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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 가족에 소속되고, 이름을 갖게 되며 성별과 외모가 정해진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진짜 삶이라 할 수 없다. 진짜 삶은 스스로의 의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누구나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잘 죽기 위해 노력한다. 특별한 사람이나 위인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게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기억되는 것도 잘 죽는 것의 한 방법이 아닐까?
나는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한 목표를 세웠다. [한 권 한 권마다 나의 추억과 흔적이 남은 책 1만 권으로 둘러싸인 서재와, 나의 모습이 담긴 앨범 한 권을 남기고 싶다. 그 1만 권의 책이 나를 떠나 보낸 가족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마지막 계획을 세워두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목표가 뚜렷해지면 삶도 더 나아질 것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 것만이 잘사는 것이 아니다. 뚜렷한 목표 의식과 삶에 대한 애착, 보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진정 잘사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과 정원을 가꾸듯 (외모가 아닌) 내 삶을 가꾸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
마더 테레사는 이런 말을 했다. '100명의 사람을 먹일 수 없다면 단 한 명의 사람을 먹이십시오.' 누구나 (어떤 방향으로든) 꿈을 크게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자기가 해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도 아름다운 삶 아닐까? 남을 돕거나 봉사를 하면서도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도움으로 배고픔을 달랜 단 한 사람은 내가 죽은 후에도 나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해줄 것이다.
월호 스님은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잘 죽기 위해,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잘사는 것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죽음으로 귀결된다. 사람은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더욱 소중하고 감사히 여길 수 있다.
죽음을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현재의 삶도 행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내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 때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하며 소중함으로 충만해진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암울하고 슬프며 후회와 불만으로 가득한 삶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종교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외모, 지위, 성별, 나이, 종교, 학벌과 상관없이 누구나 깨달아야 할 진리이기 때문이다.
후회없이 살고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서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부터 가져야 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헛된 욕망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찰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 세상에서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겸손해질 수 있고, 욕심을 버릴 수 있으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의 소중함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월호 스님의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보물 같은 책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마음을 쉬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삶의 치료제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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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매스컴을 통해 넘쳐나는 웰빙.. 다이어트부터 시작해서 건강식품, 가전제품, 심지어는 아파트, 금융상품까지 웰빙 열풍이다. 웰빙의 순수한 의미는 어디가고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느낌만 든다. 잘먹고 잘사는것 당연히 중요하다. 건강한 몸과 정신을 추구하는 생활방식, 인생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잘살까 고민하는 사람은 많아도 어떻게 잘 죽을까 하며 고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듯 하다. 하루하루 사는것도 바쁜데 어떻게 죽을까 고민할 시간이 어디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고 언젠가는 만나야 하는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았다고 해도 죽음이라는것을 편하게 맞지 못한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수 있을까..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게 누구든지 쉽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길을 한번 돌아보고 앞으로의 날들을 계획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 한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은 물론 가족들, 주위사람들에게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질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생의 마무리를 밝고 아름다우며 품위있게 한다는 웰다잉(well dying)이 사회적으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나보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책은 후회없이 사는 방법과 지금 이순간의 행복을 깨닫게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월호스님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내가 종교가 없기 때문에 이책을 고르는데 조금 고민이 있었다. 불교신자가 아니기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하는 괜한 고민 ..말그대로 괜한 고민이었다. 쉽고 편안하게 한장한장 넘어갔다. 책장 사이사이 아름다운 사진들과 함께.. 살아가는것에 대해 그 의미를 한번더 생각하면서...한권의 인생 지침서라는 느낌이 들었다. 겉모습을 가꾸고 잘먹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꾸어 가면서 편안한 마음을 갖는데 진정한 삶이 있다는것이 이책이 말하려는 내용이다. 이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 후회도 찌꺼기도 남지 않으며 욕망이나 사랑조차도 남지않는 완전 연소하는 삶. 그것이 진정한 웰다잉이라고 말하는 월호스님의 말씀처럼 지금 이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마음을 가꾸어 가면서 살수있는 여유가 생겼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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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불교하면 윤회사상을 연상하는데... 사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윤회가 아니라 윤회로부터의 해탈일 것이다. 즉 윤회라 함은 어떤 자취를 남기는 것이고 이는 삶의 불완전 연소로서 다음 생에도 계속적인 삻을 이어받아야 하는...삶이 수레바퀴와 같이 계속 돌고 도는 것이다. 하지만 해탈은 완전연소와 같은 삶으로서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마음이 과거,현재,미래의 어딘가에 계속 연연한다면 계속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거꾸로 연연하지 않는다면 윤회가 아니라 해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죽기 전에 살아가는 삶이 어떤 식으로 수행하여야 의미가 있고 진정한 삶인가에 대하여 성찰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저자인 월하스님은 현재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로서 책속에서도 불교적인 색채가 나기도 하지만 고요한 사찰에서 스님과 깊은 향나는 차를 마시면서 스님의 고견을 듣는 것과 같은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이 끝내 가시지 않는다.
