가진 바다를 면한 섬마을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청소년기의 성장과정과 그 반대급부로 작용하는 기성세대의 장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것은 비단 청소년기의 성장 통이 아닌,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와 환경파괴와 집단이기주의 등의 세계화 추세의 문제 등을 청소년의 다듬어지지 않은 시각을 기성세대의 비겁한 현실안주에 대비해 나타내고 있기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학교를 관리의 장으로 바라보는 자들에 의해 문제아의 꼬리표를 단 소키치는 의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과거를 쫓기 위해 등교거부 중에 있다. 물론 소키치의 등교 거부의 이유가 아버지의 자취 찾기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막연히 느껴왔던 학교교육의 한계와 기성세대와의 대화단절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광범위한 교육과정은 문제의식을 갖기도 전에 미리 정해진 결론은 내린다. 소키치가 사는 마을은 농부와 어부라는 직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멸종의 위기를 맞을 지도 모른다. 허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 내용은 당면한 현실조차 외면하고 있다.
공교육의 한계와 그로 인한 폐해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 결론을 내놓고 있는가. 변별력을 갖춘 시험제도, 사교육에 저항한 내신 위주의 입시제도 등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될 수 없음은 이미 명백하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허울일 뿐 그것은 결국 대입을 위한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고 그에 연계된 대학교육은 상아탑의 그것이 아닌 연봉 높은 직장에 맞춰가고 있다. 분명 이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하지만 현실을 감안한 느린 변화가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 것이 지금의 세태임은 분명해 보인다.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다. 때문에 어른들은 그들의 치열한 고민과 방황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치부한다. 철이 들면 그 시절의 방황은 시간의 낭비로 자신의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설명을 덧붙여서 말이다. 또한 이것이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어른들의 변명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염된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이제 더 이상 사춘기 시절의 긍정적인 방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연적으로 벽에 부딪칠 것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의 잘못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함을 몸소 느끼면서도 그것에 대해 항거하려 하지 않고 외면하는데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선생님이나 가족에게 사회와 학교에서 느낀 문제점을 제시 해봐도 수용은커녕 비웃음만 살뿐이 아닌가.
소키치와 그의 친구들이 겪고 있는 방황도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러웠던 것은 내게는 그 정도의 생산적인 비판을 내비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요즘의 아이들이 나약하고 버릇이 없다고 한다. 분명 이것엔 세대의 변화에 따른 문제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예전과 다르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비하시키는 푸념일 수도 있다. 이래서는 청소년과 부모세대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다시 바다로 돌아가 소키치가 발견한 사회의 이면을 살펴보자. 학교에 대한 막연한 문제의식과 아버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 소키치의 학교를 떠난 사회에서의 산교육은 그에게 여태껏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몰락해 가는 1차 산업, 직업과 부의 불균형, 그리고 환경파괴와 생산제일주의자들의 만행까지, 그것들은 그가 교과서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혹은 어렴풋이 알 수는 있지만 실체를 인식하지는 못했던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길러준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신의 내면으로 번져 단절된 관계에 갇혀있었던 가족과 친구들과의 대화의 물꼬를 터주고 나아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한다. 더불어 타인의 상처를 감싸 안을 줄 아는 사나이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소키치의 모험(가히 그리 부를만하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 그가 뛰어나가는 길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지만 바다는 넓어서 어지간한 속도로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달음치지 않는다면 바다는 언제나 뒤처지지 않고 소키치를 감싸 안는다. 또한 그가 보는 태양은 바다에서 고개를 내밀고 숙인다. 어쩌면 바다의 풍경은 변하지 않는 가치인지도 모른다.
