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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날이다. 아침에 하은양과 하진군을 데리고 투표장에 갔다. 하은양은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차 투표소까지 데려갈 수는 없어 투표소인 교실 입구에서 구경하게 했다. 하진군만 데리고 투표소에 들어가 같이 찍었다. 투표장에 가는 내내 고민했었다.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 할까? 당선권인 후보는 토호에 온갖 문제를 일으킨 후보지만 강력한 중앙권력을 가진 재선의원이다. 나의 계급적 이익에는 반하지만 내가 먹고 사는데에는 도움이 될 후보이다. 난 누구에게 투표를 했어야 할까?
글로벌 자본주의시대에 나혼자 독야청청하기 어렵다.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과 호주산 소고기와 국내산 삽겹살 한 근에는 탄소발자국을 비롯해 수많은 환경문제가 결부되어있고 싸다고 생각하는 어느 마트 상품뒤에는 아시아 어디선가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헐값의 노동비가 깔려있다. 그렇다면 공범인 나는 지구 저편 난민의 처지에 우리나라 노동자의 현실에 분노할 수 없는것인가? 지젝은 단호히 주장한다. 도와주라고 위선이지만 도우라고. 단,
지젝은 난민의 시대에 난민을 도우는 것에 대해 계급투쟁을 제의한다. 과연 국경을 넘어선 계급연대는 가능할까? 아름답지만 역사적으로 성공한 적이 없다. 또 다시 시작하기전부터 패배주의에 빠진다. * 훈족과 게르만족이라는 난민의 이동으로 시작한 유럽이 새로운 난민을 맞이하는 모습올 보면 역시 기득권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 현대식 무기가 없던 시대였으면 꽤나 큰 혼란이었겠지만 지금은 혼란을 그 지역에만 국한시킨다. * 난민은 비정규직, 알바생, 청년실업에 대응하면 우리나라와 똑같은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 역시 유럽언어 번역책은 진지하지만 읽기 뻑뻑하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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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글은 실로 오랜만에 읽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젝이 쓴 책은 딱 두 번째다. 앨피에서 나온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포함하면 세 권이긴 하지만 그건 지젝이 쓴 글은 아니기에 제외. 유일하게 읽은 책이 『죽은 신을 위하여』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난해하다는 인상은 남아 있다. 한국에서 참 인기 많은 사상가가 지젝이다. 그런데 지젝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그리 상쾌하게 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 난해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기도 하겠지만, 한국에는 그의 책이 정말 많이 소개되어서도 한몫한 듯. 지젝이 그리 체계적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사람은 아닌데다, 저술 속도도 엄청나니 웬만한 독자라면 지젝 논의를 따라갈 수가 없다. 지젝은 사상가라기보다는 비평가 쪽이 더 어울리는 편이라, 이러한 점도 지젝이 어떤 세계관을 구축해나가는지 파악하는 데 힘들게 하는 요소인 듯. 여하튼 그러한 지젝이 낸 책 『새로운 계급투쟁』은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에다가, 한창 세계 전역에 골칫거리인 난민과 테러를 다뤘다는 점에서 읽을 용기가 났다. 읽었다. 미주까지 다 합쳐도 150쪽이 안 된다.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구절이 있다. 지젝 특유의 이 화제에서 저 화제로, 저 화제에서 이 화제로의 횡단이 책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핵심은 간단하고 명쾌하다. 난민과 테러 문제는 문화 충돌이 아니라 계급 갈등이라고. 글로벌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이 지적은, 음... 뭐랄까. 예전에는 무릎을 탁 치면서 오호라 했는데. 지금 읽으면 그저 그렇다. 마치 삶은 곧 고통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듣는 그런 기분? 이런 책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래서 어쩌자고, 에 관한 내용은 부실하다. 지젝은 아마도 이런 말이 하고 싶었을 테다. 종교로 물타기하지 말라, 본질은 계급이라고. 그래, 누가 아니라고 했나. 그런데 어떻게야 하지? 여하튼 그래도 기억에 남기고자 몇 문장을 그대로 옮겨 본다. ---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유럽은 한편으로는 미국,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미국과 중국은 똑같다. 고삐 풀린 기술과 보통 사람의 뿌리 뽑힌 삶 모두 절망어린 광란이라는 점에서. 기술로 무장한 자본주의는 세계의 오지까지 점령하여 경제적 착취를 일삼고 있다. (17쪽) 우리가 가차 없이 버려야 할 다음 금기는 문화제국주의자와 인종차별주의라는 비판을 의식한 나머지 유럽의 역사적 유산인 인류의 해방을 언급하지 않는 태도다. 난민이 발생한 상황에 유럽도 (부분적) 책임이 있지만 이제 우리는 좌파의 영원한 만트라인 유럽중심적 비판을 끝내야 한다. (22쪽) 우리가 진정 아프리카인을 돕고 난민 발생을 막고자 한다면 바로 자본주의의 개입부터 비판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다수 난민이 소위 '실패한 국가',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에리트레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공권력의 붕괴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며, 리비아와 이라크처럼 많은 경우 서구가 직접 개입한 결과다.