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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일종의 액자소설이라 할 수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소설가인 화자 ‘나’가 이끌어가는 내용이다. 바깥 액자의 화자인 ‘나’는 우연히 들른 전시회의 조각가인 장운형과 만나고, 이후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느 날 전달된 두터운 스케치북에서 읽은 내용이 바로 소설의 본격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남아서 우연히 들른 지방 도시에서의 전시회, 인사동에서 받은 전시회 팸플릿의 주인공, 그리고 후배의 연극 공연에서 소품으로 사용된 조각품의 작가로서 모두 3차례에 걸쳐 ‘나’는 그의 이름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연극의 뒤풀이에서 그 주인공을 만나고, 자신에게 전달된 장운형이 남긴 기록을 접하게 된다.
이어지는 내용은 모두 조각가인 장운형이 남긴 기록들을 그대로 전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란 제목의 ‘서’에서 장운형은 소설가인 ‘나’와의 만남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아마도 ‘나’와의 만남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1부 ‘손가락’에서는 장운형의 어린시절부터 삶의 내력이 소개된다. 차가운 인상의 어머니, 대학교수로서 사회적 체면을 지극히 중시하는 아버지, 그리고 두 누이가 이룬 가족의 모습은 정상적인 그것과는 조금은 다르게 묘사된다. 그 사이에 끼었던 어린 고모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들로 인해, 가족들과의 불화와 그들과 자신이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서술되고 있다.
아버지를 경멸하던 외삼촌이 죽고, 염을 하던 순간 시신에 손가락 두 개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 이 대목에서 장운형은 외삼촌에게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장운형은 평소 아버지를 경멸하던 삼촌의 모습에서 일종의 당당함을 느꼈던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위선적인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 두 개가 없던 삼촌이 살아생전 그것이 완전한 것처럼 지냈기 때문일까? 그가 이후 조각가로서 손에 집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성스러운 손’이라는 제목의 2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의붓아버지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던 ‘L’과 장운형의 만남이 다루어지고 있다. ‘L’은 그러한 어두운 과거 때문에 폭식을 하면서 지나치게 비대한 몸을 지니고 있지만, 그녀의 손만은 장운형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장운형과의 작업이 진행되면서 차츰 마음을 열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다이어트에 나서지만, 다시 폭식에 빠져드는 ‘L’의 형상. 여러 번의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고, 끝내 그녀의 손 조각만을 남겨두고 장운형을 떠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가족들로부터 받은 성처를 품고 있었고, 그로 인해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3부의 ‘가장 무도회’는 ‘L’의 손 조각을 기화로 인테리어를 하는 ‘E’와의 만남이 이뤄지게 되고, 그 둘 사이의 에피소드들과 인연을 맺는 과정 그리고 실종 사건에 이르는 과정이 기록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일에 자신만만하게 보였던 ‘E’가 육손이로 태어나 손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E'가 장의 손조각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자신의 손에 대한 컴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 이해된다. 결국 그러한 콤플렉스로 인해 두 사람이 실종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 밝혀지면서, 장운형의 기록은 끝난다. 그리고 다시 에필로그는 장운형의 지인들이 창고에 쌓인 작품들로 유작전을 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것을 담담히 전하면서 일상으로 복귀한 소설가인 ‘나’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작품의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장운형의 기록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과거의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가족들과 소원한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던 장운형, 의붓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폭식증에 빠져들었던 ‘L’, 그리고 커리어우먼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지만 육손이였던 콤플렉스를 품고 살았던 ‘E’가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인물 설정 역시 한강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시점의 교차가 이 소설에서는 ‘액자 형식’으로 치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쯤 마음속에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그의 작품들을 통해 위로하려는 의도일까?