소키치의 치열한 방황은 이 책에서 끝을 맺지는 않는, 진행형에 있다. 그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조차 혼탁한 세상에서 소키치가 찾는 올바른 길이란 보일 듯 말 듯 그를 애태우며 평생 그 뒤를 좇아 달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내닫는 길은 아스팔트가 되었다 흙길이 되었다 하며 뒤로 물러나 그를 지치게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뛸지를 종잡을 수 없게 되기도 할 테고 사뿐히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물도 산재해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서의 뜀박질은 결국 바다의 풍경에 녹아나게 된다. 소키치. 사춘기의 실패한 추억의 청소년기가 아닌 청년까지 아우르는 당당한 청소년기의 그가 바다의 풍경을 잊지 않고 언제까지 달려 나가기를 기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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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을 읽은 것은, 사범대학을 진학한 직후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읽게 된 것이었다. 그 책을 읽으며 학교와 교사에 대한 꿈을 더 키우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책을 권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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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인 오키시마 소키치이다. 그러니 청소년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학교 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왜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있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학생은 학교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할까. 아마 그들은 소키치를 불량소년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더라도 소키치가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에 충분히 이해를 하더라도 학교에 가면서도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그는 섬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이고, 그의 아버지는 어부였지만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그는 누나와 함께살고 있다. 2학년까지는 모범생이었던 그는 3학년이 되자 학교에 가지 않는다. 교우관계가 문제이거나 선생님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고 지금 그것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힘든 선택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선생님과 학생들간의 갈등과 또 이런 상황을 보는 양극의 선생님들의 사고방식이 충돌한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과연 학교의 주인이 누구이고, 교육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아마 이것이 저자인 하이타니가 독자들에게 주는 질문일 것이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88년이다. 아마 일본에서도 개발이 주요한 가치로서 대두되던 시기였을 것이다. 이 책 주인공은 아버지가 죽기 이전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개발과 보전에 대해서 하나의 중요한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훌륭한 어부였고, 그도 어부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 벌써 일본 연근해의 어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개발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와 어류의 남획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였다. 주인공은 섬의 개발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이 생명의 근간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섬의 자연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나에서도 최근 간척사업에 대한 논란이 법정에 까지 간적이 있을 정도로 개발이냐 보존이냐에 대한 가치가 날카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개발과 보존중에 무엇이 우선되야 되느냐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후기산업사회에서 과연 1차 산업인 어업과 농업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관심 또한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이다. 단순히 돈으로 환산한 가치를 따질 경우에 1차 산업을 설 땅이 없다. 또 생산성이란 현대의 가치관으로 판단해도 1차 산업은 눈밖에 나있다. 이것이 모든 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이 책에서는 1차 산업을 생명을 다루는 분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살아있는 소중한 지구의 자원을 다루는 소중한 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작금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FTA문제의 핵심도 이와 관련이 있다. 농산물 개방 시에 농민들이 입을 피해에 대해서 우리는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원초적으로 농업과 어업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은 이 책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또 고등학생인 주인공에게는 주위에 그를 돕는 사람이 많이 있다. 아직 성숙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는 주인공에게 멘토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요즘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고 있다. 또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이런 만남을 통해서 주인공은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이처럼 소중한 만남이 이 책의 전체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두 권으로 이루어져있는 장편소설인 이 책 <바다의 풍경>(양철북.2007년)은 굵은 내용만큼 많은 이야기가 그 안에 있다. 그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보는 관점에 따라 양론으로 충분히 나누어 질 수 있다. 교사와 학생의 대립, 개발과 보전의 대립, 산업간 대립 등 어느 입장을 지지하느냐를 저자는 우리들에게 묻고 있으며,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주인공인 소키치의 선택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말들이 내게는 심저의 깊은 울림으로 들린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결코 청소년용 책이 아니다. 현대 사회가 앉고 있는 많은 문제에 대해 저자는 지적인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분명 독자들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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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모범생이었던 '소키치'는 3학년을 올라가자마자 등교거부를 하고 있다. 소키치는 학교를 다니는 것은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을 한다. 소키치가 등교거부 행동 이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이야기 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본다. 물론 자신의 분명한 생각을 주변의 어른들에게 이야기 했더라면 어떤 논리를 들이대면서도 소키치의 등교 거부를 막으려고 했겠고 그결과 등교 거부를 하지도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어른의 입장에서 봐서 그런가?-우리 아이는 그런 말도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려고 하기보다는 자기의 생각들을 강요하여 아이들 스스로 입다물게 하기 위한 특수 교육을 받는 것 같다고.) 아무튼 부모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소키치 보호자 역할까지 해야 하는 누나는 소키치의 등교 거부가 당황스럽다. 동생의 돌출 행동에 대한 분명한 이유라도 알면 덜 답답할 텐데.....