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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우와 퍼스리샤 하이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섬뜩함을 묘사하는 타고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 감각은 상황을 반전시키고 우리의 삶을 수수께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한다. - 타임아웃 뉴욕’ 뒤표지에 보면 이런 말이 쓰여 있고 띠지에도 언급하고 있다. 뭐, 섬뜩함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이렇게 쓰면 작가가 포우와 하이스미스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인식될 수 있다. 그건 아니지 않나 싶은데...
<애니멀 크래커스>는 한남자의 절망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물이 주는 메시지, 즉 경고를 알리는 작품이다. 그리고 요즘 한창 유럽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불고 있는 ‘부성애 있는 남편에게 양육권을’이라는 표제를 달고 싶은 작품이다. 불륜과 폭력이라는 것이 맞물려 부유하고 있다. 주인공과 코끼리가 등장한다. 코끼리는 기억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남자가 절대 망각할 수 없는 것을 일깨워주는...
<홈 스위트 홈>, <갈루스, 갈루스>은 이해하기 간단한 작품이었다. 작가가 어떤 방향으로 작품을 써야 할지 아직은 실험단계인 것 같은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간단하고 알아듣기 쉽게 하는 게 제일 좋다. 부부의 관계와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일방적 헌신이나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의 함께 하는 생활의 공허함이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리창 너머 남의 일 보듯 하게 만든다. 개와 닭이라... 인간에게 복종의 상징이며 가족애에 꼭 필요한 마지막 하나의 그림인 개는 <홈 스위트 홈>에서 주인공들이 바라던 것을 이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끔 물어야 개라는 걸 알 수 있다는 듯 이기적인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 <갈루스, 갈루스>에 등장하는 닭은 싸움닭으로 기사회생해서 애완닭이 되었다. 인간의 모성애에 기대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측은하다. 닭보다 못한 인간들의 모습이라니...
<타당한 조건들>처럼 유머러스한 면을 선보이는 것도 좋다. 기린의 단식 농성은 사실 재미있게 볼 수 없다. 인간의 무자비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죄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자신들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진다.
<보존>은 아버지의 무게가 주는 중압감에 평생 시달린 여자가 예전에 자신이 바라던 것을 꿈꾸는 것이 내면에서 흘러나와 현실까지 드러나고 있다. 그것을 못 받았던 사랑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남아 있는 미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상상만이 아닌 그 이상이 있었다면 더한 공포를 전달할 수 있었는데 조금 아쉽다. 고릴라라... 그 커다란 고릴라가 부서지려 한다. 아버지 같은 고릴라가 자신의 뒤를 따라온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과거의 슬픔이 박제되어 쌓이고 그것이 커져 자신을 찾는다. 우리의 슬픔은 아마도 벽과 벽 사이에 갇힌 것 같은 암담함이리라.
<슬림의 마지막 비행>과 <토크 터키>, <폭력의 집>은 같이 봐야 할 것 같은 작품들이다. 현대 사회 가정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들은 무조건 감싸기, 방치, 폭력성을 비정상적으로 드러내는 아이 앞에서 무력해지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틀린 그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다. <토크 터키>가 제일 신경 쓰였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지... 토끼 하나 전해주고 떠난 아버지, 칠면조와 말하며 소통하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아이, 고양이의 울음... 이 모든 것은 부제와 차별과 대물림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고민해야 하는 단편들이 이들이 아닐까 싶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이고 현재 속 미래의 걱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해의 히트맨>과 <당신 삶의 뱀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방법>, <미스 월드론의 붉은 콜로부스 원숭이>는 서로 다른 작품으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인생도 일방통행인 인생은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버팔로처럼 들이 받기만 한 남자의 짧은 인생은 정해지고 예견된 것이었다. 버팔로는 버팔로와 함께 살다 가야 한다. 뱀은 자기 안의 분노다. 자기에게, 또는 타인에게 그 분노를 참지 않고 제대로 터트리는 것은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마음에 뱀 한 마리씩 키우고 있다. 억제할 때와 드러낼 때를 알아가는 것이 어쩌면 사는 것인지도... 지금은 멸종된 붉은 콜로부스 원숭이와 지금은 멸종된 관습에 대한 이야기다. 멸종은 멸종시킨 자들의 탓이다. 지금도 깨닫지 못한 인간들에게 무슨 소용일까 싶다.