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는 예상 밖의 불행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행된 경제식민주의의 결과일 뿐이다. 더구나 중동에서 '실패한 국가'가 태동할 싹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종천 무렵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57쪽) 부유한 나라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노예제도의 출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장려하는 경제체제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경제 현장의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노예 양산일 뿐이다. 노예제는 중세 말 폐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 초기부터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에서 더 기승을 부렸다. 비약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가정해보자.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닐까? (62쪽) 유럽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난민의 인간적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민족 대이동은 우리의 미래이며, 이 의무 외의 유일한 선택은 신종 야만이다(혹자는 이를 '문명의 충돌'이라 칭한다). 그러나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난민 이동 발생의 조건을 제거할 철저한 경제 변혁이다. (109쪽)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1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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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회의 지식인 슬라보예 지젝의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 세계비평서다. 어렵다고 평이 난 저자의 책에 엄두를 못내다가 쪽수가 얇다는 데 용기를 내 읽게 되었다.
작년 11월 13일에 일어난 파리 테러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라고 밝혀놓았다. 이슬람 테러집단인 IS는 그 대상을 일반인들에게 겨누어서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홉명의 테러리스트들이 합세해 벌인 파리테러는 민간인 130명이 희생되는 참사를 빚어냈다. 저자는 이런 일에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 세계는 곳곳에서 학살과 테러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서구사회이기 때문에 빅뉴스가 된 것이지 제3세계에서는 지금도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냉정하고 비판하고 있다.
전쟁과 내전, 테러가 일어나고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유럽으로 건너오는 난민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이유를 저자는 글러벌 자본주의로 보았다. 원래 아프리카나 중동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살아온 민족들이다. 하지만 서구의 식민주의와 서구사회의 산업혁명을 가장 올바른 삶의 방식이라고 믿고있는 서구인들이 이들의 조용한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서구인들의 개입으로 생겨난 난민들을 혹은 동정으로, 혹은 상대하지 못할 위험한 이웃으로 대한다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다. 특히 중동에서 건너오는 이슬람 난민들은 유럽인들을 당황스럽다 못해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좌파에서는 이슬람이나 그밖의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인정해주어야한다는 입장으로 그들의 명예살인이나 여성학대를 못본척하고 있다. 우파에서는 세계인들은 하나라는 시선으로 그들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가식적이라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서구사회가 간섭하지 않는 곳이 없다. 서구사회는 자본주의 제도아래 돈을 쥐고 흔드는 편에 서서 정의를 구현하고있다고 자만하고 있다. 중동의 많은 권력자들이 그들의 부를 독식하면서 권세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서구 자본주의와 뜻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저자는 모든 원인을 서구인들에게 있다고 보고 난민 수용에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쪽도 서구인이라고 결론 짓고 있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역시 서구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난민이 사는 지역에 난민시설을 짓는 것으로 난민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서구지역에서 아프리카나 중동의 난민들이 수없이 들어와서 섞여지내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저자는 수용시설에 군대를 파견해서 질서를 지켜나갈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수용시설 안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 난민들의 궁극의 목표일까? 이것은 가난을 겪지못한 부자가 가난을 겪기 위해 일시적으로 노숙인이 되어보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해보였다.
