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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비단길』은 강연호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가 시인으로서 이 세상으로 내는 자신의 첫 길에 ‘비단길’이라는 이름을 내건 것은 의미심장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비단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버티고 있는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의 동서통상로인데, 그 명칭은 이 길을 통하여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중국의 비단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삭막하고 건조한 사막지역에 아주 간간이 깃든 오아시스들을 연결하는 이 비단길을 타는 듯한 태양과 모래바람을 뚫고 대상(隊商)들이 오고 갔다. 따라서 강연호 시인의 첫 시집 제목 ‘비단길’에서, 그 길을 가는 시인 자신은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이며, 그가 품속에 지니고 있는 비단이란 곧 자신이 쓴 시(詩)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일 것이다. 그렇다. 『비단길』은 황폐한 시절을 거쳐 온 예민한 청춘이 시쓰기를 통하여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는 가여운 그러나 소중한 길이다.
그 비단길이 가여운 것은 ‘잘못 든 길’이기 때문이다. 「제기동 블루스」연작이 보여주고 있듯이, 시인은 지리멸렬해지고 마침내는 복개되는 제기천처럼 세월 속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젊은 날의 열정과 희망을 다시 불러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남아서 그림자 기웃거리며 손벌리는 것은/ 제풀에 꺽인 그리움일 뿐>이다(「가을 江 저녁 산책」). 삶이란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같은> 것이어서(「허구한 날 지나간 날」), 아무리 시인이 시쓰기를 통하여 지리멸렬한 일상을 탈출하려고 해도 그는 환멸만을 맛볼 뿐이다. 그가 꿈꾸는 세계는 현실 속에 세워지지 않는다. 이렇듯 어두운 세상과 병든 시대에 맞서는 방식으로 시인이 채택했던 비단길은, 즉 시쓰기는, 처음에는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잘못 든 길>일 뿐이다(「비단길ㆍ2」). 시인은 시쓰기의 현실 속에서 백전백패한다. 비단길은 잘못 든 길이다.
그러나 시인은 잘못 든 길임을 알면서도 비단길을 계속 간다.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라고(「비단길ㆍ1」)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는 간다. 그 비단길에서 그는 자주 미끄러져 넘어진다. 넘어진 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는 스스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에서 그는 <내 젊음을 가둔 건/ 저 말 많은 80년대가 아니었어 바로 나였>음을 문득 깨닫는다(「80年代式」). 토란잎 그늘(현실세계) 속에 숨어서 흘린 그의 눈물(시)이 미끄러운 토란잎을 타고 방울되어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듯이 <생각하면 내 청춘도 그냥 미끄러진> 거였음을 깨닫는다(「토란잎」). 이렇듯 청춘의 환멸과 좌절을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되자 비단길은 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비단길은 이제 ‘지도를 만드는 길’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헤매다녔어도 세상 어디에서도 그대(이상세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는 사실을(「月蝕」) 깨달을 정도로 시인은 이제 철이 들었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으로 비단길을 나섰던(「비단길ㆍ2」) 시인은 이제 <철든 짐승처럼 터벅터벅 걸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너는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비단길ㆍ3」). ‘나’에서 ‘너’로의 이 극적인 시선의 변화가 암시해 주듯이, 이 돌아옴은 청춘의 새로운 성숙이다. 그리고 이 돌아옴이 의지하는 것은 최초의 출발점으로 이어지는 ‘기억’일 수밖에 없는데, 그 기억이 지도를 만드는 힘이 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막 돌아오는 길을 출발했을 뿐이며 아직 지도는 완성되지 않았다. 지도가 완성되는 순간에야 우리는 그의 비단길이 정녕 잘못 든 길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지켜보자. [인상깊은구절] 여름 방학 내 텅 빈 숙제장 속에서 풀풀 삐져 나온 졸음이 자꾸 연필심만 부러뜨리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란 토란잎 그늘 속에 고스란히 오후를 숨겨 두었지만 비가 오려나 오랜 신경통을 콜록이시던 할아버지 아귀힘 잃은 손바닥만큼은 적막하지 못했다 가령 뜨물 같은 낮잠이 나를 데불고 개울 쪽으로 뜀박질해 간다 해도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물음표를 찍으며 숨죽이고 두리번거리는 송사리떼 아득할 뿐 물자멱도 혼자서는 쉽게 지치기 마련이었다 마루 밑 습한 곰팡내처럼 먹장구름 밀려오면 씨앗이란 씨앗 죄다 쏟아버릴 것만 같은 해바라기 받침대 하나 세워주지 못한 허리춤이 궁금했다 내 또한 그렇게 기댈 곳 없어도 스스로 중심 잡고 일어서는 법을 배워가는 동안 할아버지 그예 선산으로 떠나시고 잔기침에도 자주 걸려 넘어져 울던 누이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었다 허나 숙제장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내 열 손가락의 산수셈보다 적게 개학날 다가왔을 때 담장 밑에서 몰래 기웃거리던 코스모스가 먼저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