(누나의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 소키치의 등교 거부에 대해서 소키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책을 읽는 독자나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중반까지 소키치가 왜 등교 거부를 하고 있는지 명확한 이야기가 없다. 또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도 없다. 다만 그냥 소키치의 행동을 묵묵히 보여 줄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등교 거부 = 문제아 취급을 받을 것인데 일본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는 그런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소키치를 잘 아는 사람이나 책을 읽는 독자는 소키치의 행동반경을 속속들이 들여다볼수 있기 때문에소키지의 행동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을 빼곤 그의 행동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를 알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고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소키치가 술집이나 드나드는 나쁜 학생으로 속단 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학교의 교감 선생님처럼) 소키치가 등교 거부를 하는 동안 소키치가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소키치가 학교를 안간다고 뭐라는 사람은 없다. 아니, 학교를 안가는 그 자체도 개인의 선택인냥 있는 그대로의 소키치를 인정한다. 이것이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의 다른 점인가 생각해 보다가도 일본 사회 전체가 아닌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가 사람들과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어부였고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부 생활을 접고 전력회사의 기초조사 작업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점차 고기를 잡는 것만 가지고는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그렇게 쉽게 어업을 포기 한다는 것을 소키치는 납득이 안 되었다. 일찌기 어업이 사양 산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식인 우리들에게 토산품 가게라도 남겨주어 먹고 살게 하려는 뜻이었습니까? 아니죠? 다른 무슨 뜻이 있는거죠?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한것입니까? 소키지는 필사적으로 아버지의 행적을 쫓는다. 아버지의 본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결국 소키치는 아버지가 남긴 작은 단서들을 모아 퍼즐을 마추기 시작한다. 퍼즐 맞추기가 진행됨에 따라 소키치는 개발의 논리가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전력회사의 기초 작업을 하면서 환경파괴를 최소화 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 사람은 환경에 기대에 살수 밖에 없다. 그 환경을 개발의 논리를 앞세워 변화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삶도 변화 시킬 것이다. 당장 드러나는 편리함은 곧 더 많은 편리함을 요구하게 되고 그 편리함을 위하여 더 많은 개발을 요구한다. 개발을 하면 할수록 환경은 열악해진다. 그것은 고스란히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아버지를 궤적을 따라가면서 소키치는 훌쩍 자란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면 농사꾼 밖에 될수 없다"는 교사의 말에 학생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니 소키치가 등교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소키치를 거론하자 소키치는 학교 밖에 있으면서도 학교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게으름을 피우면 농사꾼 밖에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게으르기 때문에 농사꾼이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된다며 그것은 농부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을 한다. 날카롭다. "그렇게 게을러서 어떻게 훌륭한 농사꾼이 될 수 있느냐"고 채찍 하라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른인 내가 부끄러웠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에게 원한다. 잘못한 게 있으면 그 잘못한 것에 대하여만 이야기를 하라고, 에둘러 본질을 흐리지 말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라고. 아이들의 이런 요구를 어른들은 미처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이 자라나듯 어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풀처럼 나무처럼 자란다. 아이들이 날마다 자라고 있고 그 자람이 어른들의 사고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을 알고 이해 하려고 노력을 해 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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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장소설이라기에 부담없이 책장을 넘겨갔다. 고3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의문으로 등교거부를 하는 소키치. 짬이 나면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 가는 그의 모습에서 성장소설의 전형성을 발견했다. 성배를 찾아 여행을 하며 소년에서 남성으로 커나가는 아더왕의 기사 파르시팔의 모습처럼. 하지만 책에 빠져들며 단순히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는 과정을 통한 소년의 자아 발견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은 고뇌와 번민을 통해 자아와 실존을 발견해 나가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소키치의 경우는 구체적으로 평범한 어부와 농부들의 일상을 들여다 보면서도 깊이 있는 고민을 하게 한다. 더군다나 한소년의 방황과 집념어린 노력으로 이야기가 점점 커져나가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정말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등교거부와 교사와 학생들의 갈등을 통해 진정 우리시대의 학교와 교육의 의미는 무엇인지, 소키치의 담임인 시마오선생의 고민들을 통해 교사가 어떻게 학생들을 이해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가에 대한 모습을 보며 옛날 드라마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들의 모습과 동질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소키치의 친구들과 아버지의 친구들이 바다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는 어업,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고달픔이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어떻게 비춰지는지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환경의 파괴로 인한 자연을 터전으로 하는 어부와 농부의 힘든 삶의 무게는 내가 그러한 처지와는 일정 거리를 두고 살고 있긴 하지만 조금만 생각의 폭을 넓힌다면 내 삶과도 그리 다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키나와와의 만남을 계기로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고 자본으 논리를 바탕으로 한 기업의 탐욕과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서민들, 파괴되는 자연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보다 큰 문제와 맞부딪히게 된다. 물론 형식적으론 중립이고 앞에 나서진 않지만 국가 기관들이 교묘하게 기업의 편을 들어 주는 모습을 통해 시대적 배경과 일본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과 국가권력과의 관계라는 점에서 많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현실도 근래 한미FTA 문제, 농지 확장이란 명분으로 천연의 갯벌을 파괴하는 새만금의 문제, 획일적이고 입시지향적인 교육 제도의 문제들로 소키치와 그의 친구들이 겪는 과정을 빠지지 않고 겪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들이 진행되어 가는 방식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서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소키치와 그의 친구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은 보여줬지만 작가가 행복한 결말까지 제시하지 못 하는 건 블행한 결말을 어느 정도 예감해서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소키치가 아버지가 간 길을 따라 가며 아버지가 보호했던 자연 유산들을 만나며 앞으로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 그리 정망적이진 않을 것 같다.