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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로버트 카파의 사진전에서 노르망디의 사진을 보며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전쟁은 나쁜 것이라고 거품을 물고,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장면장면과 라이언일병구하기에서 보았던 그 생생하게 재현한 전쟁장면에 속갑갑한 기분을 안고 있었는데, 화요일 내 손에 조정래 선생님의 "오 하느님"이 들려졌다.
노르망디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그 말에 머리가 띵했다. 그 총알이 빗발치는 남의 나라 전쟁에 왜 우리나라 사람이 라는 의문으로 시작한 책은 생생하고 눈에 착착들어붙는 문장 때문에 한시도 의문을 되새김질 할 사이없이 끝나버렸다.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소련군에서 독일군으로 독일군에서 미국포로로 다시 소련군으로 돌아가서 생을 잃어버리다니.. 전쟁도 안되고, 침략도 안되고 총질도 안된다!
읽으면서 다시한번 조정래 선생님이 글에 감복했다. 큰 오열도 없는데, 가슴에 쑤시는 통증이 오고 신길만과 그 외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을 읽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군더더기 없는 선생님의 글에 다시한번 박수를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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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깊은 감수성이나 문학적 시각을 전혀 지니지 못한 나로썬 왠만한 책을 읽은 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왠만한 베스트셀러를 몽땅 다 읽은 후에도 허무한 느낌을 느끼는게 대부분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오하느님이라는 소설에 대해 한번도, 어떤 말도 들은 적이 없었다. 평소처럼, 서점에 놀러갔다가 평소처럼, 베스트셀러 란에 머물다가, 평소 사고싶던 다른 두권의 책을 산 후 그냥- 아무생각없이- 조정래 님이라는 이름 하나때문에 한번 읽어나볼까 해서 사들고 온 이 책이, 이렇게 별 다섯개가 모자랄 정도로 내게 감동을 주었을 줄은 그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조그만 책에 담긴 웅장한 스케일은 물론이려니와 평소 남들은 문학적 차원이라 칭하는 주인공의 깊은 감정묘사, 그에 담긴 산만한 문체들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내가 읽기에,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한 책은 전혀 보질 못했다. 외국 유명 소설의 번역본이 아닌 한국소설만의 베스트셀러의 배부름을 느낄수 있는 소설이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책, 그만큼 몰입력이 대단한 책, 책을 덮고 한동안 책 표지를 쳐다보면서 멍 하게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책. 별 다섯개, 그야말로 강력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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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선생님은 우리 문학의 거대한 산맥이다. 그 산맥이 여전히 푸르고 깊은 숲이라는 게 이렇게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외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내 마음속엔 그런 자랑스러움이 있었다. 재미난 한국영화를 보고 나서 옆의 외국인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그렇게 잘난척해봐야 이렇게 재밌고 좋은 우리 영화를 못 보니 안쓰럽지 않은가 말이다. <태백산맥>, <아리랑>의 거대 산맥을 넘으며 간혹은 마음이 먹먹하고 숨이 막히기도 해서 몇 번이나 책을 내려놓아야 했었다. <대장경>을 읽으면서는 우리의 한에 어린 불심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해서 무작정 절에 들어가 엎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인간 연습>은 이 모든 작품들의 정수이며 조정래 문학의 완성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정치와 신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한 가지 생각으로 끌어나간 단순한 작품이었다. 물론 그 작품 하나만 놓고 봤을 때, 부족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긴 했으나 조정래라는 거대 산맥에게 기대한 작품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오 하느님>이 내 앞에 있다. 일단 재밌는 작품이다. 조정래 선생님의 힘이 여전히 느껴지는 꽉 찬 느낌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의문제기부터 시작하겠다.
왜 제목이 <오 하느님>인가. 기독교적인 색채가 있는 책인가? 아니다. 그럼 오 마이 갓인가?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별로 없다. 단 한 번 나오는 저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설도 납득할 수 없다. 배가 둑도록 고프다가 나온 먹을 것을 보고 하는 저 말이 얼마나 웃기는 말인지... 그만큼 간절하지 못했다. 그냥 요즘 사람들이 ‘아이구 하느님...’ 할 때하곤 그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지 않는가. 이 책의 제목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더라도 처음부터 주인공처럼 나오는 신길만의 어머니가 외는 염이어야 했다. “관세음보살님...”
