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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과 가까이 있는가?
죽음인가, 아니면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무엇인가?
신이 우리들 사이에서 자라는 형상에
감정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진흙과 진흙을 비벼댄들 무슨 소용인가.
이것만은 기억하라
부활하는 것은 나의 육체뿐이라는 것을.
어서 내 육체가 뜨거운 무덤에서 살며시 빠져 나와
그대 안에 있는 나의 하늘을 향해 가도록 해다오.
그대여, 깊은 곳에 자리한 승천의 젊은 장소여.
여름 꽃가루로 가득한 그대 어두운 대기여.
수천의 꽃가루의 정령들이 그대 안에서 미쳐 날뛰면,
뻣뻣한 아ㅢ 시신도 다시 부드러워지리라.
릴케의 詩를 읽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황홀한 의식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것은 어떤 정해진 틀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맞아들여지는 본능적인 감촉이라고 해야하나? 은밀함 속에서 꽂꽂한 자세가 보인다. 그것이 무언지는 확실히 아직도 모르지만 말이다. 릴케는 기독교의 교리가 인간이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성(性)을 은밀한 영역으로 감추어 두었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의 性에서 고향 없는 떠돌이 性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토로한다.
『. . . 그러나 이런 사실을 확신하고 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들 중에 있다면, 왜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기독교적 편견의 쓰레기 더미 속에 누워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정신을 다시 찾고서 어둠 속에서, 금지만이 판을 치는 비좁은 틈바구니 속에서 가사(假死) 상태의 사람처럼 몸을 뒤트는 것일까요? 』 詩라는 것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지하여 한 편의 시를 위해 극도의 집중과 고독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게 누구나 자신이 도약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릴케 역시도 예술가로서 실존적인 불안에 휩싸인 시기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에 로댕을 만나게 되었다. 릴케보다 35세나 많았던, 이미 유명해진 로댕. 이미 실존적인 예술의 경지에 있던 로댕. . . 그 로댕의 품에서 릴케는 새로운 詩心을 열게 되는 것이다.
릴케는 로댕을 흠모하여 『이 위대한 조각가의 직접적이고도 다양한 영향력은 문학작품에서 오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내가 로댕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스스로 마음의 결단을 내릴 만큼 성숙해 있었습니다.』 예술에 있어서 '사랑'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이던가! 릴케는 로댕을 만남으로써 충분히 성숙하고 발전했던 것이다. 『그 거장의 삶은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흘러, 벌써 신화가 되어버린 것만 같구나. 우리는 그가 다루는 사물들만을 느낄 뿐, 그 사람 자체를 느끼지는 못한다.』우리네 독자도 역시 그들의 사물만을 느끼고 있을 뿐 그 사람 자체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그네들의 뒤를 쫓아 흠모하는 마음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릴케는 로댕을 통해서 『값싼 감정에서 벗어나 화가나 조각가처럼 자연 앞에서 일하며 대상을 엄격하게 파악하고 묘사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로댕을 만나는 순간 릴케는 일생 전체가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릴케는 영감에 의해서 무언가가 떠올라야 글을 쓸 수 있었지만 로댕은 『작업 자체를 영감으로 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두 거장의 삶이 다 표현되기에는 지면이나 활자가 부족했던 점이 없지 않지는 않지만, 새롭게 둘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의 번역과 해설을 맡은 김재혁의 마지막 해설을 가만이 되뇌어 본다.
『릴케는 '가만히 쉬고 있거나 꿈틀대는 육체의 가물대는 윤곽들을 다룬 로댕의 소묘'에 대한 글에서, 로댕이 "정신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을 통해 표현했다"고 말하면서 로댕에 있어서 "육체는 영혼이다"라고 단언한다. 릴케에게 있어서나 로댕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더없이 달콤하고 경쾌한'뿐만 아니라 '심오한 정신이자 터무니없이 요구가 많은 탐욕가'이다. 에로스는 내면적 깊이를 표현해 주는 생명력이었던 것이다.』릴케도 로댕도 흠모하는 나는 기꺼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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