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떻게 이유인지, 뭔가 있어보이면서도, 실제로도 그 뭔가가 있는 저자나 책을 만나기가 이렇게나 어려울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 전반의 주요한 관심사가 ‘글쓰기’가 된 듯 하다. 심지어 한국의 몇몇 저자들 -김영민, 김진석 등 - 도 매우 이상한 글쓰기를 보여준 적 있었다. (난 아직도 그 때의 호들갑스러운 지식인들의 반응을 기억한다. 정말 대단한 글쓰기였다면, 지금쯤 모든 이들이 그렇게 글 쓰고, 그 글쓰기에 대한 메타 비평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실은 그들이 그런 이상한 글쓰기에 빠지게 된 것도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나쁜 영향 때문이다. 확실히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이후 ‘언어’은 이 세계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려면, 무조건 걸고 넘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언어로 된 구조물, 그 중에서 가장 만만하면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고 여겨지는 문학작품들이 그 대표가 되었고, 일군의 저자들은 문학을 닮은 글쓰기를 ‘탈구성적 글쓰기’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속은 텅 비어있으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글쓰기에만 매달리는 이들과 여기에 빠지는 순진한 이들 때문이지. (굳이 ‘지적 사기’를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얼마 전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라는 책을 읽었다.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든 탓인지, 폴 드 만이라는 이름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영문학을 전공한 이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폴 드 만 해대서, 매우 대단한 학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위시하여 정치적이며 반-자본주의(반-신자유주의)에 대한 풍부한 글과 책을 소개하는 이들도 폴 드 만, 폴 드 만 해대는 모습에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할 정도의 학자구나 하고 여겼다. 웃긴 짓들이다. 내가 읽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폴 드 만은 비-현실적이며, 또한 심각할 정도로 이론-중심적이서, 현실세계가 어떻게 되던, 나는 책 속에 빠져서 책 속에서만 살아갈래 하는 이론가처럼 읽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이 뭐길래 폴 드 만 같이 대단한 학자를 비난하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 속에 인용된 테리 이글턴의 입장을 좀 길게 인용해볼까 한다.
폴 드 만은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며 텍스트 자체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평하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사회계약론’은 약속에 관한 생각을, 그것이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그것을 약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그렇게 추측을 통해서 약속은 유일하게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특히 드 만의 비평은 문학 언어가 부단히 그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는 데 바쳐져 왔다. 실로 드 만은 그 과정에서 다름 아닌 문학의 ‘본질’ 자체를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던 것이다. 드 만이 올바로 인식하고 있듯이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불가피하게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literally) 글자 뜻 그대로(literal)라고 믿는 것은 실수이다. 철학, 법, 정치이론도 시와 마찬가지로 은유(metaphor)에 의거하고 있으며 똑같이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은유가 본질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고 일련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로 바꾸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언어는 가장 강렬하게 설득력을 지니려 하는 바로 그 때에 자신의 허구적이고 자의적인 성격을 노출시키곤 한다. ‘문학’은 이런 애매모호함이 가장 뚜렷한 영역인데, 그 안에서 독자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수사적인 의미 사이에 처하게 되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없어서 ‘읽을 수 없게’ 된 텍스트에 의해 끝없는 언어의 심연 속으로 어지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은연 중에 자신이 수사적이라는 사실을, 즉 문학작품이 말하는 바가 그 행하는 바와 다르고, 문학작품적 구조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그 본성이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식의 글들도 똑같이 수사적이고 애매한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속여넘긴다. 동료인 힐리스 밀러와 마찬 가지로 드 만에게 있어서 문학은 비평가에 의해 해체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문학이 스스로 해체하는 것임을 밝혀줄 수 있으며 더구나 바로 이 해체작용을 문학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폴 드 만에 대한 충분한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