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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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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을 읽고 있으면 가끔 이 소설이 출간된 시기를 의심하게 된다. 특히 냉전시기 동구권이나 영미권에서 출간된 작품들이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며, 미래를 예견한 듯한 소재와 그를 활용한 특유의 통찰력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구조와 독서 자체가 가져다 주는 재미. 그냥 나무랄 데가 없다.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르 귄을 비롯해 아서 C. 클라크,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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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을 읽고 있으면 가끔 이 소설이 출간된 시기를 의심하게 된다. 특히 냉전시기 동구권이나 영미권에서 출간된 작품들이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며, 미래를 예견한 듯한 소재와 그를 활용한 특유의 통찰력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구조와 독서 자체가 가져다 주는 재미. 그냥 나무랄 데가 없다.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르 귄을 비롯해 아서 C. 클라크, 좀 더 대중적인 필립 K. 딕까지...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간간히 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를 알게 된 것은 페미니즘 열풍이 한창인 때였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필명이고 본명은 앨리스 셸던.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성별을 숨기고 글을 쓴 것은 역사가 오래 되었고, 근래 가장 큰 성공은 J. K. 롤링으로 꼽힌다. 성공을 거두면서 조앤이라고 이름을 밝혔지만 처음엔 앞서 표기한 대로 이니셜을 썼다. 중성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여자가 쓴 글이면 특유의 편견 때문에(장르를 봐도 포터 시리즈는 아동서로 먼저 알려져 어른들이 읽고 다녔지 않나) 잘 안 팔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 반대로 남자 작가들이 여자 이름을 쓴다고 한다. 여성 독자들의 구매력이 높아졌고, 독자들이 남성 작가보다 여성 작가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출판사에서 그렇게 하기를 권유한다는데, 작년 영국 가디언지 기사1)를 보면 관련 이야기를 더 알 수 있다. 단순히 익명성을 위해 중성적 이름을 쓰기도 하고, 장르를 고려해 성별을 바꾸거나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사 제목에서도 보이듯 결과적으론 시장논리(to sell more books) 때문으로 읽힌다. 사실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의 성별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지만(성별을 안다고 해도 독서할 때는 잊는다) 읽다보면 원치 않게 작가의 성별을 의식(혹은 인식)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다. 종종 작가 특유의 권위의식과 사고방식에 순간 거부감이 일곤 한다. 맨스플레인이나 주변인물들을 지나치게 도구화하는 경우가 그러한데 웬만하면 넘어가는 편이다. 하나하나 반응하면 읽을 글이 없기 때문에... 여성 작가의 글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도, (상대적으로) 문학적 허용선을 넘어 뜨악하게 하는 작품이 적기 때문이다.


아무튼 필명을 바꿔도 글, 문체는 작가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기에 완전히 정체를 숨기기엔 힘이 든다. 페르난두 페소아처럼 필명 개인에 상이한 인격을 창조하여 부여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로맹 가리도 그렇게 에밀 아자르인게 밝혀졌고 팁트리 주니어도 비슷하게 정체가 알려졌다. 많은 작가들이 성별전환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지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글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는 남성적 필명을 사용하면서 자신이 여성이란 것을 들키지 않았다. 페소아의 글쓰기에 가깝게, 정말 남자같이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주 잘 드러난 것은 바로 단편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다. 남성 작가 경우와는 달리 작가가 여성이구나 하고 느낄 때는 소설 속 남성 캐릭터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부분에서다. 감성에 여자 남자가 어딨겠냐만은 아주 미묘할 때도 있고 확연하게 드러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남성 카릭터의 경우, 껍데기만 남성이지 알맹이는 여성이구나(여성이 바라는 남성상이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팁트리 주니어의 작품은 그냥 남자가 쓴 것 같다. 동시대에 살았더라면 나 역시 이건 남자가 썼어, 여자가 썼을 리 없어 단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만 보고 그러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에서 (여자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다는 편견이 지배하던 시대기도 하고, 그냥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 없이) 남성적 사고방식이라 읽히는 관점들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떤 남성작가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조난당한 섬에서 전개되는 남성 화자의 시선이 조금씩 문명을 벗어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특정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소름이 돋는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하게 남성적이면서, 떠나고 남겨지는 이의 성별도 전형성을 탈피하고 있다. 남성 화자는 끝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 이보다 더 비판적일 수가 있을까. 소설 원제는 <The Women Men don't see>로, 남자들이 보지 않는 여자들. 표제작인 <체체파리의 비법>과 더불어 읽어봐야 할 작품이다.