잘 죽는다 것(well-dying)....! 결국 그것은 생전의 삶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에 종속도어 온갖 이해관계에 매진하거나 물질적 욕망에 추구하게 되면 겉모습은 화려할 지 모르나 내면적인 모습은 완전히 공허함 그 자체인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결국 진정의 아름다운 삶은 결국 욕심이 없는 내면의 삶이 아닌가 싶다.자신을 앞서기 보다 남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학습하고 체험하는 것, 욕심을 버려야 함, 내가 필요하서라기 보다는 순수히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현재의 삶에 대하여 항상 고마워하고 즐거워 하는 마음...
어떤 욕망이나 이해관계에 대하여 스스로를 구속하면 절대 해탈할 수 없고 또 다시 다음 생을 구차하게 살아야하는 슬픈(?) 윤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한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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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잘 자고,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며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먹고 쓸려는데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잘 죽기’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죽음에 대해선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선 생경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잘 살기도 바쁜데 왠 잘 죽기??” 하지만 그 말을 깊이 있게 들어갈수록 많은 것이 느껴졌다. 그때 만난 책이 월호스님의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책이었다. 제목이 뭉클하면서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 책에 더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보다는 향냄새를 맡으며 절에 있는 것이 더 편했던 내게 이 책은 그때의 그 느낌을 다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은 내가 잊고 있었던 또는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말하고 있다. 그 예로 내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죽을 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애착은 몸에서 비롯된다. ‘나의 몸’이라는 소유의식 때문에 그렇게 집착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몸이 내 소유가 아니라 관리자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몸뿐만 아니라 가족과 집, 재물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집착이라는 욕망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부여잡고 사는지 모른다. 죽게 되면 모든 것을 놔두고 떠남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욕심을 부리며 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일화로 죽기 전에 열손가락에 보배반지를 끼고 통장을 움켜쥐고 돌아가신 분이 계신다. 그 때문에 손이 펴지지 않아서 자식들이 손가락을 잘라내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니 얼마나 씁쓸한지 모른다. 이렇듯 사람 욕심은 끝이 없지만 그 욕심을 하나씩 풀어 놓으면 어느새 마음까지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욕심’과 ‘성급함’은 우리 눈을 어둡게 만들고,
우리 가슴을 닫게 만들어버립니다.
눈이 어두우면, 우리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우리는 여유라는 삶의 휴식을 잊게 됩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인생살이...,
경주와 같은 인생살이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해 뛰어야만 하는 걸까요?
-101p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잘 죽기(welldying)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말을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잘 벗기’라고 한다. 몸은 마음의 옷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웰다잉은 우선 일차적으로는 편안한 죽음, 그리고 더 좋은 몸을 가지고 태어남을 이야기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태어남은 다시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완전히 연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정말 연소되는 죽음이 있을까?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며칠 전에 안 좋은 일이 있어 성격상 마음속에 계속 꾹꾹 눌러 담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사이엔가 자연스레 마음 아팠던 것이 치유된 느낌이었다. 마음속에 돌덩이를 담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는데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공기 좋은 산을 찾고 싶다. 그 산이 안고 있는 절에 가서 향냄새를 맡으면 정신이 맑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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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언제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끝없는 슬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삶의 마지막 즉 죽음에 대한 절묘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죽음을 삶의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동안 죽음을 터부시하여 삶의 바깥쪽으로 밀어내며 쉬쉬했는데 이 책은 죽음을 당당히 말하고 있다. 더구나 보통 사람인 아닌 월호스님이라는 분이 깨달음을 맑고 향기롭게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삶을 구원하는 측면에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를 묻고 있다. 약간은 당황스럽겠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치유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월호스님은 웰빙이 아닌 웰다잉(well-dying)으로 삶을 변화하길 바란다. 죽음을 불교에서 보면 ‘몸 벗는다’ 혹은 ‘몸 바꾼다’ 고 말한다. 한평생 쓰던 몸뚱이를 벗어 놓고 다른 몸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음이란 기뻐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잘 사고 죽느냐는 것이다. 그래야 더 나쁜 옷으로 갈아 입지 않을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마음을 잘 살게 하는 짧은 메시지들이 많다. 가령, 주인된 삶을 사는 것,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 사랑을 보는 것, 지금 여기서 후회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 웃을 일이 생길 거라며 웃으라는 것,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짓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영(0)으로 하라는 것이다. 바야흐로 웰다잉(well-dying) 시대다. 지난 날 숨가쁘게 살면서 잘 먹는 것이 잘 사는 것인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너무나 불편하다. 아무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인생의 마침표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에 대한 시간은 매우 각별한 의미일 것이다. 좋은 죽음이 좋은 삶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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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내용이지만, 그간의 불교공부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원시불교 이야기로 서두를 열고 싶다.)
