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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 자신도 그렇지만 사람들을 보면 모두 조금씩 미쳐있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갑작스런 분노의 표출, 노이로제 히스테리 강박증 편집증 우울증 그리고 콤플렉스 등등까지. 늘 바쁘고 경쟁해야 하고 급작스럽게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안정적이고 평안한 상태의 정신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런 모든 상황이 지나고 나면, 왜 그랬을까? 내가 미쳤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특히 그런 면면이 드러날 때, 공격적이거나 타인 또는 사회에 해가 된다고 다수가 느끼고 더 이상 통제가 가능하지 않을 때, 우리는 ‘미쳤다’라고 정의내리고 계속적인 상담을 하거나 병원에 격리시키고 약을 준다.
이 책은 너무 기가 막히다. 어이가 없고 황당하다. 모든 상황이 마치 거짓말 같다. 그것도 불쾌하고 끔찍한 소설 같은 거짓말.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진 현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쉴 것 같은 그런 꿈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다가 내려놓았는데, 다시 잡을 때 보니, 작가의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이 같다. 그래서 뒤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다. ‘작가의 실제 경험에 느슨하게 기댄 이야기’라는데, 느슨하게 기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논픽션일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읽었다. 물론 맨 뒤의 ‘에필로그’를 읽고 나서야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정말 기절할 뻔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내가 너무 세상을 모를 수도 있고, 또 이런 소설 같은 일들이 실제로 많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논픽션 소설로서의 매력을 느끼기엔 너무나 날카롭고 군더더기 없는 현실 묘사가 끔찍하고 불쾌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의 정신 나간 세계의 과하고 과한 세상이랄까. 온갖 지저분한 얘기이며, 더 이상 바닥으로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욕설과 비극이 난무한다. 결국엔 환자들의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의 정신과 그 치료방법을 믿은 게 불찰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어린 시절을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으로 그리고 또 쿨하려고 최대한 노력한 작가의 글 솜씨는 뛰어났다. 그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걸 축하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비위가 약한 독자들에겐 심히 거슬릴만한 내용이 많아 주의를 요한다.
열세 살에 차갑고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시인을 꿈꾸며 자기밖에 모르고 정기적으로 정신이 나가는 엄마를 둔 어거스텐은 학교에 가기를 너무 싫어한다. 매일 소리 지르고 싸움만 하던 부모가 이혼을 했을 때, 안도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자신을 감당하기 싫어한 (그 엄마의 정신 상태로는 불가능했겠지만!) 엄마로 인해 엄마를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네 집에 드나들고 또 그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봤는가. 물론 어린아이를 기르고 교육하는데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열세 살 어린이는 모든 걸 자신이 결정하고 행동할 만큼 성숙한 성인이 아니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고 거짓으로 약을 먹여 ‘자유’를 주는 의사가 제 정신인가. 사랑을 받고 제대로 먹을 권리가 있는 아이를 그렇게 더러운 집에 방치하는 게, 그런 게 자유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열네 살밖에 안 된 자기 딸을 사십대의 부자에게 넘긴 그 비뚤어진 의사의 처방이, 가뜩이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치료했는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다. 나중에는 머니를 받고 성을 팔기까지 하는 나탈리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어거스텐은 생각한다.
‘자유는 우리 것이었다. 우리에게 잠을 자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었다. 숙제를 하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었다. 버드와이저 열두 캔을 마시고 변기에 토해도 누구 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선택의 자유가 내가 가진 전부인 것 같은 때에 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까?’
열세 살 어거스텐이 바란 것은 아무렇게나 쓰레기처럼 방치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을 이끌어줄 어른이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무슨 일을 하지 말아야 할지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나 미칠 권리가 있다. 조금쯤 미쳐있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해치다 못해 남을 해치고 나보다 약한 남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나만 옳다고 믿고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상담이나 약이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사람들이 어거스텐처럼 엄청 당하고 엄청 깨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들 모두 사랑으로 치료받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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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게 언제였더라... 아마 올해 초였던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담 왜 이걸 샀을까... 이 작가에 대한 짧은 소개를 보고, 어쩜 이런 삶을 살수가 있지? 라는 의구심....그리고 그 믿기 힘든 삶을 책으로 썼다니...읽어줘야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 책과 함꺼번에 질러줬던 책들을 야금야금 읽었었고 또 지난달엔 독서의 답보 상태였으니까...
