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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표지만 봐서는 화목하고 밝은 모습이다.
<이책은> 문학테라피 에서 보내주신 지 좀 되었다.
<저자는>
<책읽은 소감> 밝아서 이쁜 노랑 바탕에 가족이 있다. 첫 느낌이 사랑스런 책이자 따듯함으로 다가온다. 저마다의 포즈도 다르고 바라보는 곳도 다르다. 개인주의 가족이다. 이 책은 '행복만을 보았다(http://blog.yes24.com/document/7979110)' 와 여러 면에서 닮아있다. 가족의 위기와 해체 그리고 치유가 있다. 삶은 아니러니하게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궁극적으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애초와는 달라도 행복해지는 결론이 맘에 들었다.
7살 아이가 쓴 동시를 본 어른들은 천재 시인 났다며 난리굿. 어떤 일에서든 시를 써보라는 채근과 기대는 아이를 주눅들게 하였고 아이는 점차 침울해진다. 운율이 있는 그 시를 왜 썼을까 끝도없이 발등 찍고 싶은 소년이 있다. 어른들의 과도한 관심과 과대해석이 낳은 부담감은 그나마 쓰던 동시도 못쓰는 상태가 된다. 기숙학교에 소년을 데리고 가는 날, 엄마와 아빠는 결별 했고 아빠가 떠났다. 엄마에겐 남동생과 여동생이 남겨졌다.
집나간 덤보는 새 여인과 살며 물려받은 가업에 매진한다. 갖은 노력에도 파산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다보니 사람도 만신창이가 되고 여러 병명을 가진채 재혼 여인도 떠나고 장남에 의해 요양원에 맡겨진다. 말을 잃은 환자요 그 어느것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휠체어에 의지한 아버지. 삶의 지치다 못해 삶을 놔버린 아버지를 보며 장남은 오열한다. 사진 한 장으로 인해 아버지가 반응하고 미소짓는 모습에서 사랑을 놓지 않았음을 감지한 장남.
덤보(남편의 애칭)를 사랑해 결혼한 엄마는 삼남매를 뒀다. 사랑만을 꿈꾸는 미모의 엄마는 애연가로 끊임없는 줄담배처럼 사랑을 소망한다. 여러 남자를 만나고, 한 남자와 새로운 인생을 준비한다. 그러던 중 막내 아들이 정신병원에서 투신사하자 절망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그 남자의 한 다리도 이해했는데 의족을 휘둘러 사고를 일으키자 연유도 묻지 않은 채 관계를 끝낸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던 여동생은 완벽한 남자를 만나 행복에 겨워한다. 임신을 알리자 샴페인을 사러 나간 왕자님은 사라지고 패닉 상태가 된 여동생. 막내 아들을 잃은 엄마는 미혼모인 딸을 위해 헌신하고 여자보다 엄마로써의 자리에 안착하는 계기가 된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아이 낳고 살고픈게 큰 욕심이었나를 되뇌이는 여동생은 팍 늙은 사람이 된다.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여동생에게 사별하고 딸이 있는 홀아비는 안전한 둥지로 다가온다.
글 쓴다는 행위에 트라우마가 있는 소년은 사춘기를 맞으며 여친이 생긴다. 연기자를 꿈꾸는 그녀에게 소년의 글이 책이 되고 그 안의 배역을 맡고 싶은 바람이 있다. 오래 사귄 남친과 결별하고 돌아온 그녀는 활력을 불어넣고 그가 글을 쓸 수 있게 한다. 소설 한 편을 들고 감정을 받으며 칭찬보다는 조언을 더 많이 듣자 그는 소설 쓰기를 중단한다. 그러던 중 광고 문구를 보며 자신이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카피라이터에 몸담게 된다. 작은 성공을 거두자 여친이 돌아오고 둘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 여자가 더 좋아해 밀어붙친 결혼은 딸을 낳고 떠나고 다시 돌아와 둘째딸을 낳아도 따듯해지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처럼 아내와 딸 둘을 떠나는데...
