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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다가오 선학동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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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선학동 나그네.... 나의 읽고자하는 마음보다 그저 수능에 나온다는 이유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읽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내 의지로 읽는 선학동 나그네, 서편제, 소리의 빛은 그때의 선학동 나그네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땐 그 작품자체의 이해보다는 주제와 인물의 특징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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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선학동 나그네....

나의 읽고자하는 마음보다 그저 수능에 나온다는 이유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읽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내 의지로 읽는 선학동 나그네, 서편제, 소리의 빛은 그때의 선학동 나그네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땐 그 작품자체의 이해보다는 주제와 인물의 특징 같은 것을 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실 부끄럽게도 난 서편제라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영상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지만 내 나름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어서 좋았다. 한국사람의 정서가 고유스럽게 뭍어 있는 책을 대하며 영화의 세계 진출도 조심스레 희망을 걸어본다.  현란한 문체보다는 담담하면서도 맛깔스런 이 책의 내용과 문체는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여러번 하였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이런 글을 쓸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생각해볼 거리 '한'

한이라... 가슴깊이 묻어둔 뭔가에 대한 열변. 우리 나라는 예전부터 침략을 많이 당해 온 나라로 어쩌면 이 '한'이라는 테마를 조용히 습득했는지 모른다. 그것을 통한 예술적 잠재력의 분출. 얼마전 읽었던 홀로 앉아 금을 타고라는 책도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음악에 대한 이해로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얇고 작은 책이지만 나에게 준 파장은 강하고도 저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울림 같은 것이였다.

 

오라비와의 만남에서 서로 모른척 해야했던, 그리고 자신의 눈을 멀게 했던 아버지를 용서해야했던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였을까? 앞을 보지 못해서 선학동의 학을 볼 수 있었던 그녀의 소리를 나도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은 텔레비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판소리를 찾아서라도 한번 들어봐야겠다.

 

같은 책이라도 읽을 때마다 참 이채롭게 느껴진다. 비단 나뿐만 그런것이 아니리라 하며 한번에 그치지 아니하는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고등학교때는 꼭 읽어야하는 책의 목록을 정해주었는데도 읽지 않았지만 새삼 그 리스트를 찾아 한권 한권 보듬으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d 2007.05.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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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한(恨)'이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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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원작인 소설 『천년학』. 지금까지 임권택 감독이 무려 100여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나는 한번도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유명하다던 <서편제>조차 보질 않았다. 영화 <천년학>이 <서편제>의 후일담을 담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기 전에 <서편제>라는 영화부터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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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원작인 소설 『천년학』.

지금까지 임권택 감독이 무려 100여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나는 한번도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유명하다던 <서편제>조차 보질 않았다. 영화 <천년학>이 <서편제>의 후일담을 담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기 전에 <서편제>라는 영화부터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였다.


『천년학』에는 3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서편제』는 워낙 영화가 유명하여 비록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혹시 내가 예전에 읽은 책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소릿재에 있는 주막을 찾은 한 남자가 그 소릿재에 얽힌 이야기를 주인 여자에게 듣는다. 오래전 그 동네에 소리를 하는 부녀가 찾아왔다. 목청이 좋았던 아비가 그곳에서 죽게 되자 부녀의 소리를 좋아했던 어른이 아비의 무덤 근처에 주막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때 주인 여자는 아비를 잃은 여자를 도와 잔심부름을 하면서 틈틈이 소리도 배웠다고 한다. 그 소리꾼 여자는 아비의 3년상을 마치던 날 새벽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주인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번째 이야기인 『소리의 빛』에서는 그 남자가 또다른 주막을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주막에는 남도 소리를 잘하는 눈이 먼 장님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는 밤새도록 그녀의 소리를 청해 들으며 북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새자 그곳을 떠나버렸다. 남자가 떠나고 나자 그녀는 궁금해 하는 주막 주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가 자신의 오라비라는 이야기를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선학동 나그네』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서편제』보다 더 유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오라비는 다시 여자의 자취를 찾아 선학동으로 온다. 그곳 주막에서는 오라비는 얼마전 여자가 다시 찾아와 아비의 유골함을 묻고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오라비에게 전해주라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한 마리 학이 되어 선학동 포구 위를 날고 있을테니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날이 새자 오라비는 여자가 그랬듯이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어렴풋한 내 기억으로는 어릴적 교과서를 통해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의 말하기 방식에 상당히 이끌렸었던 것 같다. 뭔가를 알면서도 먼저 이야기를 털어 놓지 않음으로써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까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말하기 방식이 말이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서편제」, p52)


사실 ‘한(恨)’이라는 말을 우리나라 작품들을 접하다보면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대충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한이라고 부르는게 아닐까 하는 정도 밖에.