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그렇게 앞서서 고민하고 싸웠던 소키치의 아버지같은 롤모델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램만이 남을 뿐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보고 배울 뭔가가 있을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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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보고, 청소년들에 관한 가벼운 소설이라 나름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재밌게만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들었어요. 표지만으로는 요즘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인터넷소설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 책을 다 읽은 후 내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책표지의 은은함과 따듯함처럼, 많은 것을 따듯하게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었으니까요. 첫째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요즘 10대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놀랬어요. 이렇게 많은 생각을 깊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10대들을 우습게 본건 아니었어요. 기성세대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요즘 10대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앞날에 대해 고민을 아주 많이 하고 있고 머리도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의 주인공처럼 고민하고 있을거란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거든요. 둘째, 학교에 관한 거에요. 나 역시 고등학교 때 학교가 싫었죠. 싫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싫은 건지는 생각을 안해봤어요. 이 책을 통해, “맞아, 맞아”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은 학교가 지루한 곳, 의무감으로 다니는 곳, 편견을 가르치는 곳, 이해가 부족한 곳, 사회에 나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관념, 이상을 가르치는 곳, 의미없는 것을 강요하는 곳이라 말하더군요. 이말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물론 요즘은 대안학교라는 것이 생겨 좀 다른 학교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그런 것 같네요. 셋째, 자연보호의 중요성에 관한겁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입장에서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자연보호라는 것,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란 사실도 알게해 주네요. 우리는 학생에 대해 이분법으로 생각합니다. 학교를 잘 다니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학교를 잘 안다니고 공부를 안하는 학생 이렇게요. 전자는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 쉽게 생각해 버리고, 후자는 실패한 인생을 살거라 단정합니다. 이 책은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하라고 말하네요. 넷째, 기업이란 곳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업이란 곳이 이익을 내기 위해 있는 곳이긴 하지만 기업이 있는 이유가 사람이 살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사람을 위한 기업정신을 발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좋은 책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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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태양의 아이> 등을 통해 알게된 하이타니 겐지로의 잔잔하고 편안한 그러나 메시지가 담긴 인간적인 냄새를 이 책에서도 역시 느낄 수있었다. 어린 요코와 주인공 소키치가 처음 만나는 풍경부터 독특한 그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였다.
주인공 소키치가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이야기가 펼쳐지는 우라요시 섬과 소키치가 등교거부를 하고 있는 학교와 반 아이들, 그리고 소키치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이 엮어가는 이야기에 두 권의 책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소키치라는 한 인물을 통해 내면적인 인간의 모습과 주변 환경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을, 특히 인간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정서적인 고립(고독)과 발전이라는 근사함으로 포장된 환경파괴와 같은 현대인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한편으로는 불편함과 위기를 느끼기도 하였다.
어제는 하루종일 1년 넘게 온국민의 촉각을 곤두세우던 한미FTA협상 타결로 인한 찬반으로 온나라가 떠들썩한 하루였다. 세계최대 수입시장인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결코 피할 수없는,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현실이지만 그동안의 경과와 진행에 대한, 그리고 최종협상 시한 15분을 남겨 놓고 타결된 것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은 그 어느때보다 커졌다. 내년 6월쯤에나 협정이 발효될 것이지만 그 여파는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이라 내다보는 뉴스는 오늘 아침까지도 계속되었다.
나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남의 일만은 아닌 것같은 막연한 불안감에 뉴스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문가들의 다양한 예견과 예측에 귀를 기울여 보지만 답답하기만 하다.
천생 어부로 살줄 알았던 아버지의 의문스러운 바다로부터의 떠남과 죽기 전까지의 활동에 대해 궁금증과 학교에서의 배움이 결코 현실적이지 않음으로 등교조차 거부하는 주인공 소키치. 몇 장의 사진으로 남겨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은 결국 발전의 양지에 가려진 환경파괴로부터 섬을 지켜가고자 했던 아버지의 신념과 노력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 소키치의 등교거부로 벌어지는 교육현실에 대한 학교측의 무사안일함과 교육과 현실의 괴리에서 갈등하는 학생들의 모습들은 우리의 교육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우리나라 역시 정규교육이 진행되는 공교육에서 벗어나 대안학교나 독학으로 배움을 대신하고 나름의 미래를 찾아가고자 하는 부모와 학생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아....... 다수가 전망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현실을 따라주지 않는 교과서로만 유지되는 생명력을 잃은 교육과 나날이 파괴되어 사라지는 자연의 상실에 대한 위기가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하지만, 소키치와 주변 인물들이 펼치는 저마다의 내면적인 이야기는 그럼에도 변함없이 펼쳐지는 인간의 끈끈함에 한줄기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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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가이드'에서 이벤트 도서로 받은 책입니다.]
[바다의 풍경]은 일본의 아동문학 작가이자 교육자였던 하이타니 겐지로의 1988년 작품이다. '어린이에게서 어른이 배운다'는 교육 원리를 일본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현실참여를 몸소 실천했던 작가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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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글을 많이 쓴 하이타니 겐지로의 글들은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