경은 어떻게 읽는 것일까?
문학작품처럼 작가의 문체와 서사를 음미하며 읽어야 할까? 인문사회과학서처럼 텍스트 안에 녹아있는 정보와 견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읽어야 할까?
책읽기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책은 늘 '이런' 식 아니면 '저런'식으로 읽으면 되었다. <이방인>을 통해 알베르 카뮈를 만날 수 있듯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화엄경>을 통해 석가세존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속엔 분명히 카뮈가 있는데 <금강경> 안엔 석가모니가 없었다. 이유가 뭘까?
역사적 인간으로 석가모니를 흠모하던 나는 이 분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유구한 시간과 수많은 번역자들과 엄청난 평론가들에 갑갑증을 느꼈다. 차라리 이 갑갑증이 의문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의문은 물고 늘어지면 답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갑갑증은 갈증이다. 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목이 마른다.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해서 이번엔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읽듯 경을 대한다면 뭔가 보일까? 어쩌면 이 방식이 옳은 것 같기도 했다. 왜냐면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 A이다'와 같은 금강경의 난해한 논리는 확실히 문학보다는 과학철학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래보았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글을 읽는 나는 그 글이 세부적으론 어렵지만 적어도 글쓴이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 아님을, 즉 진리란 상대적인 것임을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을 읽고 있는 나는 가나다라를 막 깨우친 아이가 글자 하나하나를 더듬거리며 읽지만 이 책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로 그 경우와 같다.
그리하여 나는 책읽기에 제 삼의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보잘 것없는 나의 깨달음이 선종에서 말하는 '불립문자' '이심전심' '직지인심'의 경지와 닿아있다고 말한다면 건방도 그런 건방이 없겠지만, 아무튼 앞서 말한 제 삼의 방법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보잘 것 없는 나의 깨달음'은 '보잘 것 없는 내 생활수행'에 기반한 것이다.)
똑같은 책을 펼쳐놓고 그것을 보고 있지만 나의 독서는 예전의 그 독서가 아니다.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 A인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석가세존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 언어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그의 빛나는 사색을!
<아함경>은 내가 찾던 물이다 - 물론 제 삼의 방법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아함경>이라도 내 갈증은 여전했을 것이다. 바로 이 경을 통해 인간 붓다를 만날 수 있었다. 큰스승, 큰어른 붓다는 다정하고 친절하고 무엇보다 정이 많다.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이 어른의 얼굴에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장을 덧칠했는지, 그래서 이 분의 얼굴을 난해하고 어렵고 요상하고 딱딱하게 만들어놓았는지, 나는 느꼈다.
<아함경>은 초기경전이다. 말하자면 석가세존의 자연스런 생얼이 거기 있다. 이쯤에서 소승과 대승의 딜레마가 대두되는데,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이다. 그간 내 갈증은 대승과 중국불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나는 중국식 화장을 하고 있는 부처님 얼굴만 보았다. 그러면서 의연중에 이게 전부는 아닐텐데?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가 그 해답이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는 불교에서 중국식 화장을 벗겨내고 역사적 인간인 석가모니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방대한 원시경전에서 추려진 몇몇 예화만으로도 '그 사람' '그 사상'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법륜스님의 <붓다,나를 흔들다>도 <아함경>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일반인을 상대로 쉽게 설법하고 있기에 초기경전 자체가 부각되는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이 책이 원시경전에서 인간사의 온갖 갈등에 해답을 제시하는 석가세존의 일화를 추려뽑아놓은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뜻밖에 월호 스님의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에서도 원시경전의 자취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잘 살아야만 잘 죽을 수 있다. 죽음은 삶을 비춰주는 불빛이라는 스님의 비유는 얼마나 지혜로운가.
죽음이 삶을 비춰주어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스님은 삶을 완전 연소하는 삶이 잘 사는 삶이라 말한다. 그것은 매순간을 사는 삶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올인'하는 삶이다. 스님은 <잡아함경>을 인용한다.
'지나간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마라. 현재에 얻어야 할 것만을 따라 바른 지혜로 최선을 다할 뿐, 딴 생각을 하지 마라. 미래를 향해 마음을 달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근심 걱정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명상의 시간으로 좋은 책이었지만, 무엇보다 문득문득 원시경전의 자취를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
| 불교란 참으로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종교이다. 스님들이 쓴 책을 읽으면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하며, 아주 쉽게 풀어서 쓴 편안하게 읽은 책이었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책을 읽는 동안에 사이사이에 있는 사진들이 너무나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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