어쩌면 여자의 오라비가 주막 여자에게 말했듯이 한(恨)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비가 자식의 눈을 다치게 한다는 식으로는 도저히 심어줄 수 없는,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먼지처럼 쌓이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구체화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h*******0 2007.04.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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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승화시킨 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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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임권택 영화 감독의 <천년학>이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무렵이 떠올랐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 치곤 분량이 꽤 많아서 몇 시간에 걸쳐「선학동 나그네」를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수업 전이었던가, 후였던가.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셨다. 바로 <서편제>였다. 꽤 오래된 영화라 그저 수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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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임권택 영화 감독의 <천년학>이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무렵이 떠올랐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 치곤 분량이 꽤 많아서 몇 시간에 걸쳐「선학동 나그네」를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수업 전이었던가, 후였던가.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셨다. 바로 <서편제>였다. 꽤 오래된 영화라 그저 수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기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음으로 별 기대없이 본 영화였지만 꽤 몰입했던 것 같다. 언덕길을 지나는 여자와 아비의 모습이 사진보듯 그 이미지가 이제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책 『천년학』에는 남도 사람 연작인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실려 있다. 이번에 개봉했던 영화는 세번째 연작인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니, 참 감회가 새롭지만, 영화는 아직 못 봤으므로 책 이야기나 해야겠다.

 

책은 아주 얇고 활자도 큰 편이라 읽는 부담이 적어서 좋았다. 게다가 중간중간 삽화 구경까지 할 수 있어 빈약한 상상력을 보충할 수 있기도 했다. 서편제를 읽으며 영화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고 소리의 빛은 영화와 교과서의 간극을 채우게끔 해주었으며 선학동 나그네는 다시 읽어도 그 여운이 남달랐다.

 

알다시피, 이 세 연작은 오누이의 여정을 쫓는 것을 주 뼈대로 하고 있다. 아비에 의해 눈이 멀어버린 여자가 한 마리 비상학이 되어 사라져간 이야기. 이 설화적인 이야기엔 한국인의 주요 정서인 한(恨)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한은 소리를 통해 표출된다. 요즘, 클래식을 듣는 이들은 많아도 국악이나 판소리를 듣는 이들은 확실히 적다. 이는 공간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클래식이야 꼭 음악회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도 얼마든지 감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악이나 판소리는 듣는 것만으론 모자라다. 소리를 하는 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소리만 하는 게 아니다. 표정과 몸짓으로 그야말로 온몸으로 연기를 한다. 쥐어뜯는 듯한, 혹은 햇덩이를 품은 듯한. 그 햇덩이가 바로 한이며 그것이 뿜어져나올 때 거대한 울림으로써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 햇덩이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 이가 이 작품에 나오는 오라비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멀게한 아비에 대한 원한을 삭히고 소리로서 승화시킨 누이. 오누이는 서로의 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서로 갈 길을 가기로 한다. 아비의 유골을 묻고 사라진 누이는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라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그들이 사라져간 언덕 위로 백학 한 마리가 하늘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이제 어딜가도 한이 맺힌다느니 한스럽다느니 하는 말을 듣기가 힘들어졌다. 그런 와중에 가슴속에 한덩어리를 품고 그것을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설화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서가 사라져간 것은 아닐 것이다. 포구가 들판이 되어 더 이상 학이 비상하는 형상을 볼 수 없어져버렸지만 한 여자의 소리가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한 마리 학이 되어 떠도는 것처럼 우리의 가슴 속 어딘가에도 한의 깊은 뿌리는 심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편제를 보고 천년학을 본 이들의 가슴이 묵직해져 오는 것일 테다.