자전 소설이기도 한 이 책은 장남의 관점과 이야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카피라이터 출신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카피라이터로 승승장구하는 부분은 실감난다.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까지의 과정과 사랑이 그려진다. 아버지처럼 소극적인 아들은 자신이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되자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린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 같은 행동을 한다. 보고 들은게 그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정신이 삼대 간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매사 아버지라면 어땠을까, 아버지도 그러셨구나, 아버지가 그랬던게 이래서였구나 등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다. 자신과 잘 맞는 반려자를 선택하지 못한 오류가 빚어내는 갈등은 가족 해체로 가는게 수순이다. 그럼에도 일에서 성공하고 어느새 성숙된 사람이 되니 정말 맘에 드는 반려자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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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회가 은연중 지향하는 시대적 흐름인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담았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각자의 것은 각자가 계산하고, 공통체적인 일을 하다가도 자신이 필요에 의해 자리를 이탈하고,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흐름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이다. 그러기에 타인의 생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행동도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일에 간섭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옛날의 경우 젊은이들이 잘못을 하면 어른들이 그 잘못을 나무란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가 있다. 타인이 잘못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그 영향이 미치지 않으면 무시한다.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어른들이 사라진 사회, 정의와 염치가 사라진 공간, 삶의 토대가 붕괴되는 우리의 현실을 우리는 자각한다. 이 책은 그런 토대 위에 이루어진 책이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공공의 장소에서는 예의, 규칙 등은 비교적 잘 지켜졌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다. 그 변함이 긍정적인 요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점도 있다. 긍정적인 점은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점은 인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관계성에 의해 살아간다. 그 관계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며 나누고 화합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그 관계가 삭막해져 가는 오늘이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정겨운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 의무도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자립성을 키워준다는 미명 하에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당사자에게 맡기는 것이 개인화가 먼저 진행된 서구의 추세였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에서도 수입되고 있다.
지난 우리들의 사회는 울타리라는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보호받고 성장했다. 그리고 그 울타리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더 큰 집단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울타리라는 것이 거의 사라져 있다. 공동체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웃사촌이 혈연관계의 사촌보다 낫다.”는 말은 오늘의 인간관계의 단면을 보여 준다. 그처럼 정서적인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이 인간관계의 끝은 어디인가?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들이 급증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의 극을 보여준다. 자신만이 중요하다는 관점이고,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성장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부모의 결별로 자신만을 생각해 나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렸을 적, 시를 써 부모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기억을 가진 주인공이 부모들의 괴리된 모습을 통해 절망하고 아파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면서 동생들과 주어지는 상황에 힘들어 하면서 꾸역꾸역 생활해 나가는 모습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집을 떠난 아버지는 그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엄마는 안타까움의 대상이 된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위로 지나가는 폭탄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가 피신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만히 있었다.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자식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식탁 밑으로 들어가 납작 엎드렸다. 겁 많은 강아지처럼. 엄마는 부엌에서 나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셨다. 잠시 뒤 아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다리를 휘청거리셨다.(p 26) 집안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 주는 구절이다. 나는 학창 생활을 해나가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어쩔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집안의 작가라고 불리지만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하게 된다.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게도 된다.
주인공이 18살이 되었을 때 결국 부모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은 풍비박산이 된다. 아빠는 그의 여자 친구의 집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여동생과 살아왔던 집에 머문다. 나는 소설보다는 현실을 쫓아 회계학을 공부하고, 거기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갑의 모니크를 만난다. 모니크는 자신이 모든 생활적인 일을 할 테니 글을 쓰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속적인 만남은 생활의 공유로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결혼으로 나아가게 되고 서로의 삶을 위한 공동의 삶이 이루어져 간다. 하지만 결별과 타인과의 만남, 재결합 등 가족 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남동생은 정신병원에서 죽고, 여동생은 결혼에 실패한다. 여동생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자녀를 가지는데, 자녀가 부부의 삶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모니크는 배우를 꿈꾸지만 환상에 불과하고, 주인공은 카피라이터로 성공한다. 그러면서 아내와 헤어지는 과정 속에 다른 여인과 만나고, 부모들도 각자 다른 대상을 만나는 삶이 이루어진다. 한 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다. 서로 맞지 않으면 쉽게 결별하고, 자녀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또 그렇게 아프게 성장한다. 그러면서 그들도 개인주의 의식을 가지면서 성장한다. 가족이라는 것이 울타리가 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서구 사회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은 우리들의 문제가 되니 문제다.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아버지를 요양 병원에 데려다 놓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그곳에 다녀갈 수 있도록 하는 장면은 기족이라는 울타리의 소중함을 은연중에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서구 사회가 동양의 유교 문화 속의 가족 사회를 동경하는 것도 이런 각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 진다. 참으로 난감한 가족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의 가족 관계가 그래도 아직까지 소중히 지켜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앞으로 자꾸만 개인주의와 되어갈 가족 관계의 아픔을 느껴보는 기회가 되었다.