(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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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품 중 저평가된 작품, 그야말로 최고. 껍데기는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한 표면을 가리키는 반면, 껍질은 내용물과 엉겨붙어있는 것이다. 껍데기가 아닌 껍질을 벗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심연의 알맹이와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껍질을 벗기면 흉측한 날것의 근육이 드러나겠지. 결합된 부분을 억지로 뜯어내면 엄청나게 고통스럽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마주하고 혐오스러운 부분을 드러내기보다는 껍질을 뒤집어쓴 채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산 사람의 몸에 석고를 부어 뜨는 조각의 기법인 라이프캐스팅이라는 소재는 얼마간 괴기스럽다. 처음엔 여고괴담이었나, 산 사람을 석고에 묻어버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조각상으로 만들어버린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섬뜩했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엔 항상 찝찝함 속에 따뜻한 장면들이 있어서 난 그의 작품이 좋다. 껍질을 벗는 과정을 거친 두 사람이 알몸 그대로의 상태로 마침내 하나가 되는 장면은 내 알맹이를 보듬어주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이런 인간 내면을 깊이 다루는 책은 읽으면 무장해제 당하는 느낌이야.. |
| 쉽게 읽어내려가지 못할 글이기에 더 매력이 있다. 언젠가 영화평론가 이동진님이 말씀하시길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단숨에 일어내려갔다는 말은 참 이상한 말이라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나 역시도 동감한다. 한자 한자 꾹꾹 눌러가며 쓰신 문장을 나 역시 참회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따라가며 주워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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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5 애정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이다. 한 순간 강렬하게 찾아들지만, 의지할 만한 물건은 못 된다. 곧 변형되고 때로는 퇴색되며 영영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어떤 여자 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 없었다. 다만 애정을 느낀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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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많은 작품들에 매료되어 왔으나, 이 소설만큼 나를 사로잡았던 적은 없는 듯하다. 며칠 전 친구와 인간의 다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떠오른다. 인간의 얼굴은 오직 하나인 것 같으나 실상은 여러 가지다. 그 수를 헤아릴 수나 있을까? 부모가 바라보는 내 얼굴, 형제자매가 바라보는 내 얼굴, 유년 시절의 친구가 바라보는 내 얼굴, 학창 시절의 친구가 바라보는 내 얼굴, 연인이 바라보는 내 얼굴, 회사 동료들이 바라보는 내 얼굴. 그 모든 얼굴은 결국 ‘나’로 귀결되겠으나, 그중 그 무엇이 진짜 내 얼굴이라고 말해야 할까. 내 친구에게 나는 더없이 좋은 벗이겠으나, 한편 누군가에게는 불쾌한 타인일 수도 있으니. 그러니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는 건 아니겠냐는. 그런 대화였다. 이 소설을 읽으며 어쩐지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 이 책은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소설가 H의 시점에서 시작해 조각가 ‘장운형’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에필로그에 이르러서는 다시 소설가 H의 시선으로 끝맺는다. 소설의 핵심은 조각가 ‘장운형’의 이야기인데, 대략 3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부 형성기 - 장운형이라는 인물이 유년 시절 어떤 사건들을 경험해 왔는지, 그가 가진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2부 발산기 - 라이프캐스팅이라는 석고 작업을 하는 조각가로서 장운형이 드러나는 시기이며, 그가 사랑한 따뜻한 손의 주인공 L이 등장하는 때이기도 하다. 3부 전이기 - E라는 동류의 인간을 맞닥뜨리면서 반대 급부로 자기 자신의 심연을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혐오함과 동시에 사랑하면서 ‘살아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 이 소설은 소설가 H가 장운형의 작품을 보고 '석고 껍데기 내부의 ‘공동空洞’이야말로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무엇이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은 데서 시작하며,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타인을 배려해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도 혼자 남는 순간이면 불쑥 튀어나오는 또 다른 얼굴. 직장에서의 얼굴과 집에서의 얼굴이 다름은 물론이다. 타인의 시선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들다 목숨이 위험해지기까지 하는 얼굴도 있다. 혹은 타인의 시선을 교묘히 자신의 아름다움 위로 분산시켜 자신의 결핍은 꽁꽁 숨기려 드는 얼굴도 있다. 