YES마니아 : 로얄 j***7 2007.04.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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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동의 학이 되어 떠도는 그녀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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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와 서울바로크합주단 공연을 보고 나오며, 평소 즐겨 듣는 풍물굿패의 공연과 비교를 한 적이 있었다. 서양의 음악이 잔잔하게 가슴속을 돌고 돌아 마침내 머리든 손이든 발이든 까닥이게 해주는 것이라면, 동양의 음악은, 아닌 울림은 가슴과 머리 그리고 온 전신을 때리고 울리고 흥겹게 만들고 종내에는 온 몸의 힘을 좌악 빼버린다고. 합주에 대해 내가 뭘 잘 아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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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와 서울바로크합주단 공연을 보고 나오며, 평소 즐겨 듣는 풍물굿패의 공연과 비교를 한 적이 있었다. 서양의 음악이 잔잔하게 가슴속을 돌고 돌아 마침내 머리든 손이든 발이든 까닥이게 해주는 것이라면, 동양의 음악은, 아닌 울림은 가슴과 머리 그리고 온 전신을 때리고 울리고 흥겹게 만들고 종내에는 온 몸의 힘을 좌악 빼버린다고. 합주에 대해 내가 뭘 잘 아는 것도 아니라 그 공연을 보고 평을 하기 민망한 점이 많다. 그저 신토불이 한국인인 나는 우리의 소리와 음악에 심하게 매료되었고 빠져있다는 것을 오히려 느끼게 해준 공연이었다고 평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피의 본능이라고 정의내려 버렸다.

 

서편제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판소리를 하시는 분들은 어디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했다. 목청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였다. 배에서 올라오는 소리도 아닌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서편제에서 본 여배우의 소리는 더 깊은 곳에서 저절로 솟아나오는 소리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의 음악을 한의 정서가 담긴 음악이라고 하는 말을 말이 들었다. 한의 정서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소리를 그것으로 축소시켜버리는 것이 싫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 소리를 한이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 그것은 한의 소리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심신을 온통 나른하게 풀어뜨리는 소리의 정체는 응어리진 마음의 절규이자, 기어코 터뜨려지고만 부끄러운 고백인 것이다.

 

서편제에서는 아비가 딸의 마음에 한을 심어주기 위해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예술가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정녕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 가슴에 한을 키우기 위함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의부라지만 아비는 아비인데 제 딸에게 그런 못할 짓을 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난 어느쯤은 자식이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두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는 남자 쪽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영화로 본 천년학에서 책으로 보며 상상만 했던 학이 나는 듯한 선학동을 보았다. 그래픽효과였는지 실제 장면을 촬영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말이지 산과 물에 비친 산에 모습이 한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듯한 형상을 만들어 내는 절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선학동의 물길은 다 막혀버렸다. 더이상 학이 날아드는 마을이 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학이 날고 물이 들어오는 그 절경을 눈이 먼 그 여자는 느낄 수, 볼 수 있다. 이제는 물이 들어오지 않지만 그것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물이 들어오는 때를 정확하게 맞추어, 예전의 제 아비가 그 물들어오던 때의 절경에 심취해 그리했든 그녀도 자신의 한을 풀어내며 소리를 한다. 결국 그녀는 아비에 대한 원망의 한을 키워온 것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한 켭 두 켭 그 시간의 흐름을 갑내하고 이겨내며 쌓인 한이였던 것이다.

 

"사람들 중엔 때로 자기 한덩어리를 지니고 그것을 소중하게 아끼면서 그 한덩어리를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위인들이 있는 듯싶데그랴. 자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알고 보면 자네 오라비라는 사람도 아마 그 길에서 그리 먼 데 있는 사람은 아닐 걸세. 그런 사람들한테는 그 한이라는 것이 되려 한세상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폭 아니겄는가. 그 한덩어리를 원망할 것 없을 것 같네. 자네같이 한으로 해서 소리가 열리고 한으로 해서 소리가 깊어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일세. ... ... 자네 오라빈 자네 소리에 서린 한을 아껴 주고 싶은 나머지, 자네한테서 그것을 빼앗지 않고 떠나기를 소망했음에 틀림없을 걸세."

e********d 2007.04.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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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그 깊은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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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많은 이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애달픔이 들어있다. 그 목소리는 빛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닌 듯한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듣는 다면 이런 기분일까? 세상에 한이 없는 사람이 어딨냐며 한을 속으로 삭히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이러할까?   <천년학>을 읽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서 듣는 기분이었다. 노을 지는 언덕 밑으로는 파도가 물결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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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많은 이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애달픔이 들어있다. 그 목소리는 빛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닌 듯한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듣는 다면 이런 기분일까? 세상에 한이 없는 사람이 어딨냐며 한을 속으로 삭히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이러할까?