등장인물들이 거의 제도적이고 규격적인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것이 현대사회의 문제점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그런 일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이 짧은 문장, 이야기의 빠른 흐름, 그리고 다양한 장면의 복합 구성, 많은 등장인물 등으로 이끌어 나가면서 흥미를 더하고 있다. 한 번 잡으면 손을 땔 수 없도록 이끌어 나간다. 화술이 대단한 작가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글을 쓴다는 행위는 치유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가족의 치유를 위해 주인공이 글을 쓰고, 그 글이 근간이 되어 이루어지는 소설이다. 개연성이 많이 느껴진다. 현대사회의 안타까움을 매우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재미가 있고 느끼는 것이 많은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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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해석하기 나름 글은 그 사람의 마음을 대신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지구가 빨리 돌다보니 스마트라는 이름이
생기고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 손에 있는 폰만 들여다 보기 급급하다.
과연 그들은 행복할까! 아니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마음의 표현은 여러가지로 할 수 있다.그림 또는 글씨로 이 둘중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개인주의 가족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는 파노라마적인 책이다.우리들의 기억 가운데 가장 지우고 싶은 것은 가족이라고 얘기했던 사람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가족에 대한 기억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행복했던 과거는 잠시지만 불행의 작은 불씨는 점점 더 커져가는 법이다.이 책에 등장하는 일곱 살에 첫 시를 써 낸 주인공 꼬마(에두아르)는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게 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모두의 부담감 때문에 글을 쓸 수가 없어진다.잡화점을 하는 아빠(덤보)와 어머니 ,남동생,여동생 하나가 있다.자라면서 기숙학교에서 지내게 되면서 에두아르는 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게 된다.사감선생을 놀려주기 위해 교정에 낙서를 했던 에두아르의 잘못을 뒤집어 쓴채 친구인 몽카생은 사감선생과 학생들에게 총을 쏘고 자신도 죽는다.인생이 꼬이면서 우리는 이런 일들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개인주의 가족은 힘들게 진행된다.가정의 불화로 부모님의 이혼과 남동생은 정신병원행 에두아르는 겨우 대학시험에 합격하고 작가가 되기위해 고군분투하고 그즈음 모니크는 에두아르와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작가가 아닌 벨기에의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성공하게 된다.모여 사는 가족이 아니라 결국 흩어지며 아름다운 추억은 유년의 시절로 남을 수 밖에는 없는 내용으로 보여진다.
남동생은 정신 병원에서 떨어져 죽고 아버지 덤보는 대를 이어 장사하던 가게를 접는다.엄마는 이혼하고 새로운 애인이 생겼고 에두아르는 연상의 여인 애니 바숑과 불륜의 관계에 빠진다.모니크와의 결혼관계는 그저 그렇게 평범한 부부관계로 유지되고 있었다.아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공간만을 같이 사용하는 관계로 전락한다.오손도손한 가정의 모습은 먼 옛날의 추억의 한토막으로 변해가는 모습속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누군가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흩어지고 떠나고 떠나고의 반복으로 만들어지는 개인주의 가족속에 왜 떠나야 하느냐의 물음에 어떤답을 볼 수가 있을까?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서로에게 향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우리는 모두 상대에게 너무 큰 기대를 안고 만난다.그러나 꿈과 이상과 현실은 다른모습으로 다가온다.에두아르의 삶속에 나도 함께 있었다.