우리 엄마는 불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불교신자다. 옛 어른들이 종교로 교리를 배우거나 내세를 위한 기도를 하기보다는,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이나 습관처럼 절에 가고 약간은 미신적으로 믿는 그런 신앙 있지 않은가.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 머리 조아리고 무조건 비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엄마의 신앙이고 신길만 어머니, 그 당시 모든 어머니들의 신앙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내세를 관장한다면, 관세음보살님은 현세를 관장한다고 한다. 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예전에 자주 김해와 서울을 차로 왕복할 때는 꼭 엄마가 가르쳐준 염을 왼다. “관세음보살님, 도와주세요...” 처음엔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생각이었지만, 이젠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하거나 어려운 일을 앞뒀을 때, 또는 비행기를 탈 때, 마음속으로 외게 된다.
꼭 그와 비교할만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길만의 어머니, 그 당시 자식들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 절박한 심정은 어땠을 것인가. 그 어떤 말보다도 “총알 피해댕겨라.”라는 아버지의 말씀, “관세음보살님을 염혀...”라는 어머니의 말씀, 그게 전부였다. 어떻게든 살아야, 생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관세음보살, 살려주세요...”란 말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절박하게 그들의 입에서 절로 나왔을 것인가 말이다.
그 모진 세월을 그렇게 오래 겪었는데,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신앙이 아니었겠는가. 남의 나라 전쟁에 용병도 아닌 용병이 되어 말도 한 마디 안 통하는 곳을 떠돌며 그들이 갈구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조선이라는 아버지, 조선이라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노랑머리에 코큰 외국인들 가운데 무심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키 작은 동양인들... 그들이 어떻게 몽고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을 거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떠났는지...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 마음에 품은 그리움과 슬픔은 어떤 것이었는지...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을 터이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기쁘고 고맙다...
‘신길만은 조사실을 나서며 새롭게 솟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눈길과 고갯짓은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위로고 정이었다. 사람끼리 말이 통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중대한 것인지 신길만은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말을 한다고 다 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 녹아있는 그 민족의 정신, 문화, 습관... 그 모든 것이다. 눈길 한 번이, 고갯짓 한 번이 모든 걸 다 느끼게 해줄 때가 있는 것이다.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면 재미도 있고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난 절대 외국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가 저런 느낌, 저런 정서를 가진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사랑이 부족하거나 내가 민족주의자 같아 보이겠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난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날라리 불교신자도 아니면서 엄마가 가르쳐준 ‘관세음보살님’을 마음으로 염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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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신길만이 마지막에 노르망디 해안에서 포로로 잡히고, 조정래는 책 뒤에서 신길만을 포로로 잡은 미군 병사는 미군 공수부대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부대는 미군 4사단, 1사단, 레인저 부대등이고, 101 공수사단과 82 공수사단은 D-day 전날 노르망디 후방에 낙하합니다. 그러니 D-day에 노르망디 해안에서 미군 공수부대에 포로로 잡혔다는 설정은 완전히 틀린 고증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내용은 매우 훌륭하지만, 2차 대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을 틀리는 실수는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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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편이란 용어를 처음 접하게 된 작품이다. ‘장편소설’이라고 되어있으면서도 그 분량이나 내용의 질은 감히 장편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조금 ‘가볍다’. 말 그대로 ‘경장편’인 셈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조정래의 다른 대하소설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작가의 입장에서 대하소설을 쓴다는 것이 엄청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읽는 사람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노력과 고통의 시간이 작가에서 요구되는 것이 대하소설일 터. 그렇기에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으로 이어지는 조정래의 소설적 맥은 그 웅장함이 더하다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이전의 대하소설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내용은 충분히 이전의 다른 소설들에 못지 않는 묵직한 것이다. 