 

<천년학>을 읽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서 듣는 기분이었다. 노을 지는 언덕 밑으로는 파도가 물결치고 조용히 이야기를 하던 중년의 남자가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 단아한 여자가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내게 들려주다 조용히 일어나 소리를 할 것이다. 그저 나는 남자가 떠날 때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노을을 보고 여자가 구슬픈 남도소리를 마칠 때까지 손하나 까딱 못하며 그녀의 소리가 내 속으로 들어와 흔들어 놓아도 그저 듣고 또 듣고 할 뿐이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남도사람> 연작소설 세 작품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를 담고 있다. 현재 개봉 중인 영화 임권택 감독의 <천녁학>은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띠지에는 임권택 감독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이 띠지로 인해 이 책은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겠지만 띠지가 없다하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연작소설이니 주이공들의 삶은 얇은 인연의 끈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보일듯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희미함, 들릴 듯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함으로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닿고있다.

 

한 남자가 전라도 보성읍 박의 한적한 길목 주막을 찾아왔다. 주막집 여자와 그 남자의 이야기 속에 남자의 과거가 회상된다. 내 삶이 아니라는 듯,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는 듯 말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말에서 더욱 긴장이 되고 안달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남자는 어릴 적 홀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소리꾼의 아이를 낳다가 죽자 소리꾼과 함께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여동생과 함께. 남자는 어미를 죽인 소리꾼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덩이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 뜨거움은 남자에게 살의를 일으킨다. 다행히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태양때문'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하지 않고 남자는 소리꾼과 여동생을 두고 도망친다.

 

떠난 후에도 떠난 것이 아님을.

사람의 인연이 그리 쉽게 끊기지 않음을 남자와 여동생은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떠나지 않았을까?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여자의 아비는 그녀의 눈에 청각수를 넣어 눈을 멀게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의 소리는 지금처럼 한이 깊지 않았을까? 의붓아비는 아들이 자신에게 살의를 느낌을 알면서 일부러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는데 그가 아비를 죽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생각의 꼬리들은 부질 없는 것이다. 그녀와 남자의 초연한 목소리에는 용서가 담겨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용서. 용서 했기에 원한은 한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긴느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중략)

 

"... 그 여인이 제 아비를 용서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을지 모르는 노릇이지. 아비를 위해서도 그렇고 그 여자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여자가 제 아비를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건 바로 원한이지 소리를 위한 한은 될 수 없었을 거 아닌가. 아비를 용서했길래 그 여자에겐 비로소 한이 더욱 깊었을 것이고......"

 

얇고 가벼운 책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후다닥 읽어버렸다. 하지만 다 읽고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방에 넣은 책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 눈은 길을 쫓고 있는데 생각은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여는 순간 생각들은 한마리 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일까? 선학동의 학이 된 그녀일까? 이청준의 책은 읽고 난 후 한동안 독자에게 그를 잊지 못하게 하고, 주인공들의 마음을 대신 앓게 한다. 그것이 싫지 않다. 

 

이 책을 보고 난 후 <서편제> DVD를 구해왔다. TV에서 서편제를 간간히 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고 책을 읽고나니 여자의 남도소리가 듣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주에는 혼자서라도 조조로 <천년학>을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아직은 서편제도 천년학도 보지 않았지만 영화를 본 후에 이 책을 한번 더 손에 잡을 것 같다.