그러다가 우연히 나에게 온 이놈. 사실 가위를 들고 달린다는 설정. 무슨 숨은 뜻이 있는 유머...하이 개그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누군가를 망쳐버리고 싶은 숨겨진 욕망일 수도 있겠다는 서늘함...
서로를 잡아 먹을 듯 싸워대는 부모... 자식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부모... 너는 너...나는 나...라는 부모... 그 사이에서 자랐다기 보다는 끼어 있던 소년은 처음엔 그런 부모일지라도 사랑을 받기위해 더 착하게 굴었고. 조금 더 자라고 나선 일부러 반항을 하기도 했고. 조금 더 자라고 나서는 부모에게 상처를 주기위해서 이상하게 막 살아보려고 하기도 했고. 그러다 자신의 부모처럼 될까봐 한순간 너무 무서워지기도 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는 이 책은 정말 내 새끼 잘키워야지...아니면 그래도 자식보다 내 삶을 우선으로 할 수 있어서 부럽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테고... 자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부모를 만나다니 정말 재수똥이라거나...부모와 상관없이 착하고 바르게 자라야지...라는 생각이 들게했다.
그 부모도 자식도 아닌 이상한 중간에 끼인것 같은 나는
그냥 정말 객관적으로 이런 정말 노말하지 않은 삶속에서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 주인공이 대견스러웠고...그걸 이렇게 드러낼 수 있을만큼의 자신감과 넓은 가슴을 가진 그가 멋져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달도 넘게 무엇을 읽어도 흰것은 종이요...검은것은 글자니라..가 되던 나의 눈에 머리에 마음에 들어와 줬다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은 박수받을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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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읽게 된 책이에요. 책 홍보 내용을 보면 유명한 타임지가 나오죠......이땐 기대 완땅입니다.... 그러나 책속에 들어가 보면 정말이지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 할수 없는 그들만의 방식이 나오지요....정말이지 읽으면서 더럽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어요.... 물론 성장소설이라기에 열심히는 읽었습니다. 과연 이책에 무엇이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는지...... 나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구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어서 느끼는 감동지수가 떨어지는건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리와는 맞지 않는 책이었던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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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베스트셀러라면 보려다가도 안 보는데, 책 앞표지에 적힌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가 나의 흥미를 끌었다. 왜? 보통 이런 수식어는 눈에 띄게 표지에 큼지막하게 넣는데, 이건 궁색해 보였다. 궁색함이 컨셉이었을까? 책 자체에서 "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였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가위 들고 달리기란 제목에서 전해진 인상도 한몫했다. 가위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 잘림, 달리기의 질주, 이동, 변화, 충동적?
나에게 어떠한 수식어도 붙이지마. 싹둑싹둑. 날 정의하려 하지마. 날 잡지마.
한 줄로 요약하면 이 책은 한 아이가 자신의 꿈을 알아채기까지의 삶을 그린 성장이야기다. 그런데 이 아이, 인생이 너무 난해하다. 주변에 정상인이 없다. 엄마는 히스테릭한 시인, 아빠는 술에 취한 수학교수다. 둘이 붙기만 하면 죽여라 살려라 싸운다. 결국 부부는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 핀치 박사. 박사 학위는 있으나 누구나 보면 병원이라 할만한 병원도 없고, 집도 없다. 더 놀라운 건 정신과 박사의 집이 정신병원과 그닥 다를 바 없는 곳이란 것. 각자의 삶에 무섭도록 집중한 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으니, 각자의 정신 세계를 바탕으로 한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주인공 아이는 언제나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겨야 했다. 흐트러진 옷차림새 용납할 수 없다. 언젠가 자신은 검정 긴 리무진이 현관앞에 서있는 근사한 집에서 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어진다.
핀치 박사의 집에서 지내게 된 주인공, 빅토리아 양식의 하얗고 깨끗한 벽에, 지붕 꼭대기엔 옥상 누대가 있는 근사한 집들로 가득한 뉴잉글랜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집, 분홍색 벽에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보이는, 멀리서 보면 버려진 집처럼 보이는 핀치 박사의 집에서 아이는 핀치 박사의 가족과 정신병에 걸린 환자와 함께 지내게 된다.
