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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은 읽기가 몹시 힘들다. 이책을 읽는 며칠간 몸도 마음도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결코 제삼자로만 읽을 수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딸을 사고로 잃고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아빠와 가정, 그 끝까지 갔다가 서서히 회복해 가는 1년여의 과정을 철저하게 아빠의 시각에서 그렸다. 그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배경이 미국 동부 어딘가의 아주 외딴 숲속 마을 에논(Enon)이라, 그 슬픔과 좌절, 절망을 드러내는 방법이 에논 숲속을 산책하고 헤매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을에 집이 몇 채 없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서로 아는 사이인 그런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심지어 그 마을은 2~3백년간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있어 주인공은 그런 역사를 여러차례 언급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감정선에 대해서 너무나 섬세하게 하나하나 터치하고 있어 그 슬픔이 절절히 공감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경이 그렇게 환타지속 같은 곳이라 그런지 주인공이 겪는 상황에 현실감이 좀 덜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아이러니 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기에. 한 문장이나 문단의 길이가 무척 긴 대목도 많아 자칫 지루할 수도 있을 법도 한데, 별로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이 다 읽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 책이 회복에 대한 책이라 생각했는데, 책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의아해했더니, 마지막에 급히 정리하고 아빠가 마음을 다잡는 느낌이 있다. 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생각하면 그 과정이야 말로 가장 섬세하게 다루었어야 할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이 생략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저 끝 밑바닥까지 가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가도 마음을 돌려 먹으면 한순간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그런 걸 염두에 두었을까. 이런 책은 누구에게 추천하기도 쉽지 않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읽어가기가 힘이 든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나처럼 위안이 될 수 있을 책이다. [책속으로] 그녀가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그리고 인생이 바라던 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실망감의 원인이 나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 그리고 그즈음 밤이면 밤마다 식탁에 앉아 우리가 얘기한 계획들이 나로 인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나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나는 거의 공포에 빠지다시피 했다. 케이트는 우리를 다시 하나로 묶어주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각자가 따로 케이트와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뿐인 소중한 딸을 통해 수전과 나도 한데 묶인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좋았다. “때로는, 기억하기가 힘든 거야.” 나로서는 과거 어느 시점에 존재한 에논에서 마을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온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케이트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차갑고 축축한 무기물로 끈적거리며 유난히 넓어 보이는 들판에 웅크리고 앉아, 풀과 흙의 향을 들이마시고 언덕 뒤에서 일어난 바람 소리를 들었던 일을 생각해보곤 했다. 언덕을 넘어 소나무들 사이를 휘돌다가 꼭대기에 머물던 바람이 나무줄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 들판을 쓸고 나아가며 긴 풀에 파도를 일으킬 때, 이 모든 것들 위로는 별들과 분홍 달, 꽃 달, 딸기 달, 사슴 달, 사냥꾼 달* 등이 떠 있었고, 달빛을 받은 구름의 외곽선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며 어찌나 섬세하게 바뀌던지, 며칠이 지난 후 잠들지 못하고 누워 있던 밤에 나는 그 화려함을 결코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일까, 딸이 잠들어 있는 동안 돈 걱정을 한다는 것은. 케이트의 죽음에 어떤 심오한 선함이나 축복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상상 속에서는 품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것의 진실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창조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해서 내 슬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안 됐어.” 내가 말했다. 나는 창피했다. 체력이 나빠서라거나 낡은 테니스화와 운동복 반바지를 입은 내 모습이 바보 같아서라기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케이트가 더이상 조그만 아이가 아니라, 다 큰 아가씨, 또는 낯선 사람처럼 보이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항상 예견하고 있었다. 