YES마니아 : 로얄 n******7 2007.04.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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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을 찾는 운명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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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동 나그네, 소리의 빛, 서편제라는 세 편의 연작 소설은 <천년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부활했다. 세 편의 제목만 읽어서는 <천년학>이라는 제목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오누이의 진정한 만남과 깨달음이 <천년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독하지 않은 이상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년학>을 찾기 위해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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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학동 나그네, 소리의 빛, 서편제라는 세 편의 연작 소설은 <천년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부활했다. 세 편의 제목만 읽어서는 <천년학>이라는 제목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오누이의 진정한 만남과 깨달음이 <천년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독하지 않은 이상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년학>을 찾기 위해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단숨에 읽어 내렸다. 문득, 이렇게까지 철저하고 처절하게 자신을 학대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배다른 오누이가 짊어져야 했던 한을 이해할 수 있을까. 평생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소리를 해야 했던 누이의 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남도 사람 연작 소설은 그 자체가 한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언제나 소리에 얽매여 있었고, 햇덩이를 가진 오라비는 그러한 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수를 해야 했지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햇덩이를 감당할 길이 없던 오라비는 결국 아버지와 누이를 내버려 두고 떠난다. 다시는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을 찾아 헤매이지만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누이는 종적을 감추었다. 게다가 누이는 장님이라 한다. 오라비는 누이가 눈을 잃은 이유를 단숨에 꿰뚫는다. 오라비가 떠난 것 처럼, 누이가 떠날까봐 겁이 난 아버지의 횡포라는 것을.

 

 소리로 인해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는, 소리로 인해 눈을 잃은 누이의 한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아버지를 용서한 누이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소리는 한의 정서에 의해 태어났다는 기존의 학설처럼, 그들에게 소리는 그 자체로써 한의 대상이며, 한을 풀어 내는 매개체이다. 그런 아이러니는 이루 감당할 길이 없을만큼 처절하게 느껴진다. 한의 대상인 소리를 듣기 위해 떠도는 오라비와 소리를 뽑아 내는 누이는, 그렇기에 더욱 쌍둥이같은 닮은 꼴로도 보인다.

 

 오라비가 누이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결국 오라비가 누이를 찾았는가는 의문이다. 찾는 동안 한 번의 만남은 있었으나 그것으로 누이를 찾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 오라비에게 나를 찾게 하지 마시오. 전 이제 이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 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 하시오…….

 

 누이는 이런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남은 <천년학>을 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선학동은 이미 옛 모습을 잃었지만, 누이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천년학>을 보고, 또 오라비가 그것을 보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만남이리라. 그리하여 오누이는 가슴에 지닌 한을 끝끝내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서로의 한을 이해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라비가 생의 분노와 살기인 햇덩이에 취해 소리를 청하는 것을 누이가 이해했듯이, 누이가 아버지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을 오라비가 이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허나 이렇게 닮은 꼴이기에 서로의 한을 서로가 덮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다.

 

 누이는 한 마리의 학이 되어 소리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오라비는 누이를 찾아 헤매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갈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운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霖

m*******y 2007.04.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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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경지로 승화된 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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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서 영화화 됐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작품이 내 기억을 고등학교 시절로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선학동 나그네'였다. 이 작품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이 작품을 본 후 정신없이 빠져들었었다.. 마치 내가 주막에서 손과 주인이 하는 얘기를 문 뒤에 숨어서 엿듣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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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서 영화화 됐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작품이 내 기억을 고등학교 시절로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선학동 나그네'였다.

이 작품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이 작품을 본 후 정신없이 빠져들었었다.. 마치 내가 주막에서 손과 주인이 하는 얘기를 문 뒤에 숨어서 엿듣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손(客)이 소리꾼 누이의 오라버니 임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체하는 주인과, 역시 자신이 누이의 오라버니임을 끝내 말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 손(客)의 모습에서  정말 숨막히는 긴장감을 느꼈었다. 그 뒤로 나는 집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서편제를 비디오로 보고 이청준 선생님의 다른 작품도 읽게 되었다. 이렇듯 '선학동 나그네'는 나에게 있어서 각별한 소설이다.

 

각설하고,

 

천년학에 수록되어있는 작품들은 예전에 읽었지만 오래되서 매우 새로웠다.

 

아버지에 소리 욕심으로 인해 평생 장님으로 살아가는 눈먼 누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의붓아버지를 원망하지만 끝내 죽이지 못하고 도망가는 누이의 오라버니

그들 남매에게 있어서 소리라는 것은 한(恨) 이었다. 의붓아버지에 대한 미움, 유리걸식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녔던 고달픈 삶, 장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삶...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소리였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이 원망스러운 한(恨)을... 그들을 이토록 처절하게 만들었던 '소리'를 통해서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킨데 있을 것이다.