신길만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일제 말기 징병으로 끌려와서 만주에서 모스크바, 노르망디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여정만큼이나 신길만의 인생 역시 기구하다. 처음에는 일본군으로 시작되었다가 소련군, 독일군으로 군복을 갈아입는다. 그것은 신길만의 약은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대상황이 그렇게 몰고 간 것이다. 오로지 고향에 살아서 돌아아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온 것이 그렇게 우습지도 않은 삶의 궤적을 그리게 한다. 신길만을 비롯한 여러 조선의 청년들이 그렇게 군복을 갈아입고 총을 든 이유는 오로지 하나. 살아사 고향에 돌아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위치한 곳은 불행히도 20세기의 격변의 역사 한 가운데였다. 더욱 불행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위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 군복을 입고 누구와 싸워야 하느냐보다 얼마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느냐 하는 것이다. “독일이면 우리나라에서 몇천 리나 떨어져 있을까요?” (중략) “몇천 리가 뭐요. 몇만 리는 떨어져 있을 건데.” 그렇지 않느냐는 듯 정우섭은 신길만을 쳐다보았다. “아마 그럴 거요.” 신길만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지그시 눌렀다. “몇만 리……, 빌어먹을, 그냥 보내줘도 못 찾아가겠구먼.” (113쪽)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신길만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다. 관세음보살만을 찾는다거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려도 산다는 말씀. 그리고 총알만 피해다니라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이러한 신길만의 역정 속에 소련내에서 있었던 조선족의 강제이주라는 역사적 사실이 얽힌다. 이 책의 제목이 ‘오하느님’인 것도 이런 가혹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숱한 조선청년들이 외쳤을 소리에 다름 아니다. 무엇 하나 가볍지 않은 묵직한 주제들로 가득한,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었다. 다만 이렇게 가볍지 않은 내용을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으로 소화하다 보니 왠지 다이제스트한 듯한 느낌을 저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좀 더 많은 내용이 그려질 수 있을 장면들이 단순화되어 버린데 대한 아쉬움이랄까. 조정래에게 또 하나의 대하소설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지 모르지만 이 내용은 좀 더 큰 틀 안에서 다루어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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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조정래의 펜으로 되살아난 '독일군복 입은 조선인' 이야기.
소설 [은하영웅전설]에서 암리츠아전후 양 웬리 중장은 중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중위, 나는 역사를 공부한 적이 있어. 그래서 조금은 알고 있는데 말야...인간 사회의 사상에는 크게 두가지 조류가 있다네. 생명이상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학설과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다는 학설, 그 두가지지. 그런데 사람이 전쟁을 시작할 땐 전자를 택하고, 싸움을 그만둘 땐 후자를 이유로 내세우더군. 그것을 지금까진 수백 년, 수천 년 반복해 왔다 그 말이야."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 '전쟁이야기'를 청하는 것은 '끝없는 연옥에 빠져 허우적대는 악몽'을 대낮에 꾸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빗발치는 포화속에서 살아났지만, 그들이 시름하는 이유는 죽은 자들의 망령을 항상 어깨에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늙은이들이 전쟁을 선포하지만, 싸워야하고 죽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이다'라고 미국의 H.후버가 한 말처럼 TV를 켜면 오늘 이시가에도 지구촌 어디에서 젊은이들은 총부리를 맞대고 싸우며 죽어가고 있다. 그들은 총을 들고 태어난 전사들이 아니라, 우리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었고, 어느 부모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이다.
![]() ![]() 소설가 조정래의 시선은 늘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가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가 쓴 책 [D-Day]에서 언급한 '노르망디 조선인(한국인)'에 대해 TV의 한방송국이 다큐멘터리로 내놓자, 이를 바탕으로 한 편의 경장편을 써내렸다. [오 하느님]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이야기의 시작부터 주인공 신길만과 그와 생과사를 함께 했던 조선인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없었다. 소련군의 괴물같은 탱크 앞에서도 총을 들고 뛰어 들라면 뛰어 들었고, 배가 고파도 식량보급을 하지 않으면 굶어야 했다. 처음부터 지원군 '지명'에 의해 일본군이 되었고, 살기 위해 그들은 소련군이 되었으며, 독일군으로 변신해야 했다. 군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바뀐 색깔만큼 고향땅에서 멀어졌음을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면...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다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2차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 속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우리 젊은이들의 7년여의 여정이 담겨있다. 하루 하루를 전투로 살아가는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육덕지고 구수한 우리네 농짓거리를 작가는 마치 함께 녹아서 경험한 듯 표현했는데, 그들의 빈웃음이 독자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한다.