아이가 나보다 빨리 달려서, 또는 나 없이 혼자 달리고 싶어해서 놀랐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런 순간이 너무 갑자기 찾아와, 내가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다고 느꼈는데도 나를 충격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깨어 있는 매 순간 느끼는 그 고통에는 아무런 고마움도 느낄 수 없었고, 거기에서 잠시도 헤어날 수가 없었으며, 이 삶이 그저 슬픔과 분노의 증류물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케이트가 죽고 내가 예전에 간간이 느끼던 절망감이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후조차도 나는 여전히 절망에 굴복하는 것은 성격의 결함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그들은 항상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해내는 일, 즉 삶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지극히 많은데도 그냥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케이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었더라면 내 슬픔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내 딸의 짧고도 행복했던 삶이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던 건 아닐까? 그 십삼 년의 기쁨이, 비록 지금은 슬픔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로 인해 훼손되지는 않은 나름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다. 그 나날들의 기쁨에는 그대로의 완전함이 있었고 케이트는 그 안에 존재했다. 내 딸은 자신의 죽음이 가져온 고통이 가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때로는 내 딸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슬픔과 분노에 잠긴 나를 보고, 그것이 삶이라는 우스운 비극의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웃는다는 느낌. 아이가 더이상 슬픔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 이유가 이젠 사람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비록 삶의 굴레에 속박된 나 자신은 케이트와 함께한 삶의 기쁨이, 비록 그것이 훼손될 수 없는 것이더라도, 케이트가 없는 삶과 이루는 극명하고도 파괴적인 대조에 계속 고통받아야 하겠지만. 그 기쁨은 내 비탄의 척도이자 원천이었다. 케이트의 죽음이 이젠 내 삶의 이정표에 불과하다는 사실, 내 딸의 삶은 그 시점을 기준으로 무효화되어버렸는데도 내 삶은 그후로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차원에서 그런 식의 구분은 그저 어법의 문제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지독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꿈에서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의도적으로 잡아두려는 순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식에 굶주렸고 무덤에서 나 자신을 먹어치우는 데 골몰했으며, 그리하여 두 세상의 중간쯤에서, 아니면 내가 조금 더 넘어가서, 어느 날 밤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아이와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산 자들의 에논에서 젖은 풀밭이나 낙엽, 또는 눈 쌓인 땅에 맨발을 디디고 다시 일어난 내 딸과, 부디 단 한마디나마, 마지막 인간의 말을 나눌 수 있기를. 집을 건사한다는 것은 무모하리만치 대담한 일이었다. 집이란 모름지기 축복을 지켜나가는 곳?돌이켜보면, 그러모아놓는 곳이 더 맞을 듯하지만?이어야 하는데 그런 축복은 그저 사라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패하여 저주받은 상태로 변해버렸다. 집은 단순히 숲의 평형상태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고사해버린 것이다. 마치 그 안에 든 것이 난로와 의자와 침대가 아니라 헐어 문드러진 내 심장이었던 것처럼. 혹은, 내가 가슴속에 심장 대신 그 컴컴해진 집을 지니고 다녔던 것처럼. 어두운 문턱을 넘어 그 집에 들어가, 어두운 방에서 어두운 난로 옆에 놓인 어두운 의자에 앉아, 창틀이 부서진 창문을 통해 어두운 나무에 둘러싸인 바깥을 내다보는 일이 천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면 나는 내 아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고, 아이가 안전하고 따뜻하고 건강하고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런 좀더 넓은 선 안에서 아이가 조금은 짜증을 부리고 조금은 거침없이 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실제로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비애였다. 자신의 죽음 때문에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생각한다면 내 딸이 너무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내가 저 너머 어두컴컴한 세상에서?일상에 익숙해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을 뿐 자양분이 풍부한 빛이 흘러넘치는 곳일 테지만 무단으로 침입하는 나 같은 산 사람에게는 단지 어두컴컴할 그곳에서?케이트를 만날 때 내가 그애에게서 듣기를 갈구하는 말은 ‘안 돼’라는 말이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약들로 만들어낸 밧줄에 매달려 마침내 내 딸을 만난 뒤 다시 각성의 세상 표면으로 휙 끌려와 구급차 바닥이나 병원 침대 위로 떨어지기 전, 그 찰나의 순간에 내 딸이 외치는 한마디 말이 ‘안 돼’이기를 나는 원치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잠시 얼굴을 내민 케이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짓는 순간을 기대하며 눈물을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 케이트는 내가 기억하기 위해 날마다 연습하는, 반은 소녀 같고 반은 여자 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할 것이다. ‘그래’라고.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한순간이나마, 내 딸과 거룻배 위에 나란히 서서 새벽녘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