유럽에서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난민이 사회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문제를 가져다 준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난민을 북한주민들로 대체해보았다. 북한난민들이 우리에게로 쏟아져들어오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정부는 어떤 대책을 마련해놓고 있을까.
난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준비되어 있는 것인가. 북한 난민을 군대가 주둔하는 수용시설에 분산시켜놓고 천천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보내준다면 우리 사회의 혼란이 줄어들 것인가.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이웃을 대할 때, 이웃과 우리는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쪽이 시혜를 베푸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서로에 대해 경계심을 허물수 없을 것이다. 난민문제는 먼 유럽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나 다름없다. 서구의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난민문제의 해결책을 보아도 답답한 것이 해소되지 않는다.
정부의 관리들이 멀지않은 미래에 맞이하게 될 북한의 난민에 대해 현명하고도 상식에 맞는 해결방식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 정부 관계자가 저자보다 더 나은 방식의 답을 제시할 거라는 희망만이 우리 사회를 안정 시키고 진정한 민족통합을 이루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덮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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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러한 제목을 가진 책을 선택하여 읽게 된것은 순전히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보았다는 이유 하나 뿐이었다. 계급투쟁이라든가 난민 같은 단어와 워낙 친하지 않고 관심사도 아닌 나같은 사람마저도 그 이름을 들어봤다는 것은 그만큼 유명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책을 받고 심술쟁이 욕심보같은 인상에 약간 실망했었드랬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점점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의 한명이라는 타이틀이 걸맞다며 저자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작년 가을 파리 테러에 정말 놀랐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도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던 일이 서구사회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그 테러의 피해자 중 하나는 난민들이다. 그 쪽으로 화살을 돌려 난민들속에서 테러리스트를 찾고자 하고, 거기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는 대중들에게 애꿎은 원망을 받으며 난민들은 얼마나 고달플까.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무조건 반대하는 대중영합주의도, 그렇다고 자비와 관용에 호소하는 좌파의 태도도 모두 옳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감성을 배제하고 올바른 이성의 힘으로 난민과 테러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규칙을 세워 체계적으로 난민을 도와야한다고 말한다.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난민을 도우려 해서는 안되고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예리하면서도 일체의 가식이 없는 저자의 접근태도에서 더욱 진실성이 느껴졌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있다. 그것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다. 우리 스스로가 혁명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유일할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번역 어투에 모르는 용어들, 철학적 사유들로 인해 한문장을 여러번 읽어야 했던 적도 많다. 그러나 한문장 한문장 읽어나가며 지금 이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하나 곱씹으며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굉장히 뿌듯하다. 큰 스승에게 지적 자극을 받으며 큰 배움을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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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서로 존중하는 선에 그치지 말고 함께 투쟁하자고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공동의 문제다(p.107)
솔직히 난민 문제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머나먼 타국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이기에 가슴 아파하고 무언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돕고 싶지만 굳이 나서서 무언가를 먼저 한다든지 혹은 내 일처럼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난민 문제는 정말 나와 상관없는 문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난민 문제는 먼 나라에서 벌어지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이는 온 인류가 함께 손을 맞잡고 해결해야 할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난민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은 이 모든 불행의 뒤에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이면을 살펴보면 전쟁으로 분명 누군가의 이익을 본다. 역으로 전쟁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로벌 자본주의가 결국 전쟁의 원흉이라는 의미이기도 한다.