핀치 박사의 어린 딸들은 주인공 아이와 정신충격기계를 만지작 거리며 병원놀이를 한다. 조카 푸 베어란 꼬마는 그 모습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고 거실 바닥에 똥을 싼다. 핀치 박사의 부인은 개 간식을 먹는다. 주인공의 엄마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핀치 박사와 모텔로 떠나고, 아이는 의사 집에 머문다.
정신병원의 기원이 도시의 부랑자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옛날엔 어느 마을이든 머리를 배배 꼬며 뛰어 다니던 광년, 광놈이가 한 명씩 있었다. 그들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이들은 정신병원에 모여 있다. 자의적일 수도 있으나 대부분이 타의에 의해 감금된다.
주인공도 그랬다. 엄마가 정신과 치료를 요청한 상황이 아이를 원치 않은 곳에 감금한 상황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핀치 박사의 집엔 강박증 환자도 산다. 2년 동안 2층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자신만의 방에서. 이 부분에서 질문을 한 번 던져본다. 정상과 비정상,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정신병 환자라고 나오는 사람과 정신병원에서 일하는 사람과 정신병원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들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28살 먹은 호프는 성경책 점을 친다. 질문을 하고 한 사람이 성경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친다. 질문을 한 사람이 펼친 쪽을 손가락으로 짚으면 그곳의 단어가 답이 된다. 나탈리는 열세 살 대 아버지의 환자 중에서 양부를 골랐다. 마흔한 살의 부자 테런스 맥스웰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남자와 함께 살며 그 남자가 학비를 대는 사립학교에 다닌다.
어느 덧, 머리가 흐트러짐에 개의치 않게 된 주인공 아이가 이런 얘길 한다.
나는 생활 방식은 물 흐르듯 흘러가게 놓아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것에도 너무 집착해선 안 된다는 사실 역시 배웠다. 어떤 면에서는 모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자유를 향한 내 깊은 욕구에 와 닿았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이상이 있었으나 현실은 그것과 지독히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삶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건 스스로에게 처절한 고통을 주는 자해와 같았다. 그는 현실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삶이 흐르는 대로 산다.
주인공은 주방천장이 낮아서 자꾸만 머리를 찧었다. 나탈리는 인생이 싫다 하였다. 그래서 둘이 주방천장을 없앴다. 돌로 천장을 쳐서 주방 골조가 드러나게 했다. 석고가 쏟아지고 부엌 바닥엔 석고 덩어리와 단열재 등의 잔해로 가득하다. 그리고 잠들었다. 잠에서 깨 햄버거를 먹고 식품 저장고의 창을 떼어내 구멍을 막았다. 그러나 틈은 있었다. 1년 중 여덞 달은 그 틈으로 비가 떨어졌고, 식탁 위에는 빗물을 받는 냄비가 항상 놓여 있었다. 넉달은 눈이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장갑과 모자를 여러 겹 덧끼고 덧써야 했다. 햇빛은 주방에 밝게 넘쳐났다.
특이한 핀치 가족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 좋아."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해." "주방에 유머 감각을 불어넣었어."
슬슬 난 이들의 삶에서 재미를 찾았다. 유머.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는 유머.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끝부분은 간단히 전한다. 주인공 아이는 언제나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길 원하는지 그는 몰랐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깨닫는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길 원하는지. 그는 뉴욕으로 떠난다. 아무것도 없이, 아무도 없는 뉴욕으로 떠난다. 맥도날드 유니폼을 입은 나탈리와 함께 맨발로 바닷가재 식당에 들어가 가위를 들고 바닷가재를 먹으며.
달린다. 산다. 걷다. 산다. 가만히 두어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삶을 산다. 달리듯, 걷듯 삶을 산다. 누구나 자의식을 갖고 자신의 의지로 순간을 선택하며 산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나의 삶은 돌이켜보면 나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삶은 중첩되 있다. 제목 가위 들고 달리기의 가위는 하나의 의식이다. 무시가 아니다. 나의 삶에 겹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싹뚝 잘라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에 얽매인 자신의 생각을 마음을 잘라내는 것이다.