일본군포로에서 소련군이 되기 전까지의 고초는 마야자키 도오코의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를 연상케하고 조선인들의 입담은 이광수의 단편소설 [무명無明]을 떠오르게 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과 의지로는 돌릴 수 없는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사라져간 이름없는 조선인들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소설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이 책은 재확인 해준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고 죽을 둥, 살 둥 헤엄쳐 나왔다면 좋으련만... 먹먹해진 가슴 달래느라 혼났다. 비극적 결말이 야속해 얼른 책을 덮었지만, "우리는 소련인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우리의 국적을 고쳐 달라. 우리를 조선인이 많은 수용소로 보내 달라." 고 피를 모아 만들어낸 그들의 혈서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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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야말로 만물의 아픔을 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약이다. 하지만 전쟁의 트라우마는 숱한 시간이 흐른다 하여도 완벽히 사그라들지 않는 것인 듯하다. 세대가 바뀜에 따라 직접 상대의 심장을 향해 총칼을 겨누었던 이들의 상당수가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부모 세대로부터 들은 이야기 혹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한 영상 등을 통해 전쟁의 끔찍함은 끊임없이 후세대로 전래되고 있다. 작가의 이번 작품은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나에겐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비극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중요한 매개체이다.
등장인물들에게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삶을 향한 의지뿐이었다. 살아서 고향이 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들의 사고로부터 어떤 이념 따위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었고, 아비의 운명을 닮지 않길 바라는 부모의 꿈에 의해 초등 교육을 마쳤을 따름이다.
중요치 않은 삶은 없기에 모든 죽음은 안쓰러운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만난 삶과 죽음은 진정 비극이었다. 그들의 삶은 전쟁에 의해 삶이 아닌 것으로 변질되었고, 그들의 몸은 전쟁에 의해 하나의 몸뚱아리로 전락되었다. 입이 있으나 말을 할 수 없는, 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들이 겪은 것은 죽음보다도 더욱 두려운 소외였다.
지금껏 살아온 것을 헛되이 만드는 마지막 장면의 끔찍함을 보며 나는 절로 '오 하느님!'을 외치고 말았다. 스탈린과 소련군의 무자비한 모습을 부각시키기에 충분한 대학살은 그러나 스탈린이나 소련군 혹은 공산주의만을 탓할 수 없다.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한 관동군 장교와 일본군의 모습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을 파괴하는 것도 용납하는 일본 제국주의를, 국적을 고치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이 아니라고 말하는 미군 소장의 모습은 최소한의 인도주의도 발휘치 못하는 미군의 경직성을 보여준다. 옷은 달리 입고 있으나 조선인들을 받아들인 사회는 모두 폭력적이었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집단은 아무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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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 1939년 만주국경 분쟁 시 소련군에 붙잡혀 소련군에 편입됐다. 그는 다시 독일군에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하는데 투입되었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미군의 포로가 됐다. 붙잡혔을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이야기 했다. 1944년6월5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 해안에서” 한 장의 사진에 붙어있는 설명서에 이렇게 써있었다. 그리고 한 소설가는 이 사진을 설명한 글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 그 소설이 바로 <오! 하느님>(문학동네.2007년>이다. ‘신길만’은 고향에서 일본군에 징집되고, 관동군에 배치되어 만주 몽골 국경부근의 전쟁터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일본군들에게는 보통 전쟁에서 패전 시 포로가 되지 말 것을 지시한다.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을 선택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인공인 일본인도 아니다. 그는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보려는 일념으로 살아남아 포로가 된다. 포로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 소련군은 그들을 소련군으로 편입시킨다. 그래야만 그들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설득하면서 말이다. 그들에게는 어느 나라 군복을 입는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을 보전하여 고향의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소련군의 군복을 입은 그들은 독일과의 전쟁터에 투입된다. 