한(恨)은 응어리진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나 예술적 경지로, 그리고 마침내 한마리 학으로 형상화 되었다.

누이의 오라버니 또한 한이 누이의 소리의 근원임을 알고 끝끝내 누이에게 자신이 오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한(恨)의 근원이었던 소리를 통해서 남매지간이란 것을 암묵적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누구 말대로(아마도 소설가 박완서 님으로 기억됨)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했다면 한은 온데간데 없고 고전 신파극으로 남는 그저그런 소설이 됐을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밝히지 않고 끝나는 모습에서 이 소설의 감동이 더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로도 개봉되면 다시한번 보고싶다..,

 

 

 

 

 

 

 

 

 

c******0 2007.04.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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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사람의 우여곡절, 그 모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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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사람의 우여곡절, 그 모든 이야기..   학창시절에 국어시간은 참 지루했다. 책을 읽고 감상만 하면 분명히 즐거운 수업시간이 되었을 텐데, 문학작품을 마치 요리책 대하듯 한 구절, 한 단어를 분석하고 외우기에 바쁘니, 거기에 지쳐서 흥미가 다 달아날 수 밖에. 오히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뒤 우연히 국어와 문학 교과서를 다시 읽고는, 이렇게 유익하고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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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사람의 우여곡절, 그 모든 이야기..

 

학창시절에 국어시간은 참 지루했다. 책을 읽고 감상만 하면 분명히 즐거운 수업시간이 되었을 텐데, 문학작품을 마치 요리책 대하듯 한 구절, 한 단어를 분석하고 외우기에 바쁘니, 거기에 지쳐서 흥미가 다 달아날 수 밖에. 오히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뒤 우연히 국어와 문학 교과서를 다시 읽고는, 이렇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글이 많이 담겨져 있었던가 놀라기도 했었다.

 

<천년학>은 연작 <남도사람> 인 '서편제'와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묶여져 나온 책이었다.  '선학동 나그네'는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일부가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었는데, 늘 '서편제'와 '소리의 빛'까지 포함한 연작 전체를 읽어 보고 싶은 마음만 갖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서야 이렇게 연작을 함께 읽게 되면서 미루고 미뤄왔던 묵은 계획을 실천하니 책을 읽는 마음이 더욱 즐거웠다.

 

<남도사람>은 1993년도에 '서편제'가 영화로 개봉되면서 사람들에게 그 내용이 많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국어시간에 '선학동 사람들'을 배우면서 그 줄거리를 배웠기 때문에 이미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자세히 읽고 보니, 역시 구수하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글에는 줄거리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섬세한 한국인의 정서라고 해야할까? 한국인이 아니고서도 과연 이 느낌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인 이청준 선생님은 7차 교육과정에 수록되기도 한 <눈길>을 비롯해서, 각종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병신과 머저리> 등 다수의 문학작품을 내신 분이시고, 이 책은 그 분의 그 유명한 <남도사람> 연작의 모음책이니, 집에 꼭 한 권 있어야 할, 소장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조금 주책스럽지만,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문화를 좀 더 이해하고, 한국인의 '한'의 정서를 느끼며 감성을 키우기에도 무척 좋을 것 같다는, 10여 년쯤 뒤의 어느날을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남도사람 연작의 우여곡절이 한 권으로 담긴 책, 한국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가슴 아련한 삶의 이야기가 담긴 책, 우리집 책꽂이에 떡 하니 꽂힌 <천년학>을 보고 있자니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든다.