그래서인지 장운형이 바라보는 건 얼굴이 아니다. 그보다 세심히 돌보지 않기에 오히려 정직한, 진실을 드러내는 ‘손’이다. 그런 그에게 아름다운 손을 가진 L과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L은 세상의 눈으로 보아서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인물일 테지만, 장운형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녀의 손을 석고로 뜨는 작업을 한다. 그 과정에서 L의 유년 시절 상처에 대해 듣게 되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러나 장운형이 L에게 주었던 온기와 L이 갈구하던 사랑의 형태는 달랐는지, L은 장운형의 곁이 아닌 차가운 세상 속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금 던진다. 세상에 별로 환영받지 못한 껍데기를 지닌 L은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를 입게 되고, 극단적인 수준의 섭식 장애를 겪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장운형은 그녀의 껍데기를 석고로 뜨면서도 그녀가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듯 자신을 맞추려 드는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정성껏 그녀를 보살핀다. 그럼에도 그녀는 홀로 남겨진 밤, 작업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홀연히 그를 떠난다. 그녀의 부재 속(그는 L이 죽었으리라 짐작한다), 장운형은 제법 유명하고 유능하며 아름다운 E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L이 동경할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장운형은 어딘가 기이한 공허를 그녀에게서 느끼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어 한며 가까워진다. 결국 그녀의 전신을 석고로 뜨는 과정에서 그녀가 감춰 온 비밀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운형 본인도 E에 의해 온몸이 석고로 뜨이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껍데기로부터 서로를 꺼내 놓는 일종의 ‘탄생’을 다시금 경험하게 된다. 목석과 다름없이 건조하고 뻣뻣하기만 했던 그녀의 몸과 차가웠던 손이 따스해짐을 느낀다. 두 사람은 이제 비로소 살아 있다. *** 이 소설을 다 읽은 직후에는 그야말로 멍해져서 내가 지금 무엇을 읽은 것인지 명료한 언어로 정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몇 글자 끄적이고 나니 이제는 조금 가닥이 보이는 듯하여 적어 본다. 극중 인물인 ‘장운형’은 유년기부터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부모의 슬하에서 존재론적 위기 의식을 늘 겪으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바를 믿을 뿐이며, ‘진실’이란 그 실상이 어떻든 간에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것이라 믿게 된다. 이 말은 곧 '인간이란 실제로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그 형태를 얼마든지 외부에 알맞게 꾸며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유년 시절 가장 거짓되지 못한 얼굴을 가졌을 인물일 것임에 틀림없는 외삼촌의 비극적 말로는 이러한 그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는 것이었으리라. 그가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애썼던 손가락이 잘려 나간 손. 진실은 그저 누추할 뿐이다. 그런 그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동(空洞)의 예술을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니었을까. 소설에서는 장운형에게 중요한 두 여인, L과 E가 차례로 등장한다. 나는 이 두 인물이 모두 장운형과 일종의 공명을 하는 인물들이라고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장운형은 모종의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L의 경우는 167cm,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여인으로,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하지만 아름답고 따뜻한 손을 지녔다. 그녀의 내면에는 순수하고 여린, 상처 입은 소녀가 자리하고 있지만 실상 그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타인의 시선에 유난히 민감하게 굴고,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는 인물이다. 어찌 되었건 본질은 있되 그것과 껍데기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메우지 못해 괴로워하는 인물인 셈이다. 살아는 있되 자신을 끊임없이 죽이려 든다. E의 경우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더없이 아름답고 완벽한 여인이나, 어쩐지 그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깊은 심연이 그저 공허하기만 한 사람이다. 그녀에게는 ‘육손’이라고 하는 비정상성의 과거가 있고, 이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면서도 지극히 혐오하는 자기 파멸적인 과거가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여러 번 상처 입힌 끝에, 자신을 상실함으로써 영영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찾아낸다. 죽어 있으나 형태는 남아 생을 영위하고 있다. 이 두 인물은 장운형에게 정반대의 의미로 다가온다. 