가위 들고 달리기. 한 단계의 성장, 성숙을 원한다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보자.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길 원하는지 생각해보자. 그것이 곧 꿈을 찾는 첫번째 단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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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흥미로워 보이는 스토리에 가볍게 구매했는데 말이다.. 그냥 소설이였다면 그저 흥미롭게 읽었을 것이다.
"원..별~~ 이런 미친..!!"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현실이라는걸 알고 읽었기 때문에 읽을때 너무 너무 많이도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그래서 읽다가 중간에 1주일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휴식을 가지며 읽어야만 했던 책이였다..
처음에는 영화를 소개하는 테레비전에서 흥미를 가지고 책을 먼저 구입했다.
거진 책이 원작으로 가진 영화는 자칫 잘못해서 영화로 먼저보면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책으로 먼저 선택한것인데.. 이번 경우는 잘못된 선택이였다고 생각을 했더랬다. 책으로 읽음으로 인해 더 현실적이고 섬세하게 느껴져 껄끄러웠던 것이다.
사실 내용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리 복잡한 서술을 쓴다거나 그랬던 것은 아닌데 말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간단, 명료, 경쾌가 정확한 것을..
그러나 휴식을 가지고 보니 잘 읽혀졌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아이를 돌보지 않는 차가운 아버지, 미쳐버린 어머니, 독자적인 형.. 그리고 정신병자 보다도 더 미쳐 있는것같은 박사와 그 가족사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저자가 위대하게까지 보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삶은 이어진다."던 책의 문구가 생각이 난다. 딱-! 이 책에 어울리는 문구가 아닌가 싶다.
내게 끝까지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힘을 준것은 그 흐릿해만 보이던 미래를 포기않고 경쾌하게 이어나가는 저자의 삶에 대한 능력이 대단해서 였다..
책 마지막 부분에 나오던 '눈을 굴리고', 어쩔것인가? '어깨를 으쓱한다'란 문구가 나의 가슴에 깊이 밖혀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내 자신에게 가장 필요로하는 생각의 흐름이다..
아무리 가슴조이고 고민하다 머리를 다 잡아 뜯어버릴 상황이라도 되지 않는일은 어떤수를 내도 않된는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해보이고 대책없어보이는 이 생각의 흐름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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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는 테런스를 사랑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어떤 관심이라도 받는 것이 낫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할 가치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같은 이유로, 살을 베여 피가 흐르는 게 기쁠 때도 있다. 아침 8시와 정오가 조금도 다른 것 같지 않은 흐린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날, 유리잔을 씻다가 실수로 깨뜨려서 파편에 찔린다. 그제야 그날 가장 두드러진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선명한 빨간색, 술렁대는 짙은 색, 나의 피. 때로 베이는 일도 괜찮다. 적어도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
그런 생각은 플레전트 스트리트 극장에서 본 외국 영화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책에 낙서를 하거나 축구장에서 무릎을 붙잡고 쪼그려 앉는 대신, 나는 리나 베르트뮬러의 흑백 영화나, 사촌끼리 사랑에 빠지고 순수의 상실을 비유하는 우는 표정의 광대가 등장한 가운데 서로를 칼로 찔러 죽이는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갔다. 이 난해하고 어쩌면 아주 나쁜 영화들이 나에게는 아주 큰 영감을 주었다...
198쪽이다. 더하고 뺄 것 없이 한 페이지 내내 마음에 와닿는, 마음을 흔드는 문장이 이어진다. 놀라운 직관을 소유한 이 미성년의 화자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토스토예프스키가 생각났다. 다음은 <악령>의 한 구절.
... 스쩨빤은 자기 친구의 마음속 깊디깊은 현을 건드려서, 그에게서 신성하고도 영원한 우수, 어느 선택받은 영혼이 한번 그것을 맛보고 그 맛을 알게 되면 그 뒤로는 그것을 절대로 값싼 만족과 바꾸려 들지 않는 그 우수의 아직은 불분명한 첫 감각을 불러 일으킬 줄 알았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똑똑하고. 상상력이 뛰어나고. 그런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분명히 어디선가 맞닿아 있다. 예술 작품에서 발견한 은유와 상징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주변을 해석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폭과 깊이가 무한한 것. 아주 다치기 쉬운 것. 그래서 삶으로부터 엇나가기도 너무 간단한 것.