이처럼 전쟁의 이면에 숨은 글로벌 자본주의는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배하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 유럽을 향해 달려가는 난민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난민 문제는 또한 새로운 계급투쟁의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자비나 관용만으로 부족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바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이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p.113)
호피족의 옛 속담을 인용한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의지할 위인이 없다.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물론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저자의 말처럼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정치, 종교, 폭력 등 난민 문제의 원인을 전체적으로 고찰한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방법이기에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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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새로운 계급 투쟁>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인정받는 슬라보예 지젝의 난민과 테러에 대한 전방위적 사색의 결과물이다. 지젝의 사유는 난민 사태를 바라보는 고정관념을 전복하고 지적 기만의 허울을 꿰뚫을 듯 날카롭다. 그는 난민 사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폭력을 피해 쇄도하는 난민의 물결을 유럽이 전부 수용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이주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서 난민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저임금 노예 노동이나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난민에 더 많이 문호를 개방하자'는 인도주의적 접근만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금 세계는 서구 사회처럼 안정적으로 보호받는 '지붕 안' 사람들과 기아와 무차별 폭력에 노출된 '지붕 밖' 사람들로 양분되어있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 '지붕 밖'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폭력, 난민의 발생은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계급 분리 현상이다. 지젝이 보기에 유럽의 진보좌파는 문화제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라는 비판을 의식한 나머지 유럽의 역사적 유산인 '인류의 해방'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지젝은 "단순한 관용을 넘어서서 타인과 진정으로 공존하고자 한다면 이 막다른 상황을 돌파할 유일한 방법은 '함께 투쟁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다시 계급투쟁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에 대한 관점없는 '관용'은 윤리적 가면을 쓴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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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이슈가 된 문제는 유럽의 난민 문제와 파리 테러 사건이다. 얼마 전부터 시리아 사태를 비롯한 중동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수많은 난민이 북아프리카와 동유럽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고 있다. 민족이동이라고 불릴 만큼의 거대한 난민의 유입은 기독교 문화인 유럽 문화의 정체성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동안은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을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적이었다. 그런데 작년의 파리 테러와 올해 벨기에 테러 사건을 통해 난민들 사이에 테러리스트들이 유입되거나, 난민들이 유럽에서 자생적 테러조직으로 성장하고 있음이 밝혀진 다음부터는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이런 전체적 시야 없이, 파리 테러 희생자들과의 비장한 연대감은 유리의 가면ㅇ르 쓴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유럽에 도착한 난민의 상황은 무엇 하나 분명한 게 없지만 분명 많은 난민들은 끔찍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파리 테러가 벌어진 다음 날, 한 난민이 텔레비전에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파리 같은 도시가 이런 비상사태에 빠져 몇 년은 아닐지라도 몇 달 동안 일상생활의 평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바로 우리가 도망친 곳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담긴 진리가 번쩍이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테러의 희생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P117)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유럽의 난민 문제를 주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이데올로기가 붕괴되어 버린 현대 사회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왜 지금의 방법들은 잘못 되었는지에 대한 책이다. 문제점을 진단함에 있어서는 날카로운 관점에서 현란하지만 명확하게 논리를 펴나가지만, 그래서 다다르는 결론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대동단결이라면 그건 좀 읭? 하다. 작가도 그걸 느꼈는지 뭐라고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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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 ‘관용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일으킨 테러였다. 나날이 늘어가는 이민자들이 테러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러잖아도 원주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위협적인 존재로 거론되던 참이었다. 사람들은 이민자들이 파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외면했다. 그들이 파리로 오기 위해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았다. 피해자는 그렇게 가해자로 둔갑했다. 공감의 정서가 사라진 빈자리를 차지한 건 내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을 향한 두려움, 경멸 등의 감정이었다. 견고해 보이던 국가의 힘을 자본이 대체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것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됐는데, 노동 또한 그 중 하나이다. 꼭 국가가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흐름에 따라 타국으로 이주한 사례가 급증했다. 