장운형은 거대한 L의 몸을 뜬 뒤, 그걸 자신의 관으로 쓸 것이라고 반쯤 농담을 하곤 한다. L의 껍데기 안에 새우등을 한 채 웅크려 있는 장운형의 모습은 태아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이미 태어나 장성한 성인 남자의 몸을 하고서 거대한 여인의 몸을 관으로 삼는다는 발상이 마치 모체로의 회귀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죽음’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데, 자궁 내로 회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돌아가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즉 삶을 다 살아낸 뒤 맞이하는 최후의 산물로서 죽음이라기 보다는 이미 살아낸 세월을 모두 부정하고 거스르는 개념으로 느껴졌다. 무(無)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동일할 것이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없는 것과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은 아주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L은 육신을 입은 존재로 살아가는 한계나 고통 같은 것을 드러내면서 역설적으로 삶의 무형성을 망각하게 만든다. 따스한 손을 지닌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을 겪어 내야만 했으나, 종국에는 현재 이 순간과 화해하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운형과의 과거에 안녕을 고하는 인물이다. 반면 E는 L과는 다르다. E는 육신을 입은 존재로서 얻어지는 호혜를 누리는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 내면만큼은 그 누구보다 텅 비어 있어 E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간다. L은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든 채우려다 끝내 거구가 되었다면, E는 과잉한 손가락을 잘라내면서 자기 존재마저 부정하고 지워 버린다. 소설 속에서도 자석의 '같은 극'이라고 묘사될 만큼 장운형의 닮은꼴은 E라고 할 수 있다. 즉, L의 경우는 반대여서 끌림이 있었고, E의 경우는 동류이기 때문에 구역감이 치밀 정도로 혐오하면서도 관심을 끊을 수가 없는 셈이다. 자기 혐오와 애정이 한끗 차이인 것처럼. E와 장운형은 서로의 껍데기를 뜨고 탈피시킴으로써 일종의 ’변태(變態, metamorphosis)’를 통해 허무로부터 삶의 회복을 동시에 경험하는 동반자적 관계를 맺게 된다. 서로의 허무와 공허에 깊이 공감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무생물적이던 과거에서 형형한 생물적 형상으로 탈바꿈하는 기이한 전개가 펼쳐진다. 서로의 존재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생명 존재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을 행위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귀결되는 것까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읽혔다. 다만 이것은 구원도, 탈출도 아니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다시 소설가 H의 시점으로 돌아오면, 장운형의 실종은 끝내 사망으로 처리되어 유고전이 열린다. 그리고 그녀는 유고전에서 장운형과 E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뒤쫓게 되지만, 인파 속에서 그들을 놓치고야 만다. 삶의 새로운 국면에 다다른 그들에게 있어 과거의 그림자가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리적인 죽음이 동반되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는 과거에 죽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소설은 껍데기를 쓰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이자 기록이며, 경종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이미 꺼내진 존재라면, 부서진 석고 껍데기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면…… 때로는 현실에 순응하고, 또 때로는 현실을 등지고, 어찌 되었건 살아 나가는 생명의 지난한 일면을 흠뻑 매료되어 숨죽이며 바라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들의 손은 내내 따스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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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는 인체의 형상을 뜨는 석고 마스크와 캐스팅 작업을 매개로, 타인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열망하는 인간의 아늑한 고독과 결핍을 정교하게 파헤친다. 겉껍데기에 불과한 피부와 그 내면에 자리한 상처, 타인에게 보이기를 원하는 모습과 가려진 본질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서늘한 어조로 짚어낸다. 손으로 타인의 몸을 어루만지고 형상을 떠내는 섬세한 과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소통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감춰진 상흔을 직면하고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치열한 탐구는, 외롭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찾아 헤매는 진정한 온기와 구원의 의미 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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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바람이분다 ,가라’, ‘채식주의자’, ‘희랍어시간‘. 내가 좋아하는 한강 작가의 장편 소설책이다. 