건조하고 메마른 동물 과자는 현대인을, 아니 비틀린 인간을 상징한다. 그것을 적셔줄 약간의 커피나 우유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유전자 탓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목이 막히니 마실 건 더 준비해야겠다. 다음에는 좀 잘 넘어가는 과자를 구우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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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쟁한 작가들을 내세우는 판매 전략은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애드거 앨런 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뒤를 잇는다는 그 문구 하나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자극적이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 과연 그런가? 하고 자신에게 묻지만 그 답은 모르겠다.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언제 이 작가들의 작품을 제대로 다 읽은 적이 있었던가? 자! 이제 유명한 다른 작가들은 뒤로 하고 이 소설집의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먼저 요즘 나오는 소설집엔 작품집이니 단편집이니 하는 표시가 거의 없다. 제목이나 책 소개나 표지만을 본 사람들은 장편이겠거니 하고 구입하고, 그 호흡에 맞추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보니 충분히 그 묘미를 누리지 못하는 몇 편이 생긴다. 어쩌면 비겁한 변명(?)일 수도 있지만 나처럼 약간 둔한 사람은 그 사람의 문장과 구성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더욱 어렵다. 넋두리는 여기서 끝. 표제작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두 번째 작품인 ‘홈 스위트 홈’부터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의 살인사건을 재미나게 풀어내는데 예상하지 못한 반전과 유머가 섞여있었다. 이후 나오는 단편들도 조금씩 작가에 적응하면서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타당한 조건들’이나 ‘그해의 히트맨’이나 ‘갈루스, 갈루스’나 ‘폭력의 집’은 다른 느낌과 분위기로 재미를 준 작품들이다. ‘타당한 조건들’은 기린들이 동물원장에게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개선사항을 보내면서 시작한다. 이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자살 흉내를 내면서 어린이에게는 공포를 매스컴엔 기사거리를 주게 된다. 간략하고 암축된 구성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단편의 묘미를 느끼게 만든다. ‘그해의 히트맨’은 마피아 히트맨의 삶을 다룬 것이다. 아비 없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지만 할머니 노나의 억센 삶에 의해 살아가다 마피아에 의해 암살자로 훈련 받고 그 업무를 매끈하게 집행한다. 재미있는 것은 살인이 아닌 약간은 평범한 전개와 암살자가 보여주는 귀여운(?) 행동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결말. ‘갈루스, 갈루스’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블랙코미디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일상적이지 않고, 묘한 집착을 가진 사람들이다. 평생 구두끈을 매어본 적이 없다거나 닭에게 빠져 정신이 없다거나 동물 소리를 남에게 들려주려고 연습한 것을 끝없이 보여준다거나 아버지의 예상하지 못한 죽음으로 불안정한 것을 두려워한다는 등의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들이 마지막 한 장면을 위해 움직이고 그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 ‘폭력의 집’은 가정내 폭력과 가족간의 갈등이 다루어진다. 여기서 가장 눈에 들어온 인물은 가족 내 구성원이 아닌 심리학자다. 하나의 행동을 부모가 알려주면 그에 맞추어 새 처방을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늘어나는 사고나 사건들을 생각하면 좀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면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 낯선 모습이 이 소설의 재미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과 다르거나 현실의 경계를 뛰어넘거나 일상에서 보는 잔혹함이 극으로 달려간다거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 틈이 점점 더 커진다거나 하는 모습이 유쾌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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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알렌 포우의 작품을 읽고 나는 명품이란 글을 썼었다. 포우는 사람을 극한의 공포로 이끌어가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작가다. 그의 책을 읽는동안 난 독자가 아니라, 책 속 인물로 변해있었다. 얼마나 공포스러웠던지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
<애니멀 크래커스>를 읽을 때 이런 기대를 했었다. 포우의 작품을 읽었을때처럼 “대단해”란 감탄사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만큼 감격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 기대가 지나쳤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으론 조금 아쉬운 책이었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동물을 모티브로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비뚤어진 욕망과 폭력성에 관한 낯설고 기묘한 이야기”라고 하니 그 주제를 잘 표현한 책이다.
몇 편의 단편작품 중 두고 두고 구토증을 유발시키는 작품이 있는데 아주 잔인한 모자의 이야기다. <슬림의 마지막 비행>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아!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느껴질만큼 천진난만한 꼬마 아이의 잔인성은 혀를 내두를정도다. 아이는 토끼를 산채로 해부한다. 흰 거죽은 어딜가고 빨간 살덩이가 폴짝폴짝 뛰어다는던 그 장면은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한쪽 다리까지 절단 된 토끼.. 그 토끼를 아무 감정없이 구멍난 양말을 꼬매듯 꼬매는 엄마.. 이 책에서 내가 뽑은 가장 잔인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게 저럴 수 있을까 소름끼치는 작품이었다. 비위가 약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장면이 떠오를때마다 속이 메스껍다.
이 책에는 어디에도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 이상하게 느껴질만큼 다들 미친 사람들만 가득하다. 말그대로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이야기 뿐이다. 기교하다기보단 비정상적인 이야기가 더 맞다. 태생부터가 불행한 사람들, 폭력에 물든 가정.. 등장인물들 모두가 육체적,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 하나 경악스러운 것들 뿐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억눌린 감정들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 감정없이, 담담하게 행해지는 그들의 잔혹성.. |