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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타자'를 향한 소설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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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타자’를 향한 소설적 사유- 정찬 󰡔광야󰡕       정찬은 이 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타자와의 대화에 관심이 많다. 그는 이러한 대화구조를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는 소설의 자리를 엿본다. 이분법적 구도로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 거기에는 스며들어 있고, 이분법적 구도로는 다가갈 수 없는 세계가 거기에는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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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타자를 향한 소설적 사유

- 정찬 󰡔광야󰡕

 

 

 

정찬은 이 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타자와의 대화에 관심이 많다. 그는 이러한 대화구조를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는 소설의 자리를 엿본다. 이분법적 구도로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 거기에는 스며들어 있고, 이분법적 구도로는 다가갈 수 없는 세계가 거기에는 펼쳐져 있다. 하지만 정찬의 소설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타자가 없다. 완전한 영혼처럼 신성을 내재하고 있는 압도적인타자가 존재하지만, 그 타자는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완전한 존재로서 타자로 표현된다. 장인하의 완전한 영혼은 완전한 타자의 형상에 이르려는 작가의 정신을 대변한다. 고문자의 사상으로 완전한 권력에 도달하려는 하야시(󰡔황금사다리󰡕)와 장인하를 가로지르는 정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완전성을 향한 열망이 그들의 마음에는 새겨져 있다. 신의 경지에 이르려는 무모한 열정이 정찬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폐쇄성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2002년에 발표된 󰡔광야󰡕에서 정찬은 이러한 독백의 형식을 벗어날 수 있는 소설적 계기로 미래의 타자들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미래의 타자들은 미래를 살아가야 할 존재(후손)들이다. 시민들을 학살하는 권력자에 맞서 싸우는 광주의 주체들은 미래의 타자들을 설정함으로써 목숨을 건 투쟁을 수행한다. 맨손으로 공수부대원의 총을 빼앗으려 한 장인하의 식물적 정신과 비교한다면, 광주의 주체들이 상정한 미래의 타자들은 명백히 현실적인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 ‘미래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항쟁파의 핵심인 박태민의 사유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의 추억을 지켜야 합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너무나 장엄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거룩하기까지 한 추억을 지켜 우리의 동생과 누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해방광주는 어둠에 덮인 조국의 땅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등불입니다. 그것을 보았던 우리의 어린 동생과 누이들이 먼 훗날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그 등불을 어떻게 했느냐고 말입니다. 총을 듭시다.” (󰡔광야󰡕, 211)

 

 

인용문에는 미래의 타자들을 지키기 위해 항쟁의 전선에 나서는 광주 주체들의 숭고한 논리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희생이라는 말로도 정리될 수 있을 터인데, 권력의 폭력에 죽음으로 맞서는 항쟁파의 논리는 이로써 해방광주를 상징하는 자유의 논리로 부각된다. 항쟁 초기, 박태민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육을 목격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존재였다. 감춰져야 할 죽음의 풍경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세계에서 그는 명백한 감각의 전도를 겪기도 했다. 삶의 세계는 이미 죽음의 세계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저항이 불가능한 인간의 살 속으로 칼을 깊숙이 쑤셔 넣는 그들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보였던 반면에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이들이 차라리 평온해 보였다.” (󰡔광야󰡕, 43)

 

이처럼 삶과 죽음의 감각이 완전히 전도된 세계에서, 박태민이 믿고 의지하던 사상의 힘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공수부대원의 무자비한 살육을 목격한 그에게, 죽음의 세계는 공포감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그는 비루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있지만, 몸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깊고 격렬한 떨림만은 물리칠 수 없다. 내면에서 파동 치는 떨림은 그러나 공수부대원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면서 윤리적인 분노로 변화한다. 공포감이 분노로 변하는 순간, 공수부대원에 대한 공포심은 적의로 돌변한다. 적의는 공포감에 기반하는 죽음의 경계와 나란히 서 있. 그러므로 싸움의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경계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가 권력과의 싸움을 끝까지 주장하는 이유도, 광주의 싸움은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상황인식 때문이다.