그동안 읽었던 한강 작가의 책들과는 결이 다르다 생각했다.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서 언급한 책들을 읽으면서는 뜨거움을 느꼈고 이 책을 읽으면서는 차가움을 느꼈다. 제목과는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남성이 화자가 되어 진행되는 스토리도 새롭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다. 재미있게 읽었으나, 뜨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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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빠져드는작품이다2002년이면32살쯤되었을나이인데작가들의뇌속에는어떤게들어있는것일까내가그나이때아무생각없이술먹고놀러다니고진짜영혼없이살던나이였는데ᆢ진짜달라도너무다르다그속에그많은삶에대한고뇌와깊은심연같은걸고민하고깊이생각하고 에휴내삶이참헛것이었다는현실감을뼈져리게느끼게해준다섬세한수채화적표현들ㅇㄱ너무나도감동이다어떻게그런표현을할수있을까ᆢ그그림자가어둠속으로흩어진데ᆢ일단읽어보자ᆢ그의끝에어떤게있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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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소설 중 비교적 덜 유명한 소설이지만 갈수록 정제되어지는 문체 이전의 날 것의 힘을 느낄 수 있어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실제의 나 일 수 있는지, 진실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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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그대의 차가운 손》은 사라진 조각가가 남긴 사연 속, 상처를 안고 세상을 마주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기의 얽매임과 풀어냄의 순간들을 그려낸다. 글을 쓰는 '나'의 이야기가 조각가인 '그'의 사연을 앞뒤로 감싼다. 분야는 다르지만 창작의 길을 걷는 '나'는 '그'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작가의 자세와 역할에 대한 고민과 대상에 쏟는 애정이 둘 사이에 공감의 고리를 만든다. '독립적으로 살아있는 기관', '제 2의 얼굴'이라고 표현한 손에 집중한다. 자신을 감싸고 어루만져야 할 소중한 손이지만 차갑고 상처를 지닌 손들이다. 손가락 몇 개가 없는 외삼촌의 손, 마음의 상처를 가진 L의 탱탱한 손, 육손의 흔적을 지닌 E의 손,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의 손이다. 이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타인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이들의 삶과 만남, 헤어짐 속에서 본질에 대한 질문과 보여짐, 보여줌, 보기의 행동에 주목해본다. 아버지의 위선적인 보여주기 속에서 성장한 조각가 장운형의 보여줌은 대상의 본질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식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자괴감 사이에서 충돌한다. 작품 뒤의 공간을 '본질이 제거된 공간, 숨을 공간'이라고 하며 본질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토로한다. L은 보여줌을 애써 피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아픔은 깊은 상처로 남아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게 한다. 손을 작품의 대상으로 내밀며 조금씩 보여줌의 세상으로 들어서지만 보여짐의 두려움은 혼돈의 생활로 이끈다. 기댐과 도피의 반복은 보여줌과 보여짐 사이의 불안정한 모습이다. E의 보여줌은 자신의 상처를 활동력으로 감추는 행위로 나타난다. 놀림감이었던 여섯번째 손가락을 스스로 자르려 했던 기억은 자기보호 의식을 강하게 한다. 자신의 얼굴로 만든 작품을 쓰고 조각가와 맞섬은 보여짐에 억눌려 있던 감정의 폭발이다. 조각가, L과 E는 만남을 통해 각자가 지닌 위선의 보여줌에 틈을 만든다. 세상과 거리를 두었던 L은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고 세상과의 분리를 두려워하던 E는 감추었던 부분을 드러내며 자신의 관계맺음을 되돌아본다. 조각가는 자신의 작품을 부수는 L의 모습과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E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다. 조용히 떠날 뿐이다. 강요된 보여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치열한 몸부림임을 알기 때문에.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자신에게 굴레를 씌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감을 힘들게 하고 본질을 잊게 함을 알기 때문에.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작가의 유고전이 열린다.또 하나의 보여주기다. 조각가는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유고전을 보았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았을까. 자신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보여줌의 강박에서 벗어났을까. 조각과 글쓰기의 작업 속에 보여짐과 보여주기, 만들어짐과 만듦, 쓰여짐과 쓰기가 이어지며 자유로운 삶의 의미를 묻는다. 창작자는 대상의 본질을 궤뚫어 자신의 방식으로 작품에 담는다. 조각가는 작품 뒤에 컴컴한 공동을 만들고 글 쓰는 '나'는 그 어두운 공간에 눈길을 준다. 차갑고 어두운 공간에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깃들기를 기대해본다. #한강 #그대의차가운손 #문학과지성사 #yes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