다행히 가위들고 달리던 소년은 살아 남았다. 언급한 모든 자질과 더불어 유머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이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에 관한 나의 믿음을 확인해 주는 책.
그래서 이 책이 좋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참 단순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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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가 그려있는 가위들고 달리기란 제목의 책에 눈에 들어왔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전세계 언론과 수백만 독자의 찬사를 받은 소설]이란 글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 글을 보며 내용이 참 궁금했었다. 이책은 저자 어거스텐이 쓴 자신의 성장기였다. 그렇다고 요즘 많이 나오는 어느 대학을 힘들게 들어간 천재의 이야기도, 성공한 CEO의 이야기도 아니였다. 정말 말그대로 우울하고 엽기적인 성장기를 보낸 한 소년의 이야기 , 누구나 숨기고 싶을것 같은 이야기였다.
아스페르거 증후군이라는 자페증을 앓고 있는 형과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이혼한 정신분열증 환자 엄마와 사는 어거스텐은 핀치박사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인 핀치박사의 집은 어거스텐이 상상한 우아하고 고상한 의사의 집이 아니였다. 내눈에는 모두 정상이 아니였다. 대화는 거의 욕으로 한다. 프로트의 심리 발달 단계를 욕설의 보고로 삼고, 성경책 점을 보고, 대변점을 보고, 정말 심각하다.
[나에게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좋았다. 그러나 나에 대한 감정이 너무 강렬한 것은 아닐가 걱정되기도 했다. 겁이 난 것도 같다. 어떤 일이든 너무 지나치면 두려움이 찾아들곤 했다. 어머니가 너무 지나친 사람이었고, 결국 어머니는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의사맞어?? 의사맞어?? 책을 읽는내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였다. 핀치박사가 환자같았다. 학교 가기 싫다는 어거스텐에게 약을 주어 자살을 기도하게 한다. 자신의 딸이 40대인 남자와 애인사이인것도 알면서 돈때문에 모른척하고, 닐과 어거스텐이 자신의 집에서 동성애를 즐겨도 신경도 안쓴다.
[그런데 왜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선택의 자유가 내가 가진 전부인 것 같은 때에 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까?] 정신병자인 어머니와 핀치박사의 가족들 사이에는 어거스텐은 정말 자유로왔다. 아니 방치되어왓었다. 닐과 동성애를 즐겼고 제정신이 아닌 핀치박사와 그 가족들 사이에서 지붕을 부수기도 하고 마약에 술에 방치된 삶을 살았다. 어거스텐이 우울한 삶속에 갇힌듯해 보였다.
[나탈리와 내가 보기에는, 식구들 모두 맛이 간 것 같았다. 우리 둘만 빼고,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집단 히스테리로는 보지 않고 그저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했다.] 이책은 12살, 13살의 아이 어거스텐의 시선에서 쓰인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우울한 삶속에 내가 들어간듯하여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엄마의 동성애, 마약, 게이등 우리의 정서와 안맞는 부분이 많지만 읽는 내내 13살의 어거스텐이 된듯한 생각에 빠져 그동안은 상상도 할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는 느낌이였다. 한편으로는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너무나 자유로운 그들의 모습이 웃기기까지 했다. 엉뚱한 그들과 마주친 내모습을 상상을 해보라! 작가가 될꺼라고 했던 나탈리의 말처럼 작가된 어거스텐~ 나탈리도 박사학위까지 받고 일하고 있다니 평범하지 않은 삶에서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책의 반전이라면 어거스텐이 작가가 되어 성공한것이 아닐까? 우울한 성장기를 거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수 있는 어거스텐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좇고 있다고 느낀적 없니? 더 큰 무언가를, 모르겠어. 너와 나만 볼수 있는 그런거야. 우리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는 것처럼.] 가위를 들고 달리자. 잘라낼것은 잘라내고 더 큰무언가를 위해 달려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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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내용 모두가 미친 환경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작가된 소년의 성장기라고 해야 할까? 머리와 옷에 집착증이 있는 주인공 어거스텐의 집안은 일단 정상이 아니다. 알콜중독 아버지와 정신질환을 가진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어머니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핀치박사가 나오면서 더 이상해진다. 정신병자보다 더 미쳤다고 생각되는 핀치박사 집은 정말 난장판이다. 이건 누가 정신병자이고 누가 정상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 이야기들, 주인공의 게이라는 정체성에 눈뜸과 스무살 연상의 남자와 사랑하는 이야기, 어머니와 핀치박사와의 약간의 불미스러운 이야기를 통한 반전 등 결국 소년은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상한, 그러나 절박한 상황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한다.