난민과 양상은 조금 다를지 모르나 그들 역시 원주민들의 생계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녔다는 건 주목받지 못한다. 우리와 다른 ‘타자’로 모두가 이해되고, 자연스레 그들은 배척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등극한다. 특정 종교와 결합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어느 종교나 근본주의로 치달으면 위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이슬람에 관해 ‘호전적’이라는 평을 즐겨 한다. 오해 혹은 몰이해. 어느 쪽이 되었건 이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위험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다분히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다.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테러가 되었건 인종차별주의가 되었건, 어떠한 문제건 유심히 들여다보면 피해자들의 양상은 유사하다. 모두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같은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피해자들 간의 세계적 연대를 떠올려 본다. 피부색이, 출신 국가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이들 간의 진심어린 연대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일단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단점으로 작용할 것만 같다. 누구 하나 나서서 거대한 집단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 역할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지위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대의(大義)를 부르짖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른 나라에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노동조합 가입조차도 금기시 여겨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해가 쉽다. 하지만 저자는 의미심장하게 외쳤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자본주의는 머지않아 실패한 체제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다.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 현실을 쌍수를 들어 환영할 집단은 그리 많지 않기에. 명확한 대안이 없어 불안하지만, 그것이 침묵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No!”를 외치는 것으로부터 변화를 향한 움직임은 출발해야 한다. 난민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의 문제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몇몇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이 만났을 때 이상적인 대안까진 아닐지라도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고민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투쟁의 성질이 계급투쟁일까. 참된 정의는 계급투쟁에서 억압받는 자에게 봉사한다 했던, 계급투쟁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 핵심이자 최고의 문제라 했던 베르너 크라프트의 말이 부디 맞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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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고래가 집어삼킨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책의 글쓴이 지젝은 ‘철학자는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자신의 모든 것으로 잘 보여주는 철학자이다. 라캉-헤겔-마르크스라는 삼총사를 앞세운 그의 사상은 마치 고래 뱃속에 사는 우리에게 고래 밖의 드넓은 바다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고래에 잡아먹혀 그 속에서 나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유럽-미국-동아시아 등지의 사람들에게 그는 말한다. “어째서 고래 밖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 않는가?” 라고. 이 거대한 고래가 등장하기 전부터 계급투쟁은 존재해 왔다. 그 장소는 교실 안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도시일 수도 있다. 크게는 한 국가 전체를 무대로 한 계급투쟁도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자본주의는 투쟁의 장을 지구 전체로 넓히는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지금 원하건 원하지 않건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재밌는 점은 현대인 중 그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지젝은 이 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전기-수도-가스가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있는가?’ 라고. (이 견고하게 짜인 시스템을 벗어날 수 있는 ‘개인’은 있어도 ‘집단’이나 ‘사회’는 없다.) 지젝은 이 책을 통해 읽는 이의 가슴 깊숙이 질문의 창을 던진다. ‘왜 당신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가?’ , ‘왜 당신은 지금 시스템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는가?’ 라고. 그리고 우리가 마음 깊숙이 묻어둔 답을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난 지금이 딱히 불편하지 않아서.] 혹은[지금 이 세상이 편하고 좋아서.] 이에 대해 지젝은 이렇게 답한다. ‘고래 뱃속에서 편하고 좋은 것이 진짜 네가 원하는 것이냐?’ 라고. 스스로의 욕망 앞에서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고. 고래 뱃속에 갇혀 매일같이 새로운 노예의 삶을 사는 사람을 애써 외면한 채 내 눈에 띄는 불쌍해 보이는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이 질문과 대답은 너무나 날카로워 읽는 이의 양심에 상처를 줄 정도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한국인은 약간의 각오(?)가 필요할 것 같다. 지젝은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모두 나쁘다고 말한다. 새로운 노예의 탄생에 책임이 없는 단 한명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편하게 자판을 두들기는 우리는 신발공장에서 16시간을 일하는 아이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 모든 것은 그 책임감에서 비롯하는 의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테러에 대한 비판도 테러로 생긴 난민에 대한 판단도.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새로운 노예계급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글로벌 자본주의가 가져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혹은 집단)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지젝은 정확하게 그 답을 알려준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