어차피 인생은 살아가는 한 누군가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이 책의 주인공처럼 글도 쓸 수 있고 작가가 될수도 있다.다만 그것을 표현을 하지않을 뿐이다.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벋어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향한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책이다.손만 뻗어면 잡을 수 있는 가족 그 가족의 삶에 나는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많은 생각을 준다.아! 이밤에도 나는 잠을 못이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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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곱살때 운율을 잘 맞춘 시를 써 크게 칭찬을 받고, 우리 가문의 작가님이라는 기대와 부담속에 자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자 엄마, 아빠는 긴 상의 끝에 나를 기숙학교로 보내게 된다. 열살때 간 기숙학교는 감옥생활로 기억될 정도로 끔찍했다. 게다가 거기서 겪은 끔찍한 총기 사고. 사감 신부와 친구 다섯명을 쏘아 죽이고 스스로를 쏜 범인은 그나마 주인공 "나"에게 호감을 갖고 친해지고 싶어했음이 먼 훗날 밝혀진다. 대학에 들어가 만나게 된 여자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지만, 애정없는 결혼이었으므로 당연한 절차처럼 헤어진다. 그러는 동안에 소설을 한편 썼지만 출판관계자로부터 호평을 받지는 못하고 카피라이터의 길로 접어들어 크게 성공하는 나.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의 기대를 항상 의식하고, 사람을 치유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만은 항상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버리고, 사랑받지 못하는 엄마는 줄담배를 피우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돌아다니며, 남동생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여동생은 미혼모가 되어 생의 기쁨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가족들의 일과 나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얽히며 이루어지는 이 소설. 행복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보이고,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딱 어울릴만큼 각박한 하루하루. 나는 그러한 날들을 보내는 가운데 아버지와의 일들을 상기하고,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예전처럼 식탁에 둘러앉아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내가 겪는 일들을 통해 옛일을 상기하고는 그것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본다. 이렇게 각박한 내용이지만 책장을 덮으며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제목과는 동떨어지게 가족의 힘을 믿게 되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요양원에 모셔놓은 아버지.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던 아버지가 15년만에 만난 아내는 한번에 알아보며 고맙다고 말한다. 그동안 돌고 돌아온 과정이 어쨌든 간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어나 보다. 나는 어떠한가. 이혼한 아내에게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물고, 자식들 양육비를 대야하는 힘겨운 현실이 남아 있지만, 새로운 인연을 만나 새 삶을 꾸려가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결말이다. 카피라이터가 아닌 책을 내는 글쓰기에도 도달할 것 같은 느낌. 과정은 어두웠지만 결말은 밝게 끝난 소설.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밝을지, 여전히 어두울지...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와 글쓰기라는 것은 무엇인지, 이 두가지 모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
![]() 제목부터 인상깊었던 책입니다. 2016년 문학테라피 신간입니다. 프랑스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각종 문학상, 소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기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소설이고 외국생활의 모습들이 디테일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과연 내가 이 정서를 잘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어요. 읽고나니 아주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에두아르의 일인칭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에두아르는 일곱 살에 첫 시를 써내고 가족의 기대 속에 작가의 꿈을 꿉니다. 유년기의 방황을 겪기도 해요. 글쓰는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에도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이후에는 카피라이터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죠. 하지만 가족들의 아픔과 상처들이 에두아르에게도 물려집니다. 그런 모습을 봐왔지만 자신도 경험하게 되죠. 에두아르의 이야기를 읽을수록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자신이 힘겹게 지내온 모습,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갈망하지만 실제로 쉽지는 않죠. 소중한 것은 잃은 뒤에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삶의 본질은 그 후에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끝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네요.