독일의 모스크바 진입 시도 서 그 조선인들은 또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참,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다시 독일군에 편입된 그들은 유럽대륙의 맨 왼쪽인 대서양 부근의 해안에 배치된다. 그 해안의 이름은 바로 ‘노르망디’였다. 2차 세계대전의 역사에서 승패를 가른 분기점이 된 그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된다. 정말 ‘오! 하느님’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누구를 또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는가? 보통 전쟁은 나의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래야만 그들은 적이라는 이름의 상대방을 죽이는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고, 참전한 것에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적인 일본을 위해 전쟁터에 나간다. 자신이 원해서 군인이 되어 참전했다면 전쟁을 통해서 영웅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를 볼 때 남자가 신분의 상승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전쟁과 혼란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징집이 되어,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의미 없는 전쟁터에 가게된 것이다. 그들의 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입은 군복과 다른 군복의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전투의 승리보다도 자신의 생명의 안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생김새가 다른 몇 벌의 군복을 입었던 것이었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의미는 ‘제국주의’도 ‘이데올로기’도 없는 생존에 모든 것을 걸어놓은 총질에 불과했다. 이 책은 내게 과연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은 자유의지인데, 그들의 생존과 미래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타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역사의 소용돌이치는 바퀴살에 튀어나가는 작은 돌부리처럼 그들의 삶은 타자의 의사에 철저히 종속된 채 자신의 가치는 전혀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 대부분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정의도 도덕도 존엄도 그 어떤 가치 있는 단어도 그들의 삶에는 투영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생존에 급급한 한 마리의 야생동물의 모습과 지극히도 비슷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위대함이 그들에게 있었던가? 그저 장마 후 쓸려 내려간 토사와 같이 그들은 전쟁이라는 큰 빗속에 산산이 해체돼 자신이 있었던 곳에서 쫓겨나간 하나의 모래와 자갈에 불과했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존재가치는 거의 영에 가깝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기에 독자들의 그들의 삶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며, 그 측은함에 깊은 동병상련을 느낀다.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작가의 상상에 의해 쓰인 이 책은 과연 역사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라는 철학적인 의문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으며, 슬픈 코리아의 20세기 초반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정말 그곳에서 죽었을까? 그 한 장의 사진 속에 독일군복을 입는 있는 슬픈 코리안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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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소설이라 나름 기내를 하고 펼쳤으나, 책을 덮을때의 그 황당함과 허탈감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등장인물의 묘사나 characterization은 너무나도 엉성하다. 소설속에서의 어떠한 '사람'이 아니라, 영화에서의 케릭터 수준에서 묘사가 그친다. 등장 인물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책을 덮고도 아무런 인상이 남지를 않는다.
스토리 전개는 또 어떤가.. 조정래는 대하소설을 써야 하는 작가인 듯 하다. epic을 담배한갑에 쑤셔 넣은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머리 속에는 이러저런 생각들도 있었고, 스토리에 대한 큰 사진은 있는데, 이걸 단지 몇페이지에 압축해 넣으려니, 소설이 아니라, 영화 screenplay를 읽는 듯 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의없고, 개연성없는 스토리 전개가 가장 큰 단점이 아닐까 싶다.
책을 다 읽고, 황석영과 조정래를 머리속으로 비교해 보았다. 황석영은 소설가이고, 조정래는 이야기꾼(story-teller) 인 듯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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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말이 필요없다. 짧지만 엄청난 흡입력과 속도감 내겐 엄청 재밌는 판타지를 보는정도의 몰입도를 선사해주었다. 밴드오브브라더스와 SBS의 다큐가 다시보고 싶어진다.. 조정래님 감사합니다. 이런글을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 정말 옹졸하지만, 지금 이시대에 태어난걸 안도하고 감사하게ff 된다....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