 

박태민이라는 광주의 주체가 세워지는 과정은 이렇듯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주체의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죽음의 경계는 인간과 짐승의 경계를 이룬다. 인간이 아니면 짐승이어야 하는 이상한 세계의 징표는 권력집단이 행하는 배제의 논리와 연관된다. 배제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박태민은 미래의 타자들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박태민은 스스로 고통스런 세계의 중심에 들어선다는 점에서, 정찬 소설에 등장하는 숭고한 인물들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장인하의 경우와는 다르게 박태민은 미래의 타자들을 고통스런 세계의 중심에 배치하고 있다. 장인하의 식물적 정신을 넘어서는 자리는 미래의 타자들을 향한 박태민의 타자 지향적 사유에서 뻗어 나온다. 정찬 소설을 규정하는 독백의 미학은 이 지점에서, 미래의 타자들을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대화의 미학으로 나아간다.

 

역사의 영혼이라는 제목의 에필로그에서 정찬이 1980년대 변혁운동에 내재된 순결주의”, 곧 적과 우리를 선명하게 구분하는 정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까닭도, 순결주의 사상에는 근본적으로 (미래의) 타자들을 배제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작가는 사회주의의 몰락을 유토피아가 요구하는 도덕성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절망적 확인으로 진단한다. 이념적 순결주의와 사회주의의 몰락 사이에는 윤리적 주체라는 예민한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윤리적 주체를 내세운 이념적 순결주의가 타자의 윤리학과 이어지지 못할 때 사회주의 인간학 역시 설 곳을 잃어버린다. 정찬은 사회주의의 몰락을 인간존재의 불완전성을 절망적으로 확인하는 계기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윤리적 주체(사회주의적 인간학)를 향한 변함없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