![]() - 나는 스물아홉 나이에 글로 먹고 살았다. 하지만 잉크병을 잘못 골라 펜을 담갔다. 글을 쓰긴 했지만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했다. - 우리 주변으로 모래 바람이 일어 눈이 따가웠고, 입속까지 모래가 들어왔다. 하지만 엄마도 나도 그것 때문에 입을 다문 건 아니었다. 엄마는 엄마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고백을 내뱉은 거였다. 이제 더 이상 어던 말로도 엄마가 다시 삶의 의욕을 찾을 수 있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 어떤 말로도. 단하나만 빼고. 사랑. 내 소설의 결말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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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책이 잘 읽히지 않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책이 잘 읽히지 않았던 경우는,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 혹은 그런 일들을 겪거나..아니면, 그 비슷한 상태에 기인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번에 책이 잘 읽히지 않았던 이유는...무더운 날씨 탓도 있었지만...긍정적(?)으로 내키지 않았음으로..그냥 마음가는대로 책을 읽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소유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어, 책이라는 물질을 우리집에 또 하나 들여 놓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 번엔 온갖 생각은 접어버리고 책을 주문 했다. 그리고, 이 책은 한참 사회,인문 책만 읽던 누나에게 던져줄 예정. 처음 읽었던 그의 작품 '행복만을 보았다'만은 못하지만, 나름 재미나게 읽었다. 특히, 앞에서 조금 정리가 안되는 느낌도 들었지만, 의외로 뒷심이 있어 읽고 나니 며칠동안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새삼 '살아 가는 것'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들도 해보았다. 나이가 마흔이 넘고나니...이제 이런 글들이 좋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모습이...크다면 클 수도 있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치부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겪어내는 소설속의 주인공들은...책장을 덮고나면 그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뭐, 이후로 행복하게 살든 또 다른 일들을 겪든...어쨌거나, 한 사람의 인생속에는 온갖 사건과 생각들로 가득차 있어...그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뻔하지만...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 비로서 많은 소설들이 왜 쓰여졌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고나 할까. 또, 한참 이 시기에 고민이 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이 잘 읽혔으리라. 특히,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장면에서...나는 왠지 모를 공감대를 느꼈다. 살다보면..이런 일도...저런 일도 있는 법일테니.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장폴 뒤브아의 '프랑스적인 삶'이나 폴 오스터의 글들이 떠올랐던 것은 조금 아쉽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내가 재미나게 읽었던 작가들의 글들이 모두 삶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것이고...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와중에도 뭔가 Creative한 요소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자. 그럼에도...정리하자면, 난 이 책이..뭔가 드라마틱하지 않게 쓰여진 그의 글이 좋았다. 앞으로도 나는 그냥...슬프기도 기쁘기도하면서..그냥 살다가 죽으면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살다보면...알아서 잘 살기 위한 방향으로 에너지가 모아지는 것 같기도 하니까. 안타까운 부분은 책 제목과 표지. 이 책의 원제목은 'l'ecrivain de la famille'이다. 직역하면 '가족의 작가'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뜬금없는 '개인주의 가족'은 도대체 누구의 발상일까? 책 한 권을 더 팔아먹으려고 머리굴린 탓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 제목은 책 내용과는 그닥 상관이 없어 보인다. 거기에다 노란 책 표지는...나름 단정하고 차분한 소설을 싸구려 날나리 소설처럼 보이게 하는 기염을 토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차라리 원어로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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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가족
일곱살에 시를 쓰고....
가족에게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은 주인공 에두아르
그러나 영재 틈에 끼어 클수록 감각은 점점 떨어지고
아홉살에 신경쇠약을 앓게 된다.
그리고 열살이 되기전에 들어간 기숙사 학교
입학식을 두고 학교을 향해 가면서 아빠와 아들의 대화는.....
각자의 생각을 ...그져그져...마음을 쨘하게 만들었던것 같다....
글을 쓰면 아문다는걸.... -본문-
에두아르의 기숙사의 생활....
아빠의 우울증, 그리고 다시 돌아온 아빠...
하지만 엄마는 담배만 늘고...
삐그덕 거리는 부부의 문제 안 속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여동생과 남동생은
더욱...불안해지는 가족의 모습이 그려지는 부분에서는...
여느가족이나 다 똑같이 느낄수 있을꺼란 생각을 들게 했답니다.
부모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자식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본문-
본문의 이 문장은 길고 긴...어느상황이든...
문장 하나로...정리가 딱..... 되며...
누구나 느끼는 공감되는 부분...일거란 생각이 든다.
가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말이 사라지게 되고....
남동생은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게 되고
여동생은 미혼모로....
가족의 해체되는 모습속에서...
안쓰럽고..답답하고....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어긋나버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리고 아빠의 '고마워'라는 한마디에
두분이 손을 꼭.....잡습니다.
아빠가 힘들때 에두아르의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
엄마와의 화해을 만들게 했던 고마워 라는 말 한마디.
어쩜......
사랑해..고마워....
너무 많이 써서 때론 흔하다고 생각이 들때도 있지만...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한마디가 아닐까 생각이 들며...
그져...그져 가족이라는 이유로....
말 하지 않아도...나를 이해하고 알아주거라는 생각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수 없죠...
힘들땐... 가족이기에.....더 서로를 위해주고~ 사랑해주고
가족의 울타리을 지켜나가야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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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가족/그레구아르 들라쿠르/문학테라피/가족 해체의 슬픔이.......
