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로빙거 세계 : 한 뿌리에서 나온 프랑스와 독일 서양의 고대와 중세 초기 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자신이 그 두 세계를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즉, '서양 고대, 로마제국' 하면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 부흥기라고 이해하면서, '고대 말, 중세 초기'하면 게르만족이나 고트족같은 바바리안의 침입으로 시작된 어쩐지 우울하고 야만적인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란 시간을 다루는 학문이고 시간은 연속성을 갖는다는 게 특징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의 고대와 중세 세계의 성격은 왜 이렇게 단절되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 패트릭 기어리의 『메로빙거 세계』이다. 가장 인상깊은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면, 로마제국과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고 일컬어지는 바바리안 사회는 이미 서로에게 동화된 동일 문화권이었다는 것이다. 예전에 중·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중세 유럽 세계의 형성은 야만인(바바리안)의 침입으로 시작되었다고 배웠다. 그 내용은 찬란했던 고대 로마 세계가 언어도 없어 '버버'거리는 '바바리안'에게 공격받아 한 순간에 무너지고, 문명이 아닌 야만성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면서 서양은 이른바 문화의 "암흑기"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설명만 들으면, 서양의 중세는 이전 고대와는 완전히 다른 민족(바바리안)의 침략으로 시작되며 이후의 역사는 로마의 것과 완전히 단절된,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패트릭 기어리는, 로마인과 게르만인은 700년 이상의 기간동안 서로 매우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5세기 말이 되면 바바리안 세계에서는 로마화(化)가, 로마세계에서는 바바리안화가 이루어져 두 세계는 이미 하나로 통합된 상태라는 것이다. 기어리는 사회상의 변화를 따라가며 바바리안과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는데 이 역시 매우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로마제국에 대한 바바리안의 침략으로 고대사회가 무너졌다는 기존의 시각은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그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단순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진리처럼 알고 있던 사실을 새로운 견해로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설명하는 이 책이, 역사를 전공하는 내 눈에는 너무도 신선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또한 이 책에서는 6세기까지의 바바리안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기어리는 고대 작가들이 통상적으로 게르만인(Germani)라고 부른 사람들은 사실 갖가지 사람들(슬라브인, 켈트인, 핀인)의 복잡한 혼합체였으며, 1세기경에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을 바라본 시각(『게르마니아』,『갈리아 원정기』)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의도적으로 독일인의 역사와 결부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배격되어야 할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기어리는 바바리안 세계의 역사는 '독일 역사'의 문맥이 아니라 고대 말 역사의 관점에서 볼 것을 강조한다. 즉, 게르만의 역사는 독일 혹은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라 게르만족 자신의 역사인데, 그 사회의 변화를 유도하여 후에 바바리안 왕국의 성립을 이끌어 낸 것이 로마였다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분명히 로마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게르만의 '침입' 혹은 '게르만의 대이동' 때문에 몰락한 것이 절대 아니다.) 이 외에도 클로비스 왕국과 프랑크족에 대한 내용으로, 본격적으로 이 책의 제목인 메로빙거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무엇보다 민족의 역사도 짧고 자신들의 배경이나 기원에 대해 아는 바도 없는, 심지어 다른 고대 부족들에 대해 열등감까지 가지고 있었던 듯한 프랑크족이 강력한 프랑크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앞의 두 장의 내용과 관련하여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 왕국이 독일과 프랑스의 기원이 되었는데,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한 뿌리에서 나온 프랑스와 독일"이라고 붙은 것이다. 기어리의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던 고대와 중세간의 연결고리를 이어주고 있다. 또 최근 역사학계에서 사회사적 연구 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군인이나 귀족, 가난한 자, 상인들의 사회 인식을 따라 고대 말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기어리의 연구는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서양 중세에 대한 지식이나 참고문헌이 많이 없는 상태에서, 서양사에 관심이 있거나 유럽에 대한 지식을 쌓고 싶은 사람, 민족의 생멸에 대한 방법론을 구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아무리 교과서가 신경향을 반영하지 못한다지만 반세기 넘은 학설을 진리처럼 알고 있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