 

작가 듀나도 이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남성은 디폴트 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의 시선과 말투를 따라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맨 처음 메갈리아가 대두했을 때 미러링한 글들을 보며 다들 저건 여자가 썼을 리 없다고 했다. 어떻게 여자들이 저런 저질스런 글을 쓰겠냐고. 하지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아니 앨리스 셸던이 대단한 이유는 남성적 사고를 가진 남성 작가를 연기하면서도, 남성 작가가 쓸 수 없는(혹은 쓰지 않은) 세계를 재현해냈다는 것이다.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또 인정받았다. 그것도 칭찬할만한 '남성' 페미니스트로 말이다. 너 사실은 여자지? 여자들한테 인기 얻으려고 이런 글 쓰지? 가 아니라 와, 남자도 이런 글을 쓸 수 있구나, 하는 인정 말이다. 작가의 성별을 떠나 SF 소설 그 자체로 봐도 우수하고 말이다. 네트워크와 간접 광고까지 예견한 작품은 놀랍기만 하고... 읽어보면 안다. 많은 사람들이 팁트리 주니어의 글에 열광하고, 앨리스 셸던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를.

 

요즘 남성 작가들이 여성 필명을 빌려오는 것에 대해서는, 조지 엘리엇이나 브론테 자매들 그리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경우와는 비교하기 힘들다고 본다. 어쩔 수 없이 '읽히기' 위해 선택해야 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시대가 변했다해도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거나 여성 작가가 썼다는 이유로 외면받는 글들은 여전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도전, 상업적 이윤 추구 등 어떤 이유에서건 필명을 택하는 건 작가의 권한이나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짚고 싶은 것은 가디언 지 기사 마지막에 나오는 마이클 데릭 허드슨에 대한 이야기다. 백인 남성인 허드슨은 자신의 이름으로 시 공모전에서 낙방하자, 중국계 미국인인 척 시를 응모하고 수상자로 선정된다. 소감이라 밝힌 내용이 더욱 문제되었는데 AA, 적극적 평등조치(비례적 평등을 위한 소수자 적극 우대조치)로 인해 역차별이 생긴다는 뉘앙스다. 그에게 쏟아진 많은 비판들 속에서 나는 박완서 선생의 <도둑맞은 가난>을 떠올렸다. 부잣집 아들이 위장취업을 한 공장에서 여공과 사랑을 키운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여자는 말한다. 이젠 가난도 훔친단 말이냐. 가난한 자의 긍지도 훔친단 말이냐, 하고 말이다.

 


 

1) "Forget George Eliot: now it's male authors disguising their sex to sell more books", (2017. 7.18), https://www.theguardian.com/books/shortcuts/2017/jul/18/riley-sager-and-other-male-authors-benefiting-from-a-gender-neutral-pen-name

e***a 2018.02.07. 신고 공감 7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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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체파리의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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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받아서 구매했던 작품입니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꽤나 괜찮았습니다. 옛날에 나왔다는 작품인건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7080 시기에 나왔다는 걸 알게된 후에는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작품들이었어요. 만족스러운 구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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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받아서 구매했던 작품입니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꽤나 괜찮았습니다. 옛날에 나왔다는 작품인건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7080 시기에 나왔다는 걸 알게된 후에는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작품들이었어요. 만족스러운 구매였습니다.
k*********7 2026.01.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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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체파리의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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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트리 주니어의 작품 중 내가 최초로 접했던 작품집이다. 수년 전에 대여로 접했다가 결국 새로 구매했다. 십여 년이 다 지난 지금 아직도 읽으려면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한다. 기괴하고 끔찍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강렬함이 주는 작품의 매력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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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트리 주니어의 작품 중 내가 최초로 접했던 작품집이다. 수년 전에 대여로 접했다가 결국 새로 구매했다. 십여 년이 다 지난 지금 아직도 읽으려면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한다. 기괴하고 끔찍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강렬함이 주는 작품의 매력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d******o 2025.07.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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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체파리의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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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일생에 대해 서치하다가 그의 작품이 궁금해져서 구매했습니다.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이고, <체체파리의 비법>은 그 소설 중의 하나인데 과연 표제작인 만큼 제일 좋았네요. 난해하지만 일관성 있게 주제를 하나로 묶는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었습니다. 다음장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오랜만에 재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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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일생에 대해 서치하다가 그의 작품이 궁금해져서 구매했습니다.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이고, <체체파리의 비법>은 그 소설 중의 하나인데 과연 표제작인 만큼 제일 좋았네요. 난해하지만 일관성 있게 주제를 하나로 묶는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었습니다. 다음장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오랜만에 재밌는 소설을 읽어서 좋았어요.

YES마니아 : 플래티넘 s*****1 2019.10.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