가족의 단절과 분열, 해체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반대로 가족의 단합이나 화합, 결합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을 훈훈하고 따뜻하게 하는데요. 하지만 기쁨의 흔적보단 슬픔의 상처가 더 마음에 남는 걸까요? 가족의 단합보단 가족의 해체 이야기가 더 많아서 일까요? 가족의 분열 이야기를 읽으며 가족 각자의 상처가 느껴져 더욱 마음이 짠~ 했습니다. 가족 분열과 해체의 이야기를 접하며 이 시대의 자화상을 보는 듯 했어요.
프랑스 작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매력적인 문장으로 만난 <개인주의 가족>은 가족의 분열과 해체를 다루기에 읽는 동안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렇게 가족 개개인의 아픔을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불완전체의 가족을 완전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싶기도 했고요. 서로 사랑하는 방법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거리감을 무엇으로 메워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고요. 유머러스하고 멋진 문장으로 가득찬 가슴이 짠해지는 가족 이야기에 한동안 가슴 먹먹하기도 했어요.
7살에 시를 쓰면서 천재 시인의 탄생으로 기대를 모았던 에두아르는 나이가 들면서 글 쓰는 감각이 둔해지고 반짝 천재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글 쓰는 일에 진척이 없습니다. 처음엔 사랑으로 만나 아이들을 낳았던 에두아르의 부모님은 에두아르가 10살이 되는 즈음에 가족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에두아르는 알제리에 있는 기숙사 학교로 보내지고, 학교에서 사감신부님께 아빠가 주신 책을 뺏기면서 벽에 '복수의 낙서'를 하게 되면서 친구는 퇴학을 당하게 되고 에두아르는 기숙사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로인해 뛰어난 천재시인에서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힌 에두아르는 가족들과도 거리가 생기게 되는데요. 아빠는 전쟁터의 상처로 인한 우울증으로 엄마와 별거하게 됩니다. 그동안 엄마는 새로운 남자 친구를 찾아 나서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간의 접착력은 떨어지고 거리감은 강해지면서 더욱 단절의 단계를 진행하게 됩니다.
아들의 천재 시인의 기질이 온 가족의 공통 관심사였기에 아들에 대한 기대감은 온 가족의 공통된 관심사였죠. 하지만 아들이 천재 시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면서 가족들은 점점 말이 사라지게 되는데요. 게다가 난청으로 고생하던 남동생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고 결국 정신병원에서 자살하게 되고, 공주처럼 사랑스럽던 여동생마저 미혼모가 되는 지경에 이르고요. 대학 회계학 수업에서 만난 모니크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 에두아르 역시 두 딸이 생기는 순간에도 가족의 결속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이혼에 이르게 되는데요.
소설 속 에두아르는 가족들의 희망이었던 글 쓰는 작가 대신 광고쟁이로 성공하지만 아쉽게도 성공은 행복을 동반하지 않죠. 글 쓰기로 상처를 치유하려 했지만 가족들의 꿈을 이루지 못한 에두아르는 광고문구만으로는 상처 치유가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요. 더구나 행복은 개인적으로 오지 않는건지 행복보단 외로움만이 가족들 주변을 늘 맴돌기만 합니다. 늘 행복을 꿈 꾸지만 누구 하나 치유자로 나서지 못하기에 벼랑 끝에 매달린 아슬아슬한 가족들입니다.
처음에 가족들을 묶은 것은 사랑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에두아르가 뛰어난 천재시인의 자질을 보이면서 가족들을 묶었을 겁니다. 가족을 묶었던 에두아르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면서 점점 가족의 분열은 더해졌겠죠. 혼자서는 살기 어려운 세상이기에 대개 가족을 형성해 살겠죠. 하지만 각자 자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가족을 보며 완전체 가족을 꿈꾸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답니다.