y******1 2007.05.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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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한은 유전자 속에 깊이 세겨진...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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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라디오'였다.  반찬통만한 크기의 라디오는 도시락 크기만한 밧데리를 검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채로 하루 24시간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나의 기억속에 할머니는 항상 라디오와 함께였다. 마치 할머니의 분신이라도 되는양 말이다. 20여년 전이었던 그때만 해도 그 못생긴 소리통이 심심찮게 민요가락을 뽑아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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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라디오'였다.  반찬통만한 크기의 라디오는 도시락 크기만한 밧데리를 검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채로 하루 24시간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나의 기억속에 할머니는 항상 라디오와 함께였다. 마치 할머니의 분신이라도 되는양 말이다. 20여년 전이었던 그때만 해도 그 못생긴 소리통이 심심찮게 민요가락을 뽑아내곤 했는데 그 순간에 할머니의 표정이 가장 행복해 보였다. 엿가락 늘어지는 듯한 지리한 곡조를 왜그리 좋아하실까? 언니들과 "잉잉잉~~" 거리며 흉내 내다가 혼나기도 했었다. ^^;;  세월이 흘러 <서편제>라는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우리의 '판소리'가 참으로 개성있고 독특하며, 예술적인 장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내면의 감정을 왈칵 쏟아낸 후 진한 여운을 남기는 '우리의 소리', '한국의 미'를 그제서야 느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이 책에는 이청준님의 [남도사람] 연작 세 편이 실려있다. <서편제>, <소리의 빛>, < 선학동 나그네> 이 중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에 의해 십수년전 이미 영상화되었고, 거장의 100번째 작품이자 책의 제목인 '천년학'은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영화 개봉에 맞추어 새롭게 책이 출간되었구나 싶었는데 보통의 단편집인 경우 6편 내외의 작품이 실린 것에 비해 책이 얇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게다가 <서편제>와 <소리의 빛> 일부 내용은 주석에서 밝힌대로 겹치는 부분도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영화에 있어서도 평론가들의 호평속에 개봉하였으나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역시나 작품성과 흥행 두 가지 다를 만족하기란 쉽지 않은가 보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서편제> p.52"

 

 한국인의 정서를 이야기하면서 '한恨'을 빼버린다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되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요즘엔  '한이 맺힌다' 라든지 '한스럽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잘 없는 것을 보면 물질적 풍요가 한스러움을 달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는 있나 보다.  단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또다른 모습으로 '한'을 품기도 하고 표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점차 서구화되고 있는, 이미 서구화 되어버린 이 사회가 가끔씩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삭막함 속에 분명 무엇가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恨'이야 아쉬울 것도 없다지만 함께 시들어가는 '정情'이 그립다.

 

 "사람들 중엔 때로 자기 한덩어리를 지니고 그것을 소중하게 아끼면서 그 한덩어리를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위인들이 있는 듯싶데그랴. <중략> 그런 사람들한테는 그 한이라는 것이 되려 한세상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폭 아니겄는가.  그 한덩어리를 원망할 것 없을 것 같네. 자네같이 한으로 해서 소리가 열리고 한으로 해서 소리가 깊어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일세.  <소리의 빛> p.92 "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끊이지 않는 외세의 침략에도 꿋꿋하게 나라를 지켜내고... " 라는 점에 공감하면서 그 시대를, 몸서리쳐지는 시대를 사셨던 분들에 대해 고개가 숙여진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 '전쟁'아니던가.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것도 없이 할머니 세대만 해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6.25등 말 그대로 수난의 시대를 사신 분들이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다.  해방둥이, 전후 세대로서 급변하는 시대를 사신 분들이다.  그분들의 힘은 "내 자식은 배 곯리지 말아야지, 내 자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시켜야지. 내가  ~하지 못한 것이 한인데..."  어쩜 내 부모님도 '한덩어리'를 조금씩 갈아마시면서 그렇게 자식들을 키우셨으리라.

 

 책을 덮으면서, 문득 비만과 관련해서 인터뷰했던 의학박사의 주장이 떠오른다. 똑같은 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해도 서양인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의 경우 비만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데 그 이유인즉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기근', '기아'에 익숙해져 유전자속에 정보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기아'에 강하다(?) 적자 생존의 법칙인가 하겠지만 하여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분의 주장이 참으로 설득력 있게 와닿았다. 생뚱맞게 왠 '비만'에  왠 '유전자'냐 싶겠지만, 한국인에게 있어서 '한恨'이란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진,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 아닐까 생각한다. 