o*****s 2017.09.03.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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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 깊게 사유한 광주.
"치열하고 깊게 사유한 광주." 내용보기
책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을 바라보는 한 서양인, 그 붕괴를 바라보며 또하나의 분단국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살상을 생각한다. 거대한 혁명을 생각한다. 광주혁명. 그 진한 피냄새를. 이 서양인의 의식은 과거로 표류해가고 광주를 둘러싼 여러 요인들이 하나씩 묘사된다. 광주에서 죽어갔던 시민을 둘러싼 풍경, 광주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댔던 특전사를
"치열하고 깊게 사유한 광주." 내용보기
책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을 바라보는 한 서양인, 그 붕괴를 바라보며 또하나의 분단국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살상을 생각한다. 거대한 혁명을 생각한다. 광주혁명. 그 진한 피냄새를. 이 서양인의 의식은 과거로 표류해가고 광주를 둘러싼 여러 요인들이 하나씩 묘사된다. 광주에서 죽어갔던 시민을 둘러싼 풍경, 광주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댔던 특전사를 둘러싼 풍경, 전두환을 둘러싼 풍경, 우리나라 현대사의 대부분에서 사실상 메인키를 쥐고 있었던 미국의 풍경, 종교인으로써 살상을 지켜보며 부끄러움을 삭이지 못하는 신부의 풍경, 혁명의 의미를 냉철하게 직시했기에 스스로 몸을 던져 '시간'이 되고자 했던 항쟁운동가의 풍경. 광주를 둘러싼 많은 이들의 상황이 존재이유를 가지고 어우러져 차마 잊혀질수 없는 커다란 비극을 연출해간다. 작가의 종합적인 시선은 독재자 자신의 심리에서부터 냉정한 미국의 태도까지 구석구석을 훑으며 평소 미심쩍어하던 부분을 싹싹 긁어준다. 아, 전두환이 12.12이후 바로 집권하지 않았던건 미국 눈치를 보느라 그랬던거구나. 미국이 결국 전두환을 지지할수밖에 없었던건 전두환이 재빨랐기 때문이구나. 전두환은 그야말로 소군의 우두머리였을 뿐이었는데 천부적인 약사빠름과 어마어마한 무자비함으로 집권에 성공했구나. 오일팔을 전후해서 존재했던 수많은 역사적 퍼즐들. 아아, 그중 하나만 어긋났었더라도 전두환의 쿠데타는 성공하지 않았을텐데. 그러면 우리나라의 문민정부는 10년은 일찍 왔을텐데. 우리나라의 문화도 10년은 빨리 나아갔을텐데. 전두환에게는 천행과도 같은 사건들이 하나둘 어우러지기 시작할때, 그래서 미국이 전두환이 괘씸하긴 하지만 그냥 냅두는게 자국의 이익에 최고일거라 생각해서 그의 집권을 결국엔 용인하게 될 때, 광주의 전사들이 결국 하나둘씩 무기를 반납하고 그간의 전과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할때, 손에 땀이 쥐어졌다. 아아, 위컴이 전두환을 조금만 더 꾸짖었어도! 광주시민들이 미국인 몇명만 인질로 잡았어도! 삼일만 더 끌었어도! 뭔가 하나만 되었어도 지금의 한국풍경은 어마어마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신군부의 하극상은 실패로 돌아가 전.노는 물론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고 문민정부의 상륙은 10년은 빨랐을 것이다. 아니 광주코뮌의 정신이 물결처럼 퍼져나가 전 노동자 계급이 궐기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주된 흐름이 가진자에서 못가진자로 옮겨가는 최초의 몸짓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아름다운 집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이 땅에 피어났을지도 모른다. 소련도 중국도 북한도 모두 망쳐버리기만 했던 마르크스의 꿈이 최초로 이곳에서...그리하여 일제땐 일본에, 미제땐 미국에 미치도록 달라붙었던 기생계급의 뿌리를 화끈하게 뽑아버렸을지도 모른다. 흘러가버린 군사독재 시절을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조선일보같은건 박물관에서나 볼수 있을거다. 그러나. 아아 그러나, 광주는 무너졌다. 정 찬은 역사를 널찍하게 조명할 줄 아는 작가이다. 숲을 한번 쫘악 비춰준다음 그 숲속의 구성원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나아가 그 구성원들간의 미묘한 관계의 흐름을 보여주어 독자가 역사의 면면을 멀리서도 봤다가 가까이서도 봤다가 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일단 지식면에서 굉장히 감사하게 된다. 좋은 소설 한 권을 읽고 나면 논픽션 열권을 읽고 자료조사를 해야만 얻어질법직한 양과 질의 지식을 얻을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가치판달을 할 수 있는 길잡이도 얻을수 있고 더불어-이게 가장 매혹적인 건데-책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기운을 생생히 느낄수 있다. 잠시나마 그 인물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호흡한다. 책을 덮은후 며칠동안은 그 인물과 함께 살게 된다. 특히 역사소설일 경우는 그 시대의 숨결도 함께 들어와 잊을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이 작가, 정말 멋있다. 인간이 글을 쓸려면 말이야, 이 정도는 써야지. 며칠전에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보다가 조금 놀란 적이 있다. 그들의 출판계에서 문고판의 발전이 1920-3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때 명작전집류가 많이 나오고 출판계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 나는 조금 이상했다. 20년대? 그 때 출판계가 발전할수도 있나? 어떻게 그런 시절에 '출판계의 문고판'이 발전할수가 있지? 이상하네...참으로 이상했다. 20년 30년대는 아무 발전도 일어날수 없는 시대일텐데...그리고 조금 있다가 소름끼치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시기를 식민지 시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20, 30년대는 일제 강점기였지 않았던가. 그 시대의 우리에게 출판문화의 발전이, 문고판의 호황이, 문고판에서 배어나오는 사상이 우리나라 고유방식으로 진보해나갈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었던가. 내 의식속의 그 시절은 시커먼 블랭크였던 것이다. 전무의 시절. 그러니 딴 나라에서 그 기간에 문화가 발전했다는게 이토록 낯설밖에. 생각해보면 일본이야 그 시절에 문화의 발전이 얼마든지 이루어질수 있던 시기이다. 아니, 오히려 어느때보다도 더 발전할만한 시기지. 국력이 강성하여 서양을 넘볼 정도이며 당당히 식민지까지 거느리고 있는 시기. 일본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시기. 일본문화가 서양문화를 섭취하며 매끄러운 소화를 거듭해갔을 것이다! (으아아~)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그렇게 억울하게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나 많다. 일제 40년, 그 직후 6.25, 분단과 군사독재...스스로 근대로 옮겨갈, 스스로 근대화를 소화해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문화가 이렇게 경직과 획일로, 천민자본주의로 갈밖에. 문화가 근대화를 소화할 시간에 우리를 내리누르고 있었던 외세와 군사독재. 그 가운데서 희미하게 피어났던 희망, 광주. 어젯밤에 이걸 읽느라 새벽 두시쯤 잤는데 불끌 때 조금 으스스했다. 광주에서 죽어갔던 전사들의 함성이, 폭도로 규정되었던 그들의 억울한 원혼이, 교묘한 방법으로 학살을 연출하고야 마는 역사의 심술궂은 기운이 잠든 내게 그대로 불어올 것같아서 두려움에 떨면서 잤다. 장화홍련보고 무서웠던 거랑은 또틀린 무서움. 역사란 무서운 것이구나.
e****5 2004.05.19.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