아픔을 드러내고 상처를 치유하기 보다 자기 안에 스스로 숨는 가족들, 상처를 드러내어 치유하기를 바라지만 서로 치유자가 되지 못하고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는 가족들, 같은 가족이라는 핏줄로 묶여 있지만 전혀 딴 세상을 바라보는 가족들을 보며 마음이 짠해졌어요. , 균열되고 엉망이 된 가족들의 단절과 해체, 분열에 대한 이 시대의 자화상 같은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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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보다 우리 자신을 더 꿈꾼 첫 세대"의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제목만 보고 제가 그린 <개인주의 가족>의 그림은 이랬습니다. 가족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가족보다 자기 자신을 꿈꾸느라 바쁜, 콩가루는 아니더라도 모래알 같은 가족들. 적당한 무관심과 적당한 메마름을 원하는. 그런데 완전히 헛짚었습니다.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가족을 '극복하려는' 사람에게도 결국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 지긋지긋하고, 원망스럽고, 아프고, 짐스럽고, 고통스러워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 지겹다면서도, 힘들다면서도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내려 하는 것이 우리라는 걸 이 책은 너무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주의 가족도 결국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가족은 왜 그리 힘이 쎈 것일까요? 타인이 바라는 꿈들이 늘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법이다(38). 주인공 에두아르는 가족들의 한마디에서 평생을 놓여나지 못합니다. 일곱 살에 쓴 네 줄의 시로 그는 "우리 가문의 작가님"이 되었고, 그 한마디가 에두아르의 인생을 결정지어버렸습니다. 아홉 살에는 "난생 처음 '반짝 천재'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었을 때도, 무엇인가를 써보려 했을 때도, "격렬히 소용돌이치는 스무 살에 침을 뱉으며" 소설을 버렸을 때도, 카피라이터로 많은 돈을 벌었을 때도 그를 불행하게 했던 것은 "우리 가문의 작가님"이라는 한마디입니다. 가족의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 가족의 기대따위, 가족의 실망따위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아무리 뻗대보아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할 수만 있다면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은 '개인'이 있을까요? 가족의 기대가 독이 되는 건, 내게 기대를 품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나의 지나친 열망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족이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실망도 한다는 건, 나 때문에 기뻐하고 나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고, 그 기쁨과 슬픔이 내 인생의 큰 의미가 되기에 가족은 힘이 쎈가 봅니다. "우리와 아빠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있으며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이, 마치 우리에게 무엇인가 호소하고 있는 듯했다. 엄마는 너희 없이도 살 수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도 그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언젠가는 우리가 더 이상 지금처럼 지낼 수 없는 날이 올 거라고. 엄마의 그 웃음소리가 지금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도 언제든 해체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금이 갈라지는 소리를 우린 끝내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은 영원할 수 없다고"(20). 그런데 이렇게 힘이 쎈 가족이 왜, 어떻게 해체되는 것일까요? 개인주의 가족에서 발견한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결혼입니다. 서로에게 애정이 없는 아빠와 엄마가 가정 해체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서로 다른 꿈을 꿀 때, (개인주의) 가족은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개인이 길러지지요. 이 상처는 힘이 쎕니다. "부모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자식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26). "어째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아빠랑 작은 오빠는 왜 떠난 거예요? 두 사람은 떠난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기 안에 숨은 거란다. 숨을 거면, 차라리 우리 집에 숨으면 좋잖아요, 클레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두 사람 찾으러 가요, 데리러 가자고요"(57).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가족은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숙학교로 보내진 뒤 홀로 생활하는 에두아르, 정신병원에 맡겨진 남동생,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지만 공주님이 되지 못한 여동생, 자신을 구원할 사랑을 기다리는 엄마, 가족을 떠난 아빠까지, 그들은 '각자의'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함께했던 가족을 그리워하지요. 사랑에 대한 갈망은 결국 가족으로 구현되기 때문에 가족은 힘이 쎕니다. "엄마가 식탁에 앉으러 가면서 아빠의 목을 꼭 한 번 껴안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게 바로 행복 아니겠는가"(81). "엄마는 에두아르 네가 언젠가 글을 쓸 거란 걸 알아, 우리가 겪은 균열과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다 얘기하겠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을 네가 꼭 찾아내렴"(39). 에두아르처럼 프랑스의 유명한 카피라이터 출신인 작가는 에두아르가 찾으려 했던 그 말을 찾았을까요? 개인주의 가족이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말입니다. 그 말이 이 책 안에 있었던가,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인용되어 있던 리오넬 뒤루아의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이 지닌 파괴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내 주변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방법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ME)를 뒤집으면 우리(WE)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짐'을 집니다.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에, 가족은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뒤집어 우리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져야 할 짐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들이 존재하기를 바랄 때, 가족은 해체되는 것입니다. 가족 안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 이 책에서 찾은 나의 대답은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어"입니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이 작가의 작품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번역서인데도 글의 흡입력이라는 것이 이토록 강렬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맛보게 해주는 작가입니다. 아름다운 글에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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