m******n 2007.04.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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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처럼 쌓인 '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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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소리를 재촉한다. 서른이 채 될까 말까한 여자는 목축임을 하고서는 구성진 남도소리를 뽑아낸다. 허나 소릿재 길의 소릿재 주막이라는 이름은 이 여인으로 인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다. 여인의 소리에 앞선 내막이 따로 있었다. 다그쳐대는 사내의 추궁에 못 이겨 털어놓은 이야기는 소리꾼과 소리꾼의 딸아이가 읍내 한 대갓집 사랑채에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직 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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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소리를 재촉한다. 서른이 채 될까 말까한 여자는 목축임을 하고서는 구성진 남도소리를 뽑아낸다. 허나 소릿재 길의 소릿재 주막이라는 이름은 이 여인으로 인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다. 여인의 소리에 앞선 내막이 따로 있었다. 다그쳐대는 사내의 추궁에 못 이겨 털어놓은 이야기는 소리꾼과 소리꾼의 딸아이가 읍내 한 대갓집 사랑채에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직 멀티플렉스 극장이 나서기 전, 그러니까 한 지역의 한 극장에서 한 영화만을 상영할 수 있던 시기에 10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서편제'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서편제'였다. 이것은 남도사람 시리즈로 서편제(남도사람1), 소리의 빛(남도사람 2), 선학동 나그네(남도사람 3)로 이어진다. '서편제'와 '소리의 빛'은 영화 '서편제'로 '선학동 나그네'는 영화 '천년학'으로 거장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상으로 되살아나, 우리는 눈먼 소리꾼 누이를 찾아다니는 아비가 다른 오라비의 길에 동행했다.

 

사내는 소리꾼 아비에 의해 눈이 멀었다는 계집자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스런 열기에 휩싸인다. 몸을 불태울 듯 뜨거운 태양의 불볕.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햇덩이는 어릴 적부터의 한 숙명의 태양이었다.

 

햇덩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계집아이와 소년을 앞세우고 고을고을 소리를 팔며 떠돌아다니던 때 소년은 소리꾼 사내를 해치려는 기회를 기다리며 순순히 시키는 대로 북채를 잡았다. 그것은 길고도 무서운 복통 끝에 핏속에서 쏟아내듯 작은 살덩이 형상 하나를 낳아놓고는 그날 새벽으로 영영 눈을 감아버린 어미의 원한의 갚는 길이자, 사내가 자신을 해하기 전에 먼저 없애려는 것이기도 했다. 소리꾼 사내는 그런 소년을 모른 체했고, 자신을 견딜 수 없었던 소년은 두 사람 앞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 고통스런 사내의 얼굴을 버릴 수 없었던 소년은 그 햇덩이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소리를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햇덩이는 한이었던가. 소리꾼의 딸아이는 어느 날 밤 숯불이라도 들어부은 듯 두 눈알이 모진 아픔으로 활활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그것으로 영영 앞을 못 보는 장님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하면 눈으로 뻗칠 사람의 정기가 귀와 목청 쪽으로 옮겨가 눈빛 대신 목청소리를 비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소년이 햇덩이를 피해 있는 사이 누이는 그렇게 눈이 멀었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자신을 죽이려던 소년을 못 본 척 하고, 딸아이의 눈 속에 청강수를 몰래 찍어 넣은 소리꾼 사내도, 어미가 죽은 후 소리꾼 사내의 얼굴을 햇덩이로만 기억하며 숙명처럼 평생 누이를 찾아 헤맨 사내도, 어느 날 타는 아픔으로 눈이 먼 채 동생과 아비를 잃고 홀로 떠돌아다닌 누이도 저마다 삶을 살아내 듯 한을 쌓아갔다. <오라버니도 아마 저 모양으로 당신의 한을 먹고 살아가시는 양반이라면 이제 다시 제게 와서 당신의 한을 앗길 짓을 하시지도 않으실 양반이오.>

 

영화가 남매의 숙명의 길이었다면 남도사람은 한의 길이다. 저마다 햇덩이를 이고 산다. 남매가 오랜 엇갈림을 끝마치는 순간, 햇덩이는 사라질 것인가. <하지만 그 누이는 여전히 종적을 알 수 없다. '오라비에게 나를 찾지 말라 하시오. 나는이제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 마리 학으로 남겠다 하시오.'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사라진 누이이니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운명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라비가 그녀의 소리를 찾아 헤매는 일을 그치지 못하는 한 저 선학동과 남도 천릿길 노랫가락 또한 그침이 없을 것이다.>

 

w******7 2008.01.25. 신고 공감 0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