나의 느낌 떠먹는 요구르트를 처음 접한 것 대학교 1학년때였던 것 같다. 서울 친척집에 놀러 갔더니 요구르트라면 의례 빨대를 꽂아서 먹어야 하는데, 흰 농축액 같은 것을 떠먹으며 맛있다고 한다. 나는 한 입을 먹어보고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 나는 떠먹는 요구르트 큰 통 하나를 다 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이 책의 느낌이 처음 내가 떠먹는 요구르트를 먹었을 때의 느낌이다. 참 많이 불편하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 역자의 설명을 보면서 다시 전체적인 이야기를 생각해보니, 성장 소설로서 참 'cool'한 면도 느껴진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무절제한 감정의 표출들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10대 그 복잡하고 혼란한 시기에 억눌렸던 나의 과거에 비해 주인공은 너무 자유롭다. 아니 거칠 것이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러한 파격의 황당함과 청량감이라면 아이러니가 아닐까.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을 많이 읽는 독자라면 새로운 내용으로 한 잔의 콜라를 마신 청량감을 느낄 것이고, 그렇지 못 한 독자라면 나와 같은 거북함을 배제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상 깊은 구절 P.140 핀치 박사는 분노가 정신 질환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분노를 자유롭게 표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망가질 수 있다고 했다. 이 집에서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핀치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 줄넘기뿐 아니라 싸움을 장려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분노는 우리 존재의 햄버거 같은 것이다. 모두에게 다양한 분노가 고무되었다. 내면을 향한 분노, 억압된 분노, 엉뚱한 곳을 향한 분노. 분노로 인한 행동도 있고 분노에서 나온 말도 있었다. 분노를 마주하지 않아서 죽을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마치 경연대회 같았다. 그리고 그 상은 정신 건강이었다. 핀치 박사는 자주 말하곤 했다. "호프가 최근에는 건강한 분노를 아주 많이 표출하고 있어. 감정적인 발전 단계에서 다음 수준으로 넘어갔다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다. 호프는 항문기를 탈피해서 남근기로 가고 있어." 그래서 그 뒤로는 모든 사람이 호프를 미워했다. 호프가 감정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지나치게 과시하면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P.357 자유는 우리 것이었다. 우리에게 잠을 자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었다. 숙제를 하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었다. 버드와이저 열두 캔을 마시고 변기에 토해도 누구 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선택의 자유가 내가 가진 전부인 것 같은 때에 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까 내 방을 검은색으로 칠할 수도 있었다. 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할 수도 있었다. '크레이지 컬러'를 써서 파란색으로 염색할 수도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나탈리가 주삿바늘로 내 귓볼을 뚫었을 때도 야단치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네 귀에 무슨 짓을 한 거니?'라고 묻는 일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어머니는 알아 차리지도 못했다. 누구도 나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코르크 잔 받침을 2센티미터만 옮겨도 어머니의 혈압을 높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제발, 어거스텐. 모든 걸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정리해놓았단 말이야." 그러나 핀치네 집에서는 2층에 있는 호프의 방과 통하도록 옷장 위 천장에 구멍을 뚫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넌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인이야." 핀치 박사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왜 늘 그렇게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전기의자에 벨트로 묶인 듯한 기분이 혹시 일종의 정신병은 아닐까 걱정했다. 무엇보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문제였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지 알 수 없으니, 콱 막혔다.
